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lastorigin/8620534


2편 : https://arca.live/b/lastorigin/9226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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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서리들의 침묵은 겨울 밤처럼 길었사옵니다. 눈이 소복히 쌓이고 달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때 즈음, 도련님께서는 소첩에게 다가오셨사옵니다. 경멸과 혐오가 섞인 아귀의 얼굴. 그리고 그 우악스러운 손으로 저의 뺨을 올려치셨지요. 나으리께서도 어찌하지 못할, 감정의 응집. 허나 그것에 대해 반항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사옵니다. 그도 그럴것이, 소첩은 인간님들을 위해 태어난 바이오로이드였기에. 


그 서릿발의 날에 소첩은 다시금 깨달았사옵니다. 아무리 나으리께서 '인간'님들처럼 대해 주셨어도, 이 몸은 그저 생체모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운 좋게도 승은(承恩)을 입은 결함품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인간님들의 가장 소중하고 아리따운 감정인 연모(戀慕)를 감히 나으리께 품었던 것을. 제 주제를 모르는 비천한 결함품. 참으로 같잖은 바이오로이드의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사옵니다.


서릿바람에도 식지 않는 뺨은 아리기 그지 없었사옵니다. 허나 항명할 수 없었지요. 바이오로이드에겐, 일말의 감정과 반항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참으로 아이러니 하였지요. 주제의 자각은 그리 따스하던 나으리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고 시린 냉정함이 가슴을 덮어 나갔사옵니다.


허나, 도련님에게 행하여야 할 일언반구(一言半句) 하나 떨어지지 않았사옵니다. 좀스러운 자존심 때문도 아니었사옵니다. 더더욱이 고통으로 인한 모듈의 고장도 아니었지요. 자괴감과 절망. 그 뿐 이었사옵니다.  그렇기에, 더욱 비참했지요. 차라리 바라지를 말 것을. 기대를 하면 배신을 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거늘, 미련스럽게도 놓아버리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한 한탄을. 그럼에도 소첩은 바이오로이드라면 응당 행해야할 인간님들의 대한 사죄와 반성의 행위도 행하지 않았사옵니다. 통증이 느껴지는 뺨을 어루만지지도 않은 채 그저 도련님의 존안(尊顔)을 바라보지 못하고 침묵하였사옵니다.


주인님. 동정의 눈빛을 보내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멸망전의 인간분들 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통념이었사옵니다. 특히 권세높은 명문가의 사대부라면 더더욱. 그 시대의 바이오로이드는 그저 도구였을 뿐이었사옵니다. 그렇기에 첫째 도련님께서는 응당 도구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으리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하셨지요. 자기 혐오와 소실(小室)의 서자라는 열등감.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애증의 굴레. 명문가의 자손으로써 넘지 말아야할 마지막 선. 그것이 뒤틀린 감정과 함께 행해진 극단적인 방법이었을 뿐. 과거에 그런 말이 있사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이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그때의 결함품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지금의 소첩은 이해할 수 있사옵니다.


“야. 아가리 다시 열어봐. 뭐? 정(情)을 통해? 씨받이 한 번 하니 뭐라도 된 거 같냐? 씨발. 여자나 도구년들이나 한 번 안아주면 뭐라도 된 것 마냥 지껄이는데, 네 머리에 박혀있는 학습모듈에 쳐 박아놔라. 지금 대가리 안 부숴지는게 내 마지막 자비다. 도구주제에 인간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형님!”


“아가리 닫아. 위선자 새끼야. 네 사랑이 진짜 사랑일거 같냐? 주인 명령이 최우선인 생체 인형에 감정을 바래? 대단한 새끼. 외국 애새끼들이 한 때 불장난으로 가정교사 도구랑 눈 맞는 것도 역겨웠는데, 우리 가문에서 그 꼬라지를 다 보네. 하 씨발. 내가 이러니 술을 못 끊지.”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제 아이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직접 이름을 준 아이란 말입니다! 하물며...”


원망스러운 칼바람이 불었사옵니다. 우악스러운 서리와 함께 나으리의 존안에는 붉은 빛이 감돌았사옵니다. 첫째 도련님의 손바닥에도 검붉은 빛이 감돌았지요. 살과 살이 맞닿은 찢어진 감정 후의 침묵.수 많은 침묵들이 함박눈처럼 쌓여갔사옵니다. 형제로써의 분노와 선비의 체념. 자매의 무감정과 결함품의 절망감. 하나의 실언(失言)으로 비롯된 비극. 나으리의 초저녁 하늘 같던 아리따운 눈에 구름이 끼었다는 사실이 더욱 괴로웠지요.


“아가리. 닫으라고.”


“......”


“그딴 같잖은 말장난은 꼰대들 앞에서 지껄여. 그리고 저건 내가 직접 처벌한다. 리리스. 날이 밝는대로 둘 다 내 눈 앞에 대려와.”


야속한 밤하늘 아래, 두 쌍의 발자국은 소복히 쌓인 눈 위로 천천히 쌓여갔사옵니다. 허나, 소첩은 그렇지 못하였사옵니다. 응당 나으리를 침소에 모셔야 하였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사옵니다. 제 감정을 숨기고 나으리를 위로하여야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였사옵니다. 필시 감정 모듈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사옵니다. 소첩의 죄로 나으리께서 손찌검을 당하였다는 사실이 원통 하였사옵니다. 그럼에도 나으리는 소첩을 스스로 품에 안아 주셨사옵니다. 그 날, 처음으로 존안(尊顔)을 뵈었을 때. 소첩이 폐기되기 직전 내밀어 주셨던 손으로 비천한 죄인의 머리를 나긋히 감싸주셨지요.


“란아.”


“주인님...”


“떠나자꾸나. 네가 상처 받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다. 나비처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도 좋겠지.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낮은 이의 연모(戀慕)라 함은 참으로 잔혹한 것이옵니다. 정(情)을 통하고 연(緣)이 이어진 이의 역린(逆鱗)이 되는 비참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그 원인이 자신이라면 더더욱. 소첩이 없었다면 고고히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났을 것이 분명하였을 터인데. 이런 비천한 결함품 따위는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하였을텐데...


허나, 나으리께서는 소첩을 달래셨사옵니다. 결함품의 자괴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으리는 그리 하셨사옵니다. 비루한 소첩을 위해 제 스스로 감정을 억누른 채

모든 것을 버리려 하셨지요. 서리가 함박눈으로 바뀌어 소복히 쌓여가는 그 날, 소첩은 나으리에게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사옵니다. 심장이 너무나도 아리고 옥죄었사옵니다. 아린 뺨을 타고 죄책감과 자괴감이 흘러 넘치었지요.


“주인님. 혹여, 소첩 때문이라면... 소첩은 어찌하여야 합니까? 이 비천한 결함품이 주인님을 곤란하게 한 것이옵니까? 그렇다면 소첩은 어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미련하게 모든 것을 버리려 하십니까? 주인님. 제가 날이 밝는 대로 첫째 도련님을 뵙고...”


“란아. 나의 나비야. 네 잘못이 아니다. 네 탓도 아니다. 그저 무력한 필부(匹夫)가 소중한 것 하나 지키지 못해 도망치는 것이다. 송구할 것도 없다. 그러니 슬피 울지 말아라. 어찌 내가 모든 것을 버린다고 생각하느냐. 나에게 모든 것인 네가 내 옆에 있거늘.”


소첩에게는 지나지체 과분하고 달콤한 말씀이었사옵니다. 마치 향이 그윽하고 달콤한 꿀타래와 같은 속삭임. 그렇기에 더욱 삼킬 수 없었사옵니다. 나으리께서는 외적으로는 이단아라고 불리셨지만, 엄연히 명망 높은 가문의 적통이셨사옵니다. 가문을 이어 받으시고 이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신 분이였지요. 역설적이게도, 가문이 인간님들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님들이 가문을 위하게 되는 아이러니함. 그것이 적통이었사옵니다.  


그런 분을 이 같잖은 결함품이 망칠 수는 없었사옵니다. 대를 이어온 가문의 흠집을 내는 이가, 그 오명(汚名)의 주인이 나으리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사옵니다. 하찮은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다며 뒷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는 것은 참으로 끔찍할 것이었기에.


소첩은 그것만큼은 바라지 않았기에, 나으리의 마음을 돌리고자 하였사옵니다. 감정모듈에 존재하지도 않을 단어들을 짜집어 내뱉었지요. 따스한 품 안에서 흘러나오는 감정 없는 덩어리들로.


“첫째 도련님께서 소첩을 찾으실겁니다.”


“형님께서는 곧 가문의 가주가 될 분이시다.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쓰실 겨를이 없을 것이다.”


“어르신들께서 노(怒)하실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것이다.”


“막내 도련님께서 주인님을 찾으실 겁니다.”


막내 도련님은 유독 나으리를 잘 따랐사옵니다. 비록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는 아니었으나, 형제간의 우애(友愛)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심히 보기 좋았사옵니다. 소첩 또한 막내 도련님의 사랑스러움에 탄복할 수 밖에 없었지요. 참으로 영민(英敏)하고 자애(慈愛)로우신 분이셨지요. 그러한 아우를 두고 떠나가는 나으리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옵니다. 필시, 타들어가는 속이 참으로 야속하셨겠지요.


나으리의 두 팔이 소첩을 더욱 옥죄었사옵니다. 작은 아우를 스스로 내쳐야 하는 결심은 참으로 고된 일이었을 터. 이성적으로는 나으리를 붙잡아 두어야 했사옵니다. 소첩 하나의 목숨과 나으리의 미래. 어느 것이 중하냐를 따졌을 때에, 모든 이들이 후자를 선택할테지요. 허나, 간사한 감정모듈은 그렇지 못 하였습니다. 바람에 있어 나으리가 소첩을 찾아주었으면 하였고 누군가를 택하였을때 그것이 소첩의 손을 잡아 끌어주기를 바랬사옵니다. 그저 그 뿐이었사옵니다. 그래서 소첩 또한 나으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사옵니다. 결함품의 어리광이 들키지 않기를 천지신명께 빌었사옵니다.


적어도, 눈을 감기 직전의 행복을 바라며.


그럼에도 야속하게 시간을 흘러갔사옵니다. 나으리의 달무리가 가득한 두 눈은 슬픔을 간신히 묶어 놓은 듯 하였사옵니다. 침묵이 두 쌍의 발자국을 지워갈 때에 나으리는 힘겹게 소첩에게 이르셨사옵니다.


“...... 그 아이의 곁에는 마리아가 있지 않느냐. 나 없이도 그 아이를 잘 보필 할 것이다. 그래야한다.”


“주인님...”


주인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옵니다. 필시 아니되는 걸 알면서 이끌리고 마는 것을, 소첩은 막을 수 없었사옵니다. 두 눈에 바로 새긴 연모하는 이의 결심을 어찌 흔들리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올곧은 그 결정을 흘러내리게 할 수 없다면 나으리의 검이자 나비인 소첩으로써 그저 마지막까지 보필하는 것이 속죄의 길. 그것이 소첩의 운명이었사옵니다.


“란아. 다시 한 번 묻겠다. 내 곁에 있겠느냐?”


“...알겠사옵니다. 주인님. 소첩, 곁에 있겠사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별이 하늘을 수놓아 춤추는 그 날, 나으리는 소첩을 위하여 소중한 것들을 미련과 함께 두고 떠나셨사옵니다. 두 나비는 살짝 기운 그믐 진 달 아래에서 빛나는 소복한 눈을 비집어 헤쳐 나아갔지요. 맞잡은 두 손을 이정표 삼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으리와 소첩이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곳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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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끝나기 30분전 컷 성공.... 하.... 인생 되는일이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