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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헬의 무덤을 점거했던 철충도 완전히 처치했고, 그 와중에 자폭 같은 뒤끝도 남겨두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덕분에 남은 것도 많고.

자연스럽게 바이오로이드 사이에서 불어온 탐험 열풍에 남국의 바람까지 얹혀지며 더더욱 떠들썩해지는 와중에 리제는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음.


그러니까……. 뭔가 묘하게 자기가 오르카 호로 돌아가려는 걸 다들 막고 있지 않아?


딱히 대놓고 막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랄까, 베이스 캠프(?) 쪽에 할 일을 이것저것 만들어놔서 그냥 돌아가야지 하는 의식 자체를 하지 않게 유도한 방식이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로크가 '오르카 호에 접근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다'는 말을 들은 순간 퍼뜩 깨닫게 되었던 거야.


일단 의식하고 나니까 줄줄이 따라오는 수상쩍은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

계속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뭔가 필요하다는 낌새만 보여도 칼같이 가져다주는 세이렌이라거나.

그 닥터가 로크에게 그렇게나 흥미를 보였으면서도 회로 교체가 끝난 후로는 얼굴 한 번 안 비추고 있다는 점이라거나.

라비아타를 포함한 지휘관 개체들이 철충을 일소하고 무덤을 돌파한 이후로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있다거나.

해적단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의상이 얌전한 건… 뭐, 하렘 분위기가 아닌 탓도 있긴 하겠지만. 아무튼간.


물론 딱히 자기한테 손해가 될 일을 꾸미고 있을 거라거나 하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지만, 어느 의미로는 깨닫게 된 것 자체가 문제였어.

서프라이즈 파티를 미리 알아채버렸을 때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덤으로 사령관이랑 같은 침대에서 잠들지 못하게 된 지도 사흘이 넘었다는 것까지 의식하고 나니 초조함은 배가 되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나 판이 깔렸는데 어깃장을 놓는 선 성격상 무리.

이리 재고 저리 재 본 끝에 리제는 그냥 아이들 인솔에나 신경쓰기로 했어.

좌우좌가 결국 진조 탐험단을 꾸린 채 돌격하…… 려다 얼마 가지도 못해서 길을 잃어버린 걸 그리폰이 꿀밤 한 대와 함께 주워오기도 하고, 눈을 빛내면서 코코넛을 먹었다가 생각보다도 미묘한 맛에 크게 실망한 알비스랑 먹고 죽는 것만 아니면 뭐든 문제 없다는 더치 걸을 비교하면서 참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로크에게서 외면당한 후에도 공중 탐사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트리아이나가 아쿠아의 비행 유닛을 빌려서 잠수함에 장착하려다가 택도 없는 출력에 크게 실망한 끝에 자신의 날개까지 빌리러 왔다가 단단히 혼나기도 하고.

그렇게 또 하루가 거짓말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다시 밤이 찾아옴.


- 고생이었겠네.


통신으로 미주알고주알 오늘 있었던 일을 들은 사령관은 쓰게 웃어 보였어.


- 당신은요?

- 로크의 안내를 받아서 금고를 돌아다녔어.


자세한 이야기를 회피하려는 것을 느낀 리제의 인상이 살짝 흐려졌지만, 통신의 노이즈 덕분에 그 사령관도 눈치채지 못한 채 마무리됨.

마지막에 보고 싶어요, 라고 작게 속삭인 것에 사령관이 나도. 라고 대답한 것이 위로라면 위로였지만 - 어쩐지 열대야 속에서도 시린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음.


*   *   *


결국 리제가 사령관과 다시 만난 것은 날짜가 지나고도 다시 저녁 때가 지난 후의 일이었음.

로크에게 올라간 채 움직여 도착한 곳은 수평선이 뚜렷하게 보이는 해안의 절벽.

그 로크조차 미련 없이 자리를 떠서, 어느새 주변엔 둘 밖에 남지 않았지.


- 둘 뿐인 건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밤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던가. 하고 소박하게 웃는 모습에 간만에 입이 멋대로 단어를 내뱉음.

외로웠어요. 하고.

농처럼 가볍게 틱틱거릴 생각이었는데, 사령관의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쳐지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표정 관리에 실패했나보다 싶었지.


- 미안해.

- 아니요. 제가 보기에도 제 쪽이 귀찮게 굴고 있는 걸요.


감정 조절을 못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 정도를 넘어서 패시브로 깔려버린 수준이고.

자조적으로 웃는 동안 사령관은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다가 표정을 다잡고는 성큼 다가옴.


- 사실, 조금 오래 전부터…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오가는 감정은 그렇게나 강렬한데, 불려야 할 이름은 너무나도 흐릿했으니까.


당연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서 리제가 사령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음.


- 연인… 이라고 해주셨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그러니까 이 말도 - 내심은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재촉에 가까웠고,


- 부족해. 그것으로는.


사령관 역시 아무런 오해 없이 품에서 부드러운 천에 감싸인 상자를 꺼내들었지.


- 리제. 나는…

 우리의 사랑에, 그것이 이뤄낸 관계에.

 누구나 이해할 만큼 확실한 이름을 주고 싶어.


세이렌에게 골라줬던 것과 어딘가 닮은 디자인의 핀.

심플하면서도 기품있는 - 아마 로크와 함께 찾아냈을 - 반지.


- 내 아내가 되어주겠어?


'지금까지랑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요.'

'백전연마의 사령관님이 왜 그렇게 긴장을 하셨을까.'

'그 전에 좀 더 자기한테 신경을 써 달라고요.'


가벼운 대답은 수도 없이 떠올랐지만 앙다문 입술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고

진지한 대답은 단어가 그럴듯한 문장을 이루기도 전에 흐르는 눈물에 씻겨나가고야 말아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리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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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스빈다. 서약이빈다.

사실 리오보로스에서 서약하는 건 막간편 즈음부터 정해둔 사항이라 나름 밑밥을 열심히 깔았스빈다.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3879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