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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이 리제와 다른 바이오로이드의 시선에서 어딘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맺어진 그 때보다도 과거니까 이제와서는 까마득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

그 사실에 불만은 있을 턱이 없었지만, 의문은 남아있었어.

리제가 '다른' 원인은 둘째치고, 정확히 어떤 식으로 다른 것인지도 당시의 사령관으로선 구체화할 수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단순히 오래 생존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졌기 때문인가 싶었지만, 마리는 물론이고 좌우좌도 단순한 생존연도로 따지면 리제와 비슷하다는 점을 알게 되고 나니 그건 아니겠구나 했지.

특히 리제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고 '평범한' 개체와는 달라졌다는 점까지 겹치는 좌우좌도 놀아주면 놀아줄수록 근본적인 심지 자체가 변한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어.


그 다음에는 자신 이전의 주인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주인이라 인식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했는데,

멸망 전부터 남아있던 개체들의 태도나, 현 시점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콘스탄챠의 대답을 보면 역시 그것도 아니었음.


그러다 리제와 맺어지게 되고, 아무래도 좋나 하면서 그 문제를 머릿속에서 잊어가던 차에 전환기가 찾아오게 됨.

다름아닌 메이의 재생산으로부터.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람을 꼼꼼하게 평가하고, 아니다 싶으면 거침없이 혹평을 퍼붓는 모습은 방향성은 다르지만 리제와 어느 정도 공통 분모가 있었거든.


머지않아 라비아타가 합류하면서 그 부분은 더욱 명확해졌지.

원작과는 달리 그리 어색함이 없는 관계지만 - 혹은 오히려 그렇기에 라비아타는 주어진 명령의 범위를 다소 벗어나더라도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 주저없이 그 길을 택했고, 그것이 사령관에게는 처음으로 리제를 지휘했을 당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는 어딘가 달랐던 움직임과 겹쳐 보였으니까.

자의적 판단에 의해 전달할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부분도 리제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어딘지 모르게 리제가 '숨기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 사령관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졌고.


어쩌면, 싶어서 라비아타로부터의 교습을 겸한 대화 중에 그 부분을 물어보자, 라비아타는 일종의 허가된 권한의 문제라고 대답해.

자신 이외에도 각 기업의 최상위 기체거나 인간 기준으로도 중대한 역할을 맡은 바이오로이드는 명령의 해석과 실행에 있어서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받는다고.


- 그러면.

 고민을 대변한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어.

- 혹시 양산형 기종 중에 특정한 개체만 권한이 높을 가능성은 있을까?


대답이 돌아오기까지의 간격도 길지는 않은 건 마찬가지였지.

- 지극히 낮다, 고 해야겠네요.


이 즈음해서 리제의 상태에 대한 사령관의 생각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우려로 변하게 됨.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오직 그 '리제'에게만 나타난 특성일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

혹여나 정신적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암시라면 자신이 리제를 사랑하게 된 계기라는 이유만으로 덮어두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그렇긴 한데 애초에 '리제의 어디가 문제인가' 부터 아리송하다는 게 문제였어.

실생활에서 드러나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평범한 리제에 비해 훨씬 건전해 보이는 게 사실이고.

메이나 라비아타를 보면서 기시감을 느끼긴 했지만 완전히 일치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니까 단순한 자율성 문제로 치부할 수도 없었으니.


그 답은 전혀 의외의 방식으로 찾아오게 됨.


- 아무래도 내가 생각보다 늦은 모양이지?


틀림없이 죽어있었던 에바 프로토타입이 통신을 걸어온 순간.

그것이 이전에 가상 현실에서 보았던 에바 프로토타입의 과거와 연결되면서, 사령관은 직감에 가깝게 이해함.

리제의 시각은,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 인간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   *   *


하지만. 말이지.

- 자신 이외의 '인간'을 본 적도 없는 사령관이

어디에서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의 차이점을 느꼈던 걸까?


*   *   *


유전적으로는 같은 생물이고 정신 활동도 그리 다르지 않아.

바이오로이드는 목적에 맞게 생산되어 모듈을 통해 정해진 형태의 인격을 부여받을 뿐.

인격이라는 것도 기종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분산도를 따지면 인간보다도 다양할지도 모르지.

그런 와중에 통일된 규격이라는 것을 찾자면- 결국 '인간을 대하는 자세'에 귀결될 수 밖에 없을 거야.


주인을 찾고자 하는 본능적인 바람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재량권에 따른 행동이나 사고의 제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야.

인간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것 때문이냐면 - 리제도 사령관을 사랑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하물며 지금의 사령관은 빠르게 정신과 능력 양면에서 성장한 만큼 이미 꽤 많은 바이오로이드에게 인정받고 있었으니, 인간이기에 보이는 호의와 상관에게의 경의, 이성으로서의 호감 정도는 진즉 구분할 수 있었어.


그럼에도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을 사랑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사랑받을 때.


신에게서 시련이 내렸을 때 감내하는 이도, 납득하는 이도, 원망하는 이도 있듯

멸망 전 인간의 악의를 받아들이는 길은 바이오로이드마다 전부 달랐어.

하지만 신에게서 은혜가 내렸을 때 -자신의 자격을 되묻는 것이 아니라면- 은혜 자체에 불안을 품는 피조물은 없듯이.

인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라면 그들 모두가 같았지.


부정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미루고, 속이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상처받고

그럼에도 제 욕심에 먹혀 놓지는 못하는­­― 


리리스가 "오만하다"고 평가한 부분이야말로

사령관이 이해한 리제의 '인간성'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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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해주신 라붕이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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