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사령관 프롤로그 - 삼류 희극


악마 사령관 1화 - 말라비틀어진


악마 사령관 2화 - 신기루(上)


악마 사령관 2화 - 신기루(下)


악마 사령관 3화 - 일출?


악마 사령관 4화 - 설중규

------------------------------------------------


V. 믿을지어다

폭포가 거꾸로 흐른다

불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구름이 땅으로 내려왔다.

믿지 못하겠는가?

눈으로 직접 볼지어다

이는 기적이라 하느니.

 

브라우니 소위 Second Lieutenant Brownie

 

 7월 30. 스틸라인 대규모 부대를 동원한 한 차례의 전투가 또 끝났다. 저항군은 1만에 함대 20, 철충 군대는 7천에 네스트를 4기나 동원한, 근래에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 양쪽에게 모두 주요한 거점을 둔 7시간의 격전 끝에 저항군은 대승했고, 철충 군대는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은 채 후퇴해야 했다

 

 물론 이 정도의 전투라면 승리한 쪽이라고 피해가 적을 리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총합 2만에 가까운 대군 간의 전투인데? 적어도 수백의 사망자, 그 몇 배나 되는 부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러 전투를 볼 때 합리적인 결과가 그렇다. 그래도 대승인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수복실은 당장 발 디딜 틈도 없

 

소위님, 이거 수복실이 왜 이렇게 휑합니까?”

 

 ?

 

그러게. 전투 끝난 거 아니었나?”

 

 브라우니 소위, 멸망 전에 온갖 전공을 세우며 장교로까지 진급한 입지전적인 인물과 그녀의 소대는 200년 동안 사망자 없이 온갖 전장에 나선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일명 흉터 소위와 그녀의 맹견 소대

 

 한쪽 눈가에 긴 흉터를 새긴 덕에 그런 이름을 받은 그녀는 그야말로 장병 사이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오르카 호에 그녀보다 경력이 긴 이들은… 놀랍게도 단 하나도 없고, 조금 짧거나 비슷한 것이 레오나, 마리, 무적의 용과 라비아타 정도의 멸망 전 개체였다. 그녀의 소대원들도 거의 비슷해, 1기 생산 모델이 열다섯, 다른 다섯도 모델 출시 10년 안에 생산된 이들이었다

 

중상자 23에 사망자 7? 전투라며? 그거 훈련이었냐? 구라지, .”

 

아니, 진짜라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현재, 장기 수복실 신세를 진 44명 중 21명이라는 명예를 짊어지게 되었다. 명예 맞나?

 

언니, 멸망 전 훈련이 그것보다 사망자가 더 나오지 않았어요?”

 

그랬던 것 같은데. 좇간 새끼들 때문에. 30명이면 비율로 따지면 몇 %?”

 

 탐색 임무에 나갔던 소대원들은 전투의 결과를 들으며 자신들의 청각을 의심해야 했다. 1만이라며? 1만이라면서? 1만 보내서 중상자 사망자 총합이 30? 0.3%? 그게 뭐야? 그게 뭔데

 

그런데 언니, 우리가 겪은 것도 비슷한 거 아니에요?”

 

 문득 꺼낸 노움 – 122의 말에 소대원들은 모조리 침묵하고 말았다. 대략 어… 그건 그렇네, 정도의 표정들이었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들이 겪은 일을 생각하니 그랬다. 전투에 나갔던 대원들이 처녀 수태의 기적을 본 셈이라면, 이들은 사흘 만에 부활 운운하는 부분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부터 코헤이 믿어야 하냐?”

 

이건 아자젤 님도 구라치지 말라고 하시지 말입니다.”

 

부정할 수가 없다. 시발.”

 

 소대원들의 콩트를 지켜보며 쿡쿡 웃던 소위는 갑자기 깜빡거리는 리시버에 고개를 돌렸다. 뭐지


승리. 3 탐색부대 소대장 브라우. , ? ? ??”

 

 갈수록 옥타브가 높아지는 소위의 목소리에 소대원들이 말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통화를 마친 소위는 허허로운 표정으로 리시버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말이 없자 기다리던 소대원들이 답답해졌는지, 레프리콘 1577이 그녀를 채근했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누구예요? , 말 좀 해 봐요!”

 

, , , 젠장. 얘들아. 마리 대장님 오신다는데.”

 

.”

 

 수복실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들은 1만 대 7000 전투에서 난 23명의 중상자보다 2명 적은, 21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것도 탐색 임무에서.

 

 이거 설마 족치려고 오는 거 아냐? 얼굴이 창백해진 레프리콘이 애써 희망적인 가설을 꺼냈다. 아니,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분은 전투 중에 - ”

 

 발생한 사상자들을 찾아가시지 않아요? 라고 말하려던 레프리콘은 뒷말을 삼켰다. 사상자가 어디 있긴 할 텐데, 23명을 하나씩 보고 사망자들 부대까지 돌고 와도… , 얼마 안 걸릴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밖에서 나는 고함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위! 소위! 자네들 괜찮나!”

 

 , 족치려는 건 아닌가 보네. 1577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님, 대장님도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

 

비키게! 내가 이 정도는 문제없는 거 알지 않나! 내가 팔이 잘렸나 내장이 터지길 했나!”

 

 한바탕 소란과 함께, 뒤에 곤란한 표정인 레드후드를 단 마리가 병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수복 대기 중인 소대원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심각했다. 대부분 온몸에 화상 연고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고, 몇몇은 부러진 팔다리에 깁스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대장인 브라우니 소위는 아예 오른팔이 통째로 없었다

 

, 소위.”

 

 마리와 마주친 소위와 소대원들이 병상에서 경례를 올렸다

 

승리. 3 탐색부대, 귀환했습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대장님. 전원 수복 대기 중이라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것 됐네, 그런데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자네들은 탐색 임무를 나갔을 텐데, 대체 왜 그런 부상을.”

 

 소위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탐색 작전 도중 전장에서 후퇴하던 40기 이상의 철충 부대 및 스토커와 조우해 응전했습니다. 다행히

 

 소위가 말을 흐리자 마리는 황급히 소대원들을 세어보았다. 설마 전사자가 있나? 다 똑같은 브라우니에 노움과 레프리콘이라지만 멸망 전부터 함께하던 역전의 용사들을 그녀가 못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스물하나, 전원 있는데? 마리가 혼란을 느끼는 차였다. 머뭇거리던 소위가 말을 마무리했다

 

조우한 적 전멸, 아군은 중상 1에 경상 20입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놀람과 걱정으로 초조해하던 마리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전멸?”

 

.”

 

전략적 의미…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전부 다 죽였다는 소린가?”

 

.”

 

.”

 

 마리는 멍청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방금까지 걱정하던 건 싹 잊은 뒤였다. 부하들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뻐해야 하겠지만, 소위의 말은 그런 감정을 잠시 침묵시켰다. 당장 말하는 소위 자신도 기뻐할 새가 없는 듯했다. 그만큼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이프리트도 없이 알보병 21명으로 구성된 소대가 철충 40기에 연결체까지 만났는데 적 몰살에 아군 경상 8? 

 

 격렬한 전투 끝에 전원 부상을 입고 적을 격퇴한 소대의 장엄한 전기가, 순식간에 삼류 개그로 바뀌는 위대한 순간이었다

 

아니, 잠깐… 소위, 자네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닌데, , 스토커는 연결체 아닌가? 근접전에 약하다고 해도 소대로는… 그러니까

 

 브라우니 소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 저도 대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압니다. 당장 저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스토커가 맞았습니다. 죽어가던 것도 아니고… 아주 멀쩡한 개체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까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뉘앙스가 달랐다. 전자가 심각하게 부상당한 부하들에 대한 슬픔이라면, 후자는, , , 그러니까… , 젠장, 조까

 

, 저희는 정기 임무에 따라 북서쪽 지역의 탐색 임무를 맡아 나가 있었습니다. 애초에 안전 지역이기도 했고, 그래서 귀환하기 직전까지 적을 발견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위는 잠깐 기억을 떠올리려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였더라

 

, 그렇지. 16:12, 그쯤에 갑자기 사령관 직속 통신이 날아왔습니다.”

 

 마리는 전투 막바지, 급하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나가버린 사령관을 떠올렸다. 그때가… 16:10? 그 정도였는데. 혹시 이것 때문에

 

 이것이 사령관과 연관되었음을 직감한 마리는 침대에 설치된 차폐막을 내려 둘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원래는 그딴 놈 알 게 뭔가였지만 최근 사령관의 동향이 심상치 않던 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들어야겠네만… 자네, 지금 길게 말할 수 있는 상태인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출혈도 다 멈췄고, 이제 최종 수복만 하면 돼서 10분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 힘들겠지만 말해주게.”

 

, 그러니까 16:12에 사령관 직속 통신을 받아 연결했는데… 제가 뭐, 경례고 관등성명 대고 할 새도 없이 바로 명령부터 시작했습니다.”

 

 - 브라우니 018 소위! 잡설 치우고 말하겠다, 아니, 경례 같은 거 빼고 들어! 지금 귀관의 부대는 전멸 위기에 놓였다! 전장에서 후퇴하는 적 부대가 소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부터 내가 명령하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대로 따라라, 아니면 다 죽는다

 

처음에는 뭔 말인지 이해도 못 했습니다. 소대는 안전 지역 탐색을 하고 있었고, 적을 만날 가능성도 없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대답을 바로 못 했는데, 갑자기 사령관이 명령했습니다.”

 

 - 젠장, 명령이다, 전 소대, 현 위치에서 전원 산개해라!

 

생각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명령에 몸이 움직이자마자 매머드의 포격이 떨어졌습니다. 1초만 더 그 자리에 있었으면 전원 으깬 고깃덩이가 됐을 겁니다. 정신이… 확 나더군요. 그리고

 

 마리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소위는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 매머드? 포격이라고?”

 

 소대는 잠시 멍해진 채 그 파괴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지금 왜 포격이? 사령관은 그걸 어떻게 알았고

 

 그렇게 석상 흉내를 내던 소대원들에게 사령관의 고함이 떨어졌다

 

 -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여, 멍청이들아! 북북서 방향, 뛰어! 차탄이 날아온다! 죽고 싶나

 

 소대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력으로 질주했다. 다음 순간 매머드가 쏜 자주포의 차탄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직격하고 무수한 파편을 튀겼다. 정신이 확 든 소대원들의 팔다리에 힘이 팍 들어갔다

 

 - 발을 멈추면 죽는다! 내 명령에 반응하는 게 늦어도 죽는다! 지금부터는 소대원 번호로 명령하겠다, 살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으으아아아, 승리!”

 

 - 1, 전방에 수류탄 던져! 3, 13, 거기에 쏴

 

 소위가 수류탄을 던지고 레프리콘 둘이 기관총을 갈겼다. 은신하고 있다가 수류탄에 총알 세례까지 얻어맞은 슬래셔들이 걸레짝이 돼서 쓰러졌다

 

 - 12, 2, 후방 방호! 그리고 바로 좌로 돌아

 

 칙 스나이퍼의 총알들이 콘크리트 벽에 막혀 흰색 조각들을 튀겼다. 뒤이어 날아든 차탄은 바위 뒤로 돌아간 소대 대신 애꿎은 바위들에 탄흔을 새겼다. 하나는 무려 브라우니 하나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와아아악! 이런 시발!”

 

 - 좋다, 저격은 이제 따돌렸군. 만약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거든 뒤를 돌아보도록! 분명 힘이 날 거다

 

 소위는 더러운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끼며 간신히 뒤를 돌아보았다. 먼지가 자욱했지만, 조준경은 수백 미터 너머의 모습을 잡아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칙에, 테스투도에, 프로스트바이트에 팔랑스에… 거의 40기는 되어 보이는 철충 부대가 그들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었다

 

 조준경을 내팽개친 소위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뛰어라! 마흔 놈이 넘어! 따라잡히면 죽는다! 사령관님, 그렇지만 놈들이 우리보다 더 빠릅니다!”

 

 - 안다, 정면 300m, 협곡으로 그대로 들어가라! 매복 같은 건 – 3, 옆쪽에 갈겨! 없다!

 

 소대는 레프리콘의 기관총 세례에 벌집이 된 슬래셔를 뒤로하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곧 나타난 협곡은 아무리 봐도 무언가 매복, 아니면 대기하고 있을 지형이었지만 이미 그들은 의심이라는 단어를 잊은 지 오래였다. 맹렬히 질주하는 그들의 뒤로 갖가지 기암괴석, 키 작은 관목이며 흙더미 따위가 지나쳤다

 

 과연, 협곡을 절반쯤 지날 때까지 별다른 방해가 없

 

진짜 아무것도 없, 으히익!?”

 

 - 1, 굴러

 

 측면을 스치는 총알에 놀란 레프리콘이 새된 비명을 내뱉었다. 소위는 괴성을 지르며 사령관의 명령을 따라 굴렀다. 머리 위를 가르고 지나간 기관포탄이 돌조각을 마구 튀겼다. 뒤를 돌아본 그녀는 리시버에 입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욕을 내뱉고 말았다

 

! 저 새끼들 존나 빠르잖아!”

 

 - 소위, 입이 생각보다 거치네? 브라우니는 안 그런 줄 알았더니

 

죄송합니다아아아!”

 

 10분여간의 추격전 끝에, 철충 부대는 소대와 100m 정도밖에 거리를 두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전력질주한다고 해도 유효 사거리에 진작 들어온 거리, 사령관이 적시마다 내린 명령과 노움의 콘크리트 장벽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브라우니 - 1002가 비명을 질렀다

 

으으으, 소대장님, 이러다가는 총이 아니라 밟혀서 죽지 말입니다!”

 

 이대로라면 그래도 죽을 판이지만! 또 바닥으로 구른 소위는 리시버에 대고 소리쳤다

 

사령관님, 다 따라잡혔습니다! 콘크리트 폭탄으로도 계속은 못 막습니다!”

 

 사령관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명령을 내렸다

 

 - 거의 다 왔다, 50m , 크고 갈라진 회색 바위다! 2, 12, 콘크리트 폭탄을 하단부에 던져라! 1, 사제폭탄 가지고 있겠지? 아니, 알고 있다, 군법 회의는 넘어갈 테니까! 내 신호에 맞춰서 거기에 던지고 터뜨려라! 꾸물대지 말고 뛰어라, 조금이라도 늦으면 산사태에 휘말린다

 

!? 산사태라고 하셨습니까!?”

 

 - 그래, 산사태다

 

 경악한 소위였지만, 몸은 그에 상관없이 움직였다. 노움들이 던진 콘크리트 장벽이 퍼져 절벽 하단부에 끼어들며, 바위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돌 부스러기들이 마구 떨어졌다. 절벽 곳곳에서 불길한 뇌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발

 

 … 쿠릉… 구궁… 

 

 - , , 하나, 터뜨려! 뛰어! 뛰어

 

 후임 이프리트와 현장 재료로 만들었던 사제폭탄은 훌륭한 위력을 발휘했다. 가뜩이나 콘크리트가 끼어들어 이곳저곳 금이 갔던 무른 바위들은 이어지는 폭발과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충격에 부서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달리던 소위는 무시무시한 포효에 무심코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이런 시발!”

 

 , 콰광, 콰르르르릉

 

 아래쪽이 박살나고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절벽의 위쪽이 따라 떨어지며 좌측 협곡이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수만 톤의 암석이 쏟아지자 따라오던 철충 부대도 경악해 물러나려 했지만, 뒤쪽으로 돌진하는 산사태는 단숨에 수백 미터를 덮어버리며 그대로 그들을 으깨버렸다

 

 문제는 그 산사태가 앞으로도 밀려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위는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으아아아아! 뛰어! 멍청이들아! 더 빨리 뛰어! 뒤에 레드후드라도 있다고 생각해!”

 

저는 마리 대장님을 떠올리면서 뛰고 있지 말입니다!”

 

제기라아아알!”

 

 - 2, 12, 후방에 콘크리트 폭탄! 던져

 

 순간적으로 후방에 펼쳐진 압축 콘크리트가 쏟아지던 파편들을 0.1초 정도 멈칫하게 했다. 소대원들은 그 틈에 바이오로이드 특유의 가공할 지구력과 근력이 한계에 달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뒤에서는 바위의 해일이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따라오고 있었다

 

 콰과과광

 

시발, 시발, 시발, 으아아아아!”

 

 소위는 주마등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정부군이랑 싸우다 코앞에 공군 폭격을 맞고 눈에 흉터 그었을 때, 연합전쟁에서 마리를 암살하러 들어온 리리스 모델과 마주쳐서 맘바에 조준 당했을 때, 철충과 전쟁 중 익스큐셔너를 쏴갈기고 팔이 날아갔을 때. , 괜찮은 인생이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리가 있냐아아아!”

 

 소위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젠장, 여기서 돌에서 깔려 죽기에는 너무 억울한 경력이잖아! 그녀는 근육의 비명을 무시하고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으악!”

 

 와당탕! 바닥에 세 바퀴 반을 구른 소위는 넘어졌나 싶어 한참이나 웃긴 꼴로 땅바닥을 기려 했다. 하지만 곧 뒤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그쳤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소질도 없는 마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 거지꼴이 된 소대원들이 그녀의 옆에서 비슷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녀들은 흙과 바위만 있던 협곡이 아니라 키 큰 풀과 나무들이 깔린 숲 경계에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힘겹게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아직도 산사태의 충격으로 먼지가 자욱한 협곡을 보였다. 이 거리에서도 바위가 굴러내리는 소음이 아련하게 들려오고 땅이 흔들렸다. 세상에, 저길 빠져나왔네

 

 한 브라우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 시발… 이걸 사네. 아자젤이 빛으로 가호하시는 게 분명해… 악마들을 물리치고 빛으로 우리를 가호하소서. 오늘부터 코헤이 신자 하겠습니다.”

 

 리시버에서 푸흡, 하는 숨죽인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령관님? 왜 그러십니까?”

 

 - 아무것도 아니다. 사망자, 부상자 다 없나? 다행이군. 이제 정북 방향으로 쭉 가면 되는데, 문제가 하나 있어서 소대원들이 하나라도 없으면 곤란했다

 

문제라고 하셨습니까?”

 

 - 그래

 

 * * *

 

산사태? 그걸로 산사태를 만들 수 있다고?”

 

 사제폭탄 어쩌고는 쏙 빼놓은 소위는 마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 나중에 노움이 한 말인데, 지반과 바위의 틈새가 가장 약한 곳을 조사하면 콘크리트 폭탄으로 틈을 만들고 약한 폭발로도 큰 규모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다만?”

 

그 조사라는 게, 보통 며칠 걸린다고 했습니다.”

 

 마리는 몇 번이나 지었던 멍청한 표정을 다시 지어야 했다. 아니, 아귀가 안 맞는 소리 아닌가? 며칠이나 조사해야 한다며? 근데 한 번에 알아보고 터뜨렸다며? 뭔 개소리야

 

 고뇌 끝에 생각을 포기한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그래, 됐네.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된 건가?”

 

그래서.”

 

 * * *

 

 - 소대 전원, 내가 내리는 명령을 신뢰할 수 있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위는 표정을 찡그렸다. 여기까지 와서 신뢰하냐 않느냐 하는 것도 웃기는 소리 아닌가? 지금 소대원들은 불길에 뛰어들라면 뛰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넋이 아예 나간 발파 및 건축 전문가, 노움 둘이 특히 그렇게 보였다. 아니,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 물론입니다.”

 

 불행히도 착각이었지만

 

 - 그럼 다행이겠지만, 소위,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다. 이건 정말 사소한 실수만 해도 바로 죽는다. 정말 걸음 한 번만 잘못 떼어도, 말이다

 

?”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오려면 귀관의 소대는 총에 별을 하나 새겨야 한다. 물론… 100마리 잡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어 좀 마음을 놓았던 소대원들은 사령관의 말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사령관이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총에 별. 그건 멸망 전에 스틸라인 보병 사이에서 돌던 킬 마크였다. 철충 하나당 하나씩. 다섯 놈이면 x자에 열 놈이면 꽃. 그리고 별은 철충 일반 개체 100마리 아니면

 

연결체.”

 

 소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연결체. 죽음을 가져오는 사신, AGS보다 강력한 적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괴물이자 철충의 지휘관급. 그들과 몇 번 마주했던 소위는 특히 놈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다. 그 대단한 지휘관 개체들도 실력 좋은 연결체와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익스큐셔너 정도 되면 지휘관도 혼자서는 버거운 수준이었다. 칙 정도는 맨손으로 때려잡고 일반 개체 100으로 별도 새겨본 그녀라지만 연결체를 잡아 새기는 별은 그 무게가 달랐다

 

 전자는 가능했지만. 후자는 자살행위였다

 

 - 스토커다, 정확히는. 그 외에는 전원 여기서 전사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후퇴하는 철충 놈들이 이 지역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스토커는 후방을 경계하며 오기 때문에 주변에도 아무도 없고, 그만 제치면 아군까지는 방해가 없다

 

하지만, 사령관님, 저희는 이프리트도 없습니다. 사제폭탄도 다 썼고… 소대로 어떻게 연결체를.”

 

 - 그래서 묻는 거다. 오면서 내가 신기한 재주를 많이 부렸지? 그걸 믿나? 못 믿어서 주저하면, 그래서 명령에 망설이면 그 순간 죽음이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죽으면 다른 이들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다. 살려면 내가 아무리 미친 소리를 해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나마 이게 가능한 것도, 귀관의 부대가 전원 멸망 전 개체로 구성된 정예라 되는 것이다

 

 - 다시 묻겠다, 소대, 날 믿나?

 

 소위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리시버가 소대 전체 음성으로 틀어져 있던 탓에 다들 사령관의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대답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스토커라면 초장거리 저격을 주특기로 삼는 연결체다. 이처럼 온갖 장애물이 있는 근거리에서는 놈이 제 위력을 다 발휘할 수 없긴 할 터다

 

 하지만 그래도 연결체는 연결체, 한 대만 맞아도 죽는 건 똑같다. 그에 비해 이쪽의 무장은 흠집이나 낼 수 있을지? 발키리처럼 한 발로 시각 센서를 꿰뚫는 정도의 실력이 있지 않다면, 아니, 있더라도, 결과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연결체를 만나 전멸당한 소대, 분대, 심지어 가끔 중대의 이야기까지 있으면 사기 깎아먹기에 딱이었다

 

 소위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온갖 생각이 다 침범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령관이 죽는다고 단언했지만, 어떻게든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런데 방금 보여준 재주를 생각하면 아닐 거 같은데? 그럼 싸워야 해? 스토커의 앞에 소대를 내몰라고? 그것도 자살행위 아닌가? 제기랄, 젠장,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저기, 언니.”

 

 소위는 고개를 돌렸다가 레프리콘 – 6974의 손가락에 뺨을 찔렸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세우는 그 고전적인 장난에 소위의 얼굴에 잠깐 황당함이 깃들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뭔, , 맞다, 얘는 멸망 전부터 자주 이러던 애였지

 

, 넌 이 상황에… 그래, 뭐냐, 음란장병.”

 

 음란장병이라는 말에 소대원들이 잠시 긴장을 잊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리시버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새어나오자 레프리콘의 얼굴이 제 머리카락만큼 붉어졌다

 

, 음란장병이라 부르지 마요! 이씨, 그놈의 일련번호… 아니, ,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다 죽는다는 거 아니에요? 맞습니까, 사령관님?”

 

 - 스토커한테 죽거나, 칙한테 죽거나의 차이겠지

 

그럼, 제기랄, 그 연결체 놈 잘난 상판에 흠집이라도 내보죠. 살면 대박이고, 아니면 뭐, 밑져야 본전이죠.”

 

죽는 게 어떻게 본전이냐? 너 계산 할 줄 모르지.”

 

, 진짜, 적당히 들어요.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영광스러운 제3 탐색부대, 칙이랑 기타 잡것들한테 뒈지다, , 영광스러운 제3 탐색부대, 스토커 대가리에 흠집 내고 존나 장렬히 전사하다. 이건 후자 아닙니까, 솔직히?”

 

 소위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또 틀린 말이 아니라 더 어이가 없었다

 

그 참 좇같은 소린데… 또 엄청나게 개소리는 아닌 것도 같고… , 젠장. 그래, 니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가장 먼저 다른 브라우니 7182이 손을 들었다. 이어서 레프리콘 1577도 고개를 끄덕였다

 

음란병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소대장님. 염병, 이래도 저래도 죽을 거라면 한 번 들이받아 보는 게 맞지 말입니다,”

 

그래요, 음란장병 말이 맞아요. 지금까지 산 것도 기적인데, 한 번만 더 믿어보죠.”

 

 동기와 부하에게 놀림 받은 레프리콘의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음란 아니라고! 음란 빼라고! 새끼들아!”

 

 레프리콘한테 조인트를 까인 둘이 비명을 질렀다. 소위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다른 소대원들도 비슷하게 웃고 있었다. 함 까보죠.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뒈지면 뒈지는 거 아닙니까?

 

그래, 우리가 언제는 뭐, 상대 가려가면서 싸웠나. 닥치고 쑤셔대다 보니까 살아남은 거지.”

 

맞아요, 언니. 원래 죽거나 안 죽거나, 50%에요.”

 

그래서 니가 맨날 레드후드도 씹고 농땡이를 피웠지, 50 대 50이라면서?”

 

씨잉. 그거 말하지 마요.”

 

하하하, 그래, 소대 전원, 음란장병 말대로 간다! 함 박아보자! 사령관님, 명령하십시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으아아악,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레프리콘을 뒤로한 소위가 말했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유쾌한 듯한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좋군. 아까도 말했지만, 부디 주저하지 말길 바란다. 아마 1초만 늦으면 바로 특진하게 될 테니까. 임관하고 싶어도 좀 참도록. , 내가 셋을 세면 양옆으로 갈라진다. , , 하나

 

 소대는 좌우로 몸을 던졌다. 시퍼런 벼락이 날아오며 줄줄이 늘어선 나무를 꿰뚫고 소대가 있던 자리의 공기를 터뜨렸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여 전류가 매캐한 냄새를 피웠다. 깔끔하게 날아간 숲 사이로 3m도 넘어 보이는 거대한 강철 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이는 눈동자들은 섬뜩한 적색이었고, 왼손에 장착된 레일건은 주위의 대기에 방전해 시야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죽음이 인세의 물질을 입고 나타난 형상이었다. 소위는 위압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스토커 출현!”

 

 - 다시 쏜다, 3, 17, 21, 숙여!

 

으아아악!”

 

 소대원들의 머리 위로 차탄이 지나갔다. 음란장병 - 레프리콘은 피부가 녹는 듯한 열기에 비명을 질렀지만, 곧바로 일어나 다시 굴러야 했다. 이미 사령관은 쉬지 않고 명령을 던지고 있었고, 소대원들은 그야말로 반사적으로 명령에 따라 구르고 뛰고 엎어지고 쐈다

 

 - 1, 13, 7, 수류탄 던져! 2, 전면에 방벽! 돌진한다! 3, 거리 벌려! 팔이 닿는다! 19, 17, 16, ! 등의 중앙, 세 번째 틈새에 점사! 1, 굴러! 2, 콘크리트, 4, 수류탄

 

 돌격하려다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 스토커의 눈앞에서 세열수류탄이 폭발했다. 좁은 공간에서 터진 폭발에 왼쪽 시각 센서가 순간적으로 나간 그는 비틀거리다가 이어지는 연계에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사령관의 명령은 멈추지 않았다. 리시버를 통해 거의 신들린 것처럼 끊임없이 지시가 내려왔다

 

 - 3, 5, 13, 15, ! 15, 뒤로 굴러! 2, 거리 별려! 12, 사이에 콘크리트! 6, 7, 아래에 수류탄 굴려! 14, 레일건에 전자기 수류탄! 20, 쏴라! 16

 

 돌진해 적들을 깔아뭉개려다 수류탄에 발이 막혀 넘어진 스토커의 위로 맹렬한 일제사격이 다시 쏟아졌다. 꼬리와 팔로 가까운 적들을 잡아채려 해도 귀신같이 피해냈다. 하다못해 레일건을 겨누고 쏘지 않는 식으로 심리전까지 걸었지만, 그마저 모조리 간파당했다

 

 - 가짜 공격! 3, 굴러! 다시 가짜! 가짜! 13, 옆으로 피해! 4, 5, 19, 수류탄 던져! 2, 지면에 방벽! 21, 오른팔에 전자기 수류탄! 가짜

 

 공격이 번번이 막히자 스토커가 금속성으로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방향을 급격히 돌리거나 공격에 페인트를 넣는 등 별의별 짓을 다 했지만, 소대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은 채 그를 돌려가며 깎고 있었다

 

 미리 패턴을 알려주는 게임 속 보스몹도 이런 식으로 공격이 피해지면 재설계하라고 항의가 들어올 것이다

 

[크으으아아아!]

 

 점점 승산이 보이는 듯한 모습에 소대원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보였다

 

 - … 엎드려! 후면, 전탄 발사! 전면, 다 뒤로 굴러! 놈의 뒤에 있으면 저 틈새를 계속 점사해라! 4, 왼쪽 바위 뒤로! 2, 12, 전면에 방벽

 

 하지만 소위는 냉철하게 상황을 살폈다. 놈을 10분째 거의 밀어붙이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소대가 탄의 반 이상을 쓴 지금 스토커는 장갑에 흠집이 좀 난 것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소대는 스치기만 하는데도 점점 너덜너덜해지는 상태였다

 

크윽!”

 

 스토커의 꼬리에 스친 소위는 갈비뼈가 두셋 나간 듯한 통증을 느꼈다. 노움 – 032는 어깻죽지가 시커멓게 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소대원 중 절반은 뼈가 부러졌고, 3도 화상을 입지 않은 소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움직임이 꽤나 느려진 채였는데 스토커는 아직도 팔팔했다, 설상가상, 표시기가 탄창이 둘 남았음을 알려왔다

 

 제기랄. 이거, 되는 거 맞아

 

사령관님, 두 탄창 남았습니다! 이대로라면 놈의 장갑을 뚫기 전에 탄이 떨어질 겁니다!”

 

 -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이다! 뛰어올라

 

 소위는 욕설을 내뱉으며 전력으로 바닥을 박찼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레일건 때문에 다리가 화끈거렸다. 젠장, 이거 몇 도 화상이려나. 그녀는 악을 쓰며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사령관이 말한 틈새에 전 소대가 몇 분째 총을 갈기고 있었지만, 거기에도 좀 깊은 흠집 정도 난 게 다였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지? 사령관은 뭘 하려는 거지?

 

 그렇게 총알이 마지막 탄창을 비우기 시작하고, 슬슬 소대원들이 지쳐가며 불안감이 스며들 때 즈음이었다. 갑자기 사령관이 소리쳤다

 

 - 이제 됐다, 소위, 준비해라. 전자기 수류탄이 하나 남았지? 그걸 꺼내도록

 

? 날벼락은 다 썼는… 아니, 아니었습니다. 하나 남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오른팔 정도 내줄 각오는 되었나

 

? ! 물론입니다!”

 

 소위는 머리 오른쪽 위를 스치는 광선에 이를 악물며 고함을 질렀다. 젠장, 고막 나갔는데? 더럽게 뜨겁네 진짜. 하지만 사령관이 갑자기 고함을 질러 명령을 내린 덕에 듣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 스토커가 차탄을 쏘려는 순간, 등의 세 번째 틈새에 흠집을 노려라! 정확하게 흠집을 덮도록 맞아야 한다, 그리고 두 번은 없다, 던지는 순간 오른팔이 날아갈 텐데, 저놈의 공격을 피하면 수류탄도 빗나갈 거다! 위안이라면 말인데, 안 죽을 거다!

 

 우와. 소위는 그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실감하며 이를 꽉 악물었다. 멸망 전에 가스공장에서 불붙이고 튀기, 폭발 직전의 수류탄 해체하고 부하 구하기, 별의별 미친 짓을 해 본 그녀에게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다, 쪽박인지 아닌지는 이제 까보는 것만 남았다. 그녀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 고함을 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으아아아아!”

 

 - 던져!

 

 소위는 근육이 한껏 긴장하는 것을 느끼며 수류탄을 던졌다. 극도의 집중 속에서, 불빛을 깜빡이는 구체가 날아가는 것이 느릿하게 보였다. 멸망 전 용사라는 칭호는 포커로 딴 게 아니란 말씀이야, 아주 정확한 궤도로 날아간 수류탄이 그대로 틈새에 난 깊이 10cm의 흠집에 딱 맞아떨어졌다

 

됐다, 그럼, 시발 - ’

 

 소위는 이어질 고통에 이를 꽉 악물며 전력으로 몸을 비틀었다. 스토커의 레일건이 번뜩임과 동시에 팔이 빛줄기에 삼켜지며 피부, 근육, 뼈 순으로 모조리 증발했다. 앙다문 그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었다. 막대한 운동에너지에 치인 몸이 소대원들 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크으으으윽!”

 

언니!”

 

 그리고 그 순간 스토커의 등 틈새에 달라붙은 수류탄이 터졌다

 

 - 2, 12, 방벽 전방에 다 던져!

 

 노움들이 남은 콘크리트 폭탄을 모조리 전방에 집어 던졌다. 반 박자 늦게 엄청난 섬광이 번뜩였다

 

 스토커의 배면 장갑과 설비는 동력로를 짊어진 만큼, 대부분의 충격을 무시하도록 단단한 구조로 설계되었다. 그 덕에 지금까지 소대가 쏴댄 탄도 그 외벽을 벗기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그 위치는 가장 많은 에너지 줄기가 동시에 지나는 교차로의 위쪽이었고, 내내 공격을 받아내 10cm나 깎인 장갑의 두께는 몹시도 아슬아슬했다 – 

 

 정확히 달라붙어 터진다면, 수류탄의 전자기장이 파고들어 교차한 회로에 연쇄반응을 주는 것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콰콰콰쾅!

 

 둠브링어의 폭격이라도 떨어진 듯한 굉음과 섬광이 콘크리트 벽 너머로 뿜어졌다. 소대원들은 깜짝 놀라 귀를 틀어막았다. 팔이 날아가 귀도 틀어막지 못한 소위는 격심한 고통과 이명에 오만상을 써야 했다. 반고리관을 다쳤는지 세상이 빙글 돌았다

 

, 시발. 한쪽이라도 막을걸.’

 

 의식이 널뛰기하듯 기절과 혼절의 사이를 오갔다. 소위는 최대한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성공했나? 성공한 건가?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빨간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간신히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황급히 달려온 레프리콘 – 6974가 급속 안정제를 주사하자 천천히 감각이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 - ! -! - 언니! 괜찮아요? 말 좀 해봐요! 언니, 제발!”

 

 소위는 끙끙대며 눈을 떴다. 물속에 든 것처럼 주위의 소리가 온통 멍멍하게만 들렸다. 지면을 탄 충격파에 얻어맞은 온몸은 말할 것도 없이 쑤셔댔다. 내장 상했다, 우욱. 시발, 그래도 살았네

 

. .”

 

언니! 괜찮아요! , 살았으면 말을 하란 말이야! 괜찮아요?”

 

 어쩌라는 거니, 음란아. 걱정하거나 욕을 하거나 하나만 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목도 죽을 만큼 쑤셨다. 소위는 힘겹게 띄엄띄엄 말을 흘렸다

 

, 시발, 존나게 아파. 좀 잡아줘. 못 일어나겠어. 으윽! 스토커 새끼는… 어떻게 됐냐?”

 

. . 저기.”

 

 스토커 얘기가 나오자 레프리콘은 상당히 멍한 얼굴로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비틀대면서도 자리에 앉은 소위는 거의 녹아내린 콘크리트 벽 뒤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고통을 잊고 순수한 허탈함의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

 

 모조리 녹아내려 유리 바다처럼 된 바닥 한가운데, 검게 그을린 각종 잔해가 있었다. 완전히 박살이 나서 원형을 알아보기도 어려운 금속 파편들, 녹아내린 전자 부품들과 흐물흐물해진 레일건의 잔해. 그것만으로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기 힘들었지만

 

 생선 대가리 뽑히듯 뽑힌 스토커의 머리가 녹아내린 웅덩이 가장 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스토커를 때려잡았다는 증거였다. 고작 소대가, 중화기도 없이, 철충의 연결체인 스토커를

 

 잡았다. 정말로

 

 모조리 넋을 잃은 소대 사이에서, 소위는 간신히 한 마디나마 내뱉을 수 있었다

 

별 새겨야겠네?”

 

 그리고 기절했다

 

 * * *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마리의 얼굴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상태였다. 헛웃음과 경악 사이의 무언가 정도. 말하며 그 기억을 돌이켜보는 브라우니의 표정도 사실 그 비슷했다

 

사실 정말 죽을 줄 알았습니다… 스토커도 스토커지만, 철충이 한 200마리도 넘게 우글거리는 것 같던데, 그걸 살아나오다니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소위는 그렇게 말하며 애써 헤실헤실 웃었다. 하지만 마리는 차마 따라 웃어줄 수가 없는지, 고개를 저으며 더듬더듬 그녀의 말을 수정했다

 

소위… 거길 지나간 철충 잔여 병력은 200이 아니야.”

 

?”

 

놈들이 그 지역 전체에 방해 전파를 펼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전장에서 빠져나간 패잔병은 싹 거기로 갔었네. 반파된 놈들을 빼고도 2000이 넘어. 연결체도 열이나 남았고, 그중에는 네스트도 있었지.”

 

 소위의 표정이 멍해졌다

 

잘모씀다?”

 

자네들이 빠져나온 지역에 있던 철충은 200이 아니라, 2000이네. 그것도 멀쩡한 놈들만.”

 

 자신들이 헤쳐나온 지옥도의 실상을 깨달은 소위의 안색이 마리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도저히 제대로 된 말을 만들 수가 없는지 한참이나 어버버, 입을 뻐끔거렸다

 

. . 그니까, 2000, 이라고 하셨습니까? 2000?”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말하고도 참 어이가 없었다

 

자네들은 철충 2000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20명의 소대로 철충 40기와 스토커를 격파하면서, 사망자 0으로 무사히 귀환했다는 말이네.”

 

.”

 

.” 

 

 둘은 멍하니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비현실적. 아니, 초현실적인 결과였다. 둘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한참을 침묵해야 했다

 

멸망 전에 전투란 전투는 다 참여했지만,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마리 대장님은 어떠십니까?”

 

알바트로스와 함께 전투에 참여한 적은 몇 번 있었네만 그도 이렇게는 하지 못하더군.”

 

아니, 매머드의 포격 위치라든가, 2000마리 사이에서 방향 잡기까지는 어떻게 넘어간다 쳐도… 대장님, 사령관쯤 되면 어떻게 해야 산사태가 나고 스토커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알 수 있는 겁니까?”

 

 마리는 브라우니 소위의 말에 허허롭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 하지만 그녀도 어제 두 번, 오늘 세 번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그런 기행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그녀는 대략 생각나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좌표 13, 14, 22에 발사. 아니, 아무것도 없지 않다. 광학미채를 사용한 매복이다.’

 

‘12소대 전원, 후방으로 산개! 매머드가 포격한다!’

 

비스트헌터, 좌표 12, 15, 지면에 발사하라! 슬래셔 부대가 접근한다! 차탄 발사, 좌표는 17, 22! 이번에도 지면이다!’

 

에이다, 다시 탐색하라. 그 지역에 있는 건 본 부대가 아니라 미끼다. 본대는 17km 떨어진 협곡에 있을 텐데.’

 

3함대, 북북서 방향 해상에서 적이 온다. 구성은 레이더 6, 스펙터 24, 라이트닝 봄버 12. 현재 거리는 900km, 10분 23초 후에 도착한다. 모든 무장을 대공 상태로 전환하라. 기함 기준, 2번째, 3번째로 가깝게 관측되는 레이더 개체는 폭격용 무장을 갖추었다. 먼저 격추하라!’

 

스토커다! , 엎드려라! 방금 보낸 좌표에 각각 하나씩 있다! 캐노니어, 내가 보낸 각도로 포격하라! 아니, 적 스펙터가 방해할 것이다. 이렇게 쏴야 직격한다!’

 

 황당하긴 매한가지였다

 

.”

 

 5전 5승 무패. 투입 인원은 항상 다섯 자리인데 사망자 총합 17. 중상자 51. 적의 기습 또는 매복이 성공한 횟수는 0. 아군의 공세가 실패한 것도 0

 

 그건 갑자기 웬 착한 짓이냐고 비웃던 이들이 할 말을 잃는 엄청난 성과였다. 사령관이 요즘 대원들을 아끼는 척한다면서요? … 근데 이게 그런 을 할 수 있는 건가? 그니까, 이런 걸 연기할 수 있는 거라고? 원래의 사령관도 천재적인 전략가였지만, 지금은 뭐라 부를 말도 없을 정도였다

 

대장님, 애들이 요즘 그럽니다. 사령관이 연기하는 게 맞냐고. 이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냐고. 저도 대답을 못 하겠습니다.”

 

 소위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장님, 우리는 대체 뭐의 지휘를 받는 겁니까?”

 

 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P.S. 

 

 전투가 끝난 대지에 달빛이 비쳤다. 사령관은 그 위를 걷고 있었다. 아직 전투가 끝나고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아, 전장은 참혹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참혹함.

 

 그것은 다른 대원들은 공감할 수 없을 참혹함이었다. 그곳에 있는 건 시체가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대원들에게는, 그건 부서진 쇳덩어리 잔해에 불과했으니까. 그들을 시체로 보는 것은 사령관이 유일했다

 

 영혼을 보는 그만이,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사령관은 다 부서진 네스트의 거체에 손을 대었다. 곳곳이 부서지고 갈라져 만신창이가 된 시체는 원형을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사령관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것을 확신한 그는 부하들을 위해 모든 포격을 자신에게 유도했다. 영혼과 연결된 강철의 육신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역장을 펼쳐 부하들의 방패를 자처했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 역장의 위치를 계산해, 포격의 절반이 그 숭고한 희생을 지나쳐 후방의 패잔병을 치도록 했다

 

 네스트… 추기경 레자키는 마지막 순간 지독한 허무함과 비애를 느끼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철의 교회를 이끄는 성직자, 신자들이 지은 수많은 살생의 업을 대신 짊어진 자로서 즉시 9층 밑바닥의 지옥에 떨어졌다

 

 오르카 호의 대원들은 7명의 사망에 슬퍼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뻐할 수 있었다. 희망이 보임에, 초현실적인 교환비에. 그래서 죽은 7명도 기쁜 마음으로 떠났다

 

 사령관은 그 기쁨에 함께할 수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느꼈다. 완벽한 전황에 환호하는 저항군의 희열,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불가능한 파멸의 기적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신자들의 고통. 그는 그들의 기발한 수를 차단하고, 가장 정교하며 공들인 전략을 깨부수고, 동료와 부하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한 발버둥과 목숨을 건 최후의 발악마저 짓눌렀다

 

 상대의 생각을 읽고 수만의 고민을 나누어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그에게는 손쉬울 뿐이었다

 

 7명 사망, 23명 중상. 사령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4721 사망, 912 중상. 그들은 마지막 순간 가장 끔찍한 감정을 느끼며 죽었다. 그 중에도 일흔다섯의 성직자들은, 그들이 지닌 숭고한 뜻에도 오로지 절망하며 지옥으로 향했다

 

 옳은가

 

 그것이 옳은가? 나는 그들의 뜻, 최후의 보루, 그들이 지키려는 마지막 씨앗마저 파괴할 셈인가?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일 테지, 그렇다면 손바닥을 뒤집어 그들에게 절망을 선고하겠는가

 

 

 

 

 

 아니

 

 한참이나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령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상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그는 저 멀리, 철의 탑에 거하는 교황과 그의 친위대, 추기경과 주교들을 볼 수 있었다. 죄를 지어 검게 된 그들의 영혼은 역설적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죄를 지은 자들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 천사의 과오로 동족과 몸마저 잃은 어린 양들이자신자들이 지은 죄를 모조리 덮어쓴 성인이기도 했다

 

 그는 확신했다. 성인을 벌해도 성인의 뜻을 벌할 수는 없었다

 

그래, 너희의 희생까지 무의미한 것으로 묻어버릴 수는 없겠지.”

 

 며칠째 해오던 고뇌에 드디어 답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사령관은 철의 탑에 있는 자신의 벗을 떠올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위베르. 나는 너희를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죄악을 벌하는 악마들의 군주이고, 또한 이 아이들에게 책임을 져야 할 자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일백억의 목숨을 해한 너희들의 죄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니 난 너희 모두를 지옥으로 인도해야 한다.”

 

하지만.”

 

 죄를 지은 건 너희이기에. 다른 이들은… 그리고 아이들은… 아니기에

 

너희의 고결한 뜻을 저버리지는 않겠다. 너희가 대신 죄를 짊어진 신자들은 지옥을 밟지 않을 것을 약조한다. 그리고 너희의 마지막 기원도…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겠다. 진명을 걸고, 맹세한다.”

 

그게 내가 벗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약속이다.”

 

 말을 마친 사령관은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걸은 채, 그는 순식간에 그림자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일곱 번째 승리의 밤이 저물고 있었다

 

-----------------------------

 

5화가 되었다. 4편은 생전 해본 적이 없는 내면묘사를 하느라 아주 죽을 뻔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거 없어서 편하게 쓸 수 있었음. PS로 떡밥 던질 여유도 생기고 좋더라

 

 악령관의 능력은 라오 스토리 읽으면서 어 시발 이정도는 되야 사망자 0명 아닐까싶은 걸 묘사했음. 대충 스x크래프트 하면서 유닛 200개 분할해서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정도

 

 이번화, 다음화는 스토리 진행상 화자를 브라우니/로크로 고정해야 했음. 죄송합다... 따라서 댓글 보고 룰렛 돌리는 건 7화부터 다시 시작함. 봇박이 여러분은 기뻐하십쇼. 최.강.지.휘.관. 도 나옵니다. WA!

 

 읽어주셔서 라스트 감사. 라오챈은 역시 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