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4264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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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년 3월 25일
오늘은 벙커의 시설과 자원을 확인했다.
정수 시설과 발전기, 환풍기는 전 주인이 꽤나 점검을 꼼꼼히 했는지 아무런 문제 없었다. 그래 PDA에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쨌든 물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통조림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많다. 계산해보면 두 명에서 1~2년은 버틸 양이다.
문제는 이게 다 베이크드 빈이라는 거지.
꼼꼼한 성격이지만 입맛은 생각 안 하는 건가.
이 상황에 반찬 투정이라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베이크드 빈 뿐은 너무 하지 않나.
아직 3일밖에 안 먹었는데도 속에서 콩나무가 자라는 거 같다.
그나저나 베이크드 빈은 콩나물이 자라는 건가 콩나무가 자라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며 한 통조림을 다 비우곤 레프리콘에게도 먹이지만 씹는 속도가 느려진 게 이 녀석도 싫은 거 같다.
그래도 먹어야지 하며 다독이니 군말 없이 먹긴한다.
... 원래 말이 없었긴 하지만 말이다.
응급품이라던가 방독면 같은 부수 물자들도 꽤나 많이 구비되어 있어 이렇게 꼼꼼히 준비했던 주인은 누굴까 궁금증이 들던 중 서랍 속에서 액자를 발견했다.
액자 속 사진은 말 그대로 단란한 가족, 부모와 남자아이 그리고 그의 누나처럼 보이는 여자까지.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에 내가 그들 대신 살아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이 있던 곳을 강제로 빼앗은 것도 아니고... 아니겠지?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미 대피해서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2111년 3월 26일
지루하다.
할만한 거라곤 맨몸 운동과 PDA에 깔려 있던 보드게임 시리즈밖에 없다.
혼자서 부루마블 3판 연속해본 적 있나?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니다.
어차피 상대방의 심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주사위만 굴리면 되니 혼자서 해도 꽤나 벨런스가 맞다고 할 수 있다.
벨런스라기에는 운빨에 가깝지만.
혼자서 놀다 보니 자문자답이 많아지는데, 이거 정신병의 초기 증상 아닌가?
레프리콘은 아직도 아무 반응이 없다.
하지만 구석에 혼자 있으면 추울까 봐 보드게임 할 때면 옆에 앉혀두고 보게 한다.
보게 한다고 해봤자 고개를 PDA 쪽으로 돌리는 거 뿐이지만.
프로이트였나.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무의식적으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이건 보게 하는 게 맞다.
물론, 레프리콘은 내가 옆에서 환호성을 질러도 반응은 없다.
무반응의 어색함 뒤에 밀려오는 민망함에 PDA를 그냥 옆으로 치워버리고 자리를 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내 곧 다시 PDA를 잡는다.
자괴감보다 심심함이 더 컸다고 해야 하나, 이 난리도 몇 번 하다 보면 별로 부끄럽지도 않다.
둘이서 젠가에 부루마블, 도둑 잡기까지 하니 꽤나 친해진 거 같다.
레프리콘, 이 친구 꽤나 도둑 잡기에 재능이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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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친 건가?
2111년 3월 27일
오늘은 두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첫 번째는 PDA 앱의 자가 진단 결과.
"귀하는 정신 이상 증세가 없습니다." 란다.
여기 밑에 갇힌 후로 처음 들은 희망적인 소리다.
갇혔다고 하기에는 자발적 감금이지만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뭐, 현대 기술력의 산물이 나보고 안 미쳤다면 안 미친 거겠지.
두 번째는 보드게임 말고 시간을 보낼 방법이 생겼다는 거다.
이 현대 기술력의 산물을 만지작거리던 도중 아직 접속이 가능한 일부 사이트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혹시 몰라 기억나는 유명사이트는 모조리 주소창에 적어보던 도중에 얻어 걸린 거지만 운 좋게 동영상 사이트가 아직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유X브 라던가 그런 대형 사이트는 아니었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시간만 보낼 수 있으면 되는걸.
방금까지도 레프리콘이랑 영화 한 편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일기를 써야 하는 시간이라 양해를 구하고 쓰고 있다.
뭐 아무 말도 없긴 했지만, 침묵은 긍정이라지 않은가? 잠시 영화는 일시 정지 시켜놓고 온 참이다.
응? 갑자기 밖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PDA에서도 갑자기 대피하란 방송이 울리고... 이거 공습인가.
순간 당황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방송하고 오는 공습이면 우리 편이겠지.
드디어 삼안이 우리를 구원해주러 오는 건가?
레프리콘에게 말해줘야겠
.
.
.
계속해서 쓰겠다 여전히 27일 밤이다.
레프리콘이 이상하다. 아니 정확하겐 이상했다.
지금은 침대에 누운 채 고요하게 자고 있지만 방금 전만 해도 발작 수준으로 날뛰었다.
계속해서 벽을 긁고 브라우니가 어쨌다, 노움이 어쨌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사이렌 소리가 심해지고 머리를 벽에 박으려 했을 때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레프리콘을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리고 나는 레프리콘이 전투용 바이오로이드라는 걸 잊어먹었다.
아직까지 온몸이 아픈 게 아마 레프리콘의 발길질에 한 4번은 나뒹굴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사이렌은 계속 울리고 공습은 시작됐는지 멀리서 오던 폭발음이 가까워지다 지면이 울리는 정도까지 왔다.
둘 다 진동에 균형을 잃고 쓰러진 상태에서 나는 레프리콘에게 기어가 거의 팔다리로 레프리콘을 껴안는 지경까지 돼서야 겨우겨우 레프리콘을 붙잡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치던 레프리콘이었으나 공습이 끝나고 사이렌 소리가 끝나자 발작은 이내 울음으로 바뀌었다.
한참을 품속에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울던 레프리콘은 힘이 다했는지 점점 조용해지다 이내 잠에 들었다.
조용해진 레프리콘을 조심스레 들어 침대로 옮기고 이 일기를 적고 있다.
PTSD인가, 대충 상황은 예상이 간다.
물어보기 꺼려지지만, 한동안은 같이 지내야 하는 사이니 일어나면 조심스럽게 물어봐야겠다.
하... 한동안 안 아프던 머리가 다시 아파지기 시작한다.
원래 몸이 아프면 머리는 안 아파야 정상 아닌가.
일단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여기까지 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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