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와우 리치왕 중반 즈음

심심해서 길드원들과 낙스나 가기로 함

그런데 모아보니 8명인거임

최소한 10명은 모아야 갈 수 있었거든

그래서 두명은 외부에서 적당히 모집했는데 이게 파멸의 전주곡이었음

한명은 그냥저냥한 유저, 다른 한명은 스스로 티를 못내 안달인 여성 유저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여성 유저와 엮여 좋은 결말을 맞이한 적이 극히 드물었기에

나와 길드원들은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대화를 나눔

마냥 지체하기도 그러니 일단 던전 입구에서 모이자고 했지


이 때 알았어야 했지

문제는 여성 유저가 아니라는 것을

들어가보니까 우리를 맞이해야 할 비글스워스 씨가 안보임

외부에서 영입한 그냥저냥한 유저가 그새 죽이고 감정표현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더라

당시 미신으로 비글스워스 씨를 건드리면 불운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었기에 우린 당황함

미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주저없이 금기를 저지르는 저 놈이 보통 또라이가 아닐 것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함

그 또라이는 여기가 자신의 안방이라는 듯이 거침없는 기세로 돌진하며 몹들의 어그로를 한몸에 끌고 저 앞까지 가있었음

세계구급 탱커도 이정도로 몹몰이를 잘 할 수는 없을거라 생각했지

문제는 그새끼가 도적이었다는거야

이 미친 새끼가 누으면 다음 타겟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되는 상황이었고

어처구니없는 전멸을 피하기 위해 우린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에 열광하는 관객마냥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쿨기까지 돌려야 했음

그와중에 그 돚거놈은 문워크 추고 있더라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라 주의를 주니 'ㅈㅅ'이라고 말은 하더라고

최소한 염치는 있는 새끼구나 싶었는데 이게 실수였다

도적새끼가 염치가 있을리가 없잖아?

아까 수준의 콘서트로는 아직 저 하늘에 닿지 않는다, 기필코 모두의 염원을 쏘아 올리겠다고 온몸으로 외치며

한층 미친 속도로 몹들을 몰아대는 새끼를 보고 우린 이번 레이드 조졌구나, 그냥 마을 광장에서 노가리나 깔걸 하고 후회함

그 와중에 여성 유저는 입구에서 미동도 않음

딜러면 모르겠는데 힐러가 그러고 있으니 우린 MMORPG가 아니라 다크소울을 플레이하고 있었음


몇번의 전멸과 열화와 같은 콘서트 후, 보스 앞에서 간단히 브리핑을 하기로 함

여성 유저라면서 유난히 강조를 하며 망부석마냥 굳어있다가 몹정리가 다 끝나서야 '데헷~공략보고 와쪄염' 이라며

간지러운 이모티콘을 날리고 여전히 뒤에서 구경만 하는 짐덩어리가 신경쓰였거든

아무리 낙스가 호구가 됐다지만 설마 진짜 공략을 모르고 왔을까

우두머리 수가 많으니 몇몇 공략이 헷갈려 확인한거겠지

진짜 모르더라


당시 울두아르 공략이 주류였고 낙스는 진작에 한물 가 심심풀이로나 가는 곳이었는데

지루한 시간이나 때워보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 우리의 길드레이드는 울두아르 하드모드를 방불케 하는 역경의 연속이었음

낙스가 규모가 작은 레이드면 몰라, 우두머리만 열다섯인데ㅋㅋㅋㅋ

내 살다살다 헤이건 바닥을 그렇게 완벽히 다 처맞는 놈은 살면서 그 때 처음 봄

타디우스를 잡을 때는 나는 인간 자석이다를 온몸으로 외치며 기막히게 다른 극성으로만 몸을 던지더라


그렇게 다섯시간이 지나고

결국 최종보스인 켈투자드를 기적적으로 잡으며 우리가 저 짐덩어리를 달고 끝내 승리했다, 

지금 요그사론 잡으러 가면 눈감고도 클리어하는거 아니냐면서 길드원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드랍테이블을 확인해보니 여성 유저가 노리던 무기가 나옴

다른 전리품은 필요 없고 순전히 그 무기 하나 먹으러 왔다 하더라고

그런데 돚거가 그 무기를 날름 집어먹음

그제서야 떠올랐지

우리가 심심풀이로 온거라 루팅 방식을 따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을

여성 유저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도적님, 왜 그걸 머거요?' '그거 제가 먹기로 한건데...'라며 그 와중에도 귀척을 못버리다

돚거가 'ㅋ' 한마디를 날리자 '그거 제가 먹기로 해짜나요!' 라며 결국 폭발해 지엠에게 신고한다느니 길길이 날뜀

끝까지 코맹맹이 소리는 유지하더라

우리야 팝콘 씹으면서 그래도 이번 레이드가 마지막에 수확은 있었구나 하고 낄낄거리며 귀환했지


그런 일이 있었어

그 날만큼은 돚거놈을 용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