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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의 무게, 생명의 무게 : 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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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이 좋단말이야, 저 둘'


메이도 나이트앤젤을 아끼고, 나이트앤젤도 겉으로는 놀리면서 그녀를 존경한다. 부러운 관계다.

'아~ 나도 메이한테 따금하게 한 마디 했어야 하는데'


함장 실로 돌아와, 일상 업무에 돌입 한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비상 사태라도 일은 일이다. 게을리 해서야 오르카호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 때였다.


'닥터?'


함장 실 밖에서 그녀가 면회 요청을 하고있었다. 분명 메이가 전해준 자료로 백신 연구에 몰두해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개실 버튼을 눌렀다.


"응 닥터 무슨일...닥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는 그녀가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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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치료를 받은 대원이 기억을 잃기 전의 본인과 연관성이 짙은 장소나 물건 따위에 접하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한다.

기억을 완전히 소거하는 기술이 아닌 기억을 봉하는 기술이므로, 사소한 자극으로도 기억이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 치료 주의사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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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아아악! 싫어... 싫어싫어싫어! 아파...아파요...! 제발... 그러지마...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었다.


"살려..살려줘...죽고싶지..."

죽었다.


죽었고 또 죽었다. 내가 만들었고 그들이 죽였다. 아니, 내가 죽인 것이기도 하다.


"실패군, 내구성이 너무 약했나"


"오리진더스트도 만능이 아니군요. 실험 내용의 전반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임"


"투약량을 조금 낮춰보지. 실전에서 그렇게 많은 양은 필요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옆에서 두 남자에겐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태연하게 말을 주고받는다.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비명을 지르던 바이오로이드가 죽었다.


"다음"


그렇게 사형선고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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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만든 B-05-모르모트말일세. 재생 능력을 올린 건 좋았지만 내구성이 너무 약해. IB-07의 보균체가 되기엔 부족한 것 같더군"

틀렸다.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내 생각과 몸은 항상 따로 놀았다. 인간놈들이 내 몸에, 정신에 걸어놓은 지독한 저주. 복종 코드 때문에.


"이렇게 실적을 내지 못해서야 총수께 계속해서 연구자금을 부탁드리기도 힘들지. 연구 방향성 자체를 재검토 해야겠어"

"협력하겠습니다"


방향성 재검토. 거기에 나는 아무런 희망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추악한 형태가 되지 않을지 걱정만 앞섰다.


"고맙네 닥터, 자네의 천재성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감사합니다"

역겹다. 토나온다. 당장이라도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지만 내 몸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바라던 바라지 않던 내 몸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주임의 개인 집무실을 뒤로했다.


나는 닥터-02. 전 세계에 11기밖에 없는 닥터 중 두 번째로 생산 된 개체이며, 현재 삼안산업의 한 연구실에 소속 돼있다.

이 연구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연구는 앞서 들린 비명소리처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인륜의 극치, 그 자체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 통칭 철충.

내가 이 연구실로 발령이 나기 이전부터 이 끔찍한 생물을 활용한 실험은 여러차례 자행되었다.

지금과 같은 바이오로이드 실험은 당연지사, 사탕발림으로 구슬려 협력을 얻은 인간들에게 까지도.


기록을 살펴본 결과, 인간들에게 가해진 실험도 잔인함을 헤아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철충의 바이러스. 독성과도 같은 물질을 인간에게 직접 투여, 인간들은 하루도 채 버티지 못하고 마치 방사선에 피폭되 듯 죽음을 맞이했다는 실험 결과가 있었다.

실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투약량을 점차 줄여가며 경과를 보는 것, 성별, 나이, 체형, 근육량, 지방량 등 모든 조건에서의 실험이 진행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도중, 사람의 맨몸은 철충 바이러스를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고, 실험의 노선을 틀게 된다.

신체 부위의 대부분을 전자 회로로 바꾸는 시술. 즉, 기계인간 시술로 몸을 강화 한 인간들을 대상으로 하는 철충 바이러스 실험.

짧게도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등으로 피실험자가 버티는 기간이 길어졌지만, 그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여러 조건에서 실험이 행해졌으며, 기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철충 바이러스를 활용하여,

맨살에 직접적인 투약이 아닌 기계를 통한 간접 감염으로 징후를 지켜보기에 이른다. 그 결과, 동일하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성공적이게 신체의 주요 장기들이 안정기에 접어든 피실험자가 있었다.

실험자 no.531.


실험의 당초 목적이었던 상용화는 불가능함이 확실시 된 상황에서, 철충 바이러스가 531의 세포에 침투하며 일으킨 변화를 중점으로 실험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블랙 리리스 모델과 소완 모델을 구상 단계에서 상용화까지 주도했던 내가 눈에 들었고, 이 연구실로 발령 나기에 이른다.


연구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연구 도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도시 곳곳의 지하에서 비밀리에 수 많은 실험이 이뤄지고 있었고, 나는 그 중 중심부에 해당하는 삼안팰리스 지하 7층 연구실에 배속되었다.

또한, 이 연구실에 속해있는 닥터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또 한 명의 닥터가 보조겸 이곳에 있었으며, 한정생산 된 닥터가 두 기나 배속된 걸 보면 삼안산업이 이 실험에 들이는 예산의 규모가 예상이 갔다.


"저번주보다 얼굴이 더 심해졌는데? 괜찮냐?"


"...531, 팔을 이쪽으로"


감염부의 추출은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다. 오리진더스트 조율 및 생산만으로 24시간이 부족한 지경임에도 내가 직접 나서서 진행해야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양을 추출해 내게 되면 피실험자의 내부 신경을 건드려, 해당 신체 부위를 결손 할 위험이 있으며, 그렇다고 너무 적은 양을 들어내면 바이러스를 추출 해 내기 전에 조직세포들이 괴사 할 위험이 있다.

정해진 부위를 정해진 양만큼. 정확하게 덜어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윽...몇 번을 해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반대쪽 팔을 부탁드립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말을 그에게 건냈다. 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피차 기업의 도구가 되어 시계 속 태엽처럼 굴러가기만 하는 존재.

하지만 그가 인간이라는 점이, 내가 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막았다.


"그런데 이 철충 바이러스란 건 좀 도움이 되고 있어?"


"...네?"


반대쪽 팔 추출 작업을 실행하던 내 손이 멈춘다. 도움이 되고 있냐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이 남자는.

본인의 몸에 들끓는 지독한 바이러스가 탄환이 되어 많은 생명, 바이오로이드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순박한 사람의 눈이었다.

부아가 치밀었다.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했던가? 지금의 나에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마음 속에 치밀어 오르면서도 억누를 수 밖에 없었던 감정을 부딪힐 곳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도움이...되고 있냐고요?"

내 눈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본 남자의 눈동자가 헤매인다.


"아아, 네 도움 되고있죠. 엄청나게 말이예요. 연구진들이 말 안 하던가요?"

원칙적으로 연구원들이 피실험자 및 피실험체들과 말을 섞는 것은 금지다. 이를 어겨 문제가 발생할 시 일반 연구원의 경우 퇴사조치를 빙자한 죽음.

나같은 바이오로이드라면, 최소 폐기처분이겠지. 굳이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므로, 바이오로이드인 나에게도 별도로 이에 관한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나 또한, 실험에 관한 혐오감이 마음을 지배하면서도 531에게 실험에 관한 내용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던 것은, 굳이 그에게 알려봐야 바뀌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작은 분명 자신이 간접적으로 많은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바라는 배려였지만, 이미 그런 배려심은 잊혀진지 오래다.


나는 그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당신이 지닌 추악한 바이러스 덕분에 어제도 오늘도 지금 이 순간조차 수십 수백 바이오로이드들의 단말마가 끊이질 않고 있어요! 아, 하하 당신은 들어본적도 없죠?"


"뭐...라고..."


그의 눈이 경악에 물든다.


"분명...바이오로이드들의 전투력 증진이 목적이라고...내 몸에서 변환된 바이러스는...유해 하지 않..다고..."


"순진하네요. 멍청하고요. 기업이 입에 담는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순진함을 가장한 어리석음 그 자체예요"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았다. 마음 한 구석에 동정심이 생겨난다. 이성이 나의 다음 말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도 피해자라고.

하지만 이미 이성따위 버린지 오래다. 죽는 것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채, 간접적으로 죽인 그녀들의 비명소리만을 들어가는 나날. 제정신따위 유지할 수 있을리가 없다.


"당신만! 당신만 아니었으면!"

너마저 실험에 실패했으면,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엉망진창이다. 궤변이란 표현조차 아까운 망언이다. 상대의 죽음을 전제로 까는 지독한 폭언이다.

스스로도 알고있다. 망가져있다는 걸 자각한다.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뒤 문이 열렸다.

"큰 소리가 돌렸는데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닥터02"

방음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세어 나갈정도로 소리지르고 있었나보다.

바이오로이드따위가 인간에게 큰 소리를 낸 거다. 아마 그도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한 나를 고발하려 하겠지.


"아하하, 오늘따라 내가 엄살이 심했나봐~ 신경 쓰지마"


"...네?"


"그렇습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531."


"어잉 너도 수고해"


"...무슨 속셈이신가요"


약점이라도 잡아서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건가?


"...속셈? 그런 건 없어...단지..."

그를 경계하면서 바라본다. 무언으로 다음 말을 재촉한다.


"나도...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해. 오늘 추출은 대강 끝났지?"

어차피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며 폭언을 퍼부은 이상 내 목숨줄은 그에게 달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걱정마. 나한테 말했다는 거, 아무도 알면 안 되는 거지?"


"...당신은 도대체"


"마음같아선 당장이라도 막고싶어. 하지만"


"네?"

막고싶다고? 무엇을? 설마...


"상대는 김지석이야. 그러니까"


다리쪽은 미처 추출하지 못했는데도 일어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도 평소와 다르게 다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정도로 혼란해있는 것 같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주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만을 남겨둔 채 그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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