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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게 열기를 내뿜는 실외기.

 

내 눈을 바라보는 미호의 물기 띈 눈빛.

 

필사적으로 나를 안는 가냘픈 두 팔.

 

'확인하게 해 줘.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어제의 일을 다시 떠올리고는,

 

"...어헣"

 

실실 올라오는 웃음을 주체하기가 힘에 부쳤다.

 

드디어.

 

14년의 시간을 넘어서 드디어 미호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철남아, 나도 너를 사랑해'

 

"으힣"

 

아니지. 이렇게 마냥 멍청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어제 해야 했었던 일이, 예기치 못한 해프닝으로 오늘로 미루어진 거다.

 

무슨 영화도 아니고, 나는 애초에 단 하루 만에 미호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않고 있었기에,

 

원래의 내 계획대로라면 어제 하루는 이 근처의 하숙집을 잡는 데에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제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내 고백 이후에 한참을 울던 미호가 자기도 똑같은 마음이었다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하고 나서 나는 미호를 일단 집으로 바래다주었고,

 

그 때는 이미 시간이 늦어 버려서 난 근처의 찜질방에서 대충 하루를 보냈다.

 

찜질방의 딱딱한 바닥에서 자느라 살짝 찌뿌둥하던 몸을 대충 펴준 후, 나는 예정대로 하숙집을 찾으러 떠났다.

 

 

 

 

 

 

 

"그러면 앞으로 두 달 반 정도 같이 살게 되는 거네, 학생~"

 

"네, 이번 방학 끝나기 전까지만 잠시 신세 지는 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미호네 집에서 대충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어느 한적한 골목의 하숙집에 한동안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번 일을 위해서 그 동안 모아두었던 돈의 상당량을 현금화해서 가져왔다.

 

연락도 없이 다짜고짜 나타나서는 빈 방을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어이없는 표정을 하시던 아주머니에게, 나는 묵직한 현찰을 꺼내 들이밀었다.

 

‘학생,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그러는 게 어딨어? 경우가 없어도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그렇게 대금을 치룬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한 아주머니를 따라서 앞으로 신세를 질 나의 방으로 들었다.

 

"오... 깔끔하네요"

 

"그렇지, 이 동네 학생들은 전부 착하거든~ 이 아줌마가 치울 것도 없이 다 치워버리고 나갔어"

 

그렇구나, 견실한 친구들이 많은 동네인가 보다.

 

 

 

 

 

 

 

"식사 시간은 이렇게 돼 있고, 시간 맞춰서 거실로 나오면 돼"

 

"나머지는 너무 어지르거나 물건 부수지 말고,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고"

 

"말 안하고 사람 막 데려오고 그러지 말고"

 

"그거만 지켜주면 웃으면서 볼 수 있겠지? 이거만 지켜주자 학생~ 그럼 아줌마 나가볼게"

 

아주머니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고 나서, 나는 바로 내 자리에 드러누웠다.

 

예정이 틀어져서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비네. 너무 일정을 널널하게 잡았나 보다.

 

일단 앞으로의 여름 방학 동안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버지에게는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이번 방학은 여기서 보내겠다고 미리 말해놓았다.

 

아마도 걱정은 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신경은 쓰일지도 모르겠네.

 

조금 있다가 나가서, 잘 되었으니 걱정 말라고 전화라도 한 통 해야겠다.

 

그리고, 이제 남는 시간은...

 

원래대로라면, 미호를 찾는 데에 써야 했을 시간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의미가 없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호를 찾아가서 내 방학이 끝날 때까지 찰싹 달라붙어있고 싶은 맘이지만,

 

미호에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다. 돈을 최대한 모아야 된다고 한다. 날 만나고 싶다고 해서 일을 놓을 수는 없는 거다.

 

어제 미호와 헤어지기 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에게의 사과. 그 동안 있었던 일들. 푸념들. 보고 싶었다는 수줍은 고백.

 

나는 그동안 솔직하지 못했던 기분들을 풀어내는 미호의 모습에 웃음이 실실 나다가도,

 

내심 앞으로 미호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미호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계속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낮밤으로 공장과 편의점 일을 번갈아 하느라 아무런 시간 여유가 없었지만,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 보니 그런 상황도 끝이 났고, 이제는 공장 일만 하고 싶다고 한다.

 

일이 끝나면 내 얼굴을 보고 싶다나 뭐라나.

 

나로서는 뭐, 마냥 좋은 일이었다. 나는 미호가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일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말릴 생각이었으니까.

 

그 다음 미호는 현재 자신의 집 상태에 대해서 대충 말해주었다.

 

빚은 꽤나 큰 금액이 남아 있었다.

 

부모님도 미호도 열심히 일에 전념하는 중이지만, 그렇게나 무리를 해도 앞으로 4,5년은 더 필요했을 거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사코 거부하려는 미호에게 반쯤은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는 헤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미호가 공장 일을 하는 시간 동안에는 나도 일을 하고, 저녁 이후에 만나는 것이 좋겠다.

 

세 명이 네 명이 되는 것만으로도 저 쪽에는 상당한 임시 수입이 되겠지.

 

미호는 앞으로 며칠 간 공장에 휴가를 내고 그 변태랑 결판을 내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그 사이에 이 주변 인력사무소라도 알아보도록 해야지.

 

얼굴만 팔아 두고 미호와 함께 다니도록 해야겠다.

 

그런 변명으로 미호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을 계획했다. 좋아.

 

그럼 ‘왕변태한테서 돈이나 한 탕 잔뜩 뜯어내서 미호랑 먹고 마시기‘ 작전에 들어가 볼까.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 아버지에게 어제오늘 일을 보고하기 위해 잠시 하숙집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때.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응?"

 

‘미호‘

 

바로 최근 김미호에서 미호로 바꾼 내 여자친구의 등록명으로, 전화가 왔다.

 

 

 

 

 

 

 

 

 

 

 

 

 

뚜루루ㄹ 삑

 

"어, 미호야"

 

"철남아아~ 히힣"

 

우와, 평소 목소리랑 엄청 다르네.

 

길거리에서 지들끼리 애교부리는 커플들 보면 꼴 보기 싫었는데, 내가 당해 봐도 역시...

 

좋다.

 

인간들 그러는 이유가 다 있었구나.

 

"너 목소리 뭔데 김미호. 웃기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해"

 

"야, 내가 말을 어떻게 하든 뭔 상관이야"

 

"뭔 상관이냐니, 내가 니 남친인데요 이제"

 

"...그렇지, 우리 이제 사귀는 거지"

 

당연하다.

 

"말했잖아, 나 이제 너 절대 안 놓칠 거라고. 너 싫다 해도 안 들어줄 거다, 죽어도 안돼"

 

"멍청이"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한 건데? 나 아버지한테 잠깐만 전화하고 내가 전화할랫는데"

 

"아니, 나... 니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래."

 

사실 나도 네 목소리 듣고 싶었어, 미호야.

 

"그... 어제는 잘 잤어?"

 

"어, 뭐. 어제 근처에 보니까 찜질방 있길래, 거기서 하루 잤지"

 

"뭐? 너 그런 데서 잔 거야? 난 너 숙소 있는 줄 알았는데... 말했으면 우리 집에서라도 재워줬을 텐데"

 

"아니, 그렇게 뜬금없이 들이닥쳐서 어떻게 신세를 져, 괜찮아. 오늘 하숙집 잡았어"

 

"정말로 이번 방학동안 여기 있으려고? 그래도 아저씨 봐야지..."

 

"아, 괜찮아. 아버지 얼굴 질리게 봤어"

 

사실 아버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호와 있고 싶은 거다. 4년 동안이나 못 봤다고. 이 정도 불효는 좀 용서해 줬으면 한다.

 

"아, 아빠 하니까 생각난 건데, 어제 아빠한테 니 얘기하니까 언제 한번 우리 집으로 찾아오래"

 

"진짜...?"

 

"응, 우리 아빠 철남이 너 오랜만에 만나서 한잔 하고 싶다고 그러시던데?"

 

아, 나 술 잘 못 마시는데. 큰일 났네.

 

미래의 장인어른 앞에서 실수를 할 수는 없잖아.

 

"으아..."

 

"ㅋㅋ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우리 아빠 술 사실 엄청 약하거든"

 

"그건 좀 다행이네..."

 

술에 취해서 거동이 힘 드신 아저씨를 완벽하게 보필하는 작전으로 가야겠다.

 

"음... 최대한 빨리 가 볼게. 너 공장 일 다시 시작하기 전에."

 

"그래? 좀 천천히 생각해도 되는데? 여름 방학 끝나기 전까지만 와"

 

하긴 뭐, 너무 서둘러서 쳐들어가는 것도 당황스러울 만하다. 미호네 집에도 사정이 있을 테니.

 

"그래그래"

 

"...철남아"

 

"그래"

 

"철남아아~ 철남앙"

 

"...갑자기 왜 이래, 너"

 

미호가 말하는게 아까부터 영 이상하다.

 

계속 이래줬으면 좋겠다.

 

"철남아~ 너... 내 번호 뭐라고 저장했어?"

 

응?

 

"니 번호? 그건 갑자기 왜"

 

"나 궁금해, 니가 나 뭐라고 저장했는지"

 

"...미호."

 

나로서는 조금 용기를 낸 저장명이다. ‘미호‘라니, 지금 봐도 부끄럽다.

 

14년 동안이나 ‘김미호‘ 였는데. 우리 관계가 한 걸음 나아간 걸 보여주는 것 같아 좋으면서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를 못 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려나.

 

저장명을 볼 때마다 괜시리 수줍게 되는 것이다.

 

"에이, 그게 뭐야 너어"

 

"응? 맘에 안 들어? 그럼 넌 나 뭐라고 저장했는데"

 

"하트 우리 철남이 하트하트뿅뿅!"

 

아니, 세상에...

 

“아니, 그게 무슨...”

 

"이철남 너어, 왜 내 이름에 하트 안 붙이는 건데, 응? 혼날래?"

 

"그... 굳이?"

 

"...."

 

"...그러면, "우리 미호" 이거 어떠냐, 괜찮지?"

 

"하트."

 

"아니아니, 난 지금 게 맘에 드는데"

 

"하트으."

 

"으..."

 

"하트 붙여줘, 철남아. 나 이렇게 부탁할게"

 

어쩔 수 없다. 미호가 이렇게까지 원한다면야,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

 

"알았어, 앞뒤에다 하트 붙여서 ‘우리 미호’ 해 놓을게"

 

"사랑해"

 

"...나도"

 

별로 하고 싶은 이름은 아니지만, 미호에게는 왠지 이길 수가 없다.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자, 당황스러운 사태로 잔뜩 피가 올랐던 머리에서 핏기가 가신다.

 

흥분했던 것이 살짝 가라앉고 나자 새삼 싸늘해진 공기를 실감했다.

 

"아, 추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와 버린 내심.

 

"...철남아, 지금 집 밖이야?"

 

"응, 나 하숙이라서... 안에서는 통화하기 좀 그럴 것 같은데."

 

"아... 그럼 시간 꽤나 늦은 거 같은데 슬슬 끊을래?"

 

어느새 주위는 완벽하게 캄캄해져 있고, 인적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날짜가 바뀔 시간이 지났겟지. 상식적으로 슬슬 전화를 끊어야 할 시간이다.

 

"...아니."

 

하지만 나는 아직 통화가 하고 싶었다.

 

"조금 쌀쌀하다 생각하긴 했는데, 뭐 별로 그렇게 추운 정도는 아니고"

 

"...그리고 아직 니 목소리 조금만 더 듣고 싶어"

 

"....응"

 

뭐, 조금만. 조금만 더 하고 들어가면 되잖아. 

 

 

 

 

 

 

"...."

 

"미호야, 자냐? ...자나 보네."

 

아까부터 점점 미호가 대답하는 게 시원치 않더니, 이 녀석 졸고 있었나 보다.

 

그러다가 이제 완전이 KO선언을 한 거구만. 하긴 피곤할 만도 하다. 슬슬 끊어야겠네.

 

"...미호야, 잘 자."

 

 

그러면 나도 한 숨 자 보도록 할까.

 

나는 하숙집의 문을 살짝 열어서,

 

"...."

 

열린 문 뒤에는, 주인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어, 아주머니 아직 안 주무셨어요? 아, 혹시 통화하는 소리 다 들렸어요? 정말 죄송해요. 담부터는 더 멀리 가서 통화할게요"

 

"...학생, 지금 몇 시 인줄 알아?"

 

"네? 지금 한 뭐... 한시 반... 두시 정도 아니에요?"

 

"다섯 시야"

 

"네?"

 

"...학생, 최근에 여친 생겼어? 완전 신나서, 우리 방까지 다 들리더라~ 좋을 때야. 부럽다 부러워."

 

"그래도 다음부터는 조금만 신경 써서 통화하자, 알겠지?"

 

"네..... 저기 아주머니, 저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응, 뭔데?"

 

"지금 집에 일어난 사람 아주머니뿐이죠?"

 

"애들 방학인데 한참 남았지, 일어나려면~"

 

다행이다.

 

"그러면 저 부탁인데... 이 얘기는 저희 둘이서만 아는 걸로 해 주세요."

 

"그럼~ 아줌마 완전 입 무겁잖니! 절대 아무도 모를거야"

 

"고맙습니다. 다음부터는 신경 써서 전화 할게요"

 

"그래~"







“으하암”

 

웅성 웅성

 

그리고 잠시 쪽잠을 잔 후 아침밥을 먹으러 나가자,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며 숙덕거리는 것이 아닌가.

 

"?"

 

내 별명이 "아침 성시경" 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내가 눈치 챈 것은, 하루가 더 지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