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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포화도, 치솟아오르던 불꽃과 먼지도, 절규하던 레드후드의 목소리도, 이 망가진 전차 안에선 더 이상 들리지 않아.


어쩌면 차라리 이게 나을지 몰라. 나고나서 유일하게 배웠고,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건 전쟁에 나가서, 우리랑 똑같이 죽이는 것만 허락된 다른 녀석들을 쏘고 오는 일이었으니까.


레프리콘 상사들은 나를 구하려다 발키리의 총에 맞고 죽었어.

이프리트 병장들은 스카이나이츠의 공습과 캐노니어의 포화 속에서 갈갈이 찢겨나갔지.

마리 대장은, 그런 우리를 구하려다 블랙 리리스의 총을 맞고 절명하고 말았어.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랬는데도,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도 증오심은 좁쌀만큼도 들지 않더군.


어차피 저놈들도 태어나서 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이잖아. 만약에 나한테 저격총을 쥐어주고, 포대를 쥐어줬으면 어땠을까?


아마 나도 보급품을 열심히 관리하던 안드바리를 쏴죽였을 지도 몰라.

다른 브라우니들이 타고 있는 장갑차를 무자비하게 날려버렸을지 몰라.

이미 하반신이 날아가버린 운디네라도 지키고자 발악하는 무적의 용의 머리를 겨눴을지도 몰라.


다른 녀석들은 스틸라인의 원수니, 적이니, 온갖 말들을 쏟아내며 그녀석들을 증오했지. 정작 우리를 뒤에서 떠미는 인간놈들한테는 단 한 마디도 안하고.


그리고는 철충이 내려왔어.


인간들이 철충을 죽이라고 명령하니, 그렇게 증오하던 적들이랑 등을 맞대는 거에 수치심을 조금만큼도 못느끼는 놈들을 보는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엿같아. 역겹지.


아마 제조되었던 그날에 머리를 파편에 맞고 나서부터 나는 브라우니답지 못한 브라우니가 된 걸지 몰라. 그래도 철충들은 무섭더라.


나를 엄호해주던 아스널 준장의 머리가 익스큐셔너한테 날아가는 걸 눈 앞에서 보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끔찍하다고 생각해? 신기하게 별 감정은 들지 않더라.


철충이 인간 위주로 공격한다는걸 듣고 나서는 난 일부러 공격을 소극적으로 했어. 그 덕분에 지금까지 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 다른 놈들은 그렇게 괴롭히던 인간놈들이 뭐가 좋았던 건지, 처절하게 저항하다 죽어버리더라고.


식료품점에 음식을 주으러 갈 때, 길바닥에서 바닐라 한놈이 백골이 된 다른 인간을 껴안고 죽어있는 걸 봤지.

대형마트에서는 사람 뼈들부터 바이오로이드 골격까지 전부 출구쪽 유리창에 쌓여있는 걸 봤어. 그날에는 밥을 제대로 못먹었어.

이그니스 한 모델이 작은 두개골을 들고 죽어있는 걸 봤지. 그쪽이 아마 예전에 소각장이었나 그랬을 거야.


그렇게 계속해서 본대가 있던 자리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어. 죽은 사람의 자동차를 뺏어타고, 자전거도 타다가, 사막과 모래의 산이 보이는 때에는 걷는 것 밖에 못했지. 그래서 여기에 도착한거야.


난 멍청한 브라우니니까, 어딘지 잘 몰랐어. 그냥 보이는 집이랑 창고는 전부 다 털어버리고, 보이는 자동차랑 자전거는 다 망가지기 직전까지 타고 다니고, 무기는 못쓸 때 까지 들고 다녔으니까, 지리고 뭐고 알 새가 없었지. 그냥...주체사상탑을 봤을 때, 나는 이제 한국을 떠나는구나, 하고 생각한게 전부였어.


아프간, 우연히 지나가던 퀵 카멜 친구가 나한테 알려준 지명이었어. 아프간...많이 들어본 곳이었거든. 소련군이고 미군이고 전부 피만 봤다는 그 동네 아니야? 그때 진짜로 난 전쟁이랑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구나...하고 생각했었어.



거기서 나름 몸을 숨길 만한 집을 찾았어. 집이라고 할만한 것들...그런거는 다 인간들이랑 철충들이 전쟁하느라 날려먹은 것 같더라고. 그래서 옛날 낡은 전차 한대에 몸을 숨겼어.


아프간은 악명답지 않게 아무도 찾지 않더라고. 철충이야 아프간이 의도적으로 무시당해서 제대로 된 공업단지고 뭐고 없으니 올 가치를 못 느꼈을 테고, 원래 살던 사람들도, 테러리스트도 그냥 시민도...다 떠나버리고 방치되던 것 같더라고. 낡았지만 나름 안락한 전차 한대에, 그나마 가끔 지나가던 바이오로이드 애들, 그리고 숨겨졌던 창고 여기저기에서 가져오는 통조림이 입구멍 안에 총을 들이밀고 싶은 기분을 그나마 낫게 해주더라.


이래저래 살다보니, 오래된 핸드폰...?을 하나 발견했어. 아마 러시아 사람이 썼던 거 같은데, 나는 지금까지 한글 말고는 제대로 뭔가를 배울 기회조차 없었으니깐 잘 모르겠더라. 아무튼 그 핸드폰을 켜봤는데, 이 노래가 나왔어.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처음에는 요즘 인간들이 만들던 노래에 너무 익숙해져서 단조롭고 재미없는 노래인줄만 알았는데...뭔가 자꾸 듣고 싶더라고. 앨범에는 멸망 직전까지 만들던 노래가 많이 있었는데, 아마 거의 8할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보냈을거야.


그와중에 북반구에서 동쪽으로 철수하던 발키리 한명을 만났어. 러시아어를 나름 잘한다던데, 이 노래 제목이랑 가사를 나한테 알려주고 갔지. 그제서야 난 키노라는 그룹이랑, 빅토르 최라는 가수가 있었고, 이 노래 제목은 혈액형이라는 걸 알았어.


가사를 알고 들으면 좋은 게 뭔지 알아? 좀 더 노래가 잘 들리고 마음 속에 더 세게 와닫는단 거야. 태어나서는 전쟁밖에 할 수 없었고, 어디 묫자리도 구할 수 없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브라우니라서, 더 이 노래의 가사가 와 닿았을지 몰라. 발키리가 적어줬던 가사를 계속해서 봤었어, 계속해서. 거의 머릿속에서도 내용이 그대로 기억날 때 까지. 내 처지에 더 알맞은 노래라서 그랬을거야. 밤중에 이 노래를 듣다가 울 때도 있었다니깐? 지금 생각하면 쪽팔리긴 해도...


그래서 밤중에 이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는데, 그쪽 스카이나이츠 바이오로이드...아니, 그쪽 말로는 '사람'들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내가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었나봐. 그러니까 이렇게 칸 양반까지 데려와서 화상통화까지 걸어주는 거지. 안 그래?


...합류?


...미안해, 솔직히 말해서, 이번 남은 생까지만 스스로한테 이기적으로 굴기로 해서 말야. 난 여기서 남아있고 싶어. 여건이 안되면 다른데로 옮길 지 모르겠지만...더이상 전쟁같은건 보고 싶지도 않고, 무의미한 바이오로이드 개체 T2 브라우니 1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정말 미안하게 됐어. 만약에 음식이 궁하거나 하면 추하게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진 몰라도...오늘은 아냐. 전쟁은 지긋지긋해. 나고나서부터 한게 그건데, 누가 또 매일 하던걸 계속 하고 싶겠어? 재밌지도 않고, 끔찍하기만 한 걸...


물론 비전투인원으로 복무해도 되겠지, 하지만 더 이상 다른 사람한테 종속되면서 살고 싶은 기분은 아냐. 묶여있는건 내 인생 하나면 충분해...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 하지만 댁이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아서, 그리고 여기 칸 대장이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아서 변명이라도 늘어놓는거야.


그러면, 기회가 되면 한번 더 얘기하던가 하자고, 기회가 되면...


다시 일하러 가봐, 사령관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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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나? 정말 오르카에 합류하지 않아도."


칸이 화상통화 패드를 주머니에 넣고, 포신에 걸린 빨래를 걷고자 일어선 장발의 브라우니에게 물었다.


"합류하는 애들이 있으면, 합류하지 않는 애들도 있어야 재미가 있지. 난 당신만큼 의지가 세지 않아서..."

"..."

"...당신도 친구들을 많이 잃어봤을 거 아냐, 그 친구들한테 묘비 하나라도, 기억해주는 인간 한명이라도 있었나? 아마 아니었겠지."


칸은 브라우니의 한탄에 가까운 말을 묵묵이 들어주었다. 칸은 그 브라우니의 마음을 이해했다. 태어나서부터 친구를 잃고, 믿고있던 유일한 동지들을 잃는다면, 그럼에도 어떤 의미도, 영광도, 명분도 찾을 수 없다면, 더 이상 누군가가 영광이나 명예 따위를 부르짖어도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칸은 그렇게 생각했다.


"난 그래서 오르카로 가지 않는거야...그 인간이라면 안 그러겠지만, 다시 누군가에게 묶인다는건 나한테는 악몽에 가까운 일이야...그러니까...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당연하지, 그러면 당신이 오르카에 합류하지는 않겠다고 전해주겠다. 여기 오르카의 물자를 조금 내려줄테니, 불평 말고 받아라. 이건 그냥 사령관이 변덕을 부린 것이라 생각해라."


큰 상자 몇개를 내린 칸은 빠르게 아프간의 산맥 위를 질주했다. 피어오르는 아련한 모래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브라우니는, 항상 자신이 듣던 노래의 소절 하나를 읆으며 다시 빨래를 걷었다.


Группа крови - на рукаве
그루빠 끄로비-나 루까볘

소매에 적힌 혈액형아

Мой порядковый номер - на рукаве
모이 빠럇꼬븨 노미르-나 루까베
소매에 적힌 내 군번아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в бою, пожелай мне:
빠줼라이 므녜- 우다치 바유, 빠줼라이 므녜-
싸움에서 나의 승리를 빌어다오

Не остаться в этой траве
녜- 아스땃짜 베따이 뜨라볘
이 들판에 남지 않게

Не остаться в этой траве
녜- 아스땃짜 베따이 뜨라볘
이 들판에 남지 않게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빠줼라이 므녜- 우다치, 빠줼라이 므녜- 우다치
나의 승리를, 승리를 빌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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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에 합류하지 않는 바이오로이드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