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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어렵구나.”

더치걸의 말대로, 나는 몸을 쓰는 일을 돕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류 작업을 도울 능력도 없는데……

“공부라도 좀 해놓을 걸, 후회가 되는구나.”

“응? LRL, 공부하려고?”

“어? 알비스!”

어느샌가 내 등뒤에 알비스가 따라붙어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그게……”

알비스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알비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참치를 받으려면 꼭 일을 해야해?”

“후후, 계약과 대가는 오랜 마계의 전통이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그치만, 다른 전투원 언니들은 시설실에서 일을 안해도 밥을 먹잖아.”

“어?”

“거봐. LRL이 안드바리한테 속은 게 분명해! 안드바리가 참치를 주기 싫어서 LRL을 속인거야!”

생각해보니 그렇다.

안드바리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만

오르카에는 평소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전투원 언니들도 몇몇 있다.

그런 언니들도 굶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분명 유사시에 전력이 되기 때문이겠지.

나는 이미 일을 하겠다고 말해버린만큼 먼저 무언가를 하긴 해야겠지만

전에는 자주 출격했던 만큼 갑자기 전투에 따라 나간다고 해도 폐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하하! 한때 전장의 구속자라고 불렸던 이 몸이 그 사실을 까먹다니, 용살자의 이명이 울겠구나!”

“응! 거짓말한 안드바리를 혼내줘야 하니까 몰래 초코바랑 참치를 훔치러 가자!”

“어…… 그건 괜찮다. 그보다 권속이 어디있는지 아느냐?”

“응? 사령관? 정찰을 나갈 인원을 편성하고 있는 거 같던데.”

“그런가…… 마침 잘됐군, 고맙네!”

나는 전투용 장비를 챙기러 방으로 향했다.

 

‘우좌야, 정말 괜찮겠어?’

“걱정 말거라, 권속이여.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네가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통신기에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떨떠름한 기색이 느껴졌다. 내가 못미더운 걸까.

“사령관, 말한대로 철충 정찰대 세 분대를 지정한 위치까지 유도했어.”

“가장 약한 쪽부터 제압한다. 본대와 통신이 가능한 철충부터 강습조가 기습, 광역 공격으로 빠르게 정리, 특수한 개체가 섞여있을 경우에는……”

정찰을 마친 대원의 보고를 들은 사령관은 빠르게 전투 지휘를 내리기 시작했다.

 

전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우리 분대는 점점 목표 지점에 가까워졌다.

나는 사령관에게 언제 행동하면 되냐고 물었지만

직접 판단해 보라는 말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전투원들의 연계는 완벽했고

나는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해서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때때로 그런 나를 신경 쓰듯 사령관은

일부러 약한 철충을 거의 망가져가는 상태로 방치해서 내 몫으로 남겨주려 했지만

오히려 같이 출격한 대원들의 눈치만 보일 뿐이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하자 보인 것은

해변에 늘어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의 철충들과, 거대한 포신들이었다.

저번에 얼핏 보았던 철의 탑의 사진과 비슷한 그 모습에 압도되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 다만 그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사령관. 정보는 충분히 확보된 건가?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 좀 더 살펴보고……”

“적이야! 3시 방향! 분대 규모고 접촉 직전이야!”

“젠장, 지원요청 막아!”

“처리했어!”

“사령관, 어서 명령을......!”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 대원들은 당황해서 사령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지만

늦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후후. 이 몸이 나설 때인가?”

“어? LRL. 너 뭐……”

“사안의 광휘에 무릎 꿇어라! 사이클롭스 이터널 빔!”

“LRL! 우선 적 편성을 파악…… 하고……”

“어……?”

혼란에 빠진 적들 사이로, 재수없는 하얀색 안테나 두개가 보였다.

센츄리온 제네럴……!

“꺄악!”

“햐악! ……우씨, 때렸어!”

“LRL, 잠깐, 멈춰!”

“엑스 오브 다크니스으으으!”

도끼를 단단히 쥐고 달려가서, 관절 부위에 강하게 한방을……

“우왁!”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져버렸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앞을 바라보니, 제네럴은 몸에 도끼가 박힌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 잡은 건가?”

천천히 다가가 도끼를 뽑기 위해 손잡이를 잡자

갑작스럽게 제네럴의 눈 비슷한 부분에서 불이 켜졌다.

“히이익! 사, 살려줘!”

“잠깐! 이쪽으로 오지 마, 바보야! 꺄악!”

“우와악!”

황급히 도끼를 잡아 뽑고 도망치다가, 반격에 맞고 데굴데굴 굴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철충의 포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사령관, 칙 스나이퍼가 메이 대장을 노리고 있다. 어서 지시를……”

‘진정해, 럭키히트 들어갔어. 저 정도면 제네럴도 광역 공격에 잡혀. 강한 순으로 화력 투사해서 중열 후열부터 정리해.’

“알았다.”

 

전투가 끝나고, 대원들은 바쁘게 상태 파악과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짜악

강제로 돌아간 뺨이 시큰거린다.

평소처럼 머리를 쥐어박는게 아니라 뺨을 후려친 그리폰은 몹시 화가 난 듯 했다.

“미쳤어? 전투가 장난이야? 처음 출격하는 것도 아닌데 뭐하는 거야?”

“……미안.”

변명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변명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끝날 일이 아니야. 전투는 우리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

‘그만해, 그리폰’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사령관이 통신을 보내왔다.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애초에 인간도 문제야. 무슨 생각으로 리더도 아닌 대원한테 자율권을 준 거야?”

‘걸음마는 넘어지면서 배우는 거야. 이제 막 자유를 얻은 참이잖아. 실수를 하더라도 최대한 하고 싶을 일을 하게 해줄 거야. 책임은 내가 질 거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

“하여간, 인간은 꼬맹이들한테만 너무 물러.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메이 대장 물리적으로 폭발하기 직전인 것 같던데, 계속 가려고?”

‘복귀할 거야. 정보는 충분히 얻었으니까. 너도 준비해.’

“흥. 회의에서 말 나와도 몰라.”

그리폰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한 얼굴로 다른 대원들에게 돌아갔다.

‘우좌야, 너도 복귀 준비해.’

“응……”

 

힘없이 오르카의 복도를 걷는다.

새삼스럽게 나는 이곳에 필요 없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계부터 신체 스펙은 허약하기 그지없고

오래 살긴 살았다지만 아는 건 등대 서고에서 대충 주워 읽은 잡지식뿐이다.

전투용으로 설계된 자매들도 많아진 지금

나같은 게 자유를 얻었다 한들

거기에 대단한 의미 따위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애초에 등대지기로 태어나 등불로 살아가야 할 내가

바닷속 잠수정에서 지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심해에 잠긴 등불이 무언가를 비출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

그러고보니 한 곳, 오르카에서 장거리 조명이 필요할 듯한 장소가 떠올랐다.

 

“오, 귀여운 꼬마 손님이 왔군.”

“트리아이나, 들어가도 돼?”

“물론이지. 새로운 탐사대원은 언제나 환영이야.”

나는 조용히 조타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비어있던 부조종석에 앉았다.

“그래서, 우리 신입 탐사대원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지? 아, 혹시 도와주러 온 거야?”

“응”

“어? 정말? 아하하, 이거 고맙네……”

나는 창 밖으로 비치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밖이 어둡구나.”

“응, 그야 심해 한복판이니까. 시간도 밤이고.”

“빛이 필요하다면, 이 몸이 비춰주겠다.”

나는 안대를 벗고 왼 눈의 조명을 켰다.

“응? 잠깐만, 괜찮은…… 꺄악!”

“아, 미안해! 빛 조절을 깜박했어……”

“으응, 괜찮아.”

황급히 빛을 끄고 다시 천천히 밝기를 올려서 이번에는 적당한 수준에서 멈췄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에는 우스꽝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꼬맹이가

가만히 앉아서 멀뚱멀뚱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유리창에 비친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등받이에 앉은 내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트리아이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 LRL?”

“왜?”

“음...... 그게…… 유리창 안쪽이 바깥쪽보다 밝으면 오히려 밖이 잘 안보이거든. 그러니까……”

“아……!”

그렇구나…….

왼 눈의 불을 끄고 다시 안대를 썼다.

“나는 또……. 폐를 끼치고 말았구나.”

“어? 아니, 그렇게까지 기죽을 일은 아닌데……?”

“미안해…… 이만 가볼게……”

“아니야, 더 있어도 괜찮아!”

나는 등 뒤의 트리아이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젓고 조타실을 나왔다.

 

마지막 갈 곳마저 사라진 뒤

이제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얌전히 숙소로 돌아가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함장실 앞에 서있는 걸까.

비밀번호를 열려던 손을 거두고

돌아갈지 들어갈지 망설이는 사이

함장실의 문이 열리며 사령관이 나왔다.

“어? 좌우좌? 나 찾아온 거니?”

놀라면서도 내 머리를 쓰다듬는 사령관의 손길에

갑작스럽게 마음이 북받쳐 오르고

눈시울이 시큰거리기 시작해서

나는 대답하지 않고 사령관의 두꺼운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 따스한 품에 고개를 묻었다.

“……”

사령관은 잠시 당황한 듯싶더니

곧 아무 말 없이 나를 마주 안아줬다.

 

함장실 의자에 앉은

사령관 무릎에 앉아

그 품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권속이여. 혹시 나는 오르카 호에 필요 없는 존재인가?”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힘도 약하고, 잘 할 줄 아는 일도 없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면서 괜히 영양만 축내면 다른 자매들에게 폐가 되는 것 아닌가?”

“하아……”

사령관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으로 내 뒷머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한테 자유를 준 건, 일을 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어.”

“……그럼 뭘 하면 되느냐.”

“처음에도 말했듯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평소처럼. 네가 뭔가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거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어.”

“그런가?”

“응.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걸음마는 넘어지면서 배우는 거야. 처음엔 실수하는 게 당연한 거고. 그러면서 점점 성장해 나가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만, 나는 뭘 해도 잘 하게 될 것 같지가 않다.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

“그럼 내 부관이라도 해볼래?”

“부관, 말이야?”

“응. 우선은 콘스탄챠랑 아르망이 하는 걸 보고 배우다가, 작은 일부터 천천히 맡아가는 식으로 해보면 될 거야.”

천천히, 부관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각종 서류가 든 테블릿을 들고

사령관에게 보고를 하는 내 모습.

이게 과연 현실감 있는 모습인지 의문이 든다.

사령관의 곁에서, 바쁜 사령관의 일을 덜어줄 수 있을까?

소중한 사람에게, 소소하게나마 보탬이 되어줄 수 있을까?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혹시라도 만약, 그럴 수 있다면……

“할게! 꼭 할래!”

“그래, 그래.”

힘차게 대답하자, 사령관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잘 자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함장실을 나선 뒤 내 숙소로 향했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발치에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쪽지랑…… 참치?”

나는 바닥에 쌓인 캔참치 위에 놓인 쪽지를 들어 올렸다.


‘잘해서 주는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 보수를 받으러 안 오셔서, 여기에 쌓아 놓을 게요.

 

++ 벌써 몇 명 왔나보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것도 먹고 힘내!’


“그리폰이랑 안드바리랑 트리아이나……”

바닥에 쌓인 캔참치를 본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일부러 아까부터 인기척이 느껴지는 복도 모퉁이 너머까지 들리게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무래도 이 몸의 ‘의기소침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한 듯 하구나! 보기 좋게 스스로 참치를 바치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가.”

“뭐? 야! 너 진짜! 내 참치 돌려줘!”

모퉁이 너머에서 나온 그리폰이 소리를 지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내 권속인 알비스조차도 한번 준 초코바를 다시 가져가지 않거늘, 그대는 평소엔 어른인 척은 다 하면서도 내면은 알비스보다도 미성숙한 것이냐?”

“으…… 이게 진짜!“

내 앞에 온 그리폰을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자

그리폰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여간, 걱정해서 손해봤네……”

나는 뒤돌아서 멀어져가는 그리폰에게 말했다.

“그리폰, 고마워!”

“……”

그리폰은 잠깐 멈춰서더니 아무말 없이 걷는 속도를 높였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캔참치를 품에 안고 방 안에 들어왔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눈 앞에는 또 다시 검푸른 수평선이 떠오른다.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이니

저 멀리 흔들리던 파도도 어느새 내 발 아래에 와있다.

이번엔 내 발목을 묶는 족쇄가 없지만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뒤돌아서

등대의 안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