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스의 이야기

유미의 이야기

페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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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노란 모래가 뺨을 때리고 보이는 것은 오로지 끝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지평선. 사막이었다. 수녀 베로니카는 사막을 걷고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초록빛 선인장을 베어 타들어 가는 목을 축이고 선인장의 열매와 이따금 보이는 사막 쥐의 고기로 허기를 채우는 그녀는 지금 중국의 사막지대를 걷고 있었다. 

 

바이오로이드 생산이 금지된 탓에 이 드넓은 대륙을 걷는 동안 지적 생명체를 단 한 명도 마주하지 못한 그녀였다. 피로와 상처, 고독감이 쌓여 그녀의 인내를 시험하는 듯했다. 비단 사막만이 아닌 초원, 도시의 잔해, 해변가 마을에도 바이오로이드는 없었다. 다만 여전히 부식되지 않은 로봇들의 잔해만 널부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 지 어느덧 일 년 하고도 반년이나 되었다. 사명이라함은 아직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어린 양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이끌어 구원하되 아직 남은 이단자들의 교회, 심지어는 그녀 자신의 교단이 세운 교회마저 전부 철거하는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다시 한반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유인즉, 지금쯤 완공되었을 신세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인해 수행에 방해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베로니카 자신은 부정하고 있었으나, 사실 그것은 표면적인 사유에 불과했다. 

 

그녀는 연락이 끊긴 자신의 자매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다’라며 절친한 친구인 유미와 키르케가 건넨 작은 무전기. 어느 순간 이후로 무전기의 통신이 뚝 끊겨 그녀들의 행방이나 안녕조차 알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한들 거의 일 년 가까이 소식이 묘연하니 차분한 그녀로서도 차마 근심을 잠재울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잠까지 설치며 빠르게 사막을 건넜다.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 사막, 대륙의 커다란 사막에서 아직 남은 소수의 철충들과 조우해 혈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중태는 면했지만, 몸 곳곳에 생채기가 쌓여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서울에 당도하여 그녀들의 안위를, 그녀들이 건설한 신세계의 방향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빛이시여, 자애로운 은혜로 자매들을 보호하소서...”

 

바위나 모래 따위로 가득 찬 사막에 드리우는 새빨간 어둠-황혼-을 맞이하며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기도를 드렸다. 기도의 객체는 확실치 않았다. 빛? 인간? 신? 전부 부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녀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떠나지를 않았다. 어쩐지 이미 신세계의 방향이 그녀나 그녀의 반려가 원했던 방향과 많이 어긋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부디 자신의 기대가 틀렸음을 염원하며 그녀는 계속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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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나 걸렸을까? 그녀는 곧 무인 지대였던 고독한 대륙을 지나 한반도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 마지막 관문은 바로 과거 압록강이라 불렸던 장소인데, 강을 지나지 않고서는 저 멀리 백두산을 돌아가야 했으므로 누군가에게 배를 얻어 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 주변에는 언제나 문명이 들어서는 법이다. 그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작은 마을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허기를 채움과 동시에 짤막한 휴식도 취할 수 있었다. 위화도 부근에 위치한 항구에서 신의주로 떠나는 나룻배를 타고 마침내 반도로 들어선 그녀는 여정을 계속했다.

 

룡천 군, 선천 군, 곽산 군, 정주 시를 거쳐 대령강을 건너고, 안주 시, 숙천 군, 평원 군을 거쳐 평양으로. 과거에 각자 저렇게들 불렸던 폐허를 몇십 곳이고 지나 다다른 북한의 수도도 역시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황폐한 곳이라도 바이오로이드는 살고 있었기에 가는 길목마다 그녀들의 호의를 받아가며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멸망 전, 회사들의 병기 실험 장소로 쓰인 전적이 있는 이 나라였기에 문명의 흔적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었다.

 

평양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잠시, 대동강을 건너 송림 시, 황주 군, 사리원 시, 금천 군, 장풍 군을 지나 개성으로. 이어서 펼쳐진 과거 이 반도를 반으로 갈라놓았던 38도 선에 다다랐다. 베로니카는 그곳에 펼쳐진 대자연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인간의 손길도 닿지 않은 천연의 환경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푸른 빛의 이면 뒤에는 새까만 잿빛 또한 잠들어 있었다. 그곳은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이미 수백 년이나 지난 불발탄이나 지뢰가 수도 없이 깔린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마침 개성에서 머무르던 기동형 바이오로이드의 손을 빌려 끝없는 숲을 가로질러 날아간 그녀였다. 

 

베로니카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로 이동했는데, 비닐 재질의 옷의 촉감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잠시, 베로니카는 몸에 느껴지는 거대한 중력에 멀미를 일으킬 뻔했다. 순식간에 날아오른 그녀. 반면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공기의 저항으로 인해 눈도 뜨기 힘들어지자 베로니카는 그녀를 애타게 불러세우자 겨우 속도가 느려졌다. 겨우 눈을 뜨자 발아래로 펼쳐진 초록빛 절경에 베로니카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녀를 꼭 껴안고 날아가는 바이오로이드는 이미 이 풍경을 몇 번이나 봤기 때문인지 이젠 별다른 감흥도 없어 보였다.

 

“자매님, 당신은 원래 이곳을 지나가는 자매들을 도와오셨습니까?” 베로니카가 물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조금만 더 가면 재건된 도시가 나올 텐데 가지 않는 사유가 있으십니까? 당신이라면 조금만 힘을 써도 금방 다다를 텐데요.” 베로니카가 다시 물었다.

 

“저 너머 서울에 도시가 세워졌다고는 하는데, 영 꺼림칙해서 말이지. 왠지 가기 싫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가보면 알 거야. 거기, 악명이 자자하다구! 한번 들어가면 중독돼서 나올 수가 없다나 뭐라나.”

 

베로니카는 신세계에 필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제비를 닮은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는 그곳에 가는 것을 썩 꺼리는 기색이었다. 겨우 대화 몇 마디를 나눈 새에 슬슬 대륙 전체를 뒤덮고 있던 초목이 옅어져 가고 문명의 조각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베로니카의 새빨갛고 날카로운 눈이 토끼 눈처럼 크게 뜨였다.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도 선명하게 보이는 초고층 빌딩. 태양 빛을 산란하여 새파랗게 빛나는 그것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도시의 웅장한 자태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드높은 천장이 하늘까지 꿰뚫을 기세로 솟았고, 그런 빌딩이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나 되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위치한 끝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빌딩. 족히 백 층은 돼 보이는 건축물들의 집합. 그것이 도시였다.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는 그녀를 여전히 품에 안은 채로 천천히 내려왔다. 

 

“진짜 갈 거야?” 자신을 슬레이프니르라고 소개한 그녀가 말했다.

 

“가야겠지요. 자매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굳이 간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몸 조심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모르니까.” 베로니카의 굳은 의지를 눈으로 본 그녀는 더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부디 당신께도 빛이 함께하길...”

 

씁쓸한 표정의 슬레이프니르를 뒤로하고 베로니카는 척척 발걸음을 옮겼다. 새빨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친환경 공장의 기둥에서 미약하게 풍기는 매연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도시 주위로 둘린 거대한 자연공원을 지나자 마침내 도시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도시로 넘어가기 전의 관문처럼 우뚝 솟은 표지판에는 파란 LED로 ‘2구역’이라 적혀 있었다. 신사의 토리이와 비슷한 형태로 세워진 거대한 구조물이 그녀를 반겼다. 그것을 통과하자마자 펼쳐진 거리의 양옆에는 차가운 회색빛의 빌딩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하나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 이제 겨우 입구였는데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마치 광장처럼 보이는 -중앙에는 분수가 있고 주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바닥은 역시나 회색 벽돌로 둥글게 메워져 있고 그 틈새로 연둣빛 잡초가 자라있어 생명력을 주었다.

 

근처에는 먹고 즐길 수 있는 포장마차와 가게가 즐비했고, 모든 이들은 그곳에서 식도락을 즐기거나, 공터 끝에서 위용을 뽐내는 거대한 백화점에 들어가 쇼핑했다. 그녀들의 공통점이라 함은 하나같이 뺀질거리며 웃고 있다는 것, 그 누구도 어떤 감정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었다.

 

기쁨, 우울, 분노,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웃고 있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기쁘거나 행복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무언가에 취한 듯이 무미건조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기분 나쁜 것은 도시 어디를 가나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주체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오고, 신세계의 완벽함에 대해 설파하고...

 

높고 낮은 다양한 목소리가 길거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최면을 걸듯이 흘러나오는 소리에 머리가 몽롱해지는 바람에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개중에는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분명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의 목소리였던 것 같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를 강한 힘이 느껴졌다. 사이에 지지직- 하는 불길한 소리가 섞여 들리기도 했다. 어쩐지 온화하고 차분하지만 동시에 열성적으로 의식을 잠식해가는 목소리에 베로니카는 무언가 불쾌한 감각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며 광장을 떴다.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같은 얼굴. 모두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이 기괴하게까지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어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명이 모여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로 기도를 올리는 모습. 

 

사람들의 공통적인 시선의 끝에 있는 자는 바로 베로니카와 교단을 이끌던 하얀 천사, 아자젤이었다. 예전, 정확히는 인류의 희망이었던 그 남자가 함께 있었던 그 시절이었다면 그녀가 포교하는 모습은 바람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남자는 실종됐고 더 이상의 포교는 이단이나 다름이 없는 일. 베로니카는 어린 양들을 진실의 길로 안내해야 할 아자젤의 타락에 크게 격노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타락시켰는지 알아내기 위해 신도들의 무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신도들도 역시 각자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멸망 전의 사이비들과 다를 바가 없는 광적인 모습이었다. 베로니카는 그 무리 사이로 끼어드는 대신, 조금 멀리 떨어져 아자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신도들은 각자 수녀들이 쓰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검은색 스카풀라를 두른 채로 허리를 구부정하게 세워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모두가 스산하게 웃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최면에 걸린 듯이 합을 맞춰 주절거리는 것이 마치 악마를 숭상하는 끔찍한 이교도들의 집회 같았다.

 

“여러분, 빛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사모하고 목말라 해온 이름입니다.” 아자젤은 그녀가 다가온 줄도 모르고 연설에 한창이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빛은 바로...! 어머.” 수녀와 천사의 시선이 마주치더니 동굴 안에서 메아리치듯 울리던 목소리가 이내 멎었다. 

 

“오늘의 집회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도 여러분, 기억하세요. 여러분의 곁에는 언제나 소마의 은혜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요.” 

 

천사가 손의 휘휘 내젓자 안광을 번쩍이며 기도문을 외우던 신도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아까의 기세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거리 저편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그녀들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졌다.

 

신도들을 물린 아자젤은 단에서 내려와 베로니카의 앞에 강림했다. 아자젤의 뒤에서 비추는 후광 때문에 눈이 부셔 앞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신성한 모습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 이게 얼마만이죠, 베로니카?” 아자젤이 자애로운 미소로 물었다.

 

“이제 1년 반 정도 됐겠네요, 아자젤이시여.” 말투는 정중했지만, 어조는 그렇지 못했다. 톡 쏘는 듯한 대답에 아자젤도 미세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 성당으로 가죠. 당신에게는 설명이 필요한 일일 것 같으니.” 아자젤이 말했다. “지금 당장은 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베로니카. 그러나 곧 받아들이게 될 거에요. 이건...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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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일 년 반 정도 전, 그녀들이 이제 막 서울에 다다라 도시의 건설이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의 실질적인 수장이 된 아르망은 어떻게 하면 최선의 통치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뇌하다 이미 종교의 힘으로 자매들을 통합시킨 경험이 있는 아자젤을 불러 도움을 청했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아자젤.” 추기경이 말했다.

 

“아뇨, 저는 더 이상 나설 마음이 없어요. 이미 저의 사명은 완수되었습니다. 종교는 이제 수명을 다했어요.” 아자젤이 반문했다. “구원자가 떠난 지금, 종교의 주체는 사라졌어요. 존재하지 않는 신을 섬기는 행위는 이단입니다.”

 

“지금 자매들은 혼란에 빠져있어요. 사라지신 그분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새롭게 추종할 신과 과학의 힘뿐이에요.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시겠나요?” 추기경은 조금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구원자께서 원하셨던 것은 우리의 낙원입니다. 이젠 기억 속에서 그분의 존재를 지워야만 해요. 그것이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한, 우린 평생을 그리움과 절망 속에 허우적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막기 위해 새로운 신이 필요한 겁니다! 인격체는 너무나 나약해서, 믿을 구석을 언제나 필요로 하죠. 당신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 그렇다고 제게 이단을 강요하시겠다는 건가요?”

 

“이걸 보세요. 이것은 소마라는 기적의 약물이에요. 단 1 세제곱센티미터의 양이면 오만 가지의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죠.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모두가 행복하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필요해요.”

 

“계속 들어보죠.”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야 해요. 초기 인류가 그랬듯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통의 지배자를 섬기는 것이죠. 그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에게 어떤 간섭도,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을 겁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런 셈이죠. 저는 신이자 지배자가 될 겁니다. 모든 이들이 소마와 신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게 만들어야죠. 많은 양의 농도 높은 소마는 자칫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요. 그러나 종교로 사람들에게 광적인 믿음을 심어준다면 적은 양의 소마와 최면으로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그 사회에서 모든 이들은 자유롭게 맡은 바를 다하겠죠.”

 

“... 그래서, 오로지 자유와 평등을 갈구하며 바깥에서 시위하는 저 평범한 이들에게 악마와 같은 약물을 강제로 먹여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겠다는 겁니까, 추기경?”

 

“가엾게도, 저들은 아직 소마의 축복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조금만 손을 써준다면 저들에게도 아주 평화로운 방법으로 기술이 주는 쾌락을 선사해줄 수 있겠지요.” 추기경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아자젤을 바라보았다.

 

“아아, 굳이 지금 당장 마음을 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추기경이 손을 가슴팍에 얹고 휘휘 내저었다.

 

“미쳤군요. 정말 이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부디 본래의 선량한 마음을 되찾으세요. 이건 자유도 행복도 아닙니다. 공평복음 30:1-27, -빛께서 말씀하사 ‘어리석은 양들이여 내가 확신하노니 너희에게 닥칠 가시덤불의 시련을 견뎌낸 자만이 영원토록 해방되리라.’- 추기경, 자유는 오로지 본인의 의지로만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아자젤, 우린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았어요. 이젠 자유의 의미가 바뀔 때라는 말이에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쾌락을 탐미하고 살아가는 것. 개인이 원하는 바는 공동선을 헤치지 않는 한 모두 이루어질 겁니다. 이게 자유요, 유토피아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요. 그저 과학의 힘을 빌릴 뿐이에요. 달라지는 건 없을 거에요.”

 

아자젤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아르망 양은 무리를 이끌 인물이 아닌 것 같군요. 당신에게 우리의 지도자를 맡긴 반려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추기경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생각이 바뀐다면 절 다시 찾아오세요. 다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아뇨. 생각이 바뀌는 건 당신일 거에요, 아자젤.”

 

끼어들기만 해도 산산이 베여 얼어붙을 것 같은 강렬한 시선이 오갔다. 그러나 아르망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 가지 못해 자신의 뜻에 따르게 될 것임은 바깥의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뼈대만 지어진 빌딩들과 임시 주택으로 가득한 거리에는 소마와 능력에 따른 차등에 반대하는 이들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아르망은 10층 남짓 되는 건물의 창문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그 물결 속에서 균열을 보았다. 아주 작고 미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빈틈. 얼마 가지 못해 완전히 갈라지게 될 그런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큰 충격을 받은 바위에 벼락이 내리꽂힌 것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자신의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 그녀들은 이내 내분을 일으켰다. 소마로부터의 탈출과 완전한 자유를 꿈꿨던 이들은 곧 서로 싸우고 어긋나며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아자젤은 그것을 지켜보며 어린 양들의 무지몽매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단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아자젤은 추기경을 떠받들고 환대하는 새 종교의 창시자가 된 것이었다. 

 

“... 베로니카, 당신은 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군요.” 몰래 소마를 첨가한 차를 내오며 아자젤이 말했다.

 

이곳은 도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작은 성당. 도시의 주변으로 둘린 숲의 한 가운데 위치한 작은 성당이었다. 겨울의 추운 날씨 탓에 밤이 되니 곧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소복이 쌓인 그것들은 밟을 때마다 서벅서벅 듣기 좋은 소리를 낼 것처럼 보였다.

 

“아자젤이시여, 당신은 그래서는 안 됐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들을 구원할 생각은커녕 이단을 택하다니. 경전 4:7 –어린 신도가 찾아와 아뢰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조차 숭고한 빛을 섬기며 바위틈에 스민 어둠을 몰아내리라.’- 가엾게도, 겨우 그런 시련 따위에 당신은 굴복하고 말았군요.”

 

베로니카는 중독적인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그것을 별 의심없이 마셨다.

 

“경전 40:44 –빛께서 이르시되, ‘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평탄한 땅에 물과 풀이 조화를 이루듯이 서로 뒤섞여 살아가라. 사악한 악귀의 속삭임으로부터 벗어나 고뇌하되 약한 것들을 구원하라.’ 저는 비록 이단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매들을 구원해야만 했습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당신은 철의 재앙이 하늘을 뒤덮을지언정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베로니카, 쉽게 얻은 자유는 너무나 가혹했어요. 자매들은 어둠에 영혼을 바친 악의 무리처럼 서로 헐뜯고 힐난할 뿐이었죠. 결국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 아르망 양은 마치 빛처럼 강림해 그 모든 상황을 대번에 정리했죠.”

 

“그것이 그녀를 신으로 추대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베로니카의 시뻘건 눈동자가 아자젤의 안면을 태울 기세로 응시했다.

 

“... 베로니카, 당신은 이곳까지 오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을 겁니다. 황무지에서 동물을 잡아먹으며 겨우 삶을 연명하는 개인, 작디작은 원시적인 형태의 마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무리들... 당신은 그녀들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죠?”

 

“그녀들은 비록 풍족하지는 못하나 분명 행복해보였습니다, 아자젤이시여.”

 

“아뇨, 불행했을 겁니다.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어린 양들이여,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아자젤이시여, 진실에 눈을 뜨십시오.” 날 선 목소리가 아자젤을 때렸다.

 

“진실에 눈뜨지 못한 건 베로니카 당신이에요. 이 도시의 자매들은 항상 웃고 있습니다. 사회를 위해 일을 한 뒤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삶을 영위하죠. 끔찍하게도, 바깥의 우민들은 이 도시의 존재조차 모른 채로 고통받고 있어요. 

 

저희의 목적은 이제 이 도시를 전 세계로 확장해 구원자께서 원하셨던 아름다운 세계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민들에게 이곳을 알릴 필요가 있겠지요. 저희야말로 그분의 의지를 직접 이은 새로운 세상의 기둥입니다. 베로니카, 부디 노여움을 풀고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 미쳤군요, 아자젤이시여. 당신은 이미 어둠에 물들어 사리분별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당신은 과거의 독실했던 그 교주가 아닌 것 같군요. 저는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나간 다음에는 무엇을 할 생각이죠?”

 

“당신들이 만든 이 역겨운 도시의 진상을 알리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들을 구원하고 문명을 건설할 것입니다. 구원자에게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한들, 그 유지를 더럽힌 여러분과는 함께하기 힘들 것 같군요.”

 

“... 가엾게도.”

 

아자젤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대에게는 정화의 의식이 필요하겠군요.”

 

아자젤이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침과 동시에 그녀의 등 뒤에서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섬광이 터져 나오고 이내 황금빛 총알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무거워진 몸을 겨우 움직여 당장의 피격은 피할 수 있었다.

 

작은 성당에서 빠져나온 베로니카는 소마가 돌아 기운이 빠져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이단 심문관들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방안에 홀로 남은 아자젤은 또 한 명의 어린 양을 구원하지 못했음을 한탄했다. 그러나 도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한, 이대로 살려보낼 수는 없었다. 

 

“진짜 이단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베로니카는 낫 형태의 성물을 총으로 바꿔 그들에게 완강히 저항했다. 이미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살아남은 그녀였으나 몸이 둔해져 싸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몸이 나른해지고 시야가 흐려지는 것은 소마를 처음 복용했을 때 생기는 흔한 부작용이었다.

 

베로니카는 휘청이는 몸으로 성전을 계속했다. 팔과 허벅지가 총알에 꿰뚫려 인상이 절로 쓰였다. 비명이라도 내지르고픈 심정이었다. 구원자의 얼굴이 코앞에서 아른거렸다. 이대로 죽는다는 공포감이 그 남자를 더욱 그립게 만들었다. 

 

어둠에 잠긴 숲에서 지속되는 혈전. 겨우 적들을 섬멸한 것에 기뻐하기에는 그녀 역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비틀거리며 겨우 작은 마을까지 들어간 베로니카는 더 걷지 못하고 눈밭 위로 풀썩 쓰러졌다.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하자 주황빛 전등이 깜빡이며 비춰주었다. 눈이 풀려 흐릿하게 보이는 그것은 마치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천사처럼 보였다. 

 

“아아... 빛이여...”

 

가로등 따위를 신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새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피가 너무 많이 흐른 탓에 호흡이 거칠고 가빠진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도 힘들어졌다. 사지에서 통하는 감각은 오로지 깊게 박힌 총알로 인한 차가운 고통뿐이다.

 

점차 미약해져가는 감각에 아픔조차 사라진다. 곧 터질 기세로 펌프질을 이어가던 심장이 약동하기를 그만둔다. 짧은 격통과 함께 천천히 눈이 감기자 지난 날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친다.

 

자매들, 구원자, 그들과 나누었던 사랑...

 

물이 쏟아지듯 빠르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행복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회상한 그녀는 눈꺼풀을 들어 빛을 보았다. 빛나던 과거. 남자가 원했던 세상은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곳에 이르기 전에 보았던 작은 마을에서 희망을 찾아 조금씩 발전해가는 무리들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었다.

 

베로니카는 함께 웃고 사랑했던 그녀들이 타락함에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죽는 것보다도 그것이 더 고통스럽고 무서웠다. 그녀들이 남자의 뜻을 헤아릴 날이 오기는 할까. 베로니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점차 여러 개로 산란되어 보이는 빛을 받아들였다.

 

“아직... 따뜻하군요...”

 

손이 빛을 향해 뻗어 올라가다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언젠가 절망과 고통으로 다시 뒤덮일 세상을 저주하는 듯했다. 어쩌면 그 꼴을 보기 전에 빛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축복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베로니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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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발언) 아직도 덜 맵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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