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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좋아.


저 황당하고 당황한 표정. 아주 제대로 놀란 모양이구만!


-좋아, 콘스탄챠 이제 어떡하면 돼?


-"식사는 저희가 준비할 테니 먼저 씻으라고 해주세요."


사전에 붙인 장비로 내 머리 속에서 떠올린 질문이 콘스탄챠의 답변으로 이어졌다.


-오케이~.


나는 하얀 장갑을 낀 집사복 차림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 일어나셨군요. 식사는 준비 중에 있으니 일단 씻으면 되겠습니다."


"머,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드디어 미치기라도 한 겁니까! 왜 그런 차림을!"


그래, 놀랄 만 하겠지.


참고로 집사복은 오드리에게, 콘스탄챠와 통신하고 있는 장비는 닥터에게 부탁한 거란다.


그나저나 역시 오르카의 인재들은 뛰어나구나.


오드리는 내 치수를 이미 알고 있다고 집사복을 뚝딱 만들어내고 머리를 읽어내는 장비는 닥터, 포츈, 알프레드가 달라붙어 단 3시간만에 뚝뚝딱 만들다니.


오히려 진즉에 내일 일감을 해치우던 내가 더 늦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야 당연히..."


나는 재밌을 때의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바닐라 아가씨의 집사니까요?"


바닐라는 내 말에 완전히 멍을 때리고 있었다.


자, 내가 왜 바닐라의 집사를 자처하고 있느냐.


이게 바로 역지사지라는 것이다.


멸망 전 깊은 의미를 담은 말들 중엔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다.


타인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역으로 돌려 생각해보아라.


바닐라의 언행이 까칠해지고 있는 최근, 나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이 기행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하루는 내가 그녀의 사용인이고 바닐라가 나의 주인이다.


"자, 아가씨."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침대에서 끌었다.


"오늘 일과가 많습니다. 서둘러 준비하시지요."


*


바닐라는 평소의 메이드복이 아니라 이전에 입었던 평상복을 입었다.


핫팬츠에 노란색 캐디솔, 그리고 투명한 천을 걸친 그녀는 귀티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좋은 느낌이 난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된건지 안절부절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바닐라의 방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콘스탄챠 언니! 게다가 금란까지? 설마 두 사람도 이런 일에 협력한 거에요?!"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평소대로 바닐라 아가씨의 시중을 들고 있는 걸요?"


"흠흠, 저도 그렇습니다. 언... 아가씨."


음식이 담긴 카트를 끌고 들어오며 콘스탄챠는 능청스레 바닐라의 말을 받아주었다.


금란도 조금 어색하지만 미리 말해준 부탁에 잘 따라주고 있다.


그래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걸 보니 둘 다 나름 즐기고 있나 보다.


내 계획에 동참해주는 두 메이드에게 속으로 감사를 보내며 바닐라를 앉혔다.


무릎 위에 수건도 올리고 목에도 받침을 정성스레 둘러준다.


그 와중에도 얼굴이 빨개진 채 몸을 비틀며 애써 저항하는 바닐라.


"으으... 주인님,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집사라니까, 참.


아무래도 어느 정도 설명을 해줘야겠네.


"자, 오늘은 너가 내 주인이야. 나는 평소에 너가 했던 사용인으로서의 일과를 하는 거고. 물론 전문적인 일은 못하겠지만 너 옆에 딱 붙어 시중을 들을거야."


왜 이런 일을 했냐고 물었기에 나는 최근 바닐라의 언행의 변화, 그리고 역지사지라는 말을 떠올려 계획을 실행했다고 답해주었다.


그제야 바닐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역지사지라니, 애초에 이렇게 하는 겁니까...?"


"몰라."


"..."


킹치만 나도 처음인걸?


바닐라는 결국 포기한 얼굴로 긴 한숨을 뱉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바보 주인님의 유흥에 어울리면 되겠습니까?"


좀 다른 방향으로 납득한 것 같지만 일단 이 계획은 지속해도 될 것 같다.


"그럼~. 자, 이제 식사를 하시지요."


나는 웃으며 식기를 배치했다.


음식은 소완에게 슬쩍 부탁해서 내가 아침에 먹었던 메뉴와 같은 음식이다.


소완은 나를 위해 해주는 음식을 바닐라가 먹는다는 말에 조금 불만을 가졌지만 다음에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조건으로 요리를 해주었다.


근데 바닐라가 식기를 안 잡는다. 왜 그러냐?


"그렇다면 제가 주인님께 어떤 명령을 해도 들어주겠다는 말씀이겠지요?"


바닐라는 식기를 바라보다 나로 시선을 돌리며 슬쩍 미소지었다.


왠지 내가 장난칠때랑 비슷한 웃음.


...


오.


"제 입에 직접 먹여주세요."


벌써 갑질하시는 바닐라 아가씨다.


*


"물을 가져와 주세요, 집사."


"옙."


나는 컵에 물을 따라 바닐라의 앞에 놓았다.


"물을 가져올 때는 물론 작은 물건도 주인에게 줄 때는 쟁반 같은 받침에 담아 주는 것입니다.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한심한 집사로군요."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참고로 바닐라가 나를 집사로 호칭을 바꾼 이유는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기왕 입장을 바꾼 거 호칭이 일치하지 않으면 이상하니까.


근데 이거 위치만 다르지 말뽄새는 그대론데?


나는 은근슬쩍 콘스탄챠와 금란이 있는 곳으로 빠져 말했다.


"저기, 역지사지가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콘스탄챠는 이 모습이 흐뭇한 듯 웃으며 말했다.


"후훗, 아무래도 바닐라가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나보네요."


이런, 콘챠는 별 이견이 없나보다.


금란은 조금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바닐라 언니도 주인님의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응?"


"역지사지는 말 그대로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인님은 바닐라 언니의 입장을 취하고 언니는 주인님의 입장을 가져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거 아냐?"


"주인님께선 저희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직접 따르시지요. 그리고 받침없이 물건을 가져다 주었다고 그걸 지적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호.


"그리고 바닐라 언니는 받침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실수를 할 분이 아니시고요."


아하.


"무엇보다 주인님께 지적받았다고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언니도 아니기도 하십니다."


어허.


"즉 우린 아직 서로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았다는 말이구나."


"물론 언니와 주인님께선 서로 다른 사람이기에 각자의 입장은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서로가 생각하는 서로의 언행을 따라하는 것으로도 목적에 어느정도 충족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나는 다시 바닐라의 옆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이미 물을 다 마시고 식사도 끝마친 상태였다.


"주인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게으리기까지한 집사..."


"독설 멈춰어어엇!"


평소대로 독설을 날리려는 그녀를 향해 나는 한 손을 쫙 펼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


내 행동에 바닐라는 흠칫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에메랄드색 눈을 찌푸리며 미친 사람을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하는 겁니까? 이젠 진짜 바보가 된 겁니까?"


어, 안 멈추네?


멸망 전 영상에선 이러면 멈춘다던데.


"...아니면 이제 그만하시겠습니까? 그럼 다행이겠군요."


바닐라는 새침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말해야 할게 좀 있어서."


"무엇입니까?"


"솔직히 내가 그런 독설은 안 하잖아? 너도 내 입장을 대신하게 되었으니 어느정도는 내 언행을 따라줘야지."


"저는 억지로 이 일에 끌어들여지지 않았습니까? 싫습니다. 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만."


방금까지 즐겼으면서 무슨 소리래, 얘는.


"...너는 나를 이해하기 싫니?"


나는 저절로 조금 서운해진 어조로 말하자 바닐라는 뻔뻔한 얼굴에서 조금 당황한 얼굴로 변했다.


"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여전히 내가 어두운 얼굴을 하자 그녀의 표정엔 불안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나는 이해하고 싶어서 이걸 하고 있는 건데... 그래, 정 불편하다면 없었던 일로..."


"잠깐, 잠깐! 하겠습니다! 하아... 정말이지."


그녀는 다급하게 일어서며 계획의 지속을 선언했다.


"그래서 무얼 하면 됩니까?"


"너는 너 자신이 생각하는 나를 따라해줘. 나는 내가 생각하는 너를 따라할테니까."


그러면 나는 '바닐라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라고 알게 될테고 바닐라도 내가 그녀를 어떤 식으로 알고 있는지 알 기회가 될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주인님... 알겠습니다."


그걸로 말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녀가 다시 나를 불렀다.


"주인님. 혹시 힘드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죠. 인내심이 없는 주인님이 얼마 못갈거란 생각은 듭니다만. 괜히 불쾌한 경험을 늘려봤자 안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그래, 너도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그렇게 나와 바닐라의 주종역전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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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끝낼줄 알았는데 이제야 시작인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