[창작물] 단편소설) 바닐라 A1 외전 스토리는 이런 스토리였음 좋겠다.

ㅆㅇㅆ(112.109) 



바람 마저도 비명을 지르는 공허한 폐허 속에서 한 남자와 한 바이오로이드가 길을 걷고 있었다. 남자는 온 몸을 감싼 채, 등 뒤에는 거대한 소총을 메고 있었다. 정적 조차 무안해지는 고요의 그림자속 허무의 폐허 속에서 남자는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적을 부수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남자는 주저 앉았다. 이제 그의 모래 시계의 모래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바닐라, 곧 있으면 바다지?"


남자가 말했다. 옆에 서서 걷던 바이오로이드는 끼긱 소리를 내며 눈을 굴리며 남자를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노인네 치매가 와서 다리라도 풀리셨습니까?"


남자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치매가 올 정도로 늙지는 않았어."


"그렇습니까?"


바닐라라고 말한 바이오로이드가 말했다. 잠깐의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졸리십니까?”


“아니, 근데 잠깐 뱃사공 카론이랑 뱃삯 흥정을 좀 해야할 것 같애.”


남자는 바닐라라고 말하던 그 바이오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광산도시의 블루칼라 노동자였었으며, 광산 도시의 밑바닥에서 토미 워커를 정비하던 정비사였다. 광산도시 특성상 남성밖에 없는 도시였던지라, 적적함을 달래주기 위해 24개월 할부로 산 저가형 바이오 로이드 바닐라를 샀었던 그는 지금 긴 여행을 떠날려고 하고 있다. 어쩌면 더 이상 적적함을 느끼지 않을 곳으로.


“많이 걸었지?”


“예, 정말 지겨울 정도로 걸었습니다. 지구 반 바퀴는 돌지 않았을까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체감상 말입니다. 체감상”




빈정대는 그 특유의 말투에 안심하듯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냐, 너는 휘프노스가 날 데려 가면 이제는 어떻게 할꺼냐?”


“휘프노스 싸대기를 때려서라도 데려와야지요. 아직 초코 케이크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준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고서는 바이오로이드는 휑하게 비어있는 한쪽 팔꿈치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것도 수복해주신다지 않았습니까? 주인님은 최저이지만 약속은 지키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충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습격 받아 날아간 그 팔에 약간의 죄책감이 들어 남자는 고개를 떨군다.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 걸까? 한때 세계를 저주 했던 적이 있었다. 가난하게 태어난 자신, 불합리한 사회에 불만을 품고, 망해버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망해 버린 세상은 그 시절조차도 아름다웠노라고 추억하게 만들어 버릴 만큼 추악했다. 여기저기 널부러진 육편 조각들, 부서져 여기저기 흩어진 바이오로이드의 사체. 망가진 폐건물 사이의 창문 사이로 얕은 빛이 흘러 들어온다. 그 빛에 비치는 것은 바다의 파란 빛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흘러갔다. 낮의 따뜻함이 지나고, 밤의 서늘함이 그들을 덮쳤다.


“저게 바다구나”


처음 보는 파란 빛이었다. 어머니 푸른 바다, 짠내가 섞인 바람이 불어와 코를 간질인다.


“옛날에 사람들은 해저 도시를 세운다고 헛소리를 해댔었는데...”


화성에 사람을 살 곳을 만든다거나, 해저에 도시를 세운다거나 다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어린 나이에 설레고 들떴던 기분이 들었다. 해저의 도시에 가고 싶어서,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사기 힘든 바다생물 도감 홀로 그램을 사달라고 조르고, 아버지는 그 날 나를 엄청 때리시더니, 다음날 바다 생물 도감 사전을 사 오셨었다. 그리고 그 책이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봤었던 기억이 났다. 부레가 망가진 물고기 마냥 유년기의 기억이 생각의 표면으로 샘솟아 오른다. 죽을 때가 되간다는 것이 실감된다.

그리고 여기쯤이면 아마, 안전할 것이다. 바닐라가 혼자 지내기에는. 이제껏 본 철충이라는 괴물은 물 근처를 싫어하니...


“그게 인간들의 멋진 점이지 않을까요? 주인님?”


고개를 돌려본다. 인공 피부가 벗겨져 철제 프레임이 튀어나와있는 바닐라의 반쪽 얼굴이 살짝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가?”


“꿈꾸는 것이요.”


힘이 풀려, 주저 앉은 나에게 바닐라가 그 무릎을 빌려준다. 말랑한 느낌이 뒤통수 근처에 느껴진다.


“그게 당장은 불가능 해보일지라도, 그럼에도 꿈꾸고 만들어내잖아요. 분명 인간에게도 시간이 더 있었다면 저 밑에서도 해저 도시가 있었을 거에요. 그곳에는 주인님이 너덜너덜하게 본 종이사전 속에 있던 물고기도 계속 떠돌아 다닐 거구요. 물고기만 있겠어요? 수초들도 해저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겠죠.”

졸린다.


“그곳에는 주인님을 반겨주는 여자도 있겠죠. 그뿐이겠어요? 주인님의 심해어같이 생긴 얼굴이랑 딱 맞는 인어 공주도 있을거고.... 그럼 거기에는 제가 없겠죠.”


네가 없긴.


“저는 말이에요. 저가형 중에서도 다운그레이드한 염가판이라 많은 감정을 누릴 수 없어서 지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단 하나뿐이다. 보급형이고, 다운 그레이드한 염가판 일지언정 나에겐 단 한명뿐인 존재.


“바닐라, 여기 근처는 아마 철충이 오지 않을 거야.”


짜내듯이 목소리를 내보려고 한다. 너는 여기 있으라고,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바닐라는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이다. 가방에 있는 식량은 아마 두달 정도는 충분할 것이다. 가방에 가득 있는 고체형 비상식량은 맛은 없지만 한 알만으로 하루는 너끈하니까.


바닐라는 요리도 못하고, 독설이 심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아름다우니까,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우니까 다른 사람이 주워갈 것이다. 그리고 수리하면 그 아름다움에 분명 놀랄 것이다. 찰랑이던 그 머릿결, 아스라한 향이 나는 그 피부 냄새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내 꿈속에서 영원히 가져갈 것이다.




그렇게 영원히.




심장 소리가 멈춘다. 그녀의 주인은 이제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주인이 매고 있던 총을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여자는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바이오로이드인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에게 총을 절대 쥐어주지 않았다. 주인에게 있어서 자신은 단순히 재산에 불과한데, 그 재산에게 쓸데없이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바닐라에게 있어 그 뒤떨어지는 모듈을 가진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그 너른 등을 보면서 안심하고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와 걸어 나가면서 본 풍경에는 자신의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바닐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그렇게 많이 존재했던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한명 뿐인 주인과 비교했을 때, 양산형인 자신의 초라함을 비참 할 만큼 깨달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바닐라는 기뻤다. 그 사람에게 단 한명 뿐인 존재라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은 이제 끝이 났다.


총을 들었다. 주인은 이곳이 안전하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감각으로 느끼기에는 사실 철충 한 기가 그녀들을 미행하고 있었다.


어쩐지 공격을 하진 않았지만, 마치 신기한 것을 관측할려고 하는 듯, 집요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CM67 스팅어를 기반으로 한 그 철충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망가진 한쪽 팔뚝을 지지대 삼아 그가 들고 다니던 소총을 조준해 철충을 향해 쏜다. 구식 총이 불을 뿜는다. 하지만 튕겨나갈 뿐 이렇다 할 충격을 철충에게 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 철충은 그녀를 향해 들이받았다. 철충의 박치기에 그녀의 다리가 꺽이지 말아야할 것으로 꺽였다. 다시 한번 바닐라를 향해, 날아오는 철충을 붙잡고 그녀는 철충을 개머리판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그리고 철충은 더 크게 반항하듯 그녀를 폐허의 한 구석까지 몰아붙였고, 바닐라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완전히 분리된 채 나뒹굴었다. 그리고 철충도 잔해로 나뒹굴고 있었다.


부서진 상반신으로 기고, 기어 경애하던 주인의 품으로 들어간다. 바이오로이드도 꿈을 꿀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그런 축복이 깃들길 진심으로 빌었다. 그의 꿈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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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마지막으로 몇 십년전 바닐라 A1 중 한 기의에 구조신호가 있었어요.”


콘스탄챠 S2가 말했다. 그곳에는 부서진 바이오로이드의 잔해가 있었다.


“아마 철충의 공격에 항전하다 부숴졌나봐요.”


“그리폰, 이곳에서는 인간님이 없는 것 같아요.”


그리폰도 주위를 둘러보더니,


“응, 그냥 바닐라 A1 모델의 잔해뿐이네. 여기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나봐.”


“그러게요.”


“그럼, 갈까요?그리폰?”


“그러자.”


그 폐허에는 단지 바닐라 A1 모델의 뼈대가 필사적으로 낡은 천 조각을 지키려고 한 듯, 꽉 안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콘스탄챠와 그리폰은 그 뼈대를 버려 둔 채, 다시 인간 탐색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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