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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의 진행은 물흐르듯이 이어졌어.

지하로를 발견하고, 거대한 연구소의 존재를 깨닫고, 막힌 문 - 너머에 에바의 시체가 있을 - 을 발견하고, 열차를 타고 트릭스터를 추격하려던 도중 레이더의 습격을 물리치고.

그 과정에서 리제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부관"이라는 지위가 생각보다 훨씬 의미가 크다는 것이었음.

게임에서야 로비에 세워두는 것과 전투에 보내고 시설에 보내는 걸 병행하는 건 아무 상관이 없지만

실제로는 부관이 된 시점에서 전투에 나설 수 있을 리가 없었지.

단순히 눈요기용인 것과는 달리 이러니저러니해도 하는 일이 꽤 많기도 했고.

마리 이후로 합류하거나 재생산되기 시작한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들도 그 나름대로 존중할 만큼의 입지도 얻었지만 그 부분은 리제가 전혀 신경쓰지 않으니 별 의미는 없었음.


물론 그만큼 사령관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됨.

사령관이 하는 업무도 단순한 전투 지휘부터 중요한 결제까지 게임에서 몇 번 터치하는 걸로 끝나는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많았지.

우습게도 그렇게 서로 일에 치이다보니 오히려 처음에 안절부절 못하던 분위기는 많이 희석되고,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어느샌가 자연스러워져 있었어.


새로운 철충을 보거나 했을 때마다 두통에 시달리는 사령관을 돌보는 것도 반쯤은 정기적인 일이 되어서, 어느새 무릎베개 정도는 해 주는 것이 당연한 느낌으로까지 변해 있었음.

리제도 이게 야스할 분위기랑 멀디 멀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6지까지는 남았고 고생하는 것도 사실이고 하니 뭐 괜찮겠거니 하면서 매번 넘겨왔지.


그렇게 쭉쭉 나가다보니 어느새 5지역에서 두 번째 트릭스터를 잡아내고, 사령관이 그 유언을 알아듣는 부분에 이르름.

현장에 나선 마리 일행이 돌아오기 전에 리제는 미리 통신기를 끈 상태에서 자기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는 걸 넌지시 사령관에게 일러둬.

돌아온 후의 대화에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위화감을 느끼는 일이 적도록.


그 후, 스카디의 수색이 시작되면서 소강 상태가 되었고, 간만에 여가 시간을 얻어 느긋하게 함교를 돌아다니던 리제를 누군가가 불러세웠어.

돌아보니까 자신과 놀라울 만큼 닮은 - 다만 살아온 시간이나 환경의 차이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쌍둥이만큼" 닮은 - 시저스 리제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

똑같은 암적색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리제는 확신하게 돼.

저 아이가 "원작의 리제"일 것이라고.


*   *   *


원작 리제에게 부관 리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해충이었어.

어느 의미로는 미움이나 질투보다도 불가해함이 앞설 만큼.

주인님에게서 가장 총애받는 건 확실한데 대부분의 고참들이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용인하고,

그러면서도 또 정작 본인은 그걸 과시하거나 더 열렬히 확인하려 들기는커녕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고 있었지.

아무리 개체차가 있다지만 같은 "시저스 리제"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양식이라서, 불쾌한 골짜기를 보는듯한 위화감까지 들었어.

혹시 주인님이 시저스 리제라는 모델을 선호하는건가 했지만 자신을 부드럽게 밀어내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었고.

그러던 와중에 브라우니 통신 - 정확히는 소문을 들은 다프네를 통해서 부관 리제의 과거에 대해서 알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지.


이전 주인을 잃은 걸 못 견디겠으면 그냥 같이 죽어버리면 될 것을.

지금의 주인님을 사랑하고 있으면 차라리 주어진 총애에 기쁘게 잠겨들면 될 것을.

얽혀든 양쪽 매듭 중 어느 한 쪽도 잘라내지 못하는 꼴로 어떻게 가위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겠냐고.


그나마 대뜸 가위부터 휘두르지 않은 건 묘하게 리제가 아니라 레아 같은 느낌이 들어서긴 했지만

(물론 정말 싸움으로 번지더라도 부관 리제의 압승이겠지만 리제가 그런 걸 고려하면서 덤빌 리가 없으니)

아무튼 그렇게 분노를 토한 원작 리제에게 부관 리제는 평온하게 대답해.

자신은 사령관 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이 품은 건 단순한 욕망에 불과하고, 마음을 얻기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 대답에 기어코 원작 리제의 뚜껑이 열려버림.

당장이라도 휘두를 듯 가위를 들이대다가 다프네랑 아쿠아에게 질질 끌려나가면서, 원작 리제가 마지막으로 외침.

그딴 표정으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이상하게 깊이 와닿는 말에 리제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렸다가,

원작 리제가 떨어뜨리고 간 가위검의 날에 비친 자신을 보게 됨.


옅으면서도 분명하게 올라온 홍조에, 물기에 젖은 눈과 은은하게 지어진 미소.


틀림없이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었음.


*   *   *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부정해 버리면 편했을 것을.

같은 몸 - 자신의 감정의 기반이 되어버린 - 의 주인이 한 말이란 점을 생각하면 도무지 떨쳐버릴 수가 없었지.


언제부터였을까.

최근 들어 사령관이 묘하게 편하다고 느꼈을 때?

두통을 느끼는 사령관의 손을 잡았을 때?

프레데터에게 대파 당한 후 수복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에이미가 사령관에게 농짓거리를 건냈을 때?

중파당한 후에 찾아온 사령관으로부터 믿어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니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얌전했던 것은 기를 모으기 위해서였다는 듯 터질듯이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리제를 완전히 채우고 있었어.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는 느낌을 억지로 붙들어매면서, 리제는 어떻게든 다시 진실을 속일 이론무장을 해내려고 머리를 굴렸지.

원작 리제의 박력이 너무 강해서 휘말렸을 뿐이다. 그냥 요즘 사령관이 아파하는 걸 자주 보다 보니 뜬금없이 모성애라도 깨우쳤나보다.


애시당초 성공적인 시도도 아니긴 했지만 그조차도 오래가진 못했어.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리제의 귀는 이미 자신 쪽을 향해 다가오는 익숙한 발소리를 알아채고 말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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