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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조동아리는 왜 사령관 앞에만 있으면 아무말을 참지를 못하는가, 혹시 수복실이 문제인가 같은 아찔함도 잠깐 들었지만 내뱉은 말은 내뱉은 말이지.

저번처럼 변명할 건덕지도 없는데다가 정신적으로도 훨씬 몰려있던 리제는 차라리 좀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해.

이왕 지껄인 거 반응이나 보자고.

뜬금없이 함 뜨자는 소리를 들은 건데 과연 극혐하는 표정으로 멀어질지, 아니면 차려진 밥상에 좋다고 뛰어들지.

그런데 사령관은 오히려 진지한 표정으로 리제를 바라보면서 말했어.


몸뿐이 아니라 마음까지 있는 건 싫으냐고.


*   *   *


좌우좌에게 리제는 단순한 동료 이상의 존재였음.

기나긴 고독 끝에 자신을 찾아와, 서로를 의지하며 다시 시간을 보내고, 저항군에 합류한 후에도 항상 가깝게 지냈으니까.

그리고 그러는 동안 계속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줬으니까.

언니, 혹은 어머니처럼 여기고 있다고 해도 좋았어.

"리제답지 않은" 행동을 저항군 동료들이 걱정하던 것도 뭐 어떠랴 싶었음.

아니, 오히려 지금의 리제를 아픈 개체 취급하는 것에 대한 반항심리가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을 만나고, 명백하게 바뀌어가는 리제를 보면서 내심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어.

자신에게도 완강히 옛 주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던, 상냥하면서도 어딘가 허무해 보이던 모습과

갑자기 전투에 나서고, 그러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으며 철충을 찢어발기던 모습을 본다면.


다른 동료들은 스토커 퇴치때의 중파 이후로 리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판단했고

이번 일도 굳이 따지자면 프레데터가 위험했던 것이지 리제가 무모하게 나선 것은 아니니까 단순하게 건강에 대한 걱정만 했을 뿐이지만 좌우좌의 불안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어.

단순히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정도가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삶에 애착을 보여줬으면, 그래서 계속 함께 있어줬으면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임에 분명한 사령관에게 - 리제가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콘스탄챠가 제시했던 옛 주인에 대한 가설을 숨김없이 털어놓기로 했던 거야.


*   *   *


마음까지 있는 것이 싫은가.

그 말을 들은 리제는 한참을 - 실제로는 십수 초 남짓이었지만 - 멍때리면서 사령관을 바라봐.

그렇게 안 넘어가는 음식을 억지로 삼키듯이 문장을 이해한 다음의 반응은 - 그야말로 폭발하듯이 온 몸에 차오르는 열기였음.

아마 분노겠지. 틀림없이 그럴 거야.

사령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어서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잡아누르면서, 억눌린 목소리로 쥐어짜듯 질문을 던지는 것에 성공함.


'어째서.'


정말 많은 말이 담긴 그 말에, 사령관은 난처하게 웃으면서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말해.

그리고 다시 질문하지. 아직 네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 알려달라고.

리제 입장에선 기가 막힐 소리였지. 마음이라니.


싫으냐 좋으냐가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소리라는 리제의 대답에도 사령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나가.

나는 네가 마음까지 내주기 전에는 몸을 겹치지 않겠다. 굳이 너뿐만이 아니라 누구라고 해도.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육체관계 이야기에 사랑 따위를 운운하다니 무슨 첫 야스에 환상 가진 꿈많은 아다인가?

까지 생각하다보니 또 깨닫게 되는 게 있었지.

아차, 지금 사령관은 아다가 맞구나.


아무튼 진퇴양난도 이런 진퇴양난이 없었어.

그냥 아무말로 욕망 한 번 꺼내봤더니 뜬금없이 오르카 호 전체의 야스 라이프가 자기 손에 달려버린 상황이 되어버린 거니까.

모두를 위해서라도 차라리 거짓말로 사랑한다고 해볼까 생각을 해도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양보하기는 싫었달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게임 오버일 것 같은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있었지.


결국 처음의 진지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유치찬란한 설전이 시작되어버림.

나는 그렇다손 쳐도 다른 바이오로이드랑은 무슨 상관이냐. → 딱히 상관있고 없고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은 거다.

제발 그런 무의미한 고집좀 집어치워라. → 고집 부리는 건 리제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혹시 특이한 도착증이라도 있는가 → 오히려 몸만을 원한다는 리제의 바람이 더 문란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옥신각신한 끝에 뭔가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져버림.


리제가 사령관을 꼬셔서 고백 없이 야스를 하게 만들면 리제의 승리.

사령관이 리제를 꼬셔서 리제가 고백을 하고 야스를 하게 만들면 사령관의 승리.


마침 리제 본인 입으로 꺼낸 이야기(마리가 왔으니 굳이 자기가 나설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도 있겠다,

공정한 승부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한동안은 전장이 아니라 옆에서 보좌를 할 것.


그렇게 리제는 생각지도 않던 부관 자리에 앉아버리게 돼.


모로 가도 결론이 야스라는 사실은 둘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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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가 여기까지가 프롤로그인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1900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