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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기 그지없는 타이밍이었지.

지금까지 사령관이 찾아왔던 건 어디까지나 수복실에 있었을 때였고

그 후의 시간도 대체로는 함장실에서 보냈으니 개인실까지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혹시 정말로 마음이 통해서?

어쩌면 자금의 기세에 몸을 맡겨서 얼렁뚱땅 인정하고 넘어가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머리에 열이 오르는 와중에도 리제는 착실하게 대답을 하고 문을 열어.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령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자신이 예상 - 혹은 기대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걸 알아채게 되어버리지.

따로 언어화할 필요도 없었어.

혼란과 절망, 통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틀림없이 철충에 감염되어가는 자신을 깨닫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   *   *


사령관이 "원작"에 비해 훨씬 더 빠르게 진실에 닿아버렸다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6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얼굴도 못 봤을 리가 없잖아.

오르카 호 내부에 얼굴이 비칠만한 물건이 적을 리도 없고, 하다못해 콘솔 화면에 잠깐 반사되는 걸로라도 볼 수 있으니까.

그것을 그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건 어디까지나 사령관의 자기방위 본능이 일했기 때문이고, 원작에서 깨닫게 된 계기가 된 것도 굳이 따지자면 라비아타가 내민 칼날이 아니라 내뱉은 말에 가까웠음.

하지만 이쪽의 사령관은 리제가 있었고, 알게모르게 정신적 부하가 올 때마다 신경써준 리제의 영향으로 훨씬 더 안정되어가고 있었지.

그리고 그렇게 생긴 여유에서 리제가 휴가를 받아 빠져나간 틈에 진실이 들이닥쳐 버린 것이고.


자신은 무엇인가.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철충에게 조종당하는 것은 아닌가.

그보다, 바이오로이드들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터질 듯한 생각 속에서 리제의 개인실을 찾아가게 된 건, 당장이라도 리제를 보고 싶다는 바람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 자신을 확인한 리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순간, 사령관은 자신이 알아챈 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수 없었어.


- 알고 있었어?


예상도 하지 못한 시점에 예상도 하지 못하게 터져버린 사건이었지.

새하얗게 빈 머리로, 리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

뭔가 더 말을 해야 하는데, 어째선지 입은 꿰매기라도 한 양 열리지 않았지.

사령관이 볼품없이 후들거리며 다가오고, 자신을 밀어서 침대 위로 쓰러뜨릴 때까지도 그랬어.


그렇게 서로 눈만 마주친 채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사령관이 간신히 목소리를 내.

그런데도 어떻게 내가 나라고 확언해줄 수 있었냐고.


그러고 보니 부관이 되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지. 하고 리제는 멍하니 떠올렸어.

물론 이 세계가 게임 스토리 속이고 거기서 당신은 새 몸을 얻게 된다고 할 수야 없었지.

마리의 오해처럼 사이버네틱스 기술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할까 했다가, 그건 지금의 사령관에게는 도움이 되는 설명이 아닐거라고 직감해.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에게.

어딘가 붕 뜬 듯한 감각 속에서 찾아낸 답은, 참으로 비논리적이면서도 낯간지러운 것이었지.


-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   *   *


사령관이 리제에게 특별하게 끌리는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 본인도 그 이유를 정확히는 짚지 못하고 있었어.

사연있어 보이는 (그리고 알고 보니 실제로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던) 분위기에서 나오는 비호욕이라거나,

좌우좌가 그렇게나 따를 만큼 상냥한 부분이라거나,

중요한 부분에선 꼭 발휘되는 헌신적인 태도라거나,

하다못해 외모가 취향이라거나.

이것저것을 생각해보긴 했지만 전부 정답은 아니었지.


그러다가 추가로 생산된 리제를 만나고 나서야 사령관은 깨닫게 돼.

새로 태어난 리제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있던 리제로부터는 언제나 당신이나 이름+ 님으로만 불리고 있었다는 것.

앞뒤 구분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의심없이 따르고 떠받들어주는 바이오로이드 중에서

그 리제만이 어째서인지 자신과 눈높이를 맞춰주고 있었다는 것을.

리제가 부관이 되면서 같이 보내온 시간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했지.


그러니까 더더욱 리제가 자신의 상태를 알고도 그렇게 대해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어.

어쩌면 배신감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런데 그렇게 던진 질문에 돌아온 것이 뜬금없는 고백이었으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어버렸지.

아니, 어쩌면 이 상황에서 할 말이냐고 기가 막힌 걸지도 몰라.

방금 전까지의 혼란도 무슨 소용이냐 싶어져서 허탈하게 그게 무슨 대답이냐고 하니까,

자기가 한 말이 어이없다는 건 알고 있었는지 슬쩍 얼굴을 붉히면서도 리제는 아무튼 그러니까 괜찮다고 우격다짐하듯이 말해.

그리고 자기랑 마리가 이미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정말 걱정할 거 없다고도.


진작에 그 말이라도 하지, 하고 투덜거리니까 말한들 들어먹을 정신상태도 아니었다고 역으로 핀잔이 오고.

그러다가 둘 다 멋쩍게 웃어.


그 상태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다가, 결국 견디지 못한 리제가 물어봐.

그래서 이제 비켜주실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하지만 사령관은 손을 치우는 대신 힘을 빼서 그대로 리제를 덮듯이 몸을 겹쳐옴.


귀 바로 옆에서 헉 하고 들이마시는 숨소리가 들리는 게 어딘가 즐겁다고 느끼면서,

사령관은 리제의 귓가에 대고 속삭임.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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