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4207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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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년 3월 22(불명)일

시간은 정확하지 않으나  그리 배가 고프지 않으니 며칠 지나지 않은 상태겠지 22일로 적겠다.

아니면 머리가 드럽게 아파서 배가 고픈지 모르는 것일 수도.

어쨌든 정신을 차려보니 밋밋한 콘크리트로 된 방 안의 허름한 침대 위였다.

그놈들의 습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건 다행이나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을 때 방 한구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 구석에 누군가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붉은 긴 머리, 여자, 제식 전투복.

연합 훈련 때 본 적이 있다.

레프리콘이라고 불리던 바이오로이드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면 습격에서 나를 구해준 건가.

고마운 마음에 감사 인사를 해보지만, 대답이 없다.

안 들린 것인가 싶어 몸을 천천히 일으켜 보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거 빼곤 몸 상태는 괜찮은 거 같다.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번 인사를 해보지만, 허공을 쳐다볼 뿐 반응이 없다.

자세히 보니 눈에 생기가 없다, 죽은 눈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해 보면 레프리콘 같은 전투용 바이오로이드가 본대와 떨어져 있는 게 말이 안 된다.


... 탈영병인가.

일단 눈은 깜빡이고 숨은 쉬긴 하는데 허공만 응시하는 게 조금 무섭지만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는 것이 위험할 것 같진 않다.

머리가 이따금씩 아프다.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이 오늘은 여기까지 적고 이만 자야겠다.



2111년 3월 23일


PDA에 적혀있는 날짜가 23일이고 날이 밝았으니 깨어난 날이 22일이 맞는 거 같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두통은 덜하다.

잠에서 깨어 쓱 방안을 둘러보면 레프리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있다.


다시 한번 인사를 했지만, 반응이 없는 레프리콘은 뒤로 한 채 방을 살펴보니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지하 벙커다, 하긴 요즘에 콘크리트로만 지은 방이 어디 있겠는가.

벙커는 꽤 크고 환풍기나 발전기 같은 기초 시설과 화장실 같은 위생시설도 잘되어 있다.

화장실과 창고, 거실 그리고 방 2개로 이루어져 있다.

침대는 각방에 2개씩 있는 것을 보니 이 벙커의 주인은 4인 가족이었나.

거실 위로 나 있는 사다리를 타고 다락문을 열면 어느 주택가의 마당이다.

꽤 잘 살던 집인 것 같지만, 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어있는 걸 보면 무슨 상관일까 싶다.


주변의 풍경은 꽤나 살풍경이다.

높이 솟아 있었던 빌딩들은 부서져 내려있었고 도시는 불타고 있었다. 

이따금씩 멀리서 폭발 소리와 총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징집 직전에 뉴스에서 봤던 세계의 멸망 같은 소리가 와 닿았다.

위의 감상평은 집어치우고 일단 정비를 위해 다시 밑으로 내려와 벙커 안을 뒤져보면 통조림과 PDA, 종이 지도 같은 것들이 있었다.

종이 지도라니, 꽤나 이곳 주인은 철저했던 모양이다.

PDA를 켜보면 잘 작동이 된다.

주파수도 인터넷도 잘 잡히고 GPS도 문제없다.

이곳 벙커의 위치는 부산 북구 낙동강 근처.

여기까지 그 괴물들에게 밀렸다면 이미 대한민국은 멸망한 게 아닐까.


내 청춘의 수고는 어디로 갔나 생각하고 있던 도중 레프리콘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앉아 있는 레프리콘은 내가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미동도 없이 조용하다.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꽤 예쁘긴 하다... 가슴도 크고.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1년 반 동안 남정네들끼리 '부대'끼고 살았던 나로서는 자극이 심하다.

반응도 없는데 그냥 이대로.... 젠장.

한순간 어두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대로 손댄다면 도구 취급했던 미군 놈들과 뭐가 다른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뻗었던 손을 그냥 레프리콘의 머리에 한 번 얹고는 집어치웠다.

나중에 이 기록을 보곤 겁쟁이라 욕하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껏 욕하라지.


그나저나 인간의 3대 욕구 중 수면욕, 성욕 그 다음이 식욕이라 했던가.

정신을 차려보니 배에서 비명을 지른다.

일단 창고를 뒤져보면 통조림 따개와 스푼이 있어 눈앞의 통조림을 잡아 깐다.

내용물은 베이크드빈, 벙커 주인은 꽤나 서양식 입맛이었나 보다.

배고픔에 허겁지겁 먹다 보니 맛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맛있었던 거 같다.

한 통을 다 비우곤 약간의 허전함에 아쉬워하다 옆의 레프리콘이 눈에 띄었다.


잠깐, 바이오로이드도 밥을 먹지 않나?

레프리콘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미동도 없이 구석에 앉아만 있었다.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봐선 내가 자는 사이 뭘 먹은 거 같진 않았고 그럼 지금까지 공복이란 소리다.

허겁지겁 먹었던 내 모습이 창피해지는 순간이다.

저 레프리콘이 움직여 통조림을 깐다는 것은 상상이 안가니 그냥 앞에 통조림을 까서 스푼과 함께 두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미동도 없는 것을 봐선 고장 난 게 틀림없다.

바이오로이드가 고장도 나느냐는 의문을 가진 채 하는 수 없이 스푼으로 떠서 입에 넣어주니 작게 오물거리다 먹긴한다.

먹는 중에도 시선은 허공에 고정이다.

이거 꽤나 섬뜩한걸.

... 근데 원래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을 간호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니 머리가 아프다. 오늘은 꽤나 길게 쓴 것 같으니 여기까지 쓰겠다.



2111년 3월 24일


드디어 PDA로 라디오 켜는 법을 알아냈다. 빌어먹을 인터넷.

인터넷도 전파는 잡히지만, 서버는 날아갔는지 검색 같은 건 먹통이다.

이럴 거면 왜 인터넷이 잡히는지 모르겠다.

PDA가 들어있던 박스에 종이로 된 설명서가 있어서 망정이지 없었다면 아직까지 잡고 있을 뻔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방송은 단조롭다.

나가지 말 것, 군대를 기다릴 것, 인기척을 내지 말 것.

다른 주파수로 돌려도 단 하나 약한 신호로 일본 방송이 들릴 뿐 다른 신호는 없다.

일본 방송도 겨우겨우 발음대로 적어 번역을 돌리면 똑같은 내용이다.

가만히 앉아 기계 음성으로 반복되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군대로 복귀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돌아갈 군대 따윈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부산까지 다 점령당한 마당에 어디서 싸운다는 말인가? 제주도?

제주도로 갈 방법도 없는 마당 아닌가?

이미 대한민국은 진거 같고 믿을 것은 미군밖에 없는건가.

뭐 미군 말고도 삼안 산업 해외 지부들도 엄청 거대하니 그놈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게다가 방송에서 나대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말 잘 들어서 남 줄 건 없다고 했다.


얼마나 버텨야 할지 모르기에 규칙을 정해 하루에 인당 콩 통조림 3개에 물 2개로 버티기로 했다.

레프리콘 개체가 하루에 얼마의 열량을 섭취해야 하는가 같은 건 모르기에 나랑 똑같은 양을 주기로 했다.

여성이 남성보다 필요 열량이 적긴 하지만 전투용 바이오로이드 아닌가, 혹시 모를 것에 대비하는 거다.

철충? 라디오에서 부르는 그놈들의 이름이다.

어쨌든 철충이 공격해 오거나 그런 유사시에는 나보다는 잘 싸우지 않겠는가.

그런 희망을 가지고 허공을 응시하는 레프리콘에게 통조림을 먹이다 보면 과연 움직이지도 않는데 싸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니까 굶겨 죽이는 건 너무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 넓은 벙커에 혼자서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섭다.

가끔은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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