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3316232

이전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3829139

--------------------------------------------------------------------


서약식은 바로 다음날 치러졌음.

뭐, 거창하게 이야기는 했지만 당시 상황상 그렇게 대단하게 준비를 할 수도 없으니 의외로 객관적으로 보면 심플한 편이었지.

굳이 따지자면 오드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드레스를 입고, 화장도 빡세게 하고, 어째 딸 시집 보내는 느낌으로 뿌듯해 하는 좌우좌를 보며 어이없어하기도 하고 하느라 정신이 없긴 했지만, 그 정도야 뭐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고.

그와는 별개로 '그 배경'을 실물로 보게 된 데다 자기가 당사자라는 점에서 또 참 기묘한 감개를 느끼면서 화창한 하늘을 배경으로 서약이 끝남.

혹시 서약용 대사라도 필요한가, 근데 리제 대사는 처음 야스할 때 써먹었는데 같은 하잘것 없는 고민도 있긴 했지만 그쪽은 라비아타가 주례 비스무리한 역할을 해줘서 별 필요는 없었음.


오히려 그 후의 피로연 쪽이 더 본방이라면 본방이었는데, 옷이야 이브닝 드레스로 갈아입어서 한결 편해졌다지만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랑 인사 나누는 게 또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임.

어차피 다들 한 배 살림인데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덕담이라 마냥 한 귀로 듣고 흘릴 수도 없네.

그 와중에 라비아타를 대표로 축하는 진심으로 해 주는데 슬슬 2세 생각은 안 하냐는 압박을 은연중에 넣는 부류도 은근슬쩍 늘어나서 뭘 먹지도 않았는데 체할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


정작 소완이 특히나 힘을 주고 만들어낸 진수성찬을 맛나게 퍼먹는 건 자기가 아니라 마냥 신난 브라우니나 지니야 등이라는 게 어찌나 불합리한지.

어찌저찌 인사가 끝날 즈음에는 설렘의 조각까지 피로 아래로 가라앉아 버려서, 그냥 자빠지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남았었는데…


홀의 거의 끝자락에서 스치듯 지나간 암갈색 - 자신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리제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하고 종종걸음으로 그쪽을 따라감.


*   *   *


이런저런 일을 거친 끝에 '지금의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곤 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리제는 여전히 바이오로이드로서의 몸(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감정)과 인간으로서의 인격이 부자연스럽게 결합해버린 존재였어.

그 영향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 사령관에 관련된 부분을 제하고 본다면 다른 바이오로이드 - 특히 페어리 시리즈와의 관계에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지.


요컨대, 컴패니언이나 페어리 시리즈처럼 유전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기종이 서로를 생산된 순서와 관계없이 자매로 인식하는 현상이었음.

물론 리제의 얀데레 기질에 비하면 정말 티도 안 날 만큼 흐릿한 감정이기도 하고, 인격 모듈로 학습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막연하게 친근감이 든다 정도였긴 했지만, 사령관과의 문제가 적당히 마무리된 후로는 그쪽에도 마음 쓸 여유 정도는 생겼으니까.

다프네랑은 사령관이 앓던 와중에 이래저래 어울리기도 했었고, 아쿠아는 진즉부터 좌우좌 패밀리에 끼어서 안 무서운 리제 언니 운운하며 잘 따르게 되었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원작 리제와는 -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 되었던 예의 사건 이후로는 엮일 일이 없었음.


부관으로 일하면서 부서가 너무 크게 갈려버린 것도 있고, 리리스가 중간에서 열심히 방파제로 뛴 - 덕분에 원작처럼 살벌하게 티격태격하면서도 슬슬 미운정이 드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까지는 이 리제는 아직 모르고 있었어 - 것도 있었지만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원작 리제도 딱히 리제에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였음.


그래왔던 걸 이제와서 접근해서 뭐 하게. 기만질 밖에 더 되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제는 원작 리제를 따라잡고야 말아.


- ……….


원작 리제는 특유의 반쯤 뜬 눈으로 냉랭한 시선을 보내고, 리제는 초조해하면서도 그걸 피하지 않은 채 마주보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 뭐야.


이 이상 길게 부르기도 싫다는 듯 짧은 한 마디로 대화가 시작됨.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고르고 고른 끝에 나온 대답은 꽤 막연한 것이었음.


- 당신이 옳았어요.


사랑을 부정했던 자신을 부정한, 그 말이 없었다면.


- 이제 와서?


그러게요.

대놓고 들으니 할 말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굳어있자니, 리제는 들으라는 듯 코를 울린 다음 돌아섬.


- …미친 동형기 따위에게 언제까지 밀릴까 봐.


여전히 친밀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달지, 오히려 적의로 충만하다고 해야 할만한 반응이었지만.

어쩐지 이걸로 서로에게 결론이 지어졌다는 느낌도 들었음.


--------------------------------------------------------------------


이제 보니까 외전이랑 0화까지 포함하면 지난 편이 50번째고 0화는 빼면 이번 편이 50번재였스빈다

몬가 서약에 어울리는 편수 같아서 뿌듯하빈다

여기까지 쓸 수 있었던 건 9할이 라붕이 분들의 감상과 추천 덕분이빈다



다음편은 아마 원작 리제 이전이빈다

원작 리제가 대놓고 칼질을 안 하는 이유라던가가 나올 예정이빈다


리제 외전 : https://arca.live/b/lastorigin/23932066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3993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