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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와 만났던 그 날 이후로도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밤마다 하는 순찰은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공부도 빼먹을 수는 없다.

 

게다가 며칠을 쉰 후 아버지도 새로운 현장을 시작했기에, 나는 정말이지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한 번씩 현장 일을 쉬는 날마다 나는, 이유도 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다가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때의 계곡으로 향해서 하루 종일 앉아있고는 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혹시 나는 다시 우연히 미호를 만나기라도 기대하고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너에게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

 

미호야.

 

고마워.

 

미안해.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나를 버리지 말아줘.

 

나를 버려줘.

 

머리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생각이 정리되지가 않을 때에 매미소리가 가끔 내 의식을 흩어놓으면,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하지만 그 곳에는 당연하게도 미호는 없었다.

 

너무 보고 싶어, 미호야.

 

 

 

 

 

그러나 내 이런 마음이 무색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미호와 만나는 일 따위는 없이 여름이 지났다.

 

나는 내 머리를 가득 채운 그 어떤 감정도, 생각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너, 고등학교도 나랑 같이 다녀 줘.'

 

'...그 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나랑 학교 같이 가 줘. 끝까지'

 

그런 약속을 했으니까. 어차피 미호 얼굴은 볼 수밖에 없다. 나는 고민을 끝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유달리 일찍 눈을 떠서는, 2학기 첫 등교의 준비를 끝냈다.

 

대문을 박차고 나선다.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달동네를 마주보고 해가 떠오른다. 이런 동네에도 햇님은 햇살을 내려 준다.

 

나는 몹시 긴장된 발걸음으로, 평소 학교에 갈 때와는 반대의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분 정도나 걸었을까, 나는 어느 장소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다.

 

1분, 5분, 10분이 지나고,

 

끼이익

 

"...어?"

 

미호가 나왔다.

 

매일 기다리던 건 너인데, 이렇게 입장이 바뀔 일 따위는 상상도 못해봤다는 얼굴이다.

 

눈이 땡그랗게 커져서는, 한 눈에 봐도 몹시 놀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철남아... 이 시간에 웬 일이야?"

 

"...기다리고 있었지"

 

"나를?"

 

"어. 해야 될 말도 있고"

 

"할 말이라니? 오랜만에 만나서 갑자기 웬 말이야"

 

"...미호야."

 

"...?"

 

"정말 미안하다. 여름방학 때도, 그리고 그 때도."

 

"정말로, 항상 너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근데 역시 니 얼굴을 보고 직접 말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

 

했다. 일 년을 가까이 내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말을 드디어 꺼낼 수 있었다.

 

미호는 뭔가 아연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음. ....솔직히 어쩌면 이제 너랑 학교에 못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좀 놀랬네"

 

"약속했잖아"

 

"그런 거,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철남아, 내 얼굴 똑바로 쳐다봐"

 

"어"

 

"신경 너무 쓰지 마, 지난 일에."

 

"나는 철남이 니가 그런 표정 짓는 거 보다 웃는 게 더 좋아"

 

"....."

 

"이제 됐지? 자, 가자"

 

앞서서 나서는 미호를 따라 학교로 출발했다.

 

저 녀석, 저런 표정을 짓다니.

 

너무나도 흔쾌한 용서의 말에 따지고 들고 싶었는데.

 

저렇게 밝게 웃어 버리니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철남아"

 

"어"

 

"나도 말야, 정말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워, 언제나"

 

"니가 왜 미안한데"

 

"신경쓰지 마"

 

"...싱겁게, 미안한 사람이 할 말이냐?"

 

"자자, 신경쓰지 말고. 일로 와 봐 옆으로"

 

미심쩍어하며 미호의 바로 옆으로 가서 서자, 미호는 내 팔을 제 품에 감싸 안는다.

 

내 팔을 미호의 체온이 감싸고, 팔을 당기면서 웃는 미호의 웃음소리에 귓가가 간지럽다.

 

"...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미안하다면서, 이 정도도 못 해줘? 짠돌이"

 

"어... 그래. 미안하니까 어쩔 수 없네"

 

"그렇지?"

 

"어, 진짜 어쩔 수가 없구만 정말로"

 

심장을 억죄고 있던 내 모든 고민이 물에 녹은 듯이 사라진 기분이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해방된 심장이 힘차게 고동친다.

 

 

 

 

 

 

 

 

그렇게 미호와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 2학기.

 

그 녀석과 함께하는 시간은 너무나 빨랐다. 어느새 11월이 되었다.

 

공부하랴 일하랴 정신없다가도 가끔씩은 성규 얼굴이나 보러 놀러가고는 하는 일상.

 

매일 매일이 비슷하게, 두근거리는 일 따위는 없이 기계적으로 보내던 방학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바뀐 것은 미호가 있고 없고 단 하나뿐인데 말이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철남아 집에 가자"

 

"애들이랑 놀러 안가나? 들어보니까 조만간 빼빼로데이랍시고 머 초콜렛 사고 머 사고 한다던데 민지랑 애들이랑"

 

"걔네들 그렇게 설레발치는거 머 1년 2년 보는 것도 아니고 뭐, 저러다가 지들끼리 초콜렛 다 처먹고 살이나 왕창 찌니까"

 

"친구들 다 살 찌는데 니 혼자 피하시겠다? 너무하는 거 아니냐. 야! 김민ㅈ“

 

"아 조용히 해 이철남 ㅋㅋ 미친놈아"

 

"그럼 빨리 집에 가자 나 오늘 빨래 말려야 된다. 저녁에 비 온다더라"

 

"그래 빨리 가자"

 

 

 

 

 

집에 도착해서 빨래거리를 대충 치우고 저녁을 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하긴 11월이면 이제 겨울이 다 됐다.

 

확실히 해가 짧아졌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나는 국 간을 보고 있었다.

 

달칵

 

오, 아버지 왔네.

 

타이밍 좋은거 보소, 마침 국 간도 딱 맞는데.

 

 

 

 

 

 

""잘 먹었습니다""

 

저녁 상을 치운다.

 

오늘 저녁은 시래기국에 김이랑 삶은 계란이었다.

 

"아 진짜 잘 먹었다 야"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그러노. 국 하나만 끓이고 계란만 삶은 건데"

 

"그래도 국 진짜 맛있던데. 어쨋든 니가 끓인 거 아니냐"

 

"안 그래도 오늘 국은 좀 자신 있었거든 ㅋㅋ 간 좀 잘 맞더라"

 

"우리 아들 장가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마누라 요리 못해도 니가 하면 되겠네"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나 이제 중학생인데 그런 얘기해도 아무 생각도 안 든다"

 

"그런가? 그래도 일찍이 생각 많이 해 놓으면 좋잖아 어떻게 살지 라던가"

 

"그런 얘기는 취직 얘기할 때 주로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결혼 어쩌구 하면 뜬금없잖아"

 

"아니 뭐, 지금 시즌이면 니들이야말로 그런 주제 많이 얘기할 때 아니냐? 연애같은 거"

 

"아... 빼빼로 데이라고? 왜 그러나 했네 난 또"

 

"그래, 임마. 빼빼로 줄 사람은 좀 있나?"

 

"아니, 그런 거 없는데. 애초에 돈 아깝기도 하고"

 

"뭐? 아니 야, 그럼 미호는?"

 

"어, 어? 아니 왜 거기서 미호가 나오는데, 그냥 학교만 같이 다니는데"

 

"하.... 야, 니 인생에 걔 만한 애가 다시 나타날 거 같냐? 무슨 맹구새끼처럼 구노"

 

"아니 내가 뭐 어때서 그러는데, 나 서른살 되기 전에 미스코리아 잡아서 장가갈 거거든?"

 

"...그래, 이나 닦으러 갈란다."

 

 

 

 

 

아버지가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해 버려서 영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

 

빼빼로 데이라니, 그런 걸 신경썻었던 적 따위는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도 괜히 그런 화제를 꺼내는 놈들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넘어갔었다.

 

'아 ㅋㅋ 그런거 다 상술인데 이 자본주의의 노예새끼들아'

 

미호가 친구들이랑 수제 빼빼로 따위를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약간 안심하거나 한 적 따위는 없다.

 

사실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한다. 미호가 누구한테 빼빼로를 줄 지가.

 

어쩌면 지금쯤, 미호 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누구한테 빼빼로를 줄 지 말이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다. 빼빼로를 단 한명에게만 주기에는 사귀는 것도 아닌데다가 너무 부끄럽고,

 

그렇다고 반 친구들한테 빼빼로를 다 돌리면서 미호에게만 슬쩍 다른 빼빼로를 주자니,

 

그 모든 빼빼로를 다 사서 쓰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뼈아픈 지출이다.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미호는 아마도 빼빼로데이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겠지.

 

하지만, 미호네 집은 여유가 있으니까, 나는 아마 못 해도 반 애들이 죄다 받는 기본 빼빼로라도 받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거기에 대한 답례로 미호에게만 빼빼로를 주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지는 않은가...?

 

음... 아니, 집어치우자. 잠이나 자자 이철남.

 

미호는 어차피 빼빼로 따위는 썩어터지게 받을 거다.

 

아마 싸구려 빼빼로 하나쯤 더 받아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겠지.

 

핀토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오늘의 푸쉬업 10세트를 마친 나는 쥐 죽은 듯이 잠에 들었다.

 

 

 

 

 

 

"빼빼로 좀 받았나 박민성?"

 

"1개"

 

"나도 1개 ㅋㅋㅋㅋ"

 

"아... 죽고 싶다"

 

"나도"

 

성규와 민성이는 사이좋게, 미호가 반 전체에 돌린 빨간색 기본 빼빼로만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야, 니들 그게 어디냐. 나는 미호가 반 애들 숫자 헷갈렸다면서 주지도 않았는데"

 

"ㅋㅋㅋㅋㅋㅋ ㅄ"

 

"아? 지금 0개따리가 말 거는 거냐? 버르장머리가 없노, 이러다 겸상도 하자 할 듯"

 

씨발놈들이.

 

"야 이철남! 집에 가자"

 

"아 나 가볼게"

 

"저걸 따라간다고? 뱉도 없는 새기"

 

"낼 봅세"

 

 

 

 

 

 

 

"자 이철남, 숫자 헷갈려서 미안해. 여기 빼빼로"

 

문방구에서 파는 100원짜리 대왕 빼빼로였다.

 

"......"

 

아니, 뭐 특별한 취급을 기대한 건 아니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까먹고 못 줬던 거 사과하려는 거면 최소한 똑같은 건 줘야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내가 감히 미호에게 기분 나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미호는 자랑스럽게도, 시재중학교 빼빼로 수령 랭킹 1등을 기록했었던 것이다.

 

0개따리가 감히 말을 걸어서 따질 수는 없었다.

 

"...고맙다"

 

"그래 철남아. 그래도 너 챙겨주는 건 이 누님 뿐이지? 너 오늘 빼빼로 한개도 못 받았다면서"

 

"놀리지 마..."

 

"너무 상심하지마 이철남! ...주변에 잘 찾아보면 너 정말 좋아하는 사람 하나쯤은 무조건 있어"

 

"하, 그래도 그 말은 고맙네. 들어가라 미호야, 내일 보자"

 

"그래 내일 봐 이철남"

 

들어가서 이거라도 먹어야지.

 

 

 

 

 

 

 

 

빼빼로 데이를 맞아서 나는 굉장히 긴장해 있었다.

 

철남이가 과연 빼빼로를 받을 수 있을 지 없을지가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1교시, 2교시, ...

 

손에 땀을 쥐며 기다렸던 나의 기대는 보상받았다. 철남이는 단 한개의 빼빼로도 받지 못했다.

 

"아 좀 그만놀려"

 

짜증난 표정이 꽤 귀엽네.

 

하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은, 내가 반 전체에 돌렸던 빼빼로를 자기 혼자만 받지 못 했던 순간이었다.

 

어미새가 주려던 모이를 다시 가져가서 자기가 먹어버리면 저런 표정을 하려나, 싶은 얼굴이었다.

 

물론 숫자를 잘못 센 것 따위는 아니었다. 나는 철남이에게 따로 빼뺴로를 주고 싶었으니까.

 

철남이와 집에 가는 길에 딱 하고 제일 비싸고 커다란 빼빼로를 챙겨주면 너는 어떤 표정을 할까?

 

하지만 가방을 열어본 나는, 철남이에게 주려고 챙겨놨었던 빼빼로를 까먹고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아, 망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철남이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수퍼에 들러서, 100원짜리 봉을 하나 줄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저런 표정으로 하는 고맙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저런 빼뺴로를 준 것은, 반쯤은 부끄러웠기 때문에.

 

미리 챙겨놨었던 빼뺴로를 준다면, 받았던 것 중에 하나라고 할 생각이었다.

 

빼빼로를 하도 많이 받았던지라, 실제로 하나 빼서 줘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외의 사태에 나는 당황해 버려서 그런 생각도 못했다. 

 

사실 했어도 남한테 받은 걸 철남이에게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리고 나머지 반은...

 

 


철남아, 그거 알아?

 

그런 말이 있대.

 

빼빼로 데이에 선물하는 빼빼로의 봉의 숫자.

 

그것은, 그 사람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숫자.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여러 가지의 생각을 가지겠지.

 

가끔은 감사를, 가끔은 짜증을 느끼고, 가끔은 놀라기도 하고...

 

그리고, 빼빼로 과자의 크기는...

 

그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 내가 가지는 감정의 크기.

 

그냥 빼빼로는 조그만 봉이 여러 가지 들어있지.

 

사람은, 특별하지 않은 그저 남에게 여러 가지의 감정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 하나하나는 결국 그렇구만, 하는 수준 이상으로 커지지는 않는 거야.

 

네게 내가 건네준 그 100원짜리 대왕 빼빼로.

 

내가 너에게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하늘만큼 땅만큼 커다란 이 마음.

 

그것은...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방에 들어와서는 이불에 파묻혀서 마구 뒹굴었다.

 

아, 덧붙이자면 철남이에게 주지 못했던 그 빼빼로는 핀토랑 맛있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