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는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축제 준비로 바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아침 일찍부터 밖으로 나가 장식에 쓸만한 자재들을 탐색했다.

 

아늑한 주황빛으로 타는 양초가 샹들리에에 매달려 조용히 흔들리는 아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럼버 제인이 베어서 가져온 높이 삼 미터가량의 구상나무였다.

 

함께 간 엘븐 자매에 따르면 이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나무가 즐비했으나 연회장 천장 크기를 고려하여 타협한 모양이었다.

 


LRL은 용케 별 모양 장식물을 찾아왔다. 직접 트리 꼭대기에 장식하고 싶은 눈치라, 룸메이트인 그리폰이 도와주기로 했다.

 

비행 장치를 착용한 그리폰이 LRL을 안은 채 날아 발과 지면이 멀어지니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LRL이 감탄했다.



 





“사자의 몸을 한 맹금이여. 지금껏 이런 경치를 혼자 누렸단 말이냐? 치사하다~! 앞으로 매일매일 이 몸을 안고 1시간 공중 산책 형벌에 처하느니라!”

 

트리 정수리에 별을 장식하고 내려온 LRL의 정수리에도 그리폰에게 꿀밤을 맞는 바람에 별이 핑핑 돌았다. 아이 돌보기를 좋아하는 마리아가 그 광경을 보고 다가가 살포시 달래주었다.

 

푸근한 품에 안긴 LRL은 그리폰의 폭력을 일러바쳤고 마리아는 그럼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못 받는다며 그리폰을 훈계했다.

 

“어차피. 아니다.”

 

입을 뾰로통 내민 그리폰은 LRL과 달리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산타의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 앞에서 사실을 말하는 일은 암묵적인 금기였다.

 

어른스러운 척하기 좋아하는 그리폰은 자기 숙소 문에 걸린 큼지막한 양말이 내심 불만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에게 자신이 아이처럼 산타의 선물을 기다린다고 착각되기 싫었다.

 

불난 데 기름 붓는다고 지나가던 모모가 착한 어린이에게만 준다는 모모 스티커를 붙인 일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 흐레스벨그가 그리폰을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 이유도 모모 스티커 때문임이 틀림없다. 귀찮으므로 주고 싶었으나 본인 물건이 아니므로 멋대로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천추의 한이다.

 

모모 스티커가 모두에게 제공되지 않는 것처럼 크리스마스 선물 또한 오르카호 전원에게 주기는 사령관이 마법이라도 부리지 않는 이상 무리였다. 그리폰은 며칠 전 회의를 돌이켜봤다.

 



“마니또?”

“그래, 마니또. 스페인어로 애인이라는 뜻이야. 한국에서는 제비뽑기 등으로 선택된 친구를 비밀스럽게 챙겨주는 놀이의 형태로 유행했대.”

 

처음 의견을 낸 건 메이드 중 한 사람이란 모양이다. 과연 사령관의 최측근인 메이드는 삼안 산업의 제품. 한국의 놀이 하나둘 정도는 알 법도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내 손수 전원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물리적으로 무리였어. 그래도 역시 나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모두 선물을 받는 날로 만들고 싶어. 그러던 중 마니또를 하면 어떻냐는 의견이 나왔어.”

 

사령관의 선물은 산타의 선물이란 이름으로 어린아이들에게 돌아가기로 결정났다.

 

오르카 전원 각자 선물을 준비해 몰래 자신의 마니또에게 전달한다. 과연 이 방법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의견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으나 ‘사령관의 선물을 받는 사람은 누군가?’와 ‘사령관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은 누군가?’를 주제로 소란이 일어났다.

 

블랙 리리스와 시저스 리제의 기 싸움은 난투를 벌이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가장 먼저 콘스탄챠S2가 두 사람을 만류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겉으로는 착한 척하면서 제비에 조작을 가할 셈은 아니겠지?”

“우연히 주인님을 먼저 발견했을 뿐이면서 정실부인인 척 굴지 마, 이 해충!”

 

결국에는 공정한 제비뽑기를 위해 제비뽑기 관리위원회가 창설됐다.

 

“내게 이런 것을 시키다니… 좋은 판단이 아닌 듯싶다.”

“크크크, 성질 급한 폭군이여. 이것도 하나의 임무. 혹 그대 정도 되는 자가 이런 조그마한 상자 하나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운지?”

“뭣이.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조잘거리기가 특기인 까마귀 놈.”

 

디지털 방식은 해킹의 염려가 있어서, 아날로그여도 상자를 바이오로이드에게 맡기면 조작이 있을 수 있다며 관리위원회 인원은 전원 AGS로 결정됐다.

 

따라서 제비뽑기는 조작 없이 순전히 운만으로 진행됐다. 어쩜 이런 일이 있을까? 그리폰의 제비에는 LRL 석 자가 적혀 있었다.

 

LRL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리폰은 실망했다. 소에도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주는데 무엇을 더 챙겨주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오르카의 누구든지 자신의 비밀친구로 인간을 뽑고 싶었으리라. 설령 선물을 준 게 본인이란 사실이 전해지지 않는다 해도. 

 



“흥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리폰은 내 마니또가 아닐 거야.”

 

삐진 아이의 실없는 소리라 해도 기분이 상했다. 나도 네 마니또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걸. 그리폰은 입 밖으로 나오려던 생각을 겨우 삼키고 통통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눈앞에서 그리폰이 사라지자 LRL은 “자기가 먼저 때린 주제에.”라며 볼멘소리를 냈으나 차츰 마리아의 품에서 나오려고 바둥거렸다.

 

돌이켜보면 손찌검은 잘못이지만 본인도 나쁜 말을 했다. 분명 도와준 사람에게 할 태도는 아니었다.

 

“마리아, 놔줘. 그리폰한테 사과하러 가야 해.”

 

그리폰의 발걸음은 오르카호 밖으로 향했다. 비행 유닛을 장착한 김에 바람을 쐬고 오려는 심산이었다. 나오자마자 숨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겨울의 밤이니 따듯하고 밝은 안과 달리 밖은 춥고 어두웠다. 이름의 유래처럼 사자의 털가죽은 없어도 한파가 그리폰을 괴롭게 할 수는 없었다.

 

기동형 바이오로이드의 이점이다. 고도가 올라가면 온도가 떨어지니 기동형은 추위에 강하게끔 설계된다.

 

“LRL은 바보. 겨울 비행은 너 같은 꼬맹이한테 무리야.”

 

바람대로 안고 날았을 때 경장형인 LRL이 춥다고 투정 부리는 모습은 쉽게 상상이 갔다. 우는 소리로 내려가자 하겠지. 어쩐지 서글퍼졌다.

 

밤하늘 달별이 이 높이에서 이렇게 아름다운데, 공중에서 내려다본 파티를 준비 중인 오르카호의 불빛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녀석은 모른다. 평생 알 방도가 없다.

 

“LRL 망할 꼬맹이. 평생 땅에 붙어 다녀라! 누가 너 같은 거랑 이 광경을 공유하고 싶대?!”

 

답답한 마음을 허공에 토해내는 그리폰은 등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벼락처럼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 밤하늘만큼 검은 AGS가 있었다.

 

“독수리의 머리, 사자의 몸통. 용맹한 짐승의 이름을 가진 하늘이 기사여.”

 

홀연히 나타난 이의 말투는 친구를 떠올리게 했으나 음색이 전혀 달랐다. 다른 바이오로이드와도 다르다. 따지자면 인간에 가까운 낮고 굵은 목소리에 전자음이 섞여 수상한 분위기가 자아낸다.

 

“깜짝이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습관은 고치는 편이 좋겠습니다. 상대가 저 같은 AGS면 더욱. 들어보니 진조의 공주랑 싸운 모양이로군요.”

 

LRL에게 하던 습관대로 로크에게 꿀밤을 먹인 결과 그리폰은 아픈 주먹을 끌어안고 허공을 바닥 삼아서 데굴데굴 구르는 곤욕을 치렀다.

 

로크의 몸체는 익숙한 LRL의 정수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단단했다. 심기가 한층 더 불편해져 자기도 모르게 날 선 태도를 보였다.

 

“남이 무슨 고민을 하든 뭔 상관이야. 오지랖도 넓으셔.”

“크크크. 아무래도 맞춘 모양이군요.”

“고철덩이 주제에 맞추기는 무슨 얼어 뒈질 놈의.”

 

원색적인 비난은 절친 타이런트를 연상케 해 로크에게 사뭇 즐겁게 다가왔다. 동시에 단순무식한 자신의 벗과 달리 섬세한 감정을 소유자임을 간파했다.

 

멸망 전 인간에 빗대자면 사춘기 여중생이나 여고생. 이런 인간일수록 자신의 실수나 실패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법. 때로는 가만히 들어주는 게 정답이다.

 

“당신의 말대로 저는 한낱 고철덩이죠. 그렇기에 당신네 고민을 들어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답니다. 어떠신가요, 고철덩이에 고민을 털어놓고 편해지는 건?”

 

타이런트는 LRL을 익히 알고 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보러오는 작은 바이오로이드. 자신을 기준으로 하면 바이오로이드는 전부 작으나 그중에서도 특히나 작다.

 

둘 사이에는 코끼리와 쥐만큼 크기 차이가 있다. 지구 역사 이래 두 동물 사이에 우정이 성립됐단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기묘하게도 타이런트와 LRL 사이에 우정이 싹텄다.

 

LRL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매번 타이런트의 사고회로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리폰이란 녀석이 너와 싸우고 이리로 나갔다고? 그 녀석을 혼내주면 되는 거로군. 내게 부탁하러 오다니 보는 눈이 있구나. 투쟁이라면 나를 능가할 존재는 없지.”

 

친구의 의중을 지레짐작한 폭군은 격납고에서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412t의 거체가 움직이자 격납고가 삐걱삐걱 신음을 흘렸다.

 

“그리폰을 괴롭히면 안 돼! 나는 그리폰이 방향으로 나갔는지 물어보러 온 거야.”

“싸웠는데 끝장을 내지 않는 건가?”

“아이는 싸우면서 큰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타이런트의 의문에 마리아가 대답했다. 타이런트는 끝내 이해 못 했는지 끙, 신음을 흘리고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폰이란 녀석이 이리로 나갔다면 로크가 알고 있겠지. 오르카의 상공은 놈의 영역. 녀석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녀석은 없다.”

“진짜? 그러면 로크랑 연결해줘!”

 

타이런트는 자신은 전화기가 아니라 투덜거리면서도 로크에게 연락했다.

 

“정리하자면 그리폰은 LRL의 머리를 때린 일을 후회하고 있다. 본심은 LRL에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선물해주고 싶다?”

“전혀, 전~~~혀 아니야! ……아니, 사실은 맞아.”

 

아까는 때려서 미안하다며 때린 부위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별로 화낼 법한 일은 아녔어. 그냥 실없는 농담일 뿐인데 때렸어. 내가 어른스럽지 못한 거지. 후, 속내를 털어서 놓으니까 후련해졌어. 고마워 로크.”

“진심을 전할 대상은 제가 아니죠. 타이런트로부터 전언입니다. 마침 LRL도 당신을 찾는 모양입니다. 사과하고 싶은 게 있다는데요?”

 

***

 


“이거 봐라, 그리폰. 누군지는 몰라도 센스 나쁜 선물이다! 내 마니또는 마리아인 줄 알았는데 생각이 달라졌다. 대체 누구지?”


 


“이 바보야! 그게 얼마나 따듯한데. 이리 줘. 입혀줄 테니까.”

“히잉, 그리폰이 또 때렸어!”

 

울먹이는 LRL의 목에 목도리를 걸었다. 자꾸 우는소리 하면 콱 졸라버린다며 겁을 주자 금방 얌전해졌다.

 

“자, 이걸로 됐다. 따듯하게 입었으니까 날아보실까?”

“그리폰, 역시 뭔가 잘못 먹은 거 아니야? 갑자기 잘해주니까 무섭도다. 나 역시 안 나갈래.”

 

콱. LRL의 머리에 쌍봉우리가 우뚝 솟았다.




크리스마스 대회용으로 부랴부랴 쓰다가 마감했길래 일반 창작물로 제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