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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룻밤을 따뜻한 온천과 푹신한 침대에서 노곤노곤하게 굴러다니며 피로의 마지막 조각까지 씻어내고, 사령관은 다음 일정 - 캐노니어와 아머드 메이든이 선택한 공업 지구로 향했음.

그럼 리제는 다시 페어리 쪽으로 돌아갔느냐 - 하면 그건 아니고, 온천에 남기로 했어.


그야 그나마 멋대로 내적 친밀감이 상승해버린 원작 리제까진 그렇다손 쳐도 리리스나 소완이나 앨리스나 레아나 오래 대하기 어려운 상대이니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공익(?)적인 측면에서도 제대로 된 이유가 있긴 했음.


딴 게 아니라 온천의 규모 문제였어.

지금이야 사령관과 리제가 사용했던 탕 하나 정도만 정비한 정도지만, 개수가 끝날 즈음이면 그럭저럭 규모가 되긴 하겠지.

"그럭저럭" 정도로는 오르카 호의 승무원 전체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도 당연하고.


고작 온천 정도라고 퉁치기에는… 크다고 해도 잠수함인 오르카 호에서 생활하는 대원에게 샤워가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글 기회가 '고작'으로 끝날 리는 없지.


해서 부대별 사용 순서 등을 조율할 필요가 생겼는데- 그런 거라면 부관 이름을 거는 편이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잖아?

해서 25일에 예정된 연회 전까지는 소규모 부대가 우선적으로 사용. 그 후의 대규모 이용은 지휘관기 간의 합의를 거쳐 정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정하고, 리제는 각 부대별 대표자들에게 연락을 돌렸음.


뭐, 이것도 회의할 날짜를 정하고 하려면 시간은 좀 걸릴 테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 오오!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운 순백의 장막이라니,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 없겠구나!

- 으음― 화이트셸은 여기서 기다려야 하겠죠?


일단은 부대 같은 거 상관 없이 개인 활동 중인 인원들 - 중에서도 특히 아이들부터 챙기고, 온천에서 느긋하게 보내야지.


*   *   *


- 어서 오십쇼. 찾아주셔서 영광이지 말입니다.

- …휴가 중인 거 맞지?


공업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휙 둘러본 사령관이 꺼낸 말에 블러디 팬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음.

기름 때에 범벅이 되어서 바쁘게 움직이는 아머드 메이든과 캐노니어 대원들을 보면 그런 의문이 나올 수 밖에 없긴 했어.


- 좋다고 하는 일이니 맞지 않겠슴까?

- 장비를 손보겠다고 듣기야 했었지.


일단 표정을 보면 다들 의욕에 넘치는 것 같으니 괜찮… 은가?

블러디 팬서 성격 상 잘 보이려고 위장했을 가능성은 없으니 괜찮겠지?

일단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사령관은 다시 - 이번엔 좀 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음.


- 오르카 호에서 하는 걸로는 역시 모자란 거야?

- 아, 그렇지는 않슴다. 기술부 분들은 잘 해주고 계시지 말입니다.

 애초에 기본적인 유지보수면 모를까, 본격적인 개조 같은 건 우리 애들로는 무리지 말입니다.

- 그런 것 치고는 하는 일이 많아 보이는데….


저쪽에선 토미 워커가 뭔가를 나르고 있기도 했고.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블러디 팬서는 씩 웃었지만.


- 준비임다.

- 준비?

- 유전자 씨앗으로 몸이나 장비는 복원할 수 있다고 해도, 소모품은 다른 문제 아니겠슴까?

- 아하.


이 다음에 복원될 최고급 바이오로이드 - 캐노니어의 지휘관인 로열 아스널의 진가는 개인의 전투능력이 아니라 지휘와 겸해서 탄약을 공급하는 능력에 있으니까.

그야 탄약 같은 걸 미리 쟁여둬서 나쁠 건 없겠지.


- 아머드 메이든이랑 캐노니어는 멸망전쟁에서 같이 활동한 적이 많다고 했지?

- 그렇슴다.


아군의 후퇴를 위해 후열에 남아 가장 괴멸적인 피해를 감수했다는 상세 사항까지야, 피차 알고 있는 입장에서 굳이 또 꺼내들 필요는 없었어.


- 네 '기억'에서의 로열 아스널은 어땠어?

- 흠. 아무래도 직접 본 건 아니라 현장감은 떨어지는데, 괜찮겠슴까?

- 저렇게나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조금이라도 더 알아둬야지.


그렇게 로열 아스널로 시작한 이야기는 - 사령관이 도착한 걸 눈치챈 대원들이 하나둘 끼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다종다양한 잡담으로 바뀌어 갔지.

누구 화력이 더 센가 같은 유치한 말싸움이 어느새 불꽃놀이로 다져진 우정을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이벤트를 포함해서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 사령관은 문득 한 가지를 눈치챘음.


- 응? 그런데 에밀리는?

- 아아, 그 애라면―


*   *   *


- 파니 같아… 졌어.

- 응. 뽀송뽀송해.

- 저기… 수고하셨어요.


티아멧의 격려에 대답할 여유도 없이, 리제는 체면이고 뭐고 나무 바닥에 엎어져서 쌕쌕 숨을 내쉬고 있었음.

애들 돌보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건 목욕탕이라는 새 환경 앞에서 참으로 덧없는 오만이었다는 걸 깨달으면서.


느긋하긴 개뿔.

쉬려다가 병 얻게 생겼네.


혹시 보련의 유전자 씨앗이라도 얻게 되면 최우선으로 복원하자고 주장해야지, 하는 결심도 얼굴에 덮인 수건과 함께 까맣게 잊혀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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