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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래도 제법 중요한 이야기인데다가 자기가 부탁받는 입장이었을 텐데, 보통 이런 식으로 닥달을 하던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과를 차려주는 소완을 앞에 두고 리제는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어.

그 말 그대로, 아침이 오기가 무섭게 소완에게서 티타임에 다시 초대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거든.

거절할까 싶었지만 기껏 잘 풀어가 놓고 이런 일로 뒤끝을 남기고 싶지도 않았고, 자리가 불편한 것과는 별개로 맛이 일품인 건 사실이라 쭈뼛거리면서 리리스에게 헬프콜을 친 결과 어제와 정확히 똑같은 인원 구성이 되었지.


지고의 저녁식사가 아니라 지고의 티타임인가.

뭐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리제는 소완이 자리에 앉자마자 재빠르게 어제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사과부터 함.

그런데 이게 웬걸, 소완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보였지.


- 가벼이 다룰만한 일이 아님은 이해하고 있사옵니다.

오늘은 어제 염치 없는 부탁을 수락해주신 것에 감사도 사죄도 포현하지 못하였음이 마음에 걸렸기에 모신 것.

단순히 친분을 다지기 위함이오니. 보잘것없는 솜씨지만 부담 없이 즐겨 주시면 기쁠 것이옵니다.


아 예. 퍽이나 그렇겠군요.

라는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올 뻔 했지만, 자기 대신 썩어들어간 리리스의 표정 덕분에 간신히 어색한 미소 정도는 지어보일 수 있었지.

그 뒤로는 정말로 소소하게 잡담이 오가.

계란 프라이를 수백 개 만드는 게 얼마나 수고가 드는지 모르는 이가 있었사옵니다. / 미리 포장된 상태로 내놓는 설비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지 않았나요? / 그건 맛이 없으니 직접 부쳐달라는 요구였사옵니다. / 제정신이 아니군요.

처음엔 적당히 맞장구나 치던 리리스도 동생이 요즘 골판지로 요상한 가면을 만들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끼어들고, 생각 외로 무난한 분위기에서 마무리가 됨.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 내일도 뵙기를 고대하겠사옵니다.


역시 사흘 연속은 좀 빡세지 않아?


*   *   *


- 리제 양이 매번 상대해 줄 필요는 없어요.


돌아가는 길에 흘리듯 나온 말에, 리제는 무심코 시선을 돌림.

리리스는 고집스레 정면을 바라볼 뿐이어서 눈이 마주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 미안해요, 리리스 양도 신경써야 할 일이 많을 텐데.

-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짧게 한숨을 토하고, 리리스는 느릿하게 단어를 골라나감.


- 저 여자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버리면.

 그 때에는 제가 뒷감당을 해야 할 테니까, 리제 양 쪽에서 동행을 요청하시는 건 감사한 일이죠.


그건- 뭔가 이상한 말이었어. 마치….


- 리리스 씨는, 확신해 버리셨나요.

- …….


순간 금색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질문에 대답하는 리리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평온했어.


- 그러는 리제 양은, 확신하지 못하고 계시지요?

- …과분하니까요.


사령관이 자신만을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처음이 아니었더라도.

아니, 설령 그가 자신에게 관심 한 조각 주지 않았더라도.

아마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야 말았을 것인데.

그런 당연한 것에 대한 사령관의 대답은 지나치게 눈부셔서.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리제를 조용히 내려다보다, 리리스는 낮게 읊조림.


- …이제야 알 것 같네요.

- 리리스 씨?

- 설명하진 않을 거예요.

오늘 밤에라도 소완 양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면 알게 될 테고.


영문을 몰라하는 리제에게 담담한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리리스는 사령관의 곁까지 리제를 호위했지.

'당신은 조금 더, 오만한 만큼은 혼나봐야 해.'

라는 말은 끝내 입 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졌음.


*   *   *


그리고 그날 밤.

당연하다는 듯 부관실로 찾아온 사령관에게, 리제는 어제보다는 자연스러운 미소로 응대할 수 있었음.

블랙리버의 실험실-아마 네오딤이 있을-을 탐색하자고 한 마리의 제안으로 오래간만에 원정을 나서게 되면서 세세하게 지휘에 신경쓸 일도 늘어났다며 죽는 소리를 하는 사령관에게, 리제는 자동 지휘로도 충분한 걸 내버려두지 못한 건 당신이라고 가볍게 핀잔을 줌.

힘들어서 하나도 안 들린다고 엄살을 부리며 자신의 허리에 메달린 사령관을 못이기는 척 달래주다가, 리제는 최대한 가벼운 톤으로 가끔은 함장실에서 자기도 하라고 이야기를 함.

사령관이 리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역할을 이 이상 이불에 빼앗길 수는 없다고 대답하는 바람에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어영부영 넘어갈 수는 없었어.


- 다른 분들이 기회를 갖기 어려워지잖아요.


처음엔 무슨 소리냐며 웃어 넘기려던 사령관은 리제의 얼굴을 보더니 표정을 굳힘.

갑자기 무슨 이야기냐는 질문에, 리제는 계속 독점하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고 대답해.


- 충실한 것이 지탄받을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목서리에 서린 당혹감에 아주 약간이나마 노기가 섞인 걸 깨닫자, 리제의 입안이 바짝 말랐음.


- 당신이 그것을 의무로 느끼거나 속박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어요. 

그런 것 따위와는 관계 없이 나는 당신을 계속 사랑할 테니까.


그 말에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사령관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 백보 양보해서, 내가 당신 이외의 다른 누군가도 사랑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볼게.

- 네.

- 설령 그렇더라도 당신은 나를 계속 사랑할 거라고 했지.

- 네.

- 하지만, 상처는 받을 거잖아.

- ......받지 않아요.


거짓말이었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수에 찔린듯한 아픔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리제의 몸이었기에 시작한 사랑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질투에까지 휩쓸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리제는 애써 웃으면서 대답함.


- 저는 온전한 당신의 바이오로이드니까.


자기가 말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대사는 아니었어.

차라리 좀 더 기회를 볼 걸 그랬나, 했는데


- 그렇게 생각 안 하면서.


깊은 한숨에 따라붙든 나온 반박은 설득력이고 뭐고 하는 문제를 넘어서 있었지.

멍청한 얼굴로 네? 하고 반문한 리제에게 사령관은 찌푸린 채 명언함.


- 리제 너는, 자기가 바이오로이드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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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틀림없이 처음 계획은 섹무새 리제의 저질개그물이었을 텐데...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302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