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3316232

이전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3021053


32는 설명편이었기에 실제로는 31편에서 바로 이어지빈다

--------------------------------------------------------------------


들켰다.


어떻게? 라는 의문은 시커먼 절망감에 휩쓸려 떠오를 기회조차 없이 가라앉고, 리제는 입을 틀어막은 채 주저앉아.

눈은 뜨고 있는데 초점이 잡히지를 않고, 귀는 열려 있는데 들리는 건 의미 없는 메아리뿐.

그럼에도 사령관이 다가오는 것만은 뚜렷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의 리제에겐 오히려 그것이 더욱 두려웠어.

버둥거리면서 물러나려 한 것은 얼마 가지도 못한 채 등이 벽에 부딪히며 끝났고,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시린 감각에 어째선지 눈물이 쏟아져내림.

리제, 하는 목소리와 함께 손목이 붙잡혔지만 차마 들 수 없는 고개를 도리질치며 거절의 뜻을 표현할 수 밖에 없었고, 입 밖으로 나오는 말도 지리멸렬했지.


- 저, 저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냥, 눈에 띄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만 있으면 그걸로, 좋았는데!!

- 리제.


당신을 보는 순간 견딜 수 없게 되어서.

멍청하게도 그걸 자기 입맛대로 곡해하면서 가볍게 여기는 사이에 빠져나갈 길도 거의 막혀버려서.

그래도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데


- 그런데 당신은, 왜 나 같은 걸, 택해서……!

- 리제!


오열인지 독백인지도 모를 말이 화자 본인조차 이해 못할 원망으로 바뀌었을 즈음에는 결국 호흡마저 리제의 통제를 벗어나.

분명히 자신의 방에 있는데, 바닥조차 없는 해구 속으로 내던져진 느낌.

사령관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손은 찌를듯한 통증을 느끼는 가슴 언저리를 쥐어짰지만 그런다고 차도가 있을 리도 없었고.

어설프게나마 돌아가던 머리도 완전히 멈춘 채 헐떡이는 것 밖에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입이 막히면서 들이쉬어도 괴롭지 않은 공기가 천천히 들어옴.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자신에게 닿은 체향과 온도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너무나도 그리워서.

리제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면서 눈물을 떨궜어.


*   *   *


- 진정했어?

- …네.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사령관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리제는 고개를 떨군 채 대답함.

생각해보니, 자기가 빙의자라거나 원작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들켰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저 한 마디 가지고 무슨 세상이 끝장난 양 발작을 한 건지.

지레짐작 세 번만 더 했다간 아르망도 되겠네.


손부채로 땀을 식히는 리제를 바라보다가, 사령관이 단언하듯 말함.

리제의 특이성은 자신이 리제를 사랑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면 되었지 문제는 하나도 되지 않는다.

애초부터 지금은 리제 말고 다른 누군가와 연애를 할 생각도 없고, 리제가 상처받을 게 뻔한 걸 생각하면 더더욱 없다고.

그 말에 가슴이 벅차오를만큼 기뻐지는 자기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리제는 소심하게 반박을 함.


- 그렇지만, 당신에게 명백하게 이성적 호감을 품는 바이오로이드도 많을 텐데 불쌍하잖아요.

- ……그런 이유로 연인한테 '자기가 상처받는 건 감수할 테니 다른 사람도 사귀라'는 소리를 듣는 나는 안 불쌍하고?


어? 그런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서 눈을 마주친 리제의 멍한 표정에 사령관이 다시 인상을 찌푸렸어.


- 내가 여럿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요령 좋아 보여?


엄청나게.

입은 열지 않았지만 안면 단속은 하지 못한 리제 때문에 사령관의 대답에도 서서히 황당함이 묻어 나오기 시작함.


- 저기, 리제.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개쩌는 하렘물 주인공이요.

그것도 썸만 타는 러브 코미디 말고 야스까지 진탕 해버리는 본격 하렘물.

...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던지라, 리제는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급조한 변명을 덧붙임.


- 저한테 넘쳐흐르도록 대해주면서도 여유가 있으니까, 몇 명 정도 더해도 너끈히 감당할 줄 알았죠.

- 너에게서 받는 칭찬이 이렇게까지 공허할 줄은 몰랐어.

- 아하, 하하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웃지요.

아니, 그래도 사령관과 관계에서의 우열을 두고 벌어진 수많은 달콤살벌 이벤트를 생각하면 그냥 넘길 순 없지 않을까?

뭣보다 당장 소완이라는 시한폭탄에 불이 붙은 상황이잖아.

원작에서 그 폭탄을 잠재워버린 건 사령관과의 야스 한 방이었고.

해서 아무리 그래도 차별로 인식되면 장기적으로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도 시간은 좀 들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보겠다고 했더니,


- 연애감정도 없는데 균형 맞추자는 감각으로 동침하겠다는 발상이 오히려 더 차별적인 거 아니야?


어?? 그런가??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던지는 위화감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령관 쪽이 윤리적으로 맞다는 납득이 정면충돌하니까 점점 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가서 눈이 팽팽 도는 리제를 보고,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면서 너무 지친 것 같으니 좀 더 찬찬히 생각해보라면서 리제를 안아다가 침대에 눕혀줌.


- 그리고, 나라고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건 아니야.

- 그건….


당연히 알지.

원작에서 반찬투정이나 했을 즈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유능하면서도, 자기를 따르는 바이오로이드들 하나하나에 대한 배려가 녹아있어서 이미 복원된 지휘관기 전원에게서 인정을 넘어서 존경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 메이도 요즘엔 작전 제안을 할 때 지나가듯이나마 더할 의견은 없는지 꼭 한 번은 확인을 구할 정도였고.

한편으로 그런것치고 지휘관들과 사령관 사이에 로맨틱한 분위기는 이상할 만큼 없었다는 것까지 깨달은 리제의 인식이 점점 근본적인 부분에 닿을 즈음해서, 이불을 덮어주고 조명에 손을 가져간 사령관이 나지막하게 속삭임.


- 그래도 걱정되면 내가 어떻게든 할테니까. 


일단 복잡한 일들은 전부 잊고 자라고.

이러니저러니해도 심적으로는 탈진에 가까웠던 차에 그 말은 마법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어서, 리제는 감기는 눈에 저항하지 못한 채 잠에 들게 됨.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장르를 바꿔버린 리제였스빈다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313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