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에 세상엔 용이 있었고, 나쁜 용들과 착한 용들이 서로 싸웠다.

나쁜 용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지배할 자격이 있는 우월한 존재라고 주장했고,

착한 용들은 우리들은 세상의 균형을 수호하는 자들이지 지배하는 자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서로의 의견차이은 좁혀지지 않았고 그들은 마침내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서로 똑같은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용들이었기 때문에 전쟁은 결판이 나지 않았고 수많은 용들이 죽었다.

착한 용들은 결국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용이 아닌, 그러나 용을 죽일만큼 강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고 나쁜 용들이 전부 죽고 나서야 전쟁이 끝이 났다.

하지만 착한 용들 또한 적은 수만 생존했고 이들 또한 많은 힘을 소모해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세상에 용이 있었다는 것은 이야기로만 전해지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자 이조차 허구에 불과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꽤 특이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런 시골에서 살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아름답고 똑똑하신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같은 미인이랑 어떻게 결혼한건지 의심이 가는 흉악한 외모의 산적같은 아버지.

마지막으로 다행히 어머니를 닮은 제법 잘생긴 나.


아버지는 솜씨 좋은 사냥꾼이셨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냥해온 짐승의 사체를 두분이서 같이 손질을 했고, 내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어머니는 나에게 학문을 조금씩 가르치셨고, 아버지는 나에게 사냥을 가르치셨다.

똑똑하신 어머니의 수업은 나름 재미 있었고, 아버지에게 배우는 사냥은 힘이 들지만 적성에 맞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허리에는 내가 사냥한 토끼가 서너마리씩 묶여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어른이 되면 아버지같은 사냥꾼이 되서 어머니같은 미인과 결혼해 조용히 사는게 꿈이었던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하늘에서 불의 비가 내리기 전까진..


전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괴현상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발생했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불덩이들이 땅으로 떨어져 마을을 불태우고, 불덩이들은 잠시 뒤 형체를 갖춘 금속의 괴물이 되어 일어나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블린이나 오크같은 마물의 형태를 의태한거같은 금속의 괴물들은 원판인 마물보다도 훨씬 강했고, 심지어 그 숫자는 헤아릴수조차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내 가족이 살던 집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 위치해있었고, 이 곳에는 괴물들이 떨어지지 않았다.

절벽 위에서 불타는 마을을 지켜본 아버지는 최소한의 짐만 챙긴 뒤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난데없는 재앙으로 치안이 개판이 된 탓인지 도적들을 마주친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놀라운 솜씨로 도적들을 쓰러트린 뒤 그들을 묶어둔 채로 어디론가 계속 우리 가족을 이끄셨다.

어렸던 나는 공포에 질려 목적지를 물어보는 것 조차 할 수 없었고, 그런 나를 어머니가 도닥여주며 우리의 여정이 계속 되었다.

몇개의 산을 넘고, 튼튼하다 자부했던 나의 다리조차 고통을 호소했는데 연약해보이셨던 어머니는 처음 피난길에 올랐던 때와 다름없는 차분함을 유지하고 계셨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어느 안개가 가득한 높은 산의 초입이었다.

을씨년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에서 아버지는 가만히 서서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삼십분? 한시간?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 산은 사람의 감각을 이상하게 꼬아버리는 기운이 가득했기 떄문이다.

마침내 산 속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그런데그림자의 크기가...매우 작았다.

길다란 하늘색의 머리카락, 낡은 드레스, 그리고 한쪽 눈을 가린 안대를 착용한 나보다 어려보이는 작은 소녀가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침묵이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고, 마침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엣...아버지 지금 뭐라고...?"


"쉿, 조용히 하렴. 지금은 우리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란다."


당황하며 아버지에게 물으려던 나의 입을 조용히 가리며 어머니가 주의를 주셨다.

어머니의 말은 언제나 거절 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지만 머리속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저런 쬐끄만, 나보다도 어려보이는 여자애한테 스승님이라니?

아버지의 스승님이라고 하는 그 꼬마는 한숨을 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겨우 한 사람 몫 하게 키워놨더니 임무 중에 말도 없이 사라지질 않나, 십년 넘게 연락도 없더니 갑자기 나타나? 그것도 '저거'랑 애까지 만들어서?"


꼬마는 어머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저거' 라고 말했다.

남의 어머니한테 저거? 

어이가 없어서 따지려던 찰나 어머니는 또 다시 나를 제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 이 못난 제자가 지은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을 스승님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려했지만...상황이 변했습니다."


"그래, 하늘이 불타더구나.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게지."


도대체 아버지는 저 늙은이같은 말투의 꼬맹이한테 왜 이렇게 공손한거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꼬맹이가 갑자기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허억...!"


하나뿐인 노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자 마치 나는 깊은 물 속에 빠진 거같은 공포를 느끼며 숨이 막혀왔다.

식은땀이 흐르고 덜덜 떨리는 내 몸을 어머니가 감싸자 공포가 사라지고 안도감이 차올라 나는 무력하게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고, 무서운 눈의 꼬마는 혀를 차며 다시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재주도 좋구나 제자야, 저 흉폭한 걸 저렇게나 길들여 놓은 걸  보니."


"...안사람입니다. 너무 뭐라하진 말아주십시오."


"에휴...너도 참...니 자식새끼 얼굴 보아하니 쉬지도 않고 여기까지 온 게로구나. 일단 따라와라, 애가 무슨 죄겠느냐. 니가 쓰던 방에서 쉬게 하거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고개를 젓던 꼬맹이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고, 어머니는 나를 엎고 아버지를 따라 산길에 올랐다.

나?

난 긴장이 풀린 나머지 그대로 어머니 품에서 잠들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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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아아, 낯선 천장이다...

아니 진짜로 여기가 어디지?

어머니한테 안겨서 산에 올라가던 건 기억이 나는데..

어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비틀비틀 일어나 문을 열려던 찰나, 아버지와 그 무서운 눈의 꼬마가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어쩌려는게냐, 미리 말해두지만 난 널 다시 받아줄 생각은 없다."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께 부탁 한가지만 하고 다시 떠날겁니다."


순간, 공기가 차가워졌다.

이 느낌은 산의 초입에서 꼬마와 눈이 마주쳤을때 느꼈던 그 공포였다.


"...네가 나한테 부탁이란 걸 할 입장이더냐?"


분노가 서린,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꼬마에게서 나왔다.

난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았는데, 저렇게 엄청난 기세를 받아내는 아버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저 사람 진짜 내 아빠 맞아..? 왜이리 낯설지?


"염치 없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도 꽤나 고려해볼만한 사항일 것입니다."


"여전히 말 하나는 뻔드르르하게 잘하는구나, 그래 말이나 해보거라."


차가웠던 공기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나의 심장을 조르는 거 같던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내가 훔쳐보고 있던 방문을 가리키며 꼬마에게 말했다.


"저 놈, 제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꽤 쓸만합니다. 기본은 닦아놨으니 키워놓으시면 쓸만할겁니다. 스승님께서 저놈을 받아주시면 전 안사람과 함께 이 사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러 가겠습니다."


"아니, 싸지르는건 지들이 싸질러놓고, 이젠 나더러 네 새끼까지 봐달라고? 생긴거만 산적같은 게 아니라 양심도 없는 놈이었구나 제자야?"


"어차피 스승님도 다른 선택지는 딱히 없지 않으십니까?"


"...말이나 못하면."


"그럼, 받아들이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언제는 네가 내 말 잘 들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지 마음대로 하면서, 귀여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건 여전하구나."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꼬마의 뒤로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며 꼬마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내가 있는 방으로 다가오셨다.


"아들, 깨있는 거 다 안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날 여기 맡기고 떠나신다니, 그것도 두분 다. 아부지야 그렇다 치고 어무이는 왜 데려가? 들어보니 위험할 거 같은데?"


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토라진 말투로 아버지에게 따졌지만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이젠 말해줄 때가 되었구나, 사실은 네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알려주려 했었는데 상황이 상황인만큼, 어쩔 수 없지."


"뭐야, 나 출생의 비밀같은거 있어? 사실 아부지는 내 친아부지가 아니고, 어무이는 어느 나라의 공주같은거지? 내 그럴 줄 알았어, 아부지같은 얼굴로 어떻게 어무이랑 결혼을...악! 왜 때려!!!"


이때다 싶어서 쫑알거리던 내 머리통에 아버지의 꿀밤이 날아왔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아버지는 한심한 놈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이 새끼가 아버지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리고 느이 어무이랑 내가 얼마나 뜨거운 사이인지 뻔히 알면서 말이야!"


아...그렇지..매일 밤마다 열심히 내 동생 만들어주려고 노력하시는 소리 때문에 잠도 못자서 내 사춘기가 일찍 왔지..

문득 그 생각이 들어 난 차가운 눈빛으로 아버지를 째려보았고, 아버지는 내 시선에 무안해졌는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크흠, 이야기가 샜네. 잘 들어라 아들아. 일단 넌 내 친아들이 맞다. 그리고 뭐...느이 어무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건 맞다. 근데 공주는 아니야."


"엥? 그럼 뭔데요?"


"...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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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이 없어?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라 할 말을 잊었냐?"


아버지는 내 눈 앞에서 손을 흔들며 묻는다.


"...아니, 이보쇼..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차라리 그냥 공주가 맞다고 그래. 그러면 아부지도 그냥 공주님 보쌈한 산적이라고 믿어줄테니까, 내가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용은 무슨..악!! 왜 또 때려!!! 때린데 또 때리고 그래 왜!!"


아버지는 내 머리를 때린 주먹을 풀지 않고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쉰다.


"에휴...그래, 뜬금없이 용이라고 하면 안 믿겠지..."


아버지는 결국 장황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난 또 쨍알대다가 꿀밤을 다섯대는 더 맞고 말았다.

전설 속에서 전해지는 용이라는 종족은 실제로 존재했고, 어머니는 그들 중 한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내 어머니는 왜 내가 아는 용이랑 모습이 다르냐고 물어봤더니 용들은 마법으로 그들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수있어서 우리가 아는 용의 모습조차 그들이 전투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변신한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여기까진 이해했고, 그럼 아버지가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그 꼬마는 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여셨다.


"나의 스승님..그 분은 용들의 전쟁을 종결시킨 최강의 무인..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라고도 불리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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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죽이고 시작하려다가 분위기 가볍게 가려고 그냥 떨구고 여행 떠나는거로 퇴장시키기로 함

아빠 스승의 정체는 좌우좌

첫 문단으로 복선 깔았음

철충은 고블린, 오크나 아님 그거보다 센 괴물들로 의태하는 신종 괴물

철남충은 아빠가 좌우좌보단 약하지만 그래도 센 인간 + 엄마가 용 (네임드x, 일회성 캐릭터)

삘받았을때 또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