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인다….따위의 말은 소설이나 게임 주인공만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나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진부한 대사를 털어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으...씨발…"


침대를 짚고 상반신만 일으킨 것일 뿐인데, 몇일은 굶은 사람처럼 힘이 안 들어간다. 

헛짚은 팔에 몸이 휘청이자 무의식적으로 욕지기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어제 뭘했더라?


광란의 술자리가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남자놈들 끼리만 먹어서 그런지 이번 술자리는 유독 길었다. 그래도 역시 4차로 새벽 5시까지 달린건 좀 심했었지?


달달 떨리는 팔을 겨우 받쳐 침대 위에서 일어나자 이번엔 다리가 접히며 팍 주저앉는다.

얼씨구 잘한다, 잘해, 아주 걸음마를 하는구나.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아, 씨발,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기억속에 떠오르는 소주병만 세어 봐도 6병은 넘는다. 

너무 먹긴 했구만, 머리도 살살 아파 오는거 같은데,


지끈거리는 두통에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침대를 잡고 일어서 본다. 그러고 보니 침대? 나는 침대를 사용하지 않는다. 위화감에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아 씨발 좆됬네….술 처먹고 엉뚱한 곳에서 잠든거 아냐..?”


술먹고 길바닥에서 깨어난 적은 많지만, 침대위는 또 처음인데 말이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철로 된 벽과 둥근 창문, 그리고 그 창문 넘어로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인다. 뭐, 물고기?


"..요즘 모텔 컨셉 존나 지랄맞네."


나는 잔뜩 쉰 목소리로 씹어 뱉듯 투덜거렸다.

감옥이나 정글 컨셉은 봤어도 잠수함 컨셉 모텔이라… 신선하긴 하네, 역시 인싸 트렌드는 이해하기 어렵다니까.


그런데 왜 집이 아닌 모텔에서 잠이 든 것일까. 아니, 애초에 여기..모텔이긴 한건가?


문득 든 생각에 다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쇠로 되어있는 방에 놓인거라곤 달랑 침대 하나 뿐,

그 흔한 화장실조차 없었다. 모텔을 자주 가본건 아니라 잘 모르긴 하지만, 숙박업소치곤 너무 콤펙트한데?


다리에 힘도 돌아왔겠다. 나는 힘겹게 일어나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일단 나가봐야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겠지?

뻐걱거리며 돌아가는 문고리와 한참 팔씨름을 하던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멈칫했다.


“...내 팔 ...내 팔이 왜 이렇게 가는거지?”


위화감을 느낀 나는 몸을 더듬어 상태를 확인 했다.

문자 그대로 가죽과 뼈만 남아 앙상해진 팔은 아프리카 난민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으며

다리의 상태도 팔과 다를게 없었다. 망할,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던게 납득이 된다.


원양어선 납치? 그걸로는 몸이 비쩍 말라버린게 설명되진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비실비실한 놈을 뱃일에 쓴답시고 납치하는 얼간이는 없겠지.

장기매매? 급하게 옷을 올려 배를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 통증도, 수술자국도 없었다. 


온갖 상상과 수많은 추측들이 머릿속에서 부유한다. 하지만 명확히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낮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다급히 나를 부른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본 내 인상이 무참히 찌그러졌다.


“인간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씨이발...이건 또 무슨 컨셉이야....”


안경을 쓴 메이드 복장의 여자 하나, 이상한 코스프레를 한 노란머리 여자애 하나랑...

사이버 펑크틱한 옷을 입은 강아지 하나라, 괴이한 조합이구만.

게다가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분명 날 인간’님’이라고 불렀지. 

몰래 카메라인가? 장난도 이정도면 과하다. 나도 모르게 나온 쌍소리에 그녀들의 얼굴이 놀란듯 일그러졌다.


“저기...인간님...괜찮으신건가요?”


내 눈치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안경녀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저 캐릭터는 라스트오리진에 나오는 콘스탄챠다.

시작한지 좀 된 게임이고, 아직까지 하고 있는 게임이니 그건 확실하다.

콘스탄챠를 닮은 배우에 보리까지 구현하다니, 사람 제대로 엿 먹이려고 작정한건가.


“저기요, 욕해서 미안한데요. 이런 장난은…”


콘스탄챠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따지려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절대로 맞춰져서는 안될, 좆같은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물고기, 숙취라고 생각했던 은근한 두통, 지나치게 리얼한 그리폰과 콘스탄챠 까지..


설마 하는 마음에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아까 물고기를 보았던 창문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아닐거다,아니, 아니여야 한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곧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하…. 진짜 돌아버리겠네.”


표표히 지나가는 하늘고래의 모습을 보자 힘 빠진 다리가 기능을 잃고 몸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창문 밖으로 헤엄치는 거대한 고래라니, 아무리 컨셉에 미친 테마모텔이라도 저런걸 키우진 않겠지.


“꺅! 인간님!”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콘스탄챠가 달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씨발, 오늘 몇번째인지 모를 썅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나는 내가 라스트오리진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2



그동안 바이오로이드들이 돌아가며 이 몸뚱아리를 관리해 줘서 청결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근육의 약화 까진 막지 못했나보다. 

나는 콘스탄차에게 안기다 시피 하며 오르카 호의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쓰러지고, 너희들끼리 버텨왔다는 거지?”


“네에, 그땐 정말 주인님이 죽은 줄 알고..”


라스트 오리진은 기본적으로 바이오로이드들의 가슴을 주무르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라이트한 게임이지만,

실제로 그 게임 안에 들어와 생존해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단 사방에서 몰려오는 철충들과 레모네이드 무리만 해도 골이 다 아플 지경인데, 

별의 아이라는 미지의 적들까지 있다. 


평범한 인간은 살아남기조차 버거운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가진 이곳에서 정보는 곧 생명이다.

정보를 얻기 위해 오르카 호 내부 상황을 이것저것 물어보던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콘스탄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대체 내가 쓰러진 시점이 언제 인거야?”


“그게 주인님께서 포츈 언니를 만나고 바로 쓰러지셔서...”


콘스탄챠의 말에 따르면 내가 포츈을 보고 기절해서, 2년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아,보니까 찍먹하다 관둔 사령관의 몸에 빙의한 것 같은데.’


씨부랄놈의 진입장벽,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애들을 앞에 넣어둔거야?

아, 물론 나는 포츈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처음 보았을 때는 그녀가 조금..아니 많이 부담 되기는 했었지만..

나는 '으악! 가슴 존나 커!!'를 외쳤던 그녀와의 첫 만남을 상기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콘스탄챠, 지휘용 콘솔 같은건 있어?”


“네, 주인님, 여기 있어요.”


아무리 상태창을 외쳐봐야 기적 따윈 일어나지 않겠지, 이럴 때는 정공법이 최선이다.

나는 손톱을 물어 뜯으며 콘스탄챠가 건네준 지휘용 콘솔을 조작했다. 


"제발...제발…."


그렇게 기도했건만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전투원 목록에 라비아타나 무적의 용은 커녕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눈에 익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어느 정도 있다는게 위안이 되는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곳에 있었다.


"하…미치겠네."


아주 초반 시점에서 2년 정도가 지난 지금, 인간의 명령이 없었던 오르카호의 상태는 그야말로 개판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인원들은 인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오르카호에 존속해 있었지만 

전투나 물자 보급등의 상태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엉망진창 이였다.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단백질 블럭으로 식사를 때우고 있었으며,

인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년간 철충들의 공격을 받아온 오르카 호의 상태도 완전하지 못했다. 그야 말로 최악중의 최악.


“.....ㅆ...후..”


이제 욕할 힘도 없다. 반파된 상부 엔진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자, 나를 부축하던 콘스탄챠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도 지금 상황이 절망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나...살아남을 수는 있을까...어?”


어디부터 손 대야 하는지도 모르는 지금, 힘없이 웅얼거리며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던 나는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을 느끼고 얼굴을 매만졌다. 


‘….사람 얼굴이 이렇게 딱딱할 수 있나?’


손으로 뺨을 긁으니 무슨 쇳덩이를 긁는 느낌이 난다. 그러고보니 이 게임 주인공...설정상으로 철충에 감염되었었지? 

아마 아까부터 느껴지던 두통의 원인은 이것일 것이다. 뭘 좀 먹고 확인 해봐야겠군.


“....콘스탄챠, 혹시 거울 있어?”


“앗, 네 주인님 식당 옆 화장실로 가시면 보실수 있어요.”


마침 식당에 도착했는지 손수 문을 열어주며 대답하는 콘스탄챠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미리 바꿔두면 감염된 것도 모르고 버티다가, 얼간이처럼 라비아타에게 칼침맞을 일은 없겠지? 

빨리 무적의 용도 합류 시켜야 겠구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식탁에 앉아 기다리자 잔뜩 긴장한 얼굴의 포티아가 쟁반 가득 음식을 내왔다. 

그러고 보니 아우로라랑 소완 합류 이전 시점이구나. 그녀 혼자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식사를 준비했을 생각을 하니, 입맛이 썻다.


“고마워, 포티아.”


따뜻한 고기 감자 스프와 잘 구워진 빵 두조각, 그리고 사과 한 알. 2년만에 깨어난 사령관에게 주어지는 식사치곤 초라했지만, 

세삼 오르카호의 식량 사정을 떠올린 나는 군말없이 수저로 스프를 떠 먹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위장에 스프가 흘러들어가자 주린 배가 비명을 지르며 음식을 요구한다.


“주인님,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시간이 없으니 천천히 드시면서 들어주세요.”


“응응.”


아까 지휘 콘솔로 워낙 충격적인 걸 많이 봐서 그런지, 뭐 이제 뭔 말을 들어도 놀랄것 같지는 않다. 

나는 빵을 스프에 찍어 먹으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식사 후, ‘불굴의 마리’님과 라비아타 통령님께서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풉..컥...,켈록켈록! ...뭐?”


방금 한 말 취소, 가까스로 목에 걸렸던 빵을 삼키고 되묻자 콘스탄챠가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아, 아까 콘솔에서는 보지 못하셨던 이름이셔서 놀라셨나 보네요. 마리님과 라비아타 통령님이 포위를 뚫고, 

방금 오르카 호에 도착하셨다고 해요.”


“....좆됬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으며 중얼거렸다. 

호감도가 0인 콘스탄챠가 첫만남에 쌍욕까지 한 날 위해 라비아타의 머리에 총을 겨눌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라면 뭔가를 하기도 전에 그냥 뒈져 버리겠지. 


초장부터 죽음의 위기라니 이건 너무하잖아…머리를 굴리던 나는 뭔가를 생각해내고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콘스탄챠..혹시 가기 전에 화장실..정도는..좀..들렀다 가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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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철충들의 공격이 오르카호로 집중된 사이, 포위를 뜷고 탈출했다는 설정으로 조기 등장한 라비아타와 마리, 

과연 전생한 철남충의 운명은? 이라는 느낌으로 써봤어...이런거도 괜찮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