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을 녹여낸 듯한 소녀의 오렌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나는 그것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똥파리도 피해갈 죄악을 한겹 포장한 건물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입술뿐이었다. 영원처럼 느껴진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그 입술이 움직였다. 구역질날 정도로 추잡했던 그날의 이야기가, 내 앞길을 걸었던 부류들이 저지른 원죄가 흘러나왔다.


"...다치거나...수명이 다 되거나...그런 자매들은, 어디론가 사라졌어. 인간님들은 수복돼서 좋은 곳으로 간다고 했지만, 자매들은 그런 말...아무도 믿지 않았어..."


소녀가 눈을 떴다. 맑은 바닷물을 연상케 하는 푸른 빛 눈동자가 그때만큼 가련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옆에 있던 총사대장이 내 손을 잡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너무 세게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본 소녀가 말을 이었다.


"응, 여기 있었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있지 않았다. 분노도 없었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고함을 질렀다면, 울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까. 소녀는 마치 저녁 늦게 들어오지 않던 아버지가 실은 찻길이 막혀 늦었다는 걸 알았다는 것 마냥 담담했다.


피가 내 핏줄을 뚫고 나올 것처럼 빠르게 몸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됐다.


"아하하, 이상한 말 해서 미안해 사령관."


내 표정을 살피던 소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아니야, 괜찮아' 라는 상투적인 대답조차 건네지 못했다. 지금 나에게 그럴 자격이나 있는가.


"그럼, 나는 다시 LRL한테 가볼게."


내가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자 총사대장과 메이드를 번갈아 바라보던 소녀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총사대장이 뒤에 있던 붉은 머리 수호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곧장 달려가 소녀를 어깨를 감싸 안았다.


"폐하, 저는...제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총사대장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엔 경악인지 공포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들이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언제나 활기차고 능글맞던 그녀가 이렇듯 진지한 적은 드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이건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할 일이야. 금란."


삭풍이 흩날리며 하얀 소복의 여인이 내 뒤에 다가섰다. 그녀가 우아하게 절을 올렸다. 허리춤에 걸려있는 환도가 짤랑거렸다.


"부르셨사옵니까."


"금란만 데려가도록 한다.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해. 혹시나 철충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철저히 수색하도록."


나는 고개를 조아리는 둘을 보지도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핏자국이 찍히는 느낌이 들어 괜시리 걸음이 빨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거대한 대문 앞에 멈춰섰다. 적갈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그 문엔 'C 구역' 이라고 적힌 나무 팻말이 힘없이 매달려 있었다.


"열어줘. 그리고 절대로 눈을 뜨지마. 명령이야."


"...알겠사옵니다."


말을 마친 금란이 문을 열었다. 검은색 콘트리트로 만들어진 낮고 넓적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철문이 있었지만 벽면의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납골당을 연상케 했다. 그때쯤 가서 나를 괴롭히던 구역질은 한층 더 심해져, 말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문을 열까요?"


내 옆에 다가온 금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짊어져야 할 빚이었다. 내가 인간의 역사를 계승했고 그 공을 가로챈 이상, 내 삶은 그들의 과에 저당잡힌 셈이었다.


문을 연 나는 건네받은 라이트를 키고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지하실 특유의 축축한 비린내를 뚫고 식초가 발효한 듯한 썩은내와 쇠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이걸 악취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냄새라기엔 차라리 무형의 고문기구였다. 벽 곳곳에는 검은색인지 붉은색인지 모를 얼룩이 남아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명소리에 내 귀가 찢겨나갈 것처럼 아픈 것은 착각일까.


계단 끝에 다다른 나는 라이트를 여기저기 비추었다. 의외로 구역의 구조는 간단했다. 넓은 공터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이 통로로 연결된 듯한 모습이었다. 옆에 있던 금란이 환도를 더욱 꽉 움켜쥐는 소리가 들렸다.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그녀에게 지금 이곳의 악취는 견디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문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원죄를 만났다.


나의 유산을 보았다.




"다들 바쁜 시기에 이 자리에 모여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3일 후, 나는 테마파크 구석에 마련된 제단에 올라서 있었다. 파크의 외벽으로 가로막힌 구석진 곳이었지만 햇빛이 가장 많이 내리쬐는 곳이기도 했다. 필수 요원과 최소한의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 오르카의 모든 인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나는 인류의 대표이자 인간의 계승자로서 진행을 맡았다.


"이미 여러분들 중 대다수는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가에 대해 들었으리라 짐작한다. 따라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전쟁 이전 인간들은 바이오로이드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기계나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가 없어지면 성노예로 팔아넘기거나 더 심한 짓을 자행하기도 했다."


잠시 말을 끊은 나는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래서 그 다음 말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참상이 벌어졌던 곳에 서 있다. 지휘관들은 나에게 이곳을 폐쇄하자고, 지난날 인간이 가지고 있던 오만과 편협함, 잔혹함의 상징을 파괴해버리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난 거부했다. 왜냐면, 인간이 저지를 죄는 그렇게 사라져선 안되기 때문이다."


몇몇이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내색하지 않겠지만 불쾌하겠지.


"앞으로 이곳은 추악했던 인간의 역사와, 그들이 지었던 죄를 상징하는 장소로 재탄생할 것이다. 또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인간을 대표하여 여러분들에게 사죄하는 바이다."


말을 마친 나는 단상에서 한발자국 비켜서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대원들의 웅성거림이 터져나왔고 지휘관들의 고함소리가 이를 억눌렀다.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허리를 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지금 이 위선적인 행동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이딴 사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한들 그 덩어리에 금이라도 가겠는가. 죽은 자들이 모욕하지 말라며 내 목을 물어뜯고 살점 한조각까지 잘라내어 나눠가져도 풀어지지 않을 죄였다.


용서를 바라기엔 너무도 컸다. 너무도 늦었다. 나 한 사람의 참회로 씻어낼 수 없는 핏자국이었다.


"인간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겠다. 인간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말리지 않겠다. 여러분들이 이 참상을 보고 느꼈을 분노는 정당하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용서를 구함이 위선적이고, 모욕적이며, 가당치 않은 행위임을 잘 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하겠다.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서 내 맹세하건대, 이 같은 역사는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인간이라고 대접받지 않을 것이며, 바이오로이드라고 차별받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하나된 인류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발걸음이 될 것이다."


말을 마친 나는 옆에 있던 아자젤을 바라보았다. 한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부드럽게 날개를 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햇빛을 받은 흰 날개는 황금이 녹아든 듯 노랗게 빛났다.



바라옵니다.


이들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소서.

차가운 침상을 데워 주소서.

떨리는 손을 잡아주시옵고

얼어붙은 발을 녹여주시옵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옵소서.


이들의 간절한 부름을 들으사

더 이상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게

더 이상 고난에 신음하지 않게

이제는 그 짐을 내려놓게 해주시옵고

아버지의 품 안에 잠들게 해주옵소서.


부디


그렇게 해 주소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자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문득 노란 잔디 속 묘비들로 눈을 돌렸다. 여름도 아닌데 아지렁이가 피어오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내 눈물 때문에 일어난 착시였는지, 정말로 아자젤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뚜렷하지가 않다.













내 방식대로 할로윈 피크 편 엔딩을 각색해봤음. 이 장면을 보면서 나였다면 어떻게 끝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처음 써보는 문학이라 재미는 많이 없어. 그래도 재밌게 봐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