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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87 로크는, 현재 사소하면서도 무시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사고회로에 가해지는 무의미한 부하와,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불합리에 대한 거부감.

좀 더 직접적으로 줄여 말하자면, 불편했다.


- 흠. 방출한 전력의 제어는…… 과-연. 이런 식인가. 괜히 앙헬의 비장의 수가 아니었네.

- 방금의 작업은 필요한 공정이었습니까? 실로 의심스럽군요.

- 숨돌리기야, 숨돌리기. 능률을 높이기 위해선 필요한 과정이라구~


회로를 교체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구조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던 바이오로이드 여성 - 닥터도.


- 후. 후. 후. 칠흑의 날개를 펼친 사신이여. 그대에게는 세계의 진실에 접할 자격이 있는 것 같군.

 지금이라면 특별히 이 프린세스의 권속으로 들어올 기회를 주겠노라!

- ………….

- 힉?!


의미 불명의 수사만 잔뜩 붙인 말을 늘어놓더니, 자신이 잠깐 시각 센서를 빛내는 것 만으로 기겁하며 도망친 소형 바이오로이드도.


- 까마귀야. 나랑 팀을 만들 생각은 없어? 너와 나와 소우피쉬라면 육해공을 전부 제패하는 것도 꿈은 아닐 거라고!

- 흐음…… 코르부 공. 혹시 연극에는 관심이 없는가? 공이라면 능히 한 시즌을 통괄하는 빌런을 담당하기에도 손색이 없다고 보네만.

- 혹시 저 AGS…… 앙헬의 유산…….

- 앙헬…… 로봇…… 오타쿠…….

- ……


자신을 비행형 유기 생명체의 이름으로 지칭하는, 자칭 탐험대장이라는 자도.

그 외에, 뻔히 인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돌아다니며 있는 말 없는 말을 주워섬기면서도 시선을 향하면 아무 일도 없는 척 지나가는 바이오로이드들도.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수 시간 전 까지의 이야기.

밤이 가까워지면서 대부분이 휴식을 위해 돌아간 지금,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필요한 간섭은 더 이상 없다.


――없을 터인데.

어째서 이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가.


"……."


고민 같은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붉은 안광이 몇 차례 점멸한 후, 검은 날개는 소리조차 삼켜버린 채 밤하늘로 빨려들어갔다.


*   *   *


"그래서, 절 찾아오셨다고요."

"유기 생명체라면 일반적으로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임은 알고 있습니다."


곤란하셨다면 사과드리죠. 하는 말에 바이오로이드 여성 - 시저스 리제가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저는 괜찮지만, 그이를 찾는 편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요?"

"당분간 오르카 호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기에, 부득이하게도."

"……?"


반응을 보아하니 이쪽도 전해들은 것은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의 선정에 오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미 시작한 대화를 그만두는 것도 낭비라는 점은 다르지 않을 테지.

그렇기에 로크는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제 회로를 교체했을 때―― 당연히 명령 순위에 조작이 가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군요."

"아."


말 그대로 회로만이 유기물질로 바뀌었을 뿐.

메모리와 행동 알고리즘, 그 모든 것이 '자신' 그대로였다.

객관적으로도 초고도의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으니 만큼 그 '닥터'가 있더라도 완전히 변조하는 것은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역으로 말하면 약간이나마 손을 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


그러나 사령관은 그리 하지 않았다.

따라서 로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현재의 상황이 불편했다.


"직전의 당신이 보인 반응에서 미루어보아, 이유에 짐작가는 것이 있으신 것으로 판단되는군요."

"……트리아이나가 아니라 제가 해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흠? 그 자칭 탐사대장과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달까 없달까……,"


난감하게 관자놀이를 몇 번 누른 후에야 대답이 나왔다.


"아무튼, 답은 간단해요.

그이 - 사령관님은, 로크 씨를 생명으로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있으니까요.

눈앞의 이득 때문에 당신의 의지를 왜곡하려 들 리 없어요."

"흠. 당신에 관해서는 사랑을 논하신 분이, 이 흑철의 덩어리에겐 존중을 베푸셨다는 것이군요."


맥락은 이해했다.

애정과 존중이 반드시 양립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상호 보완적으로 쓰일 수도 있으니까.

다만.


"하지만 제겐 생명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목적에 따라 제조된 논리 회로와 앙헬 공이 입력한 사명만이 있을 뿐이죠."

"유기체가 아닐 뿐, 사고하며 존재하는 입장에서 생명을 칭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 한들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생명이, 혹은 인격이나 감정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더 하등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원론적으로 보건데, 언제든 대체 가능한 대상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낮은 가치를 지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그 대답의 어디에 와닿는 점이 있었을까.

잠깐이나마 놀라움을 담았던 표정이, 이내 꽃이 피어나는 듯한 미소로 바뀐다.


"그럴지도 모르죠."


스스럼없는 긍정.


"하지만 그 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뒤따라온 부정.

그리 논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임에도, 내내 느껴오던 불편함은 어느샌가 씻겨나가 없었다.

그렇게 '이해'한 것을 확인하고자 나온 질문은, 로크가 보기에도 방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당신은 그 분을 사랑하시는군요."

"――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   *   *


다음 날.

사령관이 가장 먼저 택한 것은, 닥터와 스카디의 지시 하에 네오딤을 필두로 한 생체전기 능력자들을 총동원해 철충이 점거한 시설의 전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번거로운 수를 쓰시는군요.

확실히 금고의 내용물을 보존하기엔 유리하겠습니다만. 그렇게 큰 가치를 두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지금도 별 흥미는 없어.

하지만 이것으로 네 형제에게 감염 이상의 지원이 들어오진 않겠지."


어제의 자신이었다면 의미없는 행동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혹은 계약의 내용을 비틀어 이득을 취할 구석이 있는 지를 재검토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어쩐지 모르게 이어질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로크.

철충에 감염된 AGS는 기본적으로 원래의 개체보다 강해진다고 하지.

하지만 전투 기술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던데……."


감염된 형제를 직접 마무리지을 것인가, 혹은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볼 것인가.


'너는, 어느 쪽을 택하고 싶지?'


말 없이 들려온 메시지를 이해한 것이 어쩐지 유쾌해, 로크는 진심으로 웃으며 하늘로 치솟았다.


"당신에게는 절 가늠할 기회가 지나치게 부족했던 것 같군요."

"하루만에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 않겠어?"

"그렇다면 더욱 소홀히 할 수는 없겠지요.


――아무래도 오래 어울릴 사이가 될 것 같으니까요." 


*   *   *


그로부터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우레가 게걸스레 휩쓸고 지나간 잔해 속에서, 검은 사신은 자신과 똑 닮았던 무언가의 잔해를 디딘 채 번개로 물든 날개를 펼쳤다.

일견 장엄함까지 느껴지는 그 모습은 승리의 개가 같기도, 진혼의 의식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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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는 잡았지만 아직 이야기는 많이 남은 느낌이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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