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그녀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며 존경하고 배려하면서 일생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합니까?


#0. 사령관의 경우


   "서약?" 아침업무를 보기 위해 사령실로 들어간 사령관은 당일 부관인 콘스탄챠 S2에게 서약을 위한 물자가 곧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네," 콘스탄챠가 사령관의 책상 위에 커피잔을 올려두며 말했다, "파티마가 어제 저한테 알려줬어요. 아마 내일 쯤 도착할 거라네요."

   그러고는 쟁반을 가슴팍에 안은 체 허공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하나씩 세어갔다. 

   "반지, 꽃다발, 서약식을 위한 장식, 그리고..." 콘스탄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서약한 대상과 함께 그...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침실도 곧 마련된다고 하네요."

   "크흠..." 사령관은 마지막 물자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서약이라...멸망 전 인간들끼리 하던 결혼이라는 것과 비슷한 건가?"

   사령관은 멸망 전 기록에서 결혼에 대한 자료를 읽은 적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의 맹세를 통해 평생 함께할 것을 약속하는 순결하고 고귀한 의식. 비록 멸망 직전의 인류사회에서는 그 본래 의미를 거의 전부 잃었다고 하지만. 

   "음...네, 개념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멸망 전에 바이오로이드는 인간님들과 같은 취급을 받지는 않았으니까요. 인간님들 간의 의식을 결혼, 인간님과 바이오로이드 간의 의식을 서약이라고 불렀었나봐요."

   "..."

   콘스탄챠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사령관은 괜시리 깊은 생각에 빠졌다.

   멸망 전 기록에서 본 대로라면, 인간들끼리의 결혼에선 한 사람이 프로포즈를 통해 먼저 상대에게 결혼해줄 것을 청하고, 그 상대가 그 요청에 응함으로써 결혼을 위한 절차가 시작된다. 하지만 과거의 바이오로이드에게는 인간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한쪽만의 독단적인 선택에 의해 맺어지고, 또 깨어질 수 있는 게 서약이라면, 그것이 과연 결혼과 같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또, 사령관 자신과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약이라는 것이 마냥 좋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과거 인류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자행해온 일들을 보며, 자신만큼은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을 평등하게, 그리고 인간인 자신과 동등하게 대해주겠다고 결심했다. 비록 군대계급에 따른 대우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하나의 인격체로서는 그 어떠한 차별도 없도록 노력해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바이오로이드와는 서약을 하고, 어떤 바이오로이드에게는 하지 않는다면, 의도치 않게라도 그 바이오로이드를 차별하는 것이 아닐까?

   "..."

   "주인님?" 사령관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콘스탄챠가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나요?"

   "응? 아 아냐." 사령관은 애써 아무일 없는 척하려 했지만, 콘스탄챠가 계속 자신을 주시하자 결국 머릿속에 있는 고민을 꺼냈다. 

   "...그냥, 그 서약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어."

   


#1. 콘스탄챠의 경우


   "저기 콘스탄챠, 너는 서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사령관이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질문을 던졌다. 

   "저요? 음...그야..." 콘스탄챠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야 당연히...주인님에게 프로포즈 받는다면...한 없이 기쁠거 같네요."

   콘스탄챠의 순진한 반응에 사령관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영광이네. 그렇다면...만약 내가 콘스탄챠 말고 다른 바이오로이드와 먼저 서약한다면 어떨거 같아?"

   "음...그건 좀 샘나네요." 콘스탄챠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아, 하더니, 따듯한 눈빛으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역시 주인님은 상냥하시네요."

   "응? 왜?"

   "주인님께선 지금 프로포즈 받지 못한 자매들이 상처 받을까 고민하고 계신거죠?"

   "윽..." 사령관은 정곡을 찔린 것을 감추려고 애써 커피잔을 입에다 가져댔다. 

   "후후, 정말 주인님다우세요." 이번에는 사령관의 순진한 반응에 콘스탄챠가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주인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매들은 서약을 하든, 하지 않든 주인님을 변함없이 사랑할테니까요."

   "서약이 없어도 다들 날 좋아해준다면, 애초에 서약이라는 걸 할 필요가 있을까?"

   "그게 아니에요." 콘스탄챠가 허리를 살짝 굽혀 사령관과 눈을 맞췄다. "다들 주인님을 좋아하니까 주인님과 서약을 맺고 싶어하는 거에요. 주인님과 좀 더 맺어지고 싶으니까, 주인님과 더 함께하고 싶으니까, 주인님과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서약을 하고 싶어할 거에요. 만약 오늘 주인님께서 선택해주시지 않는다면, 내일은 주인님께서 돌아봐주실 수 있도록 더 노력할거에요. 서약을 해야 더 우대받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주인님을 사랑하니까요."

   갑작스러운 솔직하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말을 들은 사령관은 얼굴을 붉히며 콘스탄챠의 눈을 피했다. "그거, 왠지 콘스탄챠 네가 프로포즈하는 것처럼 들리네."

   콘스탄챠도 살짝 붉은 얼굴로 수줍게 웃었다.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그렇게 사령관과 콘스탄챠는 서로를 바라보며 얼마동안 조용히 웃었다. 사령관실의 창문을 통해, 깊고 푸른 바다를 거쳐 들어온 아침햇살이 따스했다. 

   "고마워, 콘스탄챠.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거 같아."

   콘스탄챠는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격식있게 살짝 목례했다. "주인님의 메이드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인걸요."


   그 후 몇 시간 동안은 평소와 다름없는 업무의 연속이었다. 오전 업무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갈 때쯤, 콘스탄챠가 사령관에게 제안했다. 

   "혹시 아직도 서약에 대해 걱정하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오늘 하룻동안 쉬시면서 자매들과 얘기를 해보시는 건 어때요? 오늘 나머지 업무는 중요한 건 아니니 제가 하고 있을게요."

   "응? 아 아니야 그렇게 신경쓸 필요 없어." 사령관은 손사레쳤다, "내 개인적인 문제로 업무를 맡길 수는 없지."

   하지만, 콘스탄챠는 자기 나름대로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저는 괜찮아요. 꼭 해주셨음 좋겠어요. 주인님께선 최근 무리하시기도 했고, 서약이란 건...저희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그만큼 소중한 거니까요."

   콘스탄챠의 말을 들은 사령관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애당초 멸망 전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들의 소유물로 취급되었다. 굳이 서약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거치지 않더라도, 그들은 평생 주인에게 귀속된 존재였다. 

   그렇다면 서약이라는 것은 비록 명령을 거절할 수 없는 바이오로이드를 대상으로 한 것이더라도, 그를 단순히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하고 싶다는 의미를 품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토록 가혹한 취급을 받던 과거, 서약의 프로포즈를 받는다는 것이 바이오로이드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졌을지, 돌연 사령관의 마음 속에서 그 의미의 무게가 깊숙하게 느껴졌다.

   "...알았어. 부탁할게, 콘스탄챠."

   "후훗, 맡겨만 주세요, 주인님."



#2. 뽀끄루의 경우


   그날 오후.

   사령관은 특별한 목적 없이 오르카의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비어버린 일정이 어딘가 조금 어색했다. 생각해보면 눈을 뜬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끝없이 어떤 목적을 위한 삶만을 살아왔다. 철충의 제거, 오르카의 보호, 인류의 재건. 그러한 목적을 위한 일정이 비어버린 이 시간이 사령관에게는 조금 낯설었다. 

   "그럼...일단 돌아다녀볼까?" 우선은 특별히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는, 우연히 마주치는 바이오로이드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그런 생각을 든 찰나,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하세요?"

   이 넓고 넓은 오르카에서, 자신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바이오로이드는 한 명밖에 없다. 뒤돌아보자, 그곳에 서있는 것은 귀여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큰 키와 성숙한 몸매, 그리고 발끝까지 길게 뻗치는 아이보리 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서 있었다. 

   "안녕 뽀끄루," 사령관은 뽀끄루의 옷차림을 보고는 물었다, "오늘은 마법소녀 활동이 있는 날인가?" 

   "아, 네..." 자신의 신체를 가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해보이는 핑크빛 옷의 치맛자락을 조금이라도 끌어내리는 뽀끄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늘 저녁에 백토랑 모모랑 스틸라인 부대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거든요...헤헤..."

   비록 의상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뽀끄루는 자신의 동료와 다시 함께 공연한다는 것이 기쁜 듯이 수줍게 웃었다. 

   "뽀끄루가 이제 마법소녀가 되어버렸는데, 그럼 악역은 누가 하는거야?"

   "아, 포츈씨가 움직이는 철충 모형을 만들어주셨어요."

   외계생명체에게 침식되어버린 거대로봇과 싸우는 마법소녀. 뭔가 여러가지 로망을 집대성한 것이, 확실히 브라우니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아, 뽀끄루, 혹시 지금 시간 될까?"

   "네? 리허설까지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괜찮긴 한데...핫!" 뽀끄루가 갑자기 얼굴을 더 붉히더니 치마를 더 끌여내렸다. "저저저, 저기...매, 매지컬 러브러브는...의상이 흐트러지니까 나중에..."

   "아, 아니야!" 사령관이 급하게 외쳤다. "그냥 상담할 게 있어서 그런거니까!"

   "네...?" 의외의 말에 뽀끄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서약...이요?"

   "응."

   "음..."

   복도 한 구석에 있는 의자에 사령관과 나란히 앉은 뽀끄루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며 생각에 빠졌다. "서약이 뭔지는 알아요. 하지만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뽀끄루들은 공연 클라이막스 때마다 그...은퇴를 당해서...누군가랑 서약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 그렇겠네." 사령관은 과거 뽀끄루들의 '은퇴'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실은 그 서약이런 걸 위한 물자들이 내일 들어온다고 해서 말이야. 뽀끄루는 만약 그...나와 서약한다면...어떨 거 같아?"

   사령관은 왠지 이런 걸 묻는 것 자체가 프로포즈하는 것 같아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뽀끄루는 화들짝 놀라며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네, 네? 사, 사장님이랑 제가요?" 

   뽀끄루의 격한 반응을 보니 괜시리 더 부끄러워졌다. "어, 언젠가 말이야. 언젠가. 내일 당장 한다는 건 아니고."

   "아..." 뽀끄루도 방금 자신의 반응이 쑥쓰러웠는지 에헤헤, 하고 웃었다. "물론, 엄청 기쁘죠. 사장님은 저한테 이렇게나 잘해주시는 걸요. 가끔 대마왕 이야기로 놀리시긴 하지만...좋은 분이시니까요. 백토와 모모도 함께 기뻐해줄 거에요."

   "고마워." 이렇게 솔직하고 꾸밈없이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해주는 것은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럼, 만약에 내가 뽀끄루 말고 다른 사람과 먼저 서약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거 같아?"

   그 말에 뽀끄루는 금방 울상이 되었다. "네...? 저...저만 빼고 모든 사람과 서약하시는 건가요...?"

   "아, 아니야!" 사령관은 다시 오해를 풀기 위해 다급히 말했다. "그건 아닌데...뽀끄루가 첫번째 서약 대상이 되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거야."

   "아..." 뽀끄루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얘기였군요..."

   뽀끄루는 다시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든 뽀끄루들이 그랬지만...저도 만들어지고 나서 한 번도 좋은 대우를 받은 적이 없어요. 공연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져서, 도구로 취급받았으니까요. 백토와 모모나 다른 친구들은 제게 잘 대해줬지만, 무대 위에선 그들의 손에 처치당할 운명이었죠. 또 지금 백토는 제가 진짜 대마왕인줄 알아서 저를 없애려 했고..."

   뽀끄루는 자신이 입고 있는 마법소녀 의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와 함께할 수 있고, 또 저희를 정말정말 아끼시는 사장님 밑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들이 지금은 현실이 되었어요. 서약도 마찬가지에요. 과거의 뽀끄루들이라면 서약은 꿈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현실이 되었어요. 그러니, 저는 사장님이 누구와 먼저 서약을 하든 상관하지 않아요. 사장님과 서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법 그 자체니까요."

   뽀끄루가 사령관을 보며 헤헤, 하고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순하고 상냥해보여, 사령관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미소를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대마왕이 되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너무 그렇게 착하게만 있으면, 서약 순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뽀끄루의 순한 모습에 장난스럽게 말하자, 뽀끄루가 후후, 하고 웃으며 벌떡 일어나 사령관을 향해 특유의 대마왕 자세를 취했다. 

   "아하하! 마계의 정점이자 달 없는 밤의 지배자인 본좌에게 시간은 의미없는 개념의 조각일뿐! 이 뽀끄루 대마왕은 그저 잠깐의 유흥을 즐기며 그대가 본좌의 장막에 들 것을 기다리겠노라, 필멸자여!"

   "아, 백토."

   "히이익?!"

   진짜라고 해도 믿을 카리스마 있는 대마왕 연기는 백토라는 이름 하나에 온데간데 사라졌다. 뽀끄루는 황급히 뒤돌아 봤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령관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하자 뽀끄루가 눈물을 글썽이며 사령관을 째려봤다. 

   "정말! 사장님! 너무해요!"

   한참을 웃은 뒤 사령관은 자리에 일어섰다. "미안 미안, 어쨌든 상담해줘서 고마워, 뽀끄루."

   "서약을 한 뒤에는 지금보다 더 대마왕으로 놀리실 거 같아 걱정이에요..." 여전히 화가 덜 풀린 듯한 뽀끄루가 뾰로통하게 쏘아붙혔다.



#3. 소완의 경우


   뽀끄루를 배웅해주고 난 뒤 사령관은 몇몇 바이오로이드들을 더 마주쳐 비슷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뽀끄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서약의 순서에 집착하기보단, 자신이 사령관과 서약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감격하는 듯했다. 

   몇 번의 비슷한 대답을 들은 후 사령관은 마음이 조금 편해진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제껏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을 올바르게 대해주려고 노력한 것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 

   '콘스탄챠 말대로 서약이란 것은 바이오로이드에게 정말 큰 의미를 가지고 있구나.'

   하지만 완전히 마음이 놓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만났던 바이오로이드들은 서약의 순서를 사령관의 편애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간인 사령관이 당연히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했다. 서약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기 전에, 사령관은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를 한 번 만나보기로 했다. 

   "어머 주인, 소첩을 찾아 이곳까지 와주신 것이옵니까?"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예의바른 말투, 하지만 그 속에 얼핏얼핏 비치는 잘 벼려진 칼날같은 날카로움. 오르카의 주방에 들어가려던 찰나 사령관과 마주친 소완은 평소와 같이 사령관에게 인사했다. 

   "응. 널 만나러 왔어, 소완."

   평소와는 다른 사령관의 즉각적인 대답에 소완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다시 초승달 같은 눈으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불러만 주신다면 소첩이 어디로든 찾아갔을텐데, 주인께서 이리 직접 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주인께서 소첩을 원하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사옵니까?"

   

   소완은 주방으로 들어가 아우로라를 비롯한 주방의 다른 인원들을 내보냈다. 

   "주인과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쉬시도록 하시지요."

   아우로라와 포티아는 불안한 듯 사령관을 살짝 쳐다봤지만, 사령관은 그들을 안심시키며 휴식을 가지게 해줬다. 

   "심각한 건 아니니까, 안심하고 쉬고와."

   넓찍한 주방에서 단 둘이 되자 사령관은 괜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초코여왕의 성에 다녀온 후 소완은 사령관을 대하는 것도,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대하는 것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지금 사령관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단 둘이서만 나눌 이야기라니, 소첩은 벌써부터 마음이 떨려옵니다."

   소완이 주방 한 구석에서 두 개의 작은 의자를 가져오며 말했다. 사령관이 앉는 것을 본 후 소완도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자, 사령관은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소완, 혹시 서약이라고 알아?"

   서약이라는 단 두 글자에 소완의 눈은 마치 요리를 위한 극상의 재료를 봤을 때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물론이옵니다. 바이오로이드가 그 주인에게서 받을 수 있는 극상의 신뢰. 궁극적인 사랑의 형태. 지고의 약속. 고귀한 총애. 비록 소첩이 멸망 후에 만들어진 개체라고는 하나, 어찌 그것을 모르겠사옵니까?"

   "사실은, 아마 내일쯤 서약을 위한 반지가 오르카에도 들어올 거 같거든."

   그 말을 들은 소완의 얼굴에 흥분이 감돌았다. 

   "주인...혹시 이건 소첩에게 드디어 서약의 청을..."

   "아니," 사령관이 소완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미안하지만, 서약 대상은 소완 네가 아니야."

   물론 소완과 서약을 맺을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약의 순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 중 한 명인 소완에게서 좀 더 솔직한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소첩에게 이것을 알려주시는지?"

   "내가 다른 바이오로이드와 먼저 서약을 하면 네가 질투해서 그 바이오로이드를 해칠까봐 미리 주의를 주려고 온거야."

   사령관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소완의 얼굴은 다시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주방의 온도조차 급속도로 내려간 듯 했다. 날카로움을 한껏 들어내는 소완의 눈빛에 꿰뚫리는 듯 했지만, 사령관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응시했다. 서약에 대해 사령관이 가진 불안을 가장 잘 현실화할 수 있는 그 눈빛을, 사령관은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자 했다. 

   몇 초의 침묵이 이어졌다. 매 순간마다 소완이 뿜어내는 차가운 살기가 사령관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곧 소완은 지긋이 눈을 감았고, 그녀가 뿜어대던 살기도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그렇사옵니까." 소완이 눈을 감은 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사옵니다. 주인과 연을 맺을 자매에게는 그 어떠한 해도 가하지 않을 터이니, 부디 미천한 소첩을 믿어주시고 안심하여 주옵소서.''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사령관은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사령관의 침묵을 불신으로 받아들였는지, 소완이 살짝 눈을 뜨고 사령관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령관은 소완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소첩이 미덥지 않사옵니까? 그렇다면 주인께서 맘이 편해지시도록 소첩에게 명을 내려 주옵소서. 소첩이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붙여도 좋고, 소첩이 주방에서는 나오지 못하게 하셔도 좋사옵니다. 주인께서 소첩의 진심을 믿게 된다면 무엇이든 하옵소서." 소완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아직도 과거의 잘못으로 주인을 불안하게 하여 정말..." 

   화를 내기는 커녕 스스로를 자책하는 모습에서는 일말의 계책이나 속임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령관은 소완을 와락 껴안았다.

   "주인?"

   "아니야 소완. 사과하지마.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자신을 꽉 껴안는 사령관의 손길에, 소완은 잠시동안 멍하니 있다가, 말 없이 떨리는 손으로 사령관을 안았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사령관은 진정된 소완에게 자신이 소완을 속였다는 것과, 서약에 대해 품은 걱정을 털어놓았다. 

   "속여서 정말 미안해." 

   "괘념치 마옵소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답을 소첩에게서 얻으려고 하셨다니 기쁠 따름이옵니다."

   소완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주인께선, 초심자들이 요리를 만들 때 범하는 가장 큰 오류가 무엇인지 아시옵니까?"

   "...?"

   "그건 모든 요리에서 모든 재료를 똑같이 대하려는 자세이옵니다."

   "무슨 뜻이야?"

   "자고로 흔하디 흔하지만 한 요리의 주가 되는 재료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단지 미세한 마무리를 위해 조금만 사용되어 그 존재마저도 알아내기 힘든 재료가 있기 마련이옵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요리에서는 앞서 사용된 그 귀한 재료가 주가 되고, 흔한 재료는 그저 장식이 되는 요리도 있지요. 재료의 귀천에 불문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요리에 있어 진리이옵니다. 허나 초심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여, 극상의 재료를 그저 그 재료의 귀함에 맞게 사용하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요리 전체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옵니다."

   소완은 잠시 자신의 비유를 사령관이 받아들이길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께선 서약의 순서가 저희들을 차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하시옵니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지. 내가 누군가를 먼저 선택한다는 건, 그 사람을 더 아낀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주인께서 한 사람과 가장 먼저 연을 맺고, 그 후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체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여념이 없으시다면, 과연 그 때에도 주변에서는 주인께서 그 연을 맺은 자를 편애하신다고 생각할 것 같사옵니까?"

   "..."

   뭔가를 깨달은 듯한 사령관의 표정을 본 소완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가장 먼저 서약의 대상으로 간택받는 것은 지고의 영광이요, 영원히 간직할 기쁨이옵니다. 허나, 그것은 주인께서 만드시고자 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하나의 일부가 될 뿐이지, 전부가 될 수는 없사옵니다. 결국 그관계를 완성시켜 가는 것은 주인과 저희들임을 부디 기억해주옵소서. 그것이 소첩이 과거의 부끄러운 과거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교훈이옵니다."

   "나는 너희들이 그저 내가 마지막 인간이라서, 마지막 남자라서 이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 이 지위를 이용해서 너희들을 그저 나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품고 있던 다른 걱정을 털어 놓았다. 

   "주인께서는 소첩이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소완의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눈빛에 사령관은 움찔했지만, 소완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주인께선 초코 여왕의 성에서 깨달은 것을 벌써 잊으셨사옵니까? 그날, 소첩에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들이 주인을 사모하는 것이 그저 주인께서 마지막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이시기 때문이라고."

   "...그랬었지."

   "방금은 소첩이 요리와 재료로 비유했사오나, 주인께선 본디 도구로 만들어진 저희들을 주인과 같은 존재로 대해주셨사옵니다. 조금 더 스스로를 믿어보시는 것은 어떨런지요."

    "..." 사령관은 소완이 해준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처음 콘스탄챠로부터 서약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생겨난 알지못할 걱정과 불안감, 그리고 의구심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네. 덕분에 다시 깨닫게 되었어. 정말 고마워, 소완."

   소완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요리 이외에도 주인께 도움이 될 수 있어 영광이었사옵니다."

   사령관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을 하러 나온 소완이 주방을 나서려는 사령관을 불러세웠다. 

   "주인, 외람된 질문임을 아오나...혹여나 소첩에게도...아직 연을 맺을 기회가 남아있사옵니까?"

   사령관은 소완을 돌아보았다. 소완의 눈은 여전히 평온해보였지만, 그 저변에는 평소의 날카로움 대신 흔들리는 불안이 내비쳤다. 

   "물론이지. 소완은 내가 정말로 애정하는 사람이니까."

   소완은 눈을 감고 평소와는 다른, 따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주인께서 내려주실 지고의 쾌락을, 소첩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사옵니다."



#4. 다시, 사령관의 경우


   소완과의 대화를 나눈 후 3일이 지났다. 

   서약을 위한 물자가 도착한 날 저녁, 사령관은 오르카의 전 대원들에게 서약에 대해 알리고, 그날 밤에 비밀의 방에서 자신의 첫 프로포즈를 했다. 

   분명 단 둘일 때 진행한 감동적인 프로포즈였을 터, 그 다음날 아침엔 이미 오르카의 기념비적인 첫 서약식에 대한 소문이 전 함내에 퍼진 후였다. 

   '탈론페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무엇보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먼저 들뜬 상태로 서약식의 준비를 시작하는 바람에 사령관은 준비가 끝나는 오늘 바로 서약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사령관실에서 바라본 하늘은 새하얀 뭉게구름만 떠다니는 맑고 깨끗한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 사령관은 창문 옆에 있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편한 복장과는 다르게 정갈한 수트를 입은 자신이 어딘가 어색해보였다. 오드리 드림위버가 직접 만들어준 수트의 살아있는 듯한 옷감을 느끼며, 사령관은 자신이 서약을 맺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게 이렇게 긴장될 일인가...' 자꾸 튀어나올 것만 같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령관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슬슬 갈 시간이군.'

   복도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을 포함한 오르카의 모든 인원은 갑판에서 사령관의 등장만을 기다리고 있다. 

   "..." 조용한 복도에서 나지막히 울려퍼지는 자신의 구두소리를 들으며, 사령관은 3일 전의 일을 떠올렸다. 콘스탄챠의 고백을 떠올렸다. 마법 같은 일이라며 해맑은 미소를 짓던 뽀끄루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화낼 힘조차 없이 그저 슬픔을 삼키려했던 소완의 떨리는 손을 떠올렸다. 

   그리고 프로포즈를 하던 그 날 밤 그녀가 흘린 기쁨의 눈물을 떠올렸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진심어린 애정임을 깨달았다.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사령관은 갑판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올랐다.

 

   북받쳐오르는 감정이, 이제 고민할 것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이, 이제 불안해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이, 이 감정이 틀림없는 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웨딩마치를 위한 전주곡은 끝났다. 

   이제는 그녀를 향해 나아갈 행진곡만이 남았다.

   세상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그녀를 향해-


-Fin.










서약 시스템 업데이트 때 썼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