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속이여"

"왜?"

"인간이란 무엇인 것이냐?"

"...글쎄"


  LRL이 어느날 물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녀의 말에 답해줄수 없었다. 지금에선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를 정의할수 있는 구분선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이 사령관뿐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권속이여"

"왜?"

"그렇다면 가족이란 무엇인 것이냐?"

"...지켜주는사람?"


  거듭되는 질문에 사령관은 말문이 막혔다. 피로 이어진 형제자매, 또는 배우자....배우자의 직계혈족...이라고 말한다면 이세상에서 가족이란 단어는 존재할수 없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그저 LRL이 납득할 정도의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권속이여"

"왜?"

"권속은 나의 아빠인것이냐?"

"...그렇네"

"아빠는 짐을 인간으로 만들어주었으니 나는 아빠의 딸이 될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의 어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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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아빠 일어나!"

"...아빠 조금만 더 잘께"


남자가 덮어쓴 이불은 방에 들이닥친 LRL의 손에 의해 보기좋게 정리되어 버렸다.


  "아빠 오늘 회의있는 날이잖아! 어서 씻어!"

"아빠도 사람이야...사람..."


남자는 궁시렁대며 옷을 갈아입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옷걸이에 걸려있는 제복을 쳐다보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잠옷 차림으로 방을 나가 지겹도록 보았던 복도를 걸어 회의실로 들어갔다.


"오셨군요 주인님"


늘 콘스탄챠가 반겨주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상밑에 숨어있던 아스널을 제자리로 쫓아내면 하루가 시작된다. 못먹는 감을 찔러나 보자며 입맛을 다시는 아스널은 전라에 가까운 속옷차림으로 대범하게 회의실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아무일도 없어?"

"그대의 아침 정액을 마시지 못한게 가장 큰일이다."

"그래..."

"나 왔어"


  전라에 가까운 아스널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자리를 잡는 레오나, 츄리닝 차림에 제복 코트를 어깨에 걸친 모습은 아스널의 전라노출보다도 더 위화감 있는 것이었다. 옷 아래로 아무렇게나 손을 쑤셔넣고 배를 벅벅 긁으며 하품을 하는 모습에서 북방의 암사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오늘은 쇼타 의체가 아니군 각하, 어째서지?"

"어째서라니..."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채로 자리에 앉아있는 마리, 그 강인하고 충직했던 불굴의 마리는 캐노니어의 아스널과 동화되어 욕구에 굴복해버렸다. 지금은 굴의 마리가 되버린 그녀가 남자에게 불만을 어필했다.


"아스널이 두명이 되버렸는데 소년몸으로 바꿨다가 무슨 변을..."

"소...속이...우욱..."


  테이블 한켠에서 엎드린채로 술냄새를 풀풀 풍기는 칸이 숙취를 호소했다. 전날에 술친구들을 모아놓고 술파티를 벌였다는 모양이다.


"돌겠네 진짜"

"뭐지? 내 보지에 자지를 집어넣고 허리를 빙빙 돌리겠다는건가 그대여?, 간만에 그런 허리놀림도 괜찮겠군"

"잠깐!, 그전에 쇼타몸으로 바꾸는게 먼저다 아스널!"

"소란스럽군, 그대들이 그런차림으로 회의에 참석하면 다른 대원들이 뭐라고 하겠소?"

"니가 할소리냐..."


  세이렌의 옷을 입고 회의실에 나타난 용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듯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지휘관들을 타박했다.


"빨래를 돌리고 그냥 잠들었을 뿐이오"

"그래...그래..."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거아냐?, 그냥 유전자 씨앗으로 돌아가는게 어때?"


  자신의 머릿결과 똑같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메이는 약간의 진동소리와 함께 부자연스러운 느낌의 걸음걸이로 자리에 나타났다.


"회의장에 로터꼽고 들어오는 지휘관이 세상 어느천치에 있어?"

"여...여기잇!"


  품안에 있던 리모콘의 진동세기를 최대로 올린 남자는 메이를 가볍게 벌주듯 한번 보내버렸다.


"간다앗....! 히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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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망전의 인프라를 어느정도 다시 구축한 남자는 자신을 따랐던 그녀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녀들은 더이상 인류를 위해서 헌신할 필요가 없었다. 주인을 위해서도, 인류를 위해서도 봉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남자는 복상사의 문턱에 몇번이고 드나들었고 오르카호는 파란이 끊이질 않았었다. 남자의 정을 쟁탈하기 위해 수많은 치정극이 있었지만, 그는 최후의 인류라는 무게를 짊어진 남자답게 그녀들 모두를 공평하게 불방망이로 참교육했다.


"애시당초 나는 이런 상황을 바라고 너희에게 자유를 준게 아닌데..."
"세상의 마지막 까지 함께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대여."


  유두와 비부를 훤히 내보이는 브라와 팬티를 입고 멋있는 소리를 하고있는 아스널은 의기양양하게 그를 보며 말했다.


"멋있긴한데...다음엔 제대로 갖춰입은 다음에 부탁할께"

"흥, 이제와서 우리사이에 무드를 찾는건가"


  이래 봬도 그는 미지의 존재, 그리고 멸망전의 망령들을 영원히 잠재운 남자였다. 지휘관들이 이렇게 변해버린건 악몽같았던 전쟁의 기억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재인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회의를 듣는둥 마는둥 손톱관리를 하는 레오나, 콘스탄챠에게 이온음료를 건내받고 숙취를 달래는 칸, 탈론 허브에 새로 올라온 영상을 이어폰 한짝씩 나눠 끼고 함께 감상중인 아스널과 마리, 땅콩만한 체형을 이용해 소리소문없이 사령관의 가랑이로 파고든 메이, 풍만한 가슴을 감당하지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인 세일러복을 입은채로 근엄한 표정을 고수하며 홍차를 마시는 용...그는 그녀들의 한껏 흐트러진 모습들을 보며 전쟁이 끝났음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소완이 또 내 마실물에 약탔지?"

"소첩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식사를 가져다준 소완이 알수없는 웃음을 흘리며 팽팽하게 부푼 남자의 고간을 쳐다보았다.


"언제봐도 조리장의 미약 성능은 확실하군, 탈론허브에 올릴 신작을 촬영할 시간이다 그대여"

"어이쿠, 슬슬 시작인가...각하"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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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건강검진 기록 보고서야"

"다들 멀쩡한거지?"

"뭐...트라우마로 인한 가벼운 스트레스성 장애는 관측되지만...별다른 위험성은 없어"

"그래..."

"왜 그래 오빠? 아무도 잃지 않은채로 그 모든일을 끝냈는데도 이정도가 아쉬워?"

"...닥터, 자신을 만든사람들을 의심해본적 있어?"

"...날 만든건 인류의 기술력이고 그 기술력을 만들어낸것도 결국은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을 만들어낸것도 결국은 인간이야"

"그래...근데 왜 벗는거야?"

"멸망전의 인류는 의료보험도 있었다는데...오르카호엔 그런거 없어!, 계산시간이야 오빠"

"성장약 먹었다고 아주 눈에 보이는게 없구나"


  사령관의 쥬지는 별 세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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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 너희는 이제 자유야"

"저희에겐 이게 자유이자 살아가는 이유랍니다 주인님"


  난교로 끝난 회의후 유혹해오는 여자들에게서 도망다니다가 붙잡혀 또 쥐어짜이다가 돌아오는 날이 이어지는 여느때와 다름없는 하루다. 배틀메이드와 컴패니언, 페어리 시리즈는 자유를 마다했다. 강제 명령권을 써서 자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하려 해도 애머슨법은 이미 그녀들에게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남자는 그녀들의 보필을 받으며 지내기로 했다.


  그녀들은 애시당초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녀들에게 자유란 스스로의 정체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독이든 성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들은 여전히 남자에게 종속되는것을 택했고, 남자또한 그녀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녀들의 선택또한 자유이며 존중받아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자유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택했다.


  대원들 모두가 오르카호에 남기로 한것은 아니다. 미지의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떠난 사람도 있고, 곧 다시 재건될 사회에 일원으로 진출한 대원들도 있었다. 멸망전의 인간들에 의해 손쓸 도리가 없어진 자연을 복구하기 위해 떠난 이들도 존재했다.


  지휘관들은 남자와 남기로 했다. 대원들 대부분이 자신의 손을 떠난 지금 자신의 존재 의의는 인류의 번영을 위해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 하며 자유를 마다했다. 마리와 레오나, 메이...칸과 용...아스널은 긴 전쟁으로 인해 지휘관들만이 느끼는 압박감과 책임감에서 해방되었다. 그녀들은 이것에서 해방된것이 자유라고 말했다.


  인류사회는 멸망했다. 다시는 복구할수 없다. 복구 한다 하여도, 인류는 언젠가 같은 계단을 밟을것이다. 그런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맴돌았기에...그는 자손을 만드는것을 잠시 미루고, 인간이 만들어낸 그녀들이 가질 자유의지를 믿어보고 싶었다.


남자, 그도 인류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이 아닌...그녀들이 만들어낸 사회를 믿어보고 싶었다.


  "언제라도 떠나고 싶다면. 주저하지마"


  콘스탄챠는 자신을 꼬옥 끌어안은 남자의 두 팔이 그의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다른 뜻을 말하고 있음을 잘 알고있었다.



"함께해요.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