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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은 매우 바빴어.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은 임시로 해왔던 것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으니까

 그야적당히 해도 먹고 살만한 지형이기는 했지만근대 이후의 도시마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서 기본적인 인프라나 도시 계획의 중요성은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미리 좀 힘을 낸 거지.

 완벽한 상하수도를 설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물을 끌어오고 제대로 된 터를 잡는 것 정도는 그리 문제가 없었어.

 바이오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세배 이상의 효율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게으름을 피우는 인원도 없으니 다섯 명이 했다고 하기에는 빠르고 견고하게 마을의 터가 잡혀가기 시작했지.

 

 정신없이 바빠진 만큼 레프리콘도 그리 우울할 틈이 없었어.

 주된 지시와 일은 더치걸이 맡긴 했어도 자신 말고도 모두가 일을 해야 하는 인부나 다름없었고... 무엇보다 몸이 고되면 정신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워지니까 고민에 힘쓰기 보다는 일하는데 더 에너지를 사용했지.

 그러다보니 중간에 잠시 사령관과 면담을 했지만그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어.

 레프리콘은 자기감정을 숨기는데 아주 미숙하지도 않을뿐더러 육체노동으로 인하여서 정말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으니까.

 사령관도 아주 납득하지는 않았지만지금 당장은 심각하진 않거나 회복세를 보이는 거라고 믿게 되었어.

 

 문제는 어느 정도 터를 잡고 난 이후에 일어나기 시작했어.

 기반을 잡고 나니 슬슬 각각 전문 분야로 흩어지기 시작한 거야

 다크앨븐은 주변의 숲을 조사하러 나갔고아쿠아는 작물 관리를 위한 밭을 관리하러 갔어.

 더치걸은 남아있었지만또 다른 기반 시설의 제작과 그 확인을 위해서 정신이 없었지.

 

 결국 혼자 남아서 원시적인 형태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은 레프리콘 밖에 없었어.

 이 일 또한 실제로는 다들 천막을 치고 지내고 있었고비가 오면 아직 튼튼한 폐허쪽에서 지내는 지라 급한 일은 아니었어.

 어느 의미로는 우리가 이곳에 뿌리내렸다는 상징적인 작업에 불과했지.

 

 급한 일이 아니니 여유가 생기고여유가 생기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고혼자 남아있으니 부정적으로 흘러가기 쉬웠지

 

 있으면 좋지만없어도 상관없는 집.

 그걸 만들고 있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나.

 어느새 그녀는 집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했어.

 

 

 레프리콘의 멘탈이 털리고 있는 와중에 사령관은 어디에 있었냐면은 자료 조사 중이었어.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대규모 물자를 발견했던 창고에서 저장매체를 발견 했거든.

 

 평범한 인간인 사령관이 다른 바이오로이드의 일을 돕겠답시고 육체노동을 했다가는 일도 방해하고 몸도 망가질 가능성이 높았으니 아예 사무직으로 전환 시킨 거야.

 실제로도 단순히 사무용품이 아니라 일종의 백과사전 비슷한 것이었던 만큼 충분히 일행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어.

 단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다면 객관적으로 서술해둔 만큼 옛 인류가 바이오로이드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던 거야.

 

 사령관은 사실 그리 실감이 나지 않았어.

 얘들이 나를 인간님주인님 이라고 부르고 다니지만그건 그냥 호칭에 불과했으니까.

 사령관이 보기에는 그녀들은 그냥 자신과 같은 인격체였고 생명체였거든.

 

 생명에 대한 존중... 이런 거를 떠나서 그냥자기를 아껴주고대화가 가능하고감정도 있고고통도 받으면서 살아있는 무언가를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던 거야.

 그야 길가다 누가 전봇대에 부딪히면 ㅋㅋㅋ 병신’ 이라고 생각하지만그 사람이 쓰러져서 일어나질 못하면 어 씨바저 사람 괜찮나좆된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게 사람이잖아.

 그것이 귀찮음이건 용기가 없는 것이건 아픈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아픈 것 같다 라고 저절로 떠오르는게 사람인데 어쩜 이럴 수 있나 싶었지.

 

 그와 동시에 자신과 같이 다니는 바이오로이드 기종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

 그러고나니 이전에 아쿠아가 보였던 반응도 드디어 이해가 갔지.

 

 확실히 아쿠아와 같은 시리즈에 속해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의 카탈로그를 보니 정말 상상도 못한 기능들이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도 일반 바이오로이드들도 전부 아쿠아보다는 우수한 기능을 지녔었어.

 

 그런 것들을 보아하니 또 어느 정도는 이전 인류가 이해가 되기도 했어.

 

 관련 데이터에는 온통 기능가격가격대비 성능 밖에 적혀있지 않았거든.

 기껏해야 특이사항으로 이러한 성격을 지녔으니 주의 요망 정도 밖에 적혀있지 않았지.

 이 애들이 무엇을 좋아하고무엇을 싫어하고어떤 생각을 하고자기 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고 싶어하고어떤 주인님을 원하며무엇에 약하고무엇에 강한지.

 그런 사소하면서 중요한 내용들은 조금도 실려 있지 않았어

 그저 철저하게 상품 취급이었던 거야.

 좋게 봐줘야 애완동물보통은 가전제품나쁘게 보면 소모품.

 

 이렇게 보았으니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거겠지

 

 

 사령관은 알고 있어

 레프리콘은 단맛 나는걸 좋아하지만 많이 먹지는 못해쉽게 물려서 금방 질려하거든.

 아쿠아는 벌레는 싫어하지만거미는 좋아해물을 조금 뿌리면 거미줄에 걸린 물방울이 아름답다고 전에 이야기 한 적 있었어.

 다크앨븐은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만말하던 중간에 끼어드는 건 어려워 해그러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하는 걸 듣고 멀찍이서 여러 리액션을 보여줘.

 더치걸은 햇빛을 좋아해특히 좋아하는 건 나무 밑에서 바라보는 태양인데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자주 올려다 봐.

 

 사령관은 알고 있어.

 레프리콘은 비를 싫어해걱정이 많아서 그런지 비가 오면 지내고 있는 곳에 물이 새지는 않는지만들어 놓은 것들이 망가지지는 않는지가지고 있는 무기는 괜찮은 건지 늘 고민하거든.

 아쿠아는 강한 바람을 싫어해바람이 불면 자신은 어디론가 멀리 날아갈 것 같다면서 바람이 불면 다른 사람의 근처에 꼭 달라붙어서 벌벌 떨어.

 다크앨븐은 높은 풀을 싫어해움직이다보면 다리에 쓸켜서 신경 쓰인다면서 될 수 있는 한 그런 곳은 지나가고 싶어하지 않아해.

 더치걸은 어두운 곳을 싫어해그리고 혼자 있는 것도 싫어하지.

 

 사령관이 아주 오랫동안 그녀들과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그런데도 이러한 일들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어.

 일 년십 년 그보다 더 오래 같이 지내다보면 분명 더 잘 알 수 있는 것들이 많겠지

 

 지금은 멸망한 전 인류가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울 다름이었어.




https://arca.live/b/lastorigin/2508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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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오래가네.


조금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