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꿈나라를 유영하고 있을 새벽 3시경이었다. 

 

당신은 막 아이돌 연습을 끝낸 그리폰을 숙소로 바래다주고 있었다. 복도의 불은 어쩌다 한 개 정도만 켜져 대체로 어두웠다. 앞만 겨우 보일 정도의 옅은 빛을 따라서 당신과 그녀는 어둠 속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폰은 당신 옆에 딱 달라붙은 채로 당신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뚜벅뚜벅-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하나처럼 들렸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였지만, 가끔 그리폰의 어깨가 팔에 닿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걸음 정도 멀리 떨어지곤 했다. 몰래 연모하는 사람과 단둘이 밤거리를 걷는다는 설렘과 기대 때문에 안 그래도 새빨갛게 홍조를 띄우고 있던 그녀의 뺨은 더욱이 붉게 물들어 갔다.

 

“꺄악, 프로듀서!”

 

그렇게 조금 거리를 벌렸다가도 바닷속이 훤히 보이는 복도의 둥그런 창문에 물고기로 보이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당신의 팔을 껴안는 것이었다.

 

당신은 피식 웃으며 그리폰의 떡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대략 10초 정도 그러고 있자니 진정하고는 다시 한 걸음 정도 떨어졌다. 마치 검은 길고양이처럼 새침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는 당신이었다.

 

“... 뭐가 그렇게 웃긴데.” 그리폰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째려보았다.

“이, 인간! 같이 가!” 굳이 대답않고 발걸음을 떼자 놀라며 뒤를 쫓았다.

“저기... 화났어...? 그럼 미안해...” 괜히 삐친 척을 하자 잔뜩 풀이 죽는 그리폰.

 

당신은 크게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화들짝 몸을 떨며 저항하기도 잠시, 당신의 품에서 느껴지는 숨결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그리폰은 체념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가슴에 닿아 흩어지는 숨결.

 

이번에는 그녀가 팔을 감아왔다. 그리폰은 당신의 등을 감싼 채로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편안해 보였다. 숨이 막히지도 않는지, 기특하게도 오히려 당신의 다부진 가슴에 얼굴을 묻는 그녀였다. 당신은 아기처럼 엉겨 붙는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야릇한 냄새가 풍겼지만 거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습실에서 나오기 직전에 뿌린 허브 향수와 뒤섞여 중독성 있는 냄새를 풍겼다. 부끄러운 나머지 몸을 비틀었지만, 당신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짜... 바보...” 조금 붉은 빛이 돌 뿐이었던 얼굴이 아주 홍당무가 되었다.

“냄새... 안 좋을 텐데...” 당신은 오히려 좋다고 했다.

“사랑해.” 문득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사랑해.” 다시 한번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아래쪽이었다.

“진짜 사랑해.” 

 

밤기운이 돌아서일까.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연신 얼굴을 비비며 애틋한 목소리로 당신을 불러댔다. 대답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쓸어 내려주었다. 전해지는 듬직한 온기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마치 ‘나 여기 있어.’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더 강하게 끌어안는 그녀. ‘괜찮아’라고 몇 번 달래주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당신은 프로답게 흔들리지 않고 그리폰을 더 세게 안아주었다.

 

“나도 프로듀서 엄청 좋아하는데... 맨날 다른 애들만 사랑해주고... 나도 애교 부리고 이쁨 받고 싶은데... 인간은 그런 것도 몰라.”

“미안하다고 하지 마! 내가 바보라서 그랬던 거니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품에서 빠져나오는 그리폰. 갑자기 당신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척척 향하기 시작했다. 예상가는 곳이 있었던 당신은 그저 가벼운 미소만 띄운 채로 인도에 따랐다.

 

역시나 휴게실이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운동기구와 간편식을 파는 매점이 들어선 장소로, 늦은 밤까지 그리폰의 연습을 지켜보다가 함께 오곤 했었다. 물론 몸매 관리를 핑계로 음식은 당신에게 전부 먹이고 정작 자신은 운동만 한 탓에 살이 오르는 것은 당신 뿐이었다.

 

당신은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매대에서 컵라면을 들어 보였다.

 

“안 먹는 거 알면서.” 살찐단 말이야. 그렇게 덧붙였다.

“살 찌면 귀여워서 더 좋다고? 말은 잘해요, 아주.”

 

“....” 그리폰은 매점 식탁에 앉은 채로 턱을 괴었다.

“... 아까 일은 잊어줘, 프로듀서.” 여전히 훌쩍이면서 이런 말을 하니 신뢰가 가지 않았다.

“왜 울었냐고? 정말 듣고 싶어?”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 나도 모르겠어. 그냥... 막 감정이 폭발하는 기분이었어. 여러모로 불안해서...”

“뭐가 불안하냐고? 으으, 그런 건 좀 넘어가주면 안될까?” 그 말에 당신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맞췄다.

“그, 그렇게 빤히 보지 마... 부끄럽다고.” 슬쩍 고개를 돌리는 것이 귀여웠다.

 

“프로듀서가 날 싫어하면 어쩌나 싶었어.” 잘 들리지 않았다.

“난 프로듀서가 좋아. 다른 애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큼 좋아해.”

“그런데 난 바보 같이 틱틱대기만 하니까...”

“프로듀서의 마음에 내 자리는 이미 없는 것 같았어.”

 

당신은 화가 난 표정으로 다가가 그리폰과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기에 눌린 그리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당신과 시선을 맞췄다. 당신은 담담한 목소리로 굳이 표현하지 않았던 진심을 전했다.

 

“... 그랬구나. 풉... 나 혼자 착각했던 거였구나?” 움츠러들어 있던 그리폰의 어깨가 후련하게 폈다.

“난 끝까지 바보였네. 프로듀서는 날 이렇게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리폰의 얼굴이 당신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있지, 인간, 아니, 사령관.” 

 

유구에 젖은 눈동자의 떨림이 멈췄다. 그리폰의 눈은 오직 당신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가에 살짝 맺힌 물방울이 빛을 받아 산란하며 마치 장미 성운 너머의 푸른 빛 은하수처럼 보였다. 남아있던 걱정도 훌훌 털어버린 덕분일까. 유독 맑은 색이었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떨 것 같아?” 당신은 장난스럽게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래도 모르겠어?” 그리폰이 살풋 웃으며 거리를 좁혔다.

 

이내 당신의 입술에 몰캉- 하고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살 내음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모른 척하려고 했지만, 녹아내리는 온기가 스며들자 그리폰의 진심이 몸속으로 천천히 파고 들어왔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붙어있을 뿐이었던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0을 넘어 마이너스로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섞여가는 타액과 혀가 부끄러움도 잊고 얽히고섥혔다. 그 어느 때보다 기쁜 표정이었다. 그리폰은 지금까지 받지 못한 사랑을 전부 받아갈 기세로 입술을 열정적으로 빨아댔다.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같아 귀여우면서도 능숙하게 혀를 놀리는 것이 사랑스럽고 음란했다. 당신은 그에 보답하듯 그녀의 사랑을 능숙하게 받아마셨다. 조금은 추잡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리폰은 그저 행복했다.

 

서로의 체취와 가빠진 호흡으로 헤롱헤롱해진 시야. 그리폰은 이미 당신에게 맹목적으로 꽂혀버린 듯했다. 긴 키스가 끝나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리폰이 당신을 쓰러뜨리듯이 눕혔다. 

 

“안에... 가득 채워주기 전까지는 안 놓아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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