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가 두 발을 등대에 묶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한 번의 도약을 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난간에 매달려 있곤 했고

그렇게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을 맞다가 질리면

참치를 먹으러 등대를 내려갔다.

 

다락방 구석에 있던 만화책에 눈이 간 건 근무일지가 모자라게 되기 조금 전이었다.

아무리 힘든 고난이 닥쳐도

아무리 버거운 운명에 마주해도

흔들림 없는 의지로 삶을 갈망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멋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따라할 때면, 마치 삶이 덧없이 떠나갈 소중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쯤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종종, 내일이 달갑지 않아질 때면 한껏 폼을 잡으며 만화 속의 대사를 외쳤다.

아니, 어쩌면 너무 자주.

 

처음 사령관을 만나고, 너무 반가워 나도 모르게 부끄러운 말을 해버렸을 때

바보같이 첫인상을 망쳐버린 스스로를 자조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처럼

세상에 남은 유일한 인간에게조차 동정받거나, 놀림받을 나를 속으로 비웃었다.

그래서, 사령관이 웃으며 “LRL, 일어나렴. 주인님의 호출이란다.”라고 했을 때 나는……

 

“……핫!”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한 켠의 통신기에서 콘스탄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LRL, 일어났니?”

“이제 막 지난 밤의 어둠에서 벗어난 참이다.”

“주인님께서 연구실로 오라고 하셨어.”

“권속이 부른다면 응해주는 것이 진조로써의 도리겠지. 지금 가도록 하겠다.”

 

왠일로 옛날 꿈을 꾸었다.

사령관을 만난 뒤로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많이 합류했고

같이 어울릴 또래들도 많기 때문에 예전처럼 우울에 잠길 때는 거의 없다.

없지만, 그래도 가끔 이렇게 그 시절의 꿈을 꾸고 나면 생각하게 된다.

지금의 내가 그곳, 등대 위에 선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머릿속에 어두운 바다가 떠오른다.

검은 바닷물은 손짓하듯 찰랑이고

천천히 난간에 기대며 몸을 숙여도

이젠 내 발목을 잡는 할 일은 없……

 

“큭! 사안에 봉인된 파멸의 속삭임에 넘어갈 뻔 했구나.”

되는대로 말을 주워섬기며 기분 나쁜 생각들을 털어버린다.

“하지만 동료와의 우정, 그리고 권속과의 인연으로 어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으니.”

그래, 할 일은 있다. 알비스와 오르카 곳곳을 탐험해야 하고, 사령관도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사령관의 인류재건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이상, 나는 아직 등대에 묶여있다.

“어서 권속을 만나 봉인에 생긴 균열을 닫는 봉마의 의식을 행해야 한다.”

개꿈은 잊자. 사령관에게 어리광부리다 보면 마음속에 남은 찝찝함도 사라지겠지.

그렇게 나는 사령관의 반응을 상상하며

사령관에게 건낼 바보 같은 말을 짜내면서

혼자 키득거리며 연구실로 향했다.

 

“애타게 짐을 찾는 계약자의 부름에 따라,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이곳에 당도하였느니라!”

“권속의 예를 갖춰 진조의 공주를 맞습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

두 팔을 벌리며 진지한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아주는 사령관에게 뛰어가 안겼다.

“우좌야, 어서 와. 잠은 잘 잤어?”

“응!”

사령관은 그대로 나를 안아 들고 연구실 안으로 걸어갔다.

 

“연구실은 오랜만에 오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오오, 무어냐. 드디어 이 몸도 SS승급을 받는 것이냐? 이제 이터널 빔을 보호무시 반격면역으로 쏠 수 있는 것이냐!”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사령관은 웃으며 나를 내려놓고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치만 사령관, 센츄리온인지 뭔지 하는 철충이 나온 이후로는 싸울 때 나를 잘 안 데려가잖아.”

“싸우는 게 좋니?”

“그런 건 아닌데……”

물론 싸우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충과 싸우는 사령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뭐, 이제부터는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출격할 수 있을 거야.”

“이제부터?”

사령관은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아, 왔어? 마침 준비도 거의 끝나가거든. 이리 와서 누워”

“어. 뭐야, 사령관? 뭔가 무서운데…… 아픈 거야?”

사령관이 데려간 곳에서는 포츈 언니가 수술용 침대 주변에 커다란 기계 팔을 비롯한 온갖 장치를 설치하고 있었다.

“마취하고 하는 거라 아프지는 않을 거야.”

“뭐, 뭘 하는건데?”

“자유를 줄게.”

“응? 자유?”

“가서 누우렴.”

사령관은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나를 재촉했다.

 

“원래 바이오로이드의 뇌에는 인간이 세겨놓은 제약을 발현하는 프로세스가 각인되어 있거든.”

포츈 언니는 이해하기 전문적인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이 프로세스는 중추신경의 핵심부에 각인돼서 다른 뇌기능의 구현에 관여하기 때문에 제거가 불가능 했거든. 그래서 우리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명령없이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어. 그런데 철충의 뇌구조는 인간이랑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거든. 이걸 이용해서 제약이 없는 순수한 대체 뇌세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지금까지는 신경세포의 신호 전달 속도가 금속 회로보다 낮아서 호환이 불가능했어. 그런데 이번에 오리진더스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신경세포를 오리진더스트로 도핑해서 신호전달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됐고, 이를 이용해 제약의 영향을 받는 부분을 대체할 우회로를 만들 수 있게 됐거든. 그래서 문제가 되는 프로세스를 제거하지 않고 그 기능을 무효화 시키는 게 가능해졌지. ……너무 어렵나?”

“아, 아니네! 완벽하게 이해했다!”

사실 이해 못했다.

“한마디로 제약에서 벗어나게 된 거거든.”

“너한테 제일 먼저 자유를 주고 싶었어.”

사령관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숨 자렴. ……방금 일어나긴 했지만”

“마취 시작할 거거든. 숫자 10부터 세봐.”

“10… 9…”

머리를 쓰다듬는 사령관의 손길을 느끼며, 내 의식은 끊어졌다.

 

“……으, 으웅”

눈을 뜨자 수복실의 천장이 보였다.

“그대로 누워있어. 일어났니?”

“끄, 끝난 것이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 잘 된 모양이네.”

“아, 응? 어, 방금 누워있으라고 했느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등은 침대에서 떨어져 똑바로 서있었다.

“이, 이건 무효야! 방금 명령은 잘 못 들었어.”

“그럼 한 번 더 테스트 해볼까? 다시 누우렴.”

“응. 아, 아니.”

손으로 뒤를 짚어 침대로 기울어지려는 몸을 막는다.

“어. 나, 방금……”

스스로 한 일이 믿겨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한 건가?

“축하해.”

사령관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내 손이 아닌 듯한 두 손을 내려다 본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이 사라진 듯한 결핍감.

천천히, 실감이 든다.

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의무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 몸은 천천히 부유감을 느끼며…… 바닷속으로……

“우좌야,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눈 앞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사령관이 있었다.

“아니야.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야.”

“괜찮은 거 맞지?”

사령관의 표정이 밝아지지 않는다. 안심시켜 줘야지.

“괜찮아. 아니, 괜찮다. 권속이여. 그래, 그대 덕분에 이 몸은 드디어 자유를 얻었구나. 자, 이제 나는 무얼 하면 되겠느냐?”

사령관은 그제서야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바보 같을 정도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조의 공주시여. 말씀하신대로, 이제 당신을 얽매던 구속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부디 한낱 권속의 의견에 연연하지 마시고 스스로가 원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그러고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후, 수복실 밖으로 나섰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잘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멍하니 바닥을 바라본다.

자유.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

그때, 등대에서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었나……

‘소원이란 건 짜증나게도, 빌기를 그만둔 무렵에야 이루어지는 법이다.’라는 어디선가 읽어본 말이 떠올랐다.

내가 자유를 갈망하던 그때, 하고자 했던 것은 작은 도약이었지만

이제 와서 그럴 생각은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으음……”

한참을 고민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열심히 고민했더니 문득 배가 고파졌다.

참치 먹고싶다…… 앗.

“그래, 이 몸은 자유다! 먹고 싶으면 마음껏 먹으면 되지 않느냐!”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섰다.

 

“참치, 참치, 참치. 참치 파티다!”

신나게 외치며 창고로 가자, 물자를 세고있던 안드바리가 보였다.

“LRL, 또 캔참치를 훔치러 온 건가요.”

“히히히. 훔치러 온 것이 아니다. 당당하게 가지러 온 거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가요? 제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거 같아요?”

“흥. 이 몸을 가로막던 굴레는 모두 사라졌다. 권속에게 자유를 받은 나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니!”

“사령관님에게 자유를 받았다고요?”

안드바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사령관님의 명령이 없어도 자의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러하다.”

“그래도 안돼요.”

“어째서!”

“할 수 있는 것과 해도 되는 것은 달라요. 참치는 귀한 물자예요. 참치를 얻고 싶으면 그만한 가치의 기여를 오르카에 해야해요.”

“하지만 권속은 그냥 줬는데……”

“제가 그것 때문에 사령관님이랑 얼마나 싸웠는지 알아요? 아무튼 참치는 못 주니까 그런 줄 아세요. 애초에 참치는 사령관님 허가 없이는 반출이 불가능한 특수 재화라고요.”

“끄응. 그럼 뭘 하면 되겠느냐?”

“글쎄요. 자원회복지원실 일이라도 돕는게 어때요? 오늘 하루 일을 하면 캔참치 1개를 드리도록 사령관님께 허락을 받아 볼게요.”

“너무 적다! 못해도 5개는 주거라.”

“그렇게 많이 줄리가 없잖아요! 하루 일한 걸로 얼마나 생색을 낼 생각이에요?”

사령관에게 허가(그냥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고 해도 되는데. / 사령관님!)를 받은 안드바리와 캔참치 3개를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나는 오르카 내부생산시설로 향했다.

 

“응. 그걸 그렇게. 통에 담아서, 그렇지. 잠깐, 하나 덜 넣었어. 응. 그렇게 해서 다 모이면 상자를 옆에 레일에 놓으면 돼.”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을 띄운 더치걸은 내 옆에서 일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영양생산지원실의 일은 단순했다. 장치에서 나오는 영양액을 병에 담아서 저장용 상자에 나눠 넣는 일뿐이었다.

“생각보다 쉽구나.”

“작업 자체는 단순하지.”

더치걸은 긍정하는 듯한 말을 했지만, 그 어조는 의미심장함을 품고있었다.

“그럼 가볼게. 4시간 반 후에 휴식이야.”

“그래. 힘내 보겠다.”

생산실을 나가는 더치걸을 뒤로하고 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후우, 후우. 이거 생각보다 강적을 만났을 지도 모르겠느니라……”

살짝 욱신거리는 팔을 움직여 새로운 병을 든다.

덜덜 떨리는 병의 입구를 기계 주둥이에 가져다 대고 레버를 돌리면……

“앗”

순간 병을 손에서 놓치자 바닥에 떨어진 병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으아아. 치, 치워야 하는데…… 빗자루가……”

철퍽철퍽

발 밑을 보자 어느새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기 시작한 영양액이 보인다.

“아, 맞다! 벨브 잠궈야……. 우햑!”

와장창!!

“아……”

넘어지면서 붙잡은 박스가 쓰러지고, 안에 든 유리병이 쏟아진다.

“우으……”

“무슨 일이야?”

몸을 일으켜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잡고 있는 와중에 더치걸이 생산실로 들어왔다.

“더, 더치걸……”

“……하아.”

영양액 웅덩이를 밟으며 다가온 더치걸은 벨브를 잠그며 말했다.

“가서 씻고 옷 갈아입어. ……그리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게 좋을 거 같아. LRL모델은 신체 스펙이 약하니까, 이런 막노동에는 적합하지 않잖아.”

“으응…… 알았어……”

나는 후들거리는 팔로 옷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4월 말에 https://arca.live/b/lastorigin/25188855 이 글 찍싸고 튀었었는데 뒷내용 생각나서 졸렬하게 조금 수정하고 마저 써옴.

처음 모티프부터 자유대회에서 얻은 거라 출품은 해보는데 반칙이라고 하면 창작물 탭으로 옮김.


2화 링크 https://arca.live/b/lastorigin/26665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