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느즈막한 저녁, 슬슬 업무를 끝내려던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


벌컥!


들어오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거침없는 행동력은 분명 워울프다. 


"사령관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보아하니 업무는 대충 끝나신 것 같은데,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흐레스벨그?"


순식간에 업무 테이블 앞까지 밀고 들어온 흐레스벨그는 다짜고짜 본인의 용건부터 들이밀었다.

예상이 빗나가서 조금 당황했지만 평소 고지식하고 담담한 흐레스벨그가 이렇게 흥분하는 경우는 분명 하나 뿐이다.


"시간이라.."


딱히 오늘 저녁엔 추가 일정이나 동침 예정도 없다.

어디서 매지컬 모모 극장판이라도 구해왔나본데, 오랜만에 흐레스벨그와 모모 극장판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뭐, 딱히 일정은 없어. 오랜만에 같이 모모나 한 편 보게?"


"음, 그것도 좋지만 오늘은 다른 용건 입니다."


"뭐?!"


흐레스벨그가 모모를 거절해? 어디 아픈건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만, 오늘 탐색에서 기가 막히는걸 찾아와서 말입니다."


뒷춤을 뒤적이던 흐레스벨그는 시디 케이스 하나를 슥 내밀었다. 케이스에는 서부시대풍 옷을 입은 남성이 총을 들고 멋들어진 포즈를 취한 그림이 그려져있다.

위에 적혀 있는 제목은..


"악마 사냥꾼 케인?"


"맞습니다! 악마 사냥꾼 케인!"


쾅!


제목을 읽기 무섭게 흐레스벨그는 책상을 호쾌하게 내려치며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남성형 바이오로이드가 주인공이었던 최초의 특촬물! 덴세츠에서 제작한 야심작!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성형 바이오로이드의 결함 발견으로 인해 팬들의 청원과 성원에도 불구하고 완결내지 못하고 막을 내렸던 비운의 작품! 그 작품의 최종화가 이 흐레스벨그의 손에 들어온 것은 그야말로 운명! 아무도 알지 못했던 케인의 끝을 이 제가 알 수 있게 되었단 말이죠! 야 이건 말 그대로 신의 인도하심이랄까요? 아, 물론 모모야말로 덴세츠의 역작이고 제 최애작이지만 케인 역시 어디 가서 꿀릴것 없는 명작이라 관심이 가서 찾아봤단 말이죠? 케인은 모모와 다르게..."


얼마나 흥분 했는지 흐레스벨그는 붉게 상기된 얼굴을 내 코앞까지 들이밀고 콧김까지 뿜어가며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잠깐만, 완결을 못 낸 작품이라 하지 않았어? 근데 최종화라니 무슨 소리야?"


시디 케이스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어디에도 '완결' 이라거나 '최종화' 라고 하는 단어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아, 그 시디 케이스가 꽂혀있던 선반 자리에 최종화라 적혀 있었습니다만?"


선반에 최종화라 적혀 있었으니 최종화일 것이다. 

평소 흐레스벨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워울프스러운 사고에 헛웃음이 픽 나왔다.



"어디에 있던 시디인데?"


"덴세츠 매장 안쪽 직원 연구실입니다.."


쓸만한 물자 찾으라고 탐색을 보냈더니 덴세츠사 매장에 들어갔단 소린가? 

하긴,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흐레스벨그가 덴세츠사 매장을 그냥 지나쳤을리 없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이걸 같이 보자고?"


"예. 바로 그겁니다."


길어봐야 두 시간 안에는 끝날테니 나쁠건 없지 않을까?

깐깐한 흐레스벨그가 저렇게 극찬을 하니 궁금하기도 하다.


"좋아. 정리가 끝나는대로 샤워만 하고 갈게. 스카이나이츠 숙소로 가면 되는거지?"


"아뇨. 제가 준비를 해서 사령관님의 방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오늘 밤은 재워드리지 않을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어?"


뭐라 물어볼 새도 없이 흐레스벨그는 순식간에 문 밖으로 사라졌다. 오늘 밤은 안 재운다고..? 


.

.

.

.

.

.

.

.

.


똑똑.


"접니다. 사령관님."


"들어와."


기다렸다는듯 문을 열고 흐레스벨그가 들어왔다. 헐렁한 반팔티에 파자마 바지를 입은, 평소와는 다른 편한 차림의 흐레스벨그를 보자 왠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저 두꺼운 안경과 등에 매고 있는 거대한 가방은 못 본걸로 하자.


"실례하겠습니다."


흐레스벨그는 들어오자마자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곤 전등의 조도부터 낮췄다. 환했던 전등은 순식간에 은은한 빛으로 흐릿하고 포근하게 방을 비췄다.

흐레스벨그에게 이런 적극성이 있었다니 의외다.


"오, 오자마자 너무 빠른거 아니야?"


"이 정도 조명이 가장 적당합니다."


전등의 조도를 낮춘 흐레스벨그는 이번엔 TV 앞에 앉아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음료수, 군것질거리, 물티슈, 바디 필로우와 쿠션, 담요까지. TV앞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물건들이다.

보금자리를 꾸미는 다람쥐처럼 담요와 쿠션을 이리저리 배치하던 흐레스벨그는 만족한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번엔 시디 케이스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꺼낸 시디가 하나, 둘, 셋... 열을 넘어서도 시디는 계속해서 나왔다.


"흐레스벨그? 그 시디들은 대체.."


시디를 꺼내 쌓는데 열중하던 흐레스벨그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 아! 이런! 설명이 늦었군요! 악마 사냥꾼 케인 1편부터 27편과 OVA 전편입니다. 뜬금 없이 최종화부터 보여드리면 이해도 안 가실테고 재미도 없으실 것 같아 전부 가져왔습니다.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케인 최종화를 영접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1편부터 다시 정주행을 한다는 느낌으로 볼 생각입니다."


...어?


"그러면 오늘 밤 안 재운다 했던건..?"


"케인은 한 편에 20분에서 25분 사이이니 지금부터 보면 아마 밤새 보셔야 할 겁니다. 각오는 되셨습니까?"


흐레스벨그는 안경을 올려쓰며 기대감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배시시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얊은 고무를 슬쩍 침대 아래로 밀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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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레스벨그 외전 같은 느낌으로 단편 하나 써보고 싶어서 써봤음.


사령관이랑 같이 TV앞에 나란히 누워 과자 옴뇸뇸 하면서 DVD 보다가 야한장면 나오니까 괜히 사령관 눈치 보면서 민망해 하던중 사령관이랑 눈 마주쳐서 움찔 하면서도 뭔가 기대하듯 계속 곁눈질 하다가 사령관이 키스하려고 상반신 서서히 들이미니까 허둥거리면서도 안 피하고 그대로 키스하고 순애 야쓰하는 흐붕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