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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인간 2호 나오면 후회물보다도 추노찍을거 같지 않냐 -1




1

다프네가 미는 휠체어에 실려 사령관실로 향한 지 몇 분. 긴장 때문에 활성화된 호르몬들 때문인지 다리의 절단면에서 오는 고통이 점점 흐려졌다.

 

사령관실이 있는 복도 앞. 여기까지 오면서 다프네가 휠체어를 보통의 걷는 속도보다 천천히 민 탓도 있겠지만, 이 시설의 규모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 긴 여정에 별의별 바이오로이드는 마주쳤어도, 인간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니. 눈치도 없는지, 불안한 생각이 금태양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여기는 전투를 수행하는 인원이 타고 있는 것 같으니 거주 구역은 따로 있을 거야. 현우놈도 거기에 있겠지…. 그놈이 총을 들고 뛰어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냉동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이를 고려하면 그편이 합리적인 추측일 거다.’

 

라고 생각하는 그의 머리 한구석으로 떠오르는, 너무나도 희박한 확률의 사건에 배팅을 걸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다리의 고통에 집중했다.

 

“도착했습니다. 잠시...”

 

휠체어를 멈춘 다프네가 문 옆의 패널을 가볍게 두드리고 허락을 구하자 ‘들어와.’라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이오로이드는 진작에 폐기된 고블린을 제외하면 전부 여성형이니, 인류는 멸종했고 바이오로이드만 살아남아 저항군을 꾸렸다는 절망적인 선택지는 금태양의 머릿속에서 경쾌하게 제거되었다.

 

“그럼, 문 열겠습니다.”

 

“… 네.”

 

사령관이라는 자가 외부인을 직접 만나는 만큼 경비도 삼엄하겠지. 아마 전투용 바이오로이드들은 기본에 리리스 모델까지 있겠지. 숨을 한껏 들이마셔 마음의 준비를 마친 금태양은 살풋 웃고 있는 다프네를 향해 대답했다.

 

두툼한 철문이 열리고 사령관 옆에서 금방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도륙 낼 것처럼 쳐다보고 있는 별들의 향연은, 금태양을 사령관이 가볍게 웃으며 건넨 인사에 기절로 대답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2

“기절하셨네요.”

 

“다른 이상은 없고?”

 

“네. 건강상에 문제는 없어요.”

 

다프네의 말을 들은 사령관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너희는 그냥 다른 데 있는 게 나을 거 같다. 경호는 리리스가 숨어서 하면 충분할 거 같아. 그리고…”

 

사령관의 시선이 그의 침대에 뉘어있는 금태양으로 향하자 메이가 말했다.

 

“…이렇게 비리비리할 줄은 몰랐네.”

 

“…응.”

 

지휘관들을 회의에서 사령관이 금태양을 직접 만나겠다고 하자, 처음 보는 외부인을 사령관이 직접 독대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며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

 

이젠 유일하게 남은 인간은 아니지만, 흑심을 품고 사령관을 해코지라도 한다면, 오르카 세력은 처음 보는 인간의 손에 별수 없이 떨어질 터였다. 더군다나 그의 성품이 바이오로이드를 함부로 대하던 멸망 전의 그것과 같다면, 앞길은 지옥도일 게 뻔한 건 지나가는 토모도 알만한 사실이었다.

 

해결보다 중요한 건 예방이라던가?

 

리리스의 경호 능력을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지만, 기선제압은 중요하니까.

 

이렇게 말한 레오나의 말에 다들 동의하고 수십 분을 토론했다. 어느 위치에, 어느 배치로, 어느 자세로 있어야 사령관이 아무리 살갑게 대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질지에 대해서.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들은 새로 들어온 인간이 얼마나 유약한 멘탈의 소유자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게. 김빠지네.”

 

처음 안건을 낸 레오나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자 다들 동의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저 정도 인간이라면, 아무리 기를 쓰고 달려들어봤자 신체가 강화된 사령관에게 생채기 하나 못 내겠지. 대부분의 지휘관이 이렇게 생각했고, 아르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14,000,601가지의 미래를 들여다보았으나, 사령관이 지거나 하물며 머리카락이라도 헝클어지는 미래는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다들 회의실에서 카메라로 보는 거로 하자. 아르망이랑 리앤은 여기서 일하는 척하면서 보고 있는 거로 하고.”

 

“알겠소. 저자가 깨기 전에 카메라를 설치하려면… 빨리 포츈을 호출해야겠군.”

 

“아, 그럴 필요 없어.”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사무용품과 방 곳곳에 붙은 마스킹 테이프를 떼어내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페더 부르기만 하면 돼.”

 

칸이 페더에게 용건을 말하자 그녀가 기절하면서 패드를 떨어트려 사령관의 면담을 카메라로 지켜보지 못할 뻔 한 것, 다음날 탈론페더가 <BIG BROTHER IS WATCHING YOU>라는 문구가 적힌 활동복을 입고 스틸라인의 유격 훈련에 참가하게 된 건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3

금태양은 소완이 말없이 내미는 유자차를 과해 보일 정도로 굽실거리며 받았다.

 

‘과연 이걸 마셔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령관과 차를 몇 번 번갈아 보았지만, 이걸 입에 대지 않고는 도통 대화를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차를 입에 가져갔다.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진작에 죽일 생각이었으면 나이트 칙 앞에 내버려 뒀어도 될 일인데, 독약 같은 번거로운 걸 사용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 그… 차가 맛있네요.”

 

“오, 다행이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히 무리해서 오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조금 걱정됐습니다. 오시자마자 쓰러지셔서.”

 

“아, 아유 그럼요… 덕분에… 감사합니다….”

 

살갑게 그를 맞아주는 사령관의 노력에도, 금태양은 도저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하하, 우선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 오르카호의 함장이자 저항군의 사령관입니다.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여기는 군사적인 목적을 어느 정도 띄고 있거든요. 실례지만 성함이랑 소속, 그리고 어째서 그런 곳에서 철충한테 공격받고 계셨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여태껏 살면서 금태양은 외모가 훌륭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쩜 다들 하나같은지, 머릿속엔 이성에 대한 생각밖에 없고, 진지한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외모로 얻는 사회에서의 메리트가 당연한 줄 알고 있었고, 그들 스스로 외모가 훌륭하다는 걸 낯부끄럽지도 않은지 알고, 무례함은 기본이었다. 정리하자면, 평범한 외모에, 중산층이라고 할 수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아득바득 살아온 금태양의 눈에 좋게 보일 부분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령관이라는 자는 그가 내린 귀납적인 추론의 맹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화려하기보다 깔끔한 생김새, 유쾌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 고압적으로 나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상황임에도 잃지 않는 신사적인 태도. 이성애자인 내가 봐도 남자 대 남자로서 이렇게 호감이 가는데, 이성이라면 오죽할까 하는 생각에 금태양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문인지 자연스레 긴장이 풀린 금태양은 지금까지의 삶을 술술 풀어놓았다. 별로 좋지 않은 가정형편에 힘들었던 일, 세상이 굴러가는 모습에 녹아들지 못해 고생한 학교생활, 살길을 찾아 헤매다가 찾은 과학도의 길, 갖은 노력으로 붙은 대학에서도 성적은 괜찮았지만 이름있는 집안 자제들이 가득한 그 시절 대학에서 방황한 일, 석사를 끝내고, 고민한 결과 박사학위까지 받은 일, 생각처럼 잘 안 된 임용, 그리고 현우의 도움으로 회사에 들어가 조금 지낸 이야기까지 이야기를 망설이려 할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반응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령관 덕에 얼마 전에 길바닥에서 죽을 뻔한 이야기까지 마쳤다.

 

현우의 이야기를 할 때 즈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령관에게 다른 사람들은 없는지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 유감이에요.”

 

“하하, 아니에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흉강이 뭐에 묶인 듯 옥죄여옴을 느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령관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가실 곳은 있으세요?”

 

“하하… 그런 게 있을 리가요.”

 

난처한 듯 웃으며 대답한 금태양은 지금이 이곳에 남을 수 있을지 물어봐야 하는 타이밍인가 생각했다. 생각이라고 해봤자 ‘어떡하지’만 되풀이되는 막연한 걱정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잠시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치고 반가운 이야기를 꺼낸 건 사령관이었다.

 

“혹시 그럼 제가 제안을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아까 생물학 공부하셨다고 하셨죠? 여기 오르카에도 연구실이 있습니다. 저희가 마주한 적이 미지의 외계생명체다 보니 태양 씨의 지식에 도움을 받고 싶네요. 연구실에 닥터가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나을 테니까요.

 

혹시 내키지 않으시다면 ‘요안나 아일랜드’라는 후방기지가 있는데, 그곳에 자리를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자원관리나 인프라구축을 하고 있는데, 비전투 인원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경계 인원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겁니다. 혹시라도 공습이 오면 저희가 인원을 보내니까요.

 

두 제안 모두 마음에 안 드시면 떠나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손님이시니 아쉽게 나가시겠다고 하셔도 식량이나 무기 같은 물자는 가능한 만큼 차출해드리겠습니다.”

 

선택지를 몇 가지 던져주긴 했지만, 금태양이 고를 것은 뻔했다. 후방기지? 비전투 인원이 대부분이란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전투 인원이 배치돼있겠지만, 공습이라도 오는 날엔…. 바깥에서 이미 경험한 무기력함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이곳에 남을 명분까지 갖춰진 선택지를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저는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

 

“세 번째 제안은 그렇다 치고, 두 번째 제안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나요? 개인적으로 두 번째 제안을 선택하실 줄 알았거든요. 여기에 있는 것보다 편하고 느긋하게 지내실 수 있을 테니까요. 굳이 이곳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혹시 이 자리를 탐한다거나 하는 야욕이라도 있으신 건지?”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래도…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이기적인 이유지만… 전 인간은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휴양지에 누워있는 게 훨씬 편하고 여유로울 순 있죠. 그래도 마지막에 가서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산 삶일 겁니다. 전 행복해지고 싶거든요.

 

더군다나, 더군다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제 마음의 짐도 덜고 싶습니다.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방에 들어온 뒤로 처음 의욕적으로 대답하는 금태양을 보며 사령관은 엷게 웃었다. 금태양은 이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전투의 고양감 같은, 어쩐지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 전에 여쭈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오르카 호에 저를 제외하면 모든 승무원이 바이오로이드입니다.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는 사령관의 표정. 그에 더불어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금태양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그 질문이었지만, 금태양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언제나 진실은 통하는 법이니까. 만약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남자는 내 대답을 핑계 삼아 나를 해코지할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고 금태양은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게 맞겠죠.

 

어릴 적에는 집안 형편상 바이오로이드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대학에는 바이오로이드가 아주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회사에선 상사들의 바이오로이드를 자주 마주했습니다만, 그들을 대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상사의 뜻대로였습니다. 누구는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오히려 그렇게 대하면 화를 냈습니다. 물건과 인간의 경계를 흐리지 말라고 설교하는 이도 있었고, 자신을 존대하라는 의미에서 그의 소유물인 바이오로이드에게 깍듯이 대하라는 상사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이오로이드를 마주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그 존재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사령관님은 제 목숨을 살려주신 은인이신데, 사령관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사령관은 그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하, 그래도 너무 저자세로 나오실 필요는 없으세요. 어색한 건 금방 해결될 겁니다. 아침에 눈 떠서, 밤에 누울 때까지 마주칠 텐데요. 인간이랑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전. 어색해도 금방 그렇게밖에 생각하실 수 없을 거예요. 그럼,“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태양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승선을 환영합니다.”

 

 

4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지?”

 

금태양이 실려있을 휠체어의 바퀴 소리가 충분히 멀어지자 사령관이 리앤에게 물었다.

 

“응, 일단 거짓말은 아닌 거 같아. 특히 마지막에 한 말은 더더욱.”

 

제일 걱정하던 부분이 해결되자 사령관은 이번엔 아르망을 향해 의자를 빙글 돌렸다.

 

“아르망, 저 사람을 들였을 때 일어날 일이나 효과는 뭐가 있을까?”

 

“아직도 정보가 한참 부족하긴 합니다만, 좋은 일로는 사령관님의 업무 부담은 약 20%P 감소할 것으로 보이고, 연구에서 성과를 내는 시간은 6%P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안 좋은 일로는, 저분께서 뛰쳐나갈 확률은 97%, 반란을 일으켜 오르카를 전복시킬 확률은 0%입니다.”

 

“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아르망의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은 만족스럽다는 듯 양손을 쓱쓱 비비며 음흉하게 웃었다. 이때만큼은 백토가 봤다면 발작해서 덤벼들 만큼 사악해 보이는 그였다.

 

리앤과 아르망은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그 이면에 꿈틀거리는 그 자신과 그녀들을 위한 순수하고도 짓궂은 욕망에 엷게 웃었다.

 

“주인님, 다른 지휘관들이랑 마찬가지로… 죄송하지만 저는 마음에 안 들어요.”

 

금속끼리 긁히는 약간의 소음과 함께 공중에서 리리스가 사령관의 무릎으로 우아하게 내려왔다. 알비스에게 ‘부둥부둥’에 대해 들은 뒤로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이젠 사령관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리리스의 허리를 안고 무릎을 편안한 박자에 맞춰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이름부터 저게 뭐예요…. 호드의 변태가 말한 ‘NTR’ 물에 나오는 악역 같잖아요….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우유부단해선….”

 

“에이, 그래도 사람을 이름이랑 외모로 속단하면 안 되지. 그리고 리리스 마음에 들었으면 내가 질투 나서 못 견딜걸? 난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머,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멋진 주인님이 계시는데… 짓궂으시네요.”

 

금태양에게 보이던 묘한 살기는 어디 가고 짐짓 삐진 척을 하고 있는 리리스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는 사령관을 보며 리앤과 아르망은 언제 봐도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 그리고 주인님의 의견에 토 달긴 싫지만… 데려와도 그렇게 이득인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굳이 저 인간을 들이셔야 하나요?”

 

“무슨 소리야. 어마어마한 이득이지. 내 업무가 80%로 준다고? 내가 철충들 동면기에는 7시간 정도 자고 15시간 정도 일하고, 활동기 때는 많이 봐줘서 5시간 정도 자고 17시간 일하니까 80%면 동면기 때는 3시간, 활동기 때는 3시간 반 정도가 시간이 생기는 거 아니야?

 

그 시간에 잠만 자도 8시간 넘게 자는 새 나라의 어린이고, 너희들이랑 시간을 보내도 얼마나 충실한 하루하루가 될 텐데. 초-이득이지.”

 

사령관의 이런 말에도 여전히 내키지 않는듯한 표정을 짓던 리리스는, 사령관이 허리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고 목에 입을 맞추며 ‘세 시간이나 늘어난다고?’라고 언질을 주자 메이보다 새빨갛게 얼굴을 태우며 좋은 생각이라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 폐하께서 하신 방금의 이야기는 지휘관들이 못 들었으면 좋겠군요.”

 

“하긴, 들으면 잔소리하겠지?”

 

 

5

저녁 식사를 끝내고, 금태양은 포츈을 통해 건네받은 단말기로 사령관에게 연락을 받았다. 오르카가 마주한 ‘철충’이라는 적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 존재의 특성 때문에 바이오로이드들이 어떤 골칫거리를 안고 있는지.

 

군사 지식이 있을 리가 만무한 금태양이 아무리 작은 규모여도 그녀들을 지휘하는 건 무리라고 그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약간의 훈련을 통해 2~3팀 정도라도 탐색팀을 담당할 수 있으면 좋겠노라고 사령관은 말했다.

 

철충과 조우했을 때 전술적인 판단은 탐색팀의 팀장에게 맡기고, 마지막 공격 명령만 사령관의 명령을 하달한다는 문구만 갖춰 내려주면 되기 때문에 큰 전략적 안목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일 터였다. 더군다나 상황이 발생했을 때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라 이를 맡는다고 일과에 큰 지장도 없었다.

 

대학에서 연구할 때처럼 수업이나 아르바이트도 없이, 더군다나 집안일과 비슷한 잡무도 배틀 메이드에서 어느 정도 해결해준 만큼 시간이 남을 것이기에 사령관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금태양은 흔쾌히 수락했고, 사령관은 업무 효율을 0.3%P정도 얻을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 업무시간에 사령관은 금태양을 불러 간단한 서류 결재를 부탁했다. 군사적인 안건이나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서류처리까지도 아닌, 간단한 소원 수리 같은 일들. 안드바리에게 전달받은 서류들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요약해서 사령관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비록 매일 매일 주어질 일이지만,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일이라 금태양은 이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이방인인 그를 믿고 일을 선뜻 내어준다는 점에서 감동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삼안에서 한 달 정도는 사소하다고 하기엔 애매하게 큰, 작은 일을 시키고 괜한 갈굼만 받았던 그에겐 천사나 다름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잘 대해달라고 부탁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상냥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한편,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들의 기분을 상하게 해선 안 되겠다고 가뜩 긴장했다. 자신에 대한 불평이 그녀들의 입을 타고 사령관의 귀에 도달하면, 그의 상냥함만큼 단단한 검이 자신을 내리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포를 느끼며 한구석으로는 그녀들처럼 그에게 부하로써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휩노스 병에 대해 전달받고 오후에 김지석의 묘로 출발하기로 하고, 금태양은 사령관의 업무를 지켜보았다.

 

오르카를 좀 둘러보는 게 어떻겠냐는 사령관의 제안이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다른 승무원들에게 아직 정식으로 인사한 상태도 아니고, 다리도 한쪽 없는 상태로 돌아다니면 휠체어를 미는 다프네만 고생할 터였기 때문이다. ‘사령관의 밑에서 생활하려면 이 정도 배려는 갖추어야 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사의 역정에 못 이겨 바이오로이드들을 거칠게 대할 때보다 편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지켜보게 된 사령관의 업무는 감히 쫓아갈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오전에 있는 지휘관 회의를 시작으로 살인적인 양의 서류처리, 간간이 찾아오는 조그만 불청객들도 업무를 멈추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그러면서도 밀리는 거라곤 일절 없었다. 대면보고는 물론, 짜증스럽게 울리는 경고음에 HMD를 쓰고 지휘하는 모습 역시 일반인이 봐도 신속, 정확, 명확하고 효율적인 지휘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업무에도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일이 일절 없었다.

 

아, 파티마라는 인물과 연락하고 패드를 몇 번 두드린 다음 격하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금세 수그러들고 이로 인한 사건이 더 터지지는 않는 걸 보아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스트레스 해소용 게임 같은 거겠지. 게임이 잘 안 풀렸나? 

 

이게 공식적인 전면전이 없는 기간의 모습이라니, 과연 사람인가 싶을 정도의 강인함에 사령관을 향한 충성심은 지수함수처럼 커져만 갔다. 문자 그대로 간이고 쓸개고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 중에도 시계는 간다는 말처럼 점심시간이 끝나고, 작은 팀을 꾸려 사령관은 금태양을 데리고 신체 재건설비로 향했다.

 

금태양은 연령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고, 그의 연구 활동에 도움이 될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뇌와 호르몬 시스템을 위해 소년의 몸을 선택했다.

 

 

그의 이 선택이, 그 자신에게 어떤 비극을 가져다줄지 모른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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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환영 오히려 좋아

코와붕가한 글을 쓰고 싶은 것이다-!


다음편 부터 짬처리 한 스노우볼을 굴릴예정ㅇㅇㅇ 뭔가 이번편은 판만 깔아두고 내용은 없는거 같어서 아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