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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화 [24화]



 

멸망 전, 블랙리버는 모든 기술력을 동원해서라도 삼안의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을 능가하는 바이오로이드를 만들고 싶어했다. 애석하게도 삼안의 오리진 더스트의 응용력은 블랙리버보다 몇 수는 앞서 있었기에 그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이 축적된 전투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든 지휘 모듈을 장착한 한 바이오로이드는 라비아타와 다른 면에서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참여하는 전투마다 항상 승리를 안겨 준 그녀에게 인간들이 ‘무적’이라는 별명과 ‘용’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 빼어난 지휘 능력 덕분이었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력인 만큼 그녀는 인간의 명령에 항명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져 있어 자신의 의지와 어긋나는 명령은 전부 무시했다. 이 항명은 본래 자신의 주인이었던 앙헬은 물론이고 임시 주인이었던 김지석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녀의 주인이 된 적이 있었던 이들은 모두 역설적이게도 인간임에도 인간적인 면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몸으로 깨닫고 있었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들에게는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들은 교활했고, 가식을 떨었으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체스판 위의 말처럼 눈 하나 깜짝 않고 희생시킬 수 있는, 아니 버릴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무적의 용이 만났던 모든 인간들은 크든 작든 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호감을 느낄래야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일련의 경험들은 무적의 용이 인간이라는 생물은 믿어서는 안 될 동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인간을 위해 싸워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할 때도 있었지만 전장에서는 무인의 자세를 유지하며 휘하의 병력들을 지휘했다.

철충이 온 지구상을 뒤덮고, 인류의 전력이 급속도로 줄어들게 되자 무적의 용과 그녀의 휘하 함대는 동면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동면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는 다음에 자신의 주인은 비록 조금 모자랄지라도 정을 붙일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 한 켠에 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무적의 용과 휘하 함대를 동면에서 깨어나게 만든 오르카 호의 사령관은 멸망 전의 인류와 별다를 것이 없는 교활하고, 가식을 떨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거기에 폭력까지 서슴지 않는 모습까지 보게 되자 환멸까지 느껴졌다.

무적의 용은 그때부터 인간이란 원래 그런 생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호라이즌을 이끌고 자신의 함대와 같이 오르카 호에서 떨어져 나와 행동하고 싶었지만 차마 오르카 호를 떠나지 못하는, 오르카 호가 삶의 터전이 되어 버린 다른 자매들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적의 용은 멸망 전에 했던 그대로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작전이나 회의에만 얼굴을 비쳤고, 그 외에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가끔 밖으로 나오더라도 호라이즌 대원들을 돌보는 일만 할 뿐 그 외의 바이오로이드와 접촉하는 일은 드물었다. 심지어 그녀가 오르카 호에 있다는 것조차 까먹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사령관은 당연히 그런 용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명령거부권이 있는데다가, 오르카 호보다 규모가 큰 함대의 소유권이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에 탐탁치 않아 하면서도 그녀를 섣불리 통제하려 들지는 못했다. 덕분에 용은 거의 유일하게 사령관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허나 진짜 문제는 그녀에게 싸울 의욕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무인으로써 사령관 같은 무뢰한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대량의 사상자가 예상되는 작전에만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새로운 인간 소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 소년이 부사령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바이오로이드들을 인격체로 대해 준다는 말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소년이 행한 선하다고 할 만한 모든 행위도 가식처럼 느껴질 뿐, 그녀에게 인간은 이미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소년과의 대면 역시 거의 없었고 해야 할 일이 있어도 꼭 필요할 때에 사무적인 대화만 주고받았다. 소년 쪽에서 말을 붙이려 해도 못 들은 척 모르쇠로 일관하며 그대로 방에서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등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용은 그것마저도 무시했다.

더 이상 희망을 품을 계기도 없게 된 그녀에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지금의 생활은 그야말로 고문이었다. 허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스스로 되물어 봐도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지휘관 회의 시간이었지만, 간밤에 있었던 보고사항들을 전달받고 난 뒤의 사령관의 표정이 짐짓 진지해지자 에반을 포함한 모든 지휘관들의 얼굴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곧이어 사령관이 하나의 정찰 자료를 회의실 한 켠에 있는 패널에 띄웠다. 곳곳에 빛나는 광물이 박혀 있는 꽤나 널찍한 내부를 가지고 있는 동굴과 흡사한 내부. 그곳의 정체를 알고 있는 지휘관들의 안색은 곧바로 새파래졌다.

 

다들 짐작하고 있었나 보군.”

 

지휘관들의 낯빛이 파래지는 것을 본 사령관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여 진지한 얼굴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광물 조달 작전을 시행할 때가 왔다. 며칠 전부터 광산 내부에 철충의 움직임이 극도로 적어졌다고 하니 지금만큼 적기가 없는 셈이지.”

 

에반은 그제서야 그 화면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지휘관들의 군사학 교육을 들으면서 힘들었던 작전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하던 바로 그 작전임을 알아채자 입 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너희들의 전투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이번에도 분명히 잘 해 주리라 믿는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뻔뻔한 사령관의 작태에 지휘관들은 금방이라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보다 더 커다란 공포심을 떠올리는 것으로 그것을 참아냈다. 지휘관들의 반응을 본 에반 역시 아무 말도 하진 않았지만 사령관을 노려보듯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부사령관의 지휘 능력도 시험해볼 겸 부사령관이 지휘를 맡아 주었으면 하는데 어떤가?”

 

그 시선을 신경쓴 건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사령관과 에반의 시선이 맞닿았다. 에반은 더욱 적의를 드러내면서 노려보았지만 사령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의 적막이 흐른 다음 에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물론, 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그래, ‘유능한’ 부사령관이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유능한’ 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한 사령관은 자신을 노려보는 에반의 어깨를 두들겨 주면서 그 용기를 칭찬했다. 그 행동에 조금이나마 적의를 숨긴 에반은 사령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렇다면 작전에 투입될 전투원들의 편성도 맡겨도 되겠지?”

“…알겠습니다. 금일 내로 편성을 완료하여 제출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역시 믿음직스럽군.”

 

사령관은 에반의 일방적인 신경전을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로 빙긋 웃으며 내려보다가 똑같은 얼굴로 지휘관들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모두가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사령관의 표정을 보며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역시 사령관은 그런 표정들을 무시하면서 이야기했다.

 

그럼 지휘관 회의는 이만 종료하도록 하지. 모두 해산할 수 있도록.”

 

회의 종료를 선언한 사령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갔다. 한껏 긴장했던 분위기가 지휘관들의 한숨 소리와 함께 풀어졌지만 작전에 대한 걱정은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기에 긴장이 풀려도 여전히 표정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

아무리 철충 본대가 빠져나간 상태라도 광산에 남아 있는 철충들의 수는 여전히 많은데다가 광물까지 채취해야 하는 이 작전은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아 온 바이오로이드들조차 꺼리는 작전이었다.

거기에 더해 사령관의 명령이라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수행해야 했기에 거기에서 오는 중압감 역시 온전히 그녀들의 몫이었다. 그야말로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작전인 것이다.

허나 지휘관들은 은연중에 이번 작전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자신들을 사망자 없이 이끌어 온 에반이 지휘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랫동안 상실되어 있던 자신감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에반 역시 모의 전투는 물론이고 실제 작전과 전투에서 경험을 충분히 쌓아 온 데다가 바이오로이드를 향한 신뢰도 두터운 상태라 자신이 잘만 지휘한다면 별다른 큰 변수가 없는 한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큰 변수가 없다는 조건이 마음에 걸렸다. 속내와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사령관의 태도는 왠지모를 공포심과 꺼림칙함이 느껴져 에반을 불안감에 휩싸이게 했다.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번 작전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광물은 장비의 개선 및 개발과 오르카 호의 유지보수를 위해서는 꼭 필요했고, 광물을 수급할 수 있는 수단은 철충 본대가 잠시 떠나 있는 저 광산에서 직접 가져오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래도 안심이야. 에반이 지휘한다면 쓸데없는 명령 때문에 일어나는 전력손실은 없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각하. 그 동안 해 오신 대로만 명령해 주신다면 승리는 확실합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레오나와 마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에반의 눈에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보고 믿어 준 지휘관들의 미소 띤 얼굴들이 보였다.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녀들의 눈빛을 보자 에반은 어수선한 마음을 떨쳐 버리고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다잡았다.

그래, 이 작전도 평소에 치르는 철충들의 전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이 평소에 지휘하던 대로만 지휘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신을 재무장하며 고개를 힘차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그녀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알았어요. 쉽진 않겠지만, 열심히 해 볼게요.”

 

모범 답안과도 같은 기특한 말에 지휘관들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여태껏 사령관에게 바라 왔던 자세가 이 작지만 강인한 소년에게서 보이자 훗날에 사령관으로 추대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를 사령관으로 추대할 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당장은 눈앞에 닥친 작전이 우선이었다. 전투원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아무리 뛰어난 지휘를 받는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던 그녀들이기에 전투원들의 전력을 유지하는 데에 집중하자는 데에 뜻을 모았다.

 

에반, 우리는 너의 지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편성만 해 준다면 그에 맞춰 우리가 준비할 테니, 너는 지휘에만 집중해 주길 바란다.”

 

신속의 칸이 에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자신의 우상이자 롤 모델이 하는 격려는 칭찬과 애정에 목마른 소년의 열정을 더욱 불태웠다. 바보 같은 미소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꾹 참은 에반은 눈동자를 빛내며 다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말했다.

 

네… 네…! 최선을 다 할게요!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하하! 그래야 에반답지. 좋아, 더 이상 있다간 방해만 될 테니 되니 우린 이만 물러나도록 할까?”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아스널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한 듯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홍련과 메이 역시 말을 할 기회가 없었지만 회의실을 나가며 에반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으로 응원을 대신했다. 에반 역시 그녀들을 웃으며 배웅했고, 어느덧 회의실에는 혼자 남게 되었다.

 

우선… 이전 교전 기록부터 찾아봐야겠네….”

 

철충 본대가 기거했던 곳인 만큼 연결체들도 많을 것이고, 기존에 자료로만 보던 철충들도 있을 테니 교전 기록을 바탕으로 대책을 세우고 부대를 편성해야 하고, 이후에는 보급 계획과 전투원의 상태도 점검해야 한다. 지휘하는 일이 마냥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실감한 에반은 자료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

 

스틸라인은 보병, 포병, 지원 3개 분대, 발할라, 둠 브링어, 호드…”

 

이전의 전투 기록을 비롯한 대량의 자료들을 훑어본 에반은 대강의 부대 편성을 머릿속에서 구상하면서 보고서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소중해진 기억들을 회상하며 이름들을 기입하던 그의 손길이 문득 한 곳에서 멈췄다.

 

호라이즌…”

 

지휘관 란에 적혀 있는 ‘무적의 용’이라는 이름에 시선이 닿자마자 한숨을 깊게 내쉰 에반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호라이즌 대원들은 자원 탐색이나 일반적인 전투 임무에는 자신이나 사령관의 재량으로 투입할 수 있었지만, 이런 대규모의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용의 인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그 인가를 받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와 친하게 지내 왔다고 자부하는 에반조차도 용과 사적인 대화는 단 한 마디도 나눠보지 못했다. 말을 붙이려 해도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는 핀잔만 듣고 끊기기 일쑤였다.

언젠가 세이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용은 멸망 전부터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사령관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고 했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전투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몸소 출전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멸망 전 인간의 생활상은 에반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고, 자료를 통해 목격한 그 참상은 보다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려 버릴 만큼 참혹했다. 가장 끔찍했다던 테마파크 내에 위치한 C구역의 모습이 담긴 영상에 녹음되어 있던 생생한 비명소리를 들었을 때엔 헛구역질까지 했다.

그런 일들을 당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인간에게 봉사해야만 하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그녀들을 보면 용이 저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사령관이나 자신의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묵묵히 임무를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 용건 외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묵살당해 버리는 그녀에게 호라이즌의 출전을 허가해 달라는 부탁을 해야 하니 눈앞이 벌써부터 캄캄해졌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마른 세수를 한 에반은 탄식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말이라도 꺼내 봐야지. 이번 작전은 중요하니까… 허가해 줄 거야.”

 

대부분의 전투 부대가 투입되는 작전이고, 광물을 채취해 와야 한다는 명목도 있는 작전이기에 호라이즌의 차출을 인가받기에는 충분하다고 마음 속으로 위안을 하면서 걷던 에반은 용의 숙소 앞에 서자마자 안에서 느껴지는 절도 있는 위압감에 또다시 긴장했다.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긴장을 푼 에반은 몸을 살며시 기울여 똑똑, 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다시 노크를 하려던 찰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쪽에서 들려왔다.

 

누구요?”

부사령관, 에반입니다.”

하아… 무슨 일이오?”

광물 조달 작전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열려 있으니 들어오시오.”

 

못마땅한 목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좋지 못한 예감에 불안해하며 문을 열자,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 안의 모습이 드러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용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깐 동안의 적막이 흐른 후 용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는 됐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시오.”

이틀 후에 있을 광물 조달 작전에 호라이즌을 차출했으면 합니다.”

 

차출을 요청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용은 움찔했다. 그 작전이 엄청난 위험을 동반한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이 요청은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의자 위에서 몸을 돌려 에반과 눈을 마주친 용은 목소리를 진지하게 바꿔 물었다.

 

그 작전은 누가 지휘하는 것이오?”

제가 지휘합니다. 사령관님이 옆에서 지켜보겠지만요.”

 

사령관’이라는 단어에 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 믿었지만 그것은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인간의 이름은 언제 들어도 혐오감이 들었다. 잠깐 두 눈을 감고 생각하는가 싶던 용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역시나─

 

안 되오. 호라이즌의 차출은 허락하지 않겠소.”

 

매몰차다 못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의 거절. 설득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단칼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에반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호라이즌의 강력한 화력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막중한 책임을 진 소년은 용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유라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대의 지휘 능력이 소문만큼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엔 사령관이라 칭하는 무뢰한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오? 난 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 생각은 없소.”

 

명백하게 자신을 의심하는 용의 태도에 에반은 분개했다. 다만 그 분노는 이제까지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마음을 얻고, 오르카 호의 환경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애썼는데도 인간에 대한 회의감으로 똘똘 뭉친 그녀의 의심을 풀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분함에 가까웠다.

 

저는 사령관과는 달라요. 여기에 오고부터 쭉… 오로지 바이오로이드들만을 위해서 일했어요. 사령관이 바이오로이드를 괴롭히는 게 보이면 말리면서 싸우기도 했고요.”

 

단 한 순간도 바이오로이드를 도구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녀들이 웃으면 자신도 따라 기뻤고, 슬퍼하면 자신도 가슴이 아렸다. 그 동안 해 왔던 노력들이 무색하게 보이는 반응에 악에 받친 에반은 목소리에 더 힘을 주면서 애원하듯 이야기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그렇다면 제가 뭘 해야, 어떻게 해야 믿으실 수 있으신데요?”

 

그 말을 던진 다음 에반은 눈을 부릅뜨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용을 응시했다. 그에 반해 눈을 가늘게 뜬 채 냉담하게 바라보는 용의 시선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착각이 아니라는 듯 코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어차피 그것도 다 가식이지 않소? 그대의 본심은 단지 사령관의 자리가 탐이 나서 그 자리를 뺏고 싶은 것일 뿐… 이제까지 소관이 만나 본 인간들은 전부 그런 추악한 본성을 숨기고 있었소.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결론을 말하며 대화를 끝마치려던 용은 갑자기 들려온 고성에 놀라 어느새 벌떡 일어나서 자신을 노려보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분노가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에 반해 두 눈에 맺혀 있는 보자마자 용은 심하게 당황했다.

 

에반…?”

네, 저도 멸망 전에 인간들이 어땠는지는 정말 잘 알고 있어요. 지금도 적당히 사령관이 시키는 대로만 했으면 좀더 편하게 지낼 수 있었겠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 내자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심으로 바이오로이드를 대한 자신을 의심하는 그녀의 태도에 서러움이 복받쳐서, 슬퍼서 목소리가 떨려 옴에도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밀어넣으며 에반은 다시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요… 사령관이 누나들을 괴롭히는 걸 볼 때마다… 여기가… 여기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소년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린 뒤 그대로 탁, 탁 소리를 내며 두들겼다.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느낌과 함께 절대로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항상 되새겼었다.

하지만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자신을 멋대로 판단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인간들의 만행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서러웠다. 에반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구며 다시 고성을 질렀다.

 

직접 보셨어요? 제가 사상자를 내지 않기 위해 지휘하는 모습이나… 누나들한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걸 한 번이라도 그 두 눈으로 제대로 보셨냐구요!!”

에반… 미안하오…. 소관의 생각이 너무 짧았소…”

 

어린 몸에서 나올 수 있는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큰 소리에 용은 심하게 당황하면서 우물쭈물했다. 바이오로이드의 처우에 대해 이렇게 진지한 반응을 보인 인간을 본 적이 없었기에 섣부른 판단을 해 버린 자신을 마음 속으로 자책하면서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에반 쪽으로 손을 뻗은 순간─

 

탁─

 

가벼운 통증과 함께 뻗은 손이 그녀의 쪽으로 되돌아왔다. 용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멍청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쳐드는 에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물 자욱이 묻은 얼굴에 드러난 에반의 표정에 새겨진 절박함을 보고 나서야, 용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됐어요! 필요 없어요! 저도 절 의심하는 사람한테 매달릴 생각 없으니까, 혼자서 잘 해 보세요!”

에반, 소관은…”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거부 반응에 용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에반이 뒤돌아서 뛰쳐나가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를 불러 붙잡아보려 했으나 그 목소리는 닿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자 눈물이 만들어 낸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하, 하하하…”

 

털썩, 하고 의자에 주저앉은 용은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인간은 전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편협한 사고에 갇혀서 진짜 희망이었을지도 모르는 소년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말았다. 옛날에 그렇게 부르짖던 무인다움은 방금 전의 자신에게선 전혀 없었다.

에반의 말이 모두 옳았다.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방 안에 쭉 틀어박혀서 현실을 개탄만 했을 뿐, 제대로 이뤄낸 것은 없었다. 더구나 고정관념에 빠져 에반이 지휘하는 모습은 단 한번도 보지 않았다. 틀려먹은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손가락질 받아도 할 말이 없군…”

 

한 사람이 오랜 기간 동안 해 온 수고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말을 해 버려서, 용서받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두려움이 더 컸다. 원래 친했던 관계도 아니고 서먹한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꿔 용서를 구하러 간다?

가식 수준으로 오해받으면 다행이고, 오히려 자신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나 희망을 찾아 왔건만 자기 스스로 그 희망을 부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용은 허탈함을 느끼며 의자에 주저앉은 채 실성한 사람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참내!!!!!! 독자 라붕이들이 기다렸던 다음 편이 나와버렸다

결말부를 머릿속에서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바꿔보느라 정리가 안 된 탓도 있고

설에 부모님 가게 도와준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내가 게을러서 일어난 일이다. 그것 때문에 금고깡 공약도 건 거고..

진짜, 몇 번이고 이야기하지만 늦어서 너무 미안하다. 그래도 런은 절대로 안 할거야

이렇게까지 판 깔아놓은데다가 3월 20일까지 소설 다 못 끝내면 금고깡 한다는 공약도 추가로 건 만큼 끝까지 안고 갈 생각임

무용이 인간불신에 걸려버린 설정이 어색하다던가 이 사건이 너무 뜬금없다던가 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25화는 어쩌면 3부작으로 나올 수도 있겠지만 써 봐야 알 것 같다

지금까지 기다려 준 라붕이들, 개추와 댓글로 응원해 주는 라붕이들, 봐 주는 라붕이들 정말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

오타나 비문, 어색한 표현들은 댓글 달아주면 여건 되는대로 피드백할게

다음 편은... 나도 빨리 끝내고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으니 기다려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