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_1화

분열_2화

분열_3화

분열_4화

분열_5화

분열_6화

분열_7화

분열_8화

분열_9화

분열_10화

분열_11화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어. 그렇게나 소중한가? 네 목줄을 쥐고 있는 그 인간이?!”


“어리석긴! 철충과의 항쟁에 사령관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외다!”


자꾸만 떨리는 다리에 행여 무릎을 꿇을세라 크게 호통쳐 정신을 가다듬는다. 물결치는 파도에 저항하듯 쉬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용이지만 수십 번의 검격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알바트로스.


반면 변화된 몸에 적응이라도 한 듯 더욱 속도를 가하는 알바트로스의 공격은 눈앞의 용을 쉴 새 없이 압박해간다. 힘껏 당겨진 대검이 원을 그리며 용의 옆구릴 덮쳐오지만, 양손에 쥔 검을 교차해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만약 사령관의 존재가 불필요하다면?”


“헛소리!”


고속으로 휘두른 검은 페이크에 지나지 않다. 칼끝을 따라 펄럭이는 새하얀 코트로 놈의 시야를 차단한 뒤, 역수로 쥔 반대편 검을 알바트로스의 미간으로 재빠르게 휘두른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이어진 검신이라면 코트에 가려져 알아차릴 확률은 지극히 낮으리.


카가각!


한차례 튄 불꽃과 함께 거대한 벽이 그녀를 압도한다. 완벽하게 계산된 기습이었으나 알바트로스는 손에 쥔 타워 실드를 조금 앞으로 내미는 것만으로 용의 공격을 수포로 되돌린다.


“가련한 것! 끝내 족쇄를 풀 생각이 없는 건가?!”


이에 그치지 않고 방패의 안쪽으로 무게를 실어 돌진. 노도와도 같은 기세에 양손으로 쥔 검을 눕힌 용은 칼끝과 수평을 이룬 어깨를 내밀며 나란히 돌격한다.


우득.


기분 나쁜 소리가 쇄골을 타고 흘러가 눈살을 찌푸린다. 거리를 벌리지 않기 위해 마주 오는 공격을 파고들어 충격을 상쇄했으나 힘의 차이는 너무나도 압도적.


“칫...!”


힘을 잃은 왼팔이 그대로 떨어지고 마찬가지로 내지른 검은 힘없이 부서지고 만다. 새하얀 옷깃을 적시는 검붉은 피가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지만, 용의 눈에 떠오른 의지는 여전히 결연한 모양.


그 모습에 타워 실드의 측면으로 대검을 들이미는 알바트로스.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자세에 이를 간 용은 반대편 손에 쥔 검을 굳게 잡아 결의를 다진다.


“이걸로, 끝이...”


“햇츙!”


양손에 쥔 가위 날에 힘을 실어 낙하하는 리제. 혀를 찬 알바트로스는 즉시 자세를 바로잡곤 타워 실드를 들어 올린다. 예상대로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으나 대미를 장식할 순간에 끼어든 그녀가 여간 고까운 모양. 반대편 손에 쥔 칠흑의 대검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해 간다.


“그럴 순 없습니다!”


붉은색 의복을 두른 조그마한 소녀가 손을 흔들자 가녀린 손길을 따라 반짝이는 빛무리가 알바트로스의 측면을 타격한다. 데미지는 전무하나 한순간이나마 시야를 빼앗기엔 충분.


“주제도 모르고...!”


황급히 눈을 감곤 손에 쥔 대검을 회수해 함선의 바닥을 강하게 내리친다. 충격으로 비산하는 구조물들이 금방이라도 아르망을 삼켜버릴 것 같지만 비스듬히 발을 뺀 그녀는 여유만만하게 그것들을 비껴간다.


“성전을!!”


손에 든 책을 펼쳐 하늘 높이 치켜든다. 페이지 사이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광채가 주변을 둘러싸자 눈살을 찌푸린 알바트로스는 대치하던 리제를 무시하곤 곧바로 아르망에게 달려간다.


“하압!”


“칫!”


몸을 날린 용이 있는 힘껏 알바트로스의 실드와 부딪힌다. 새로운 몸이 아직 생소한 알바트로스. 본래라면 미동조차 없었겠지만 달리는 동작 중 들어온 개입에 그만 중심을 잃곤 다섯 걸음 정도 뒷걸음질 치고 만다.


굴욕감에 인상을 찌푸린 알바트로스. 곧장 대검을 휘두르려는 그녀의 눈앞으로 난데없이 회전하는 무언가가 달려들곤 폭발한다.


“샷~! 정말 맞았어!”


함선의 중앙. 거대한 포신 위에서 이쪽을 향해 포대를 들어 올린 파니가 손을 흔들며 환호한다.


***


시꺼먼 연기가 가라앉자 드러난 건 놀랍게도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알바트로스의 모습.


“후우...”


허나 방심하긴 이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전투의 양상에도 확연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한숨 소리. 반쯤 바닥에 꽂힌 알바트로스의 대검에서 별안간 푸른빛의 기운이 박동한다.


대검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파동이 발목을 스치자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엄습한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라비아타 씨의 플라즈마 제너레이터... 무슨 수로?!”


“시작일 뿐이다. 우리의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르망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곁눈질한 용은 다친 몸을 부추기며 번개같이 달려든다. 유일하게 드러난 머리가 바닥과 가까운 지금만큼 절호의 기회는 없다고 판단.


부러진 검을 내팽개친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푸른빛의 또 다른 검을 잡아채곤 가차 없이 휘두른다. 하지만 알바트로스는 그 몸집에 맞지 않는 빠른 스피드로 바닥에 박힌 대검을 힘껏 뽑아버린다.


쿵!


단순한 동작이지만, 위력만큼은 무시 못 할 수준. 대검을 휘감은 푸른 빛의 검강이 달려드는 용을 날려버림과 동시에 선미의 가장자리가 출렁이는 바다로 반쯤 가라앉았다 튕겨져 나온다.


“놀랍지 않나? 새로이 태어난 난, 프로토타입의 힘을 아득히 능가한다! 아니, 그 이상이지!”


대검을 감싼 폭풍의 기운이 모두를 압도한다.


***


공간을 베어가는 대검과 대치하는 용의 검이 다시 한번 산산이 부서진다.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마지막으로 남은 흑색의 검을 들어 올리는 용.


“소용없다!”


움직이지 않는 왼팔이 이리도 탄식할 줄이야. 입가를 비틀어 비웃음 짓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에 날갯짓하며 상황을 주시하던 리제의 양손으로 힘이 들어간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는 기습하듯 날아올라 알바트로스의 목덜미로 교차시킨 가위 날을 들이민다. 힘의 차이는 명백하나 가슴 한편으로 믿는 구석이 있는 리제였기에 가능한 행동.


카가각!


대검을 휘감은 플라즈마가 리제의 몸을 감싼 로자 아줄과 격돌. 날카로운 유리가 서로를 갈아대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리제의 눈앞으로 불규칙적인 균열이 드러난다.


“...?!”


“네까짓 게 끼어들 곳이 아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감. 찰나의 시간이지만 서서히 좁혀들어오는 대검에 입술을 깨문 리제는 죽을 힘을 다해 양손에 쥔 가위 날로 알바트로스의 드러난 갑옷 사이를 찍어버린다.


“큭...!!”


인간의 몸이 된 후로 처음 느껴보는 고통. 하물며 슬슬 적응이 끝나 갈 하반신에 피해를 입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양새다.


“추기경! 정원사를...!”


“걱정말아요!”


데미지는 고사하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그녀다. 헌데 이제껏 정원사로 알고 있었던 리제가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안겨준 기회를 용은 결단코 놓칠 수 없었다.


지친 몸을 일으켜 마지막 남은 힘을 발끝으로 집중. 알바트로스 역시 발등에 박힌 칼날을 빼내려다 달려오는 용의 모습에 혀를 차며 손에 든 타워 실드를 들어 올린다. 여차하면 휘둘러서 날려버릴 기세.


거꾸로 쥔 검을 파지한 용은 미간으로 겨눠진 방패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이윽고 알바트로스의 공격 범위로 들어온 그녀는 크게 소리치며 지체 없이 무릎을 꿇는다.


“함대! 전속력으로 돌격!”


“뭣?!”


발등의 상처로 어정쩡히 서 있던 그녀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간 용은 허릴 비틀어 당황하는 알바트로스의 발목에 손에 쥔 검을 냅다 꽂아버린다.


“크아아악!”


그대로 망설임 없이 달려나가 곧장 바다로 뛰어드는 용.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필시 추기경이라면 자신의 행동을 예측해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마쳤을 것이 분명하다.


“도망치는...!! 무, 뭐지?!”


홀로 전열을 이탈해 전속력으로 달려나가는 용의 함선엔 어느새 고통에 신음하는 알바트로스 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의 손짓에 나가떨어진 날개 달린 메이드와 건방지게 눈을 가리던 책사, 주제도 모르고 끼어든 시끄러운 여자와 그 옆의 가녀린 소녀까지.


“무슨 생각을... 크윽!”


갑옷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에 혼란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알바트로스. 기어코 모든 칼날을 빼낸 그녀의 시야엔 그제서야 분노한 듯 몸을 떠는 커다란 함포가 들어온다.


“저건,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소녀가 손을 대자 무서우리만치 거대한 에너지를 다시금 축적키 시작한 포신. 명백히 자신을 향할 것이 분명했기에 전투 중에도 곁눈질로 확인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젠장... 젠장!!”


그렇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포신의 위치는 하늘을 가리켜 만에 하나라도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는 못할 위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과 일행들은 함선을 포기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대가 포진한 곳을 향해 함선을 돌격시켰다.


후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AGS 부대는 자신들에게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는 함선을 발견했으나 동시에 포착되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을 확인하곤 겨눠진 총구를 다시 떨어뜨린다.


“건방진 년이...!!”


욕지거릴 내뱉는 알바트로스지만 행동이 굼뜨다. 에밀리의 바이오더스트까지 흡수해버린 함포가 한계를 초월해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주변의 공기마저 앗아간다.


이윽고 모든 것을 소멸시킬 거대한 빛의 기둥으로, 함선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


“...그렇게 된 거야.”


“...”


더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선뜻 믿기지 않는 듯 꽉 쥔 주먹을 떠는 레이스. 팬텀 또한 놀란건 매한가지인 건지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 선진 모르겠지만, 알파는 마지막까지 나이트앤젤 대령에게 예전부터 간직했던 소중한 무언가가 없냐는 듯한 말도 꺼냈었어.”


“소중한 무언가...”


흔들리는 동공이 손에 쥔 금색의 휘장으로 모여든다. 나이트앤젤 대령이 떠나기 전 자신에게 남긴 물건으로 경황이 없어 단순히 훈장과 같은 무언가로 생각했었다.


“이유까지는 이터니티조차 모르는 눈치였어요. 그러니까... 죄송해요. 너무 제 할 말만 했네요.”


더치는 어딘지 친숙하기까지 한 레이스의 일그러진 표정에 그만 머리를 긁적이고 만다.


***


“저기, 그, 괘, 괜찮은가? 후, 후배...?”


탈출정의 옆에 가만히 기대앉아 손에 쥔 휘장을 노려보는 레이스.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한 더치는 마지막까지 사죄의 말을 남기며 발길을 돌렸다.


“거거거, 걱정마라! 내, 내가 도와주겠다! 후배가 복수를 원한다면... 그, 어어어, 어차피 사령관님도 안 계시니...”


“선배.”


어떻게든 위로의 말을 건네는 팬텀에게 레이스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닿는다. 평소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음성에 침을 삼키며 바라본 팬텀.


“처음엔, 복수하고 싶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부대를 몰살시킨 녀석을 찾아가 놈을 죽이고 나도 따라서 자살하려고 했다.”


“자, 자살이라니...”


무덤덤이 내뱉는 말에 애써 침착한 척을 연기하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연신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팬텀. 얼마나 긴장했는지 바닥으로 떨어진 땀이 슬슬 고여가는 지경이다.


“하지만 이대로 알파에게 대적했다간... 부대원들의 복수는커녕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은 채 울지만은 않을 거다.”


팔을 들어 젖은 눈가를 거칠게 문지른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아직도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팬텀과 마주한다.


“그러니까 선배! 날, 날 도와줄 수 있겠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선배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곳엔 언제나 자신과 어울려 소심하게 속삭이던 레이스의 모습은 없다. 당당하게 허리를 펴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팬텀은 그저 멍하니 고개만 끄덕일 뿐.


“걱정마라, 후배! 내가 도와주겠다. 이래 봬도 저, 전투엔 자신 있다!”


“고맙다, 선배!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


양손을 맞잡은 그들의 눈은 여느 때보다도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


“...지금 제정신인가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린 리리스의 기세에 오금이 저린 더치였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물러설 수 없다.


“진심이야.”


“아니요. 진심이 아닐 거에요. 만약 진심으로 그런 소릴 지껄였다면 당신 미간에 바람구멍이 났을 테니까.”


차갑게 돌아서는 리리스의 뒷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무는 더치. 곧이어 크게 숨을 내쉰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곤 소리친다.


“비겁한 년!!!”


“...뭐?”


우뚝.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 리리스. 작게 수축한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하자 마치 짐승의 앞에 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더치걸이 뒷걸음질 친다.


“지금 당장, 당신 머리통을 날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요.”


“허, 허세는 내가 아니라 알파한테 부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급격히 상승하는 더치의 시야. 아래쪽으로 스미는 시꺼먼 그림자에 그제야 자신의 목이 조이고 있단 사실을 깨닫는다.


“카흑... 컥!”


“한 번만 더 그년 이름을 언급하면 목을 비틀겠어요!”


사납게 소리치며 손에 쥔 더치를 날려버리는 리리스. 분노한 듯 내딛는 걸음마다 딱딱한 구두 소리가 복도로 울려 퍼진다.


“콜록...! 아직도, 아직도 임무라는 핑계나 대고 있는 거야?!”


“...”


숨이 트인 더치의 입에선 가시 돋친 말이 쉼 없이 흘러나온다.


“오르카 호를 사수해야 해서 떠나지 못한다고?! 바보야, 실패야! 넌 실패했다고!”


아아악!! 새된 비명과 함께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물이 터져 나온다. 어느새 다가온 리리스가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더치의 어깨를 짓밟곤 허릴 숙여 권총을 들이민다.


“그렇게 죽고 싶으셨다면 미리 말을 했어야죠. 당신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히히히... 맞아. 나 같은 게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 하지만 걔들은 달라.”


“...?”


영문모를 소릴 하는 더치를 내려다보는 리리스는 아직 초점을 잃지 않은 그녀의 눈과 마주한다.


“언제까지 눈을 돌릴 거야?!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건데! 알고 있었잖아! 예상했었잖아! 혼자서 도망치지 말라고, 치사한 년아!!”


“다악쳐어어어...!!”


어깨를 누르는 힘이 강해지자 더치는 이를 악다물곤 반대쪽 손을 이용해 리리스의 발목을 잡아챈다.


“인정, 해! 네 임무는 실패야! 그러니까 이런 데서 궁상떨지 말고 얼른 사령관한테 꺼지라고! 이딴 데서 쭈구리고 있어봤자 널 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가 뭘 알아?! 내가,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남은 지!!”


“비이켜어어!!”


작은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막강한 힘으로 자신을 짓누르는 리리스를 날려버린다. 당황한 그녀가 중심을 잡자 어깨에 난 상처를 부여잡고 비틀대며 일어나는 더치.


“안 궁금해. 설령 어떤 사정이라도 그게 친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아!”


“입 닥쳐!”


탕!


한차례 총성이 울리자 더치의 어깨에 매달린 멜빵끈이 그대로 흘러내린다. 명백한 위협 사격에도 불구하고 한걸음 내디뎌 다가가는 더치.


이가 부서지도록 힘을 준 리리스는 권총을 고쳐 쥐곤 여러 차례 방아쇠를 당기지만 단 한발도 명중하지 못하고 그녀의 곁을 스치기만 한다.


“하아... 하아... 거기서, 비켜. 넌,”


“그만...”


파르르 떨리는 눈가. 분명 자신보다 한참이나 떨어지는 스펙을 가진 더치의 입에서, 거부할 수조차 없는 진실이 리리스를 꿰뚫는다.


“그만!!”


“넌 자격 없어.”


***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주인님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 스틸라인과 발할라를 비롯한 대다수 전투원이 명령이란 명목하에 오르카 호를 떠났을 때? 이터니티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은 모두가 탈출을 준비할 때?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인님께 향하려는 스토커에게 자신의 로자 아줄을 건네주었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탈출하려는 인원들에게 자매들을 호위로 붙였다.


“사실은, 사실은 나도...”


떠나고 싶었다. 주인님의 곁으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소리치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던 스토커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 눈물을 훔치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자매들의 손길이.


“주인님이, 주인님이 내게 주신 마지막 임무...”


휩노스 병이 재발했을 당시,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항상 곁에서 그를 지켜보며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지만 주인님을 향하는 비난 어린 시선도, 떠나려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마지막만큼은...!!”


땅을 치며 후회한 들 지나간 시간을 돌아오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떨구는 리리스의 곁을, 더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지나간다.


***


레모네이드 알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르카 호의 출구로 향하고 있다. 비축된 바이오 씨앗과 여러 설비는 이미 새로이 제조된 자신의 병사들이 모두 챙겨둔 상황.


“그래도 조금은 아쉽네요. 기왕이면 이 오르카 호도...”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젓곤 상념을 떨쳐낸다.


“아니, 그건 너무 욕심이겠죠?”


출구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향해 똑바로 나아간다. 고작 열 걸음 정도를 남겨둔 그때, 바깥과 내부를 연결한 통로의 격벽이 예고 없이 내려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다.


“...”


눈을 깜빡인 알파는 팔짱을 낀 손을 풀어 허공에 나타난 단말기를 두드린다. 이곳의 모든 시스템은 이미 장악을 끝마친 상황. 하지만 어째선지 눈앞의 격벽은 열릴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에러 코드 6224. 외부 요인에 의한 충격으로 통제 불능...?”


단말기에 떠오른 붉은색 글씨의 경고문. 확실히 격벽의 이음새엔 바깥을 향해 부채꼴 모양으로 번진 새까만 화약 흔적이 여럿 퍼져있었다.


“경호 대장은... 아니겠죠.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자신의 계획을 눈치챈 누군가의 심술인가. 고개를 들어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런 유치한 행동을 할 이는 누구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곳의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말이죠. 저도 아직 멀었네요.”


눈꼬릴 휘며 피식 웃은 그녀는 이내 단말기의 버튼을 눌러 누군가를 호출한다.


“들리시나요? 아무래도 바깥에서 강제로 열어야 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위험하니 벽에서 떨어져 주세요.』


새로이 제조된 자신의 병사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들리자 여유롭게 물러선 레모네이드 알파. 이윽고 커다란 중장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후훗, 귀엽네요. 차마 앞으로 나올 순 없었나 보죠? 하하하,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요~”


입가를 실룩이는 그녀의 귀로 별안간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적군! 기습입니다! 이, 이터니티... (노이즈)』


바깥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불 보듯 뻔하게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제조된 이들은 하나같이 양산에 적합한 브라우니 개체. 폭주한 이터니티를 막을 순 없다.


“귀찮게... 살려준 목숨을 낭비하는군요. 하는 수 없네요.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해결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그대로 발걸음을 돌린 알파의 주위로 별안간 커다란 진동이 느껴진다.


“이건 무슨... 설마 이터니티가? 아니, 불가능해. 이 정도의 떨림이라면...!”


신속히 손을 들어 단말기를 들여다본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부릅뜬다. 화면에 떠오른 오르카 호의 단면도엔 붉은색의 경고문이 수도 없이 떠오르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자신을 향하는 진동의 세기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가잖은 짓을!”


이미 CCTV마저 모두 파괴한 누군가가 마음껏 선내를 누비고 있다. 예상되는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알파 자신.


“누군지는 몰라도 절대 용서...”


콰광!


곧이어 거대한 폭음과 함께 천장의 구조물이 힘없이 무너진다. 몸을 감싼 방어 역장이 피해를 막아주었으나 뒤편의 격벽 또한 충격으로 우그러진 상황.


“매몰시킨다고? 감히 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알파는 스커트의 먼지를 털어내며 앞을 향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멈추어 선 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조그마한 소녀와 마주치고 마는데.


“생김새완 달리 악취미네요.”


“너한테 그런 소리 듣기 싫어.”


마주한 더치의 손엔 그녀의 키보다 높은 대형 드릴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더 보여줄 것이 없다면 이만 사라지세요.”


“히히, 미안하지만 아직 더 남았어.”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충격. 순식간에 덮쳐온 어둠에 당황한 알파는 단말기를 조작할 새도 없이 기울어진 선체를 따라 다시 한번 옆으로 쓰러지고 만다.


“제정신인가요, 당신?! 이런 짓을 하면 당신도 살아나가지 못해요!”


“나도 그 정돈 알아~ 뭔가 착각하나 본데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어.”


여유로움을 넘어 어딘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에 인상을 쓴 알파는 손을 뻗어 허공을 두드린다.


“얌전히 빠져나갔으면 됐을 것을!”


이터니티에게 한 것과 똑같이 화면에 떠오른 더치의 실루엣을 드래그한다.


“이미 후회해도 늦었어요. 영원히 바닷속을 헤메는... 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천연덕스럽게 질문하는 더치의 얼굴을 바라본 알파가 혀를 차곤 들었던 팔을 내린다.


“멸망 전 개체였나요. 별나군요. 아무리 오래된 모델이라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밀 검사를 진행한 적이 없다니.”


“하하하, 뭐야 그 소리였어~”


배를 잡고 웃은 그녀는 이내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다.


“너 같은 아가씨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멸망 전의 인간님들껜 여러 사정이 있었거든~ 아예 우리 같은 존재를 신고 안 하는 경우가 많았나 봐. 그리고 내 경우엔...”


뜸을 들인 그녀가 입을 뗀다.


“오르카 호에 합류한 후에도 상처에 대한 치료뿐이지, 내부의 나노 머신엔 전혀 손대지 않아 싸구려 그대로야. 뭐, 제멋대로인 내 주장을 사령관이 받아준 것뿐이지만.”


끝에 가선 부끄럽다는 듯 볼을 긁는 그녀에게 알파 또한 여유 있게 미소짓는다.


“그런가요? 좋은 자료네요. 참고가 됐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거두어진 손을 이번엔 어깨 뒤로 넘긴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괴기스럽게 일그러지곤 곧이어 거대한 원반 형태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케스토스 히마스.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보석에서 별안간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긴 더치는 자신의 관절 이곳저곳이 무거운 밧줄로 묶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죠. 이미 정보는 파악했어요. 당신이 쓸데없는 소릴 떠드는 틈에.”


“하, 하하. 역시 대단해. 이런 거... 듣도 보도 못했어.”


“당연합니다. 그대로 죽어가세요.”


번쩍이는 빛이 그 세기를 더해가자 자신을 짓누르는 힘이 그 강도를 더해간다.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아줘. 나 같은 게 당신과 맞서려면,”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어설프게 가려둔 어깨의 상처를 쑤신다.


“크으읍!! 이 정도 각오는 해야 하거든.”


비명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알파는 서서히 자신의 손길을 벗어나는 더치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뜬다.


“당신, 어떻게...?”


“히히, 그거 알아? 사람이든 동물이든, 우리 바이오로이드든. 보다 큰 고통에... 어쩔 수 없이 머릴 숙이기 마련이야.”


당황하는 알파의 손가락이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더치는 놓치지 않고 바닥에 뉘인 자신의 대형 드릴을 알파에게 냅다 던져버린다.


카각!


알파의 역장이 반응하며 피해를 소멸시켰지만 당황한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방어하기 위해 위로 올라가 있다.


“쓸데없는 소릴 하는 틈에 나 따위를 분석했다고? 하하! 정말 멍청하네, 너!”


“적당히 까불지 않으면...!”


“끝났어.”


단정 짓는 말에 의문을 표한 알파를 향해 더치는 초연히 말한다.


“내가 뭐하러 네 앞에 나타났겠어. 애초에 난 그 역장을 뚫을만한 힘도 가지지 못했다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뒷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든다. 불을 붙이는 것과 동시에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진동.


“설마!”


“같은 물귀신 친구끼리 친하게 지내자고.”


충격을 버티지 못한 오르카 호가 깊은 바다로 침몰한다.


***


“꼴이 그게 뭡니까, 알바트로스. 당신답지 않군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몸을 감싼 칠흑의 갑옷엔 한눈에 봐도 치명상일 균열이 눈에 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로크는 애써 고개를 돌리곤 싸움이 한창인 바다를 내려다본다.


“그래서? 이쯤 했으면 저들의 전력도 많이 줄어들었겠죠. 사령관님을 붙잡지 못한 건 아쉽지만...”


“아직도 그 인간을 사령관이라 칭하는가?!”


“실례.”


조용히 고개를 숙인 로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간다.


“알파와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어디서 뭘 하는진 몰라도 무언가 예기치 못한 것에 휩쓸렸을 가능성도 크죠. 어떡하시겠습니까?”


“...에이다는?”


“바빠 보이더군요. 대답이 늦습니다.”


턱에 손을 댄 알바트로스의 눈이 이내 광채를 띤다.


“에이다에게 전해라. 목표지점으로 병력을 이끌고 집결하라고.”


“...알파는?”


입가를 비틀은 로크와 그에 동조하듯 진한 미소를 띠는 알바트로스.


“알파에겐 큰 빚을 졌지. 허나, 꼭 값아야 할 필요는 없다.”


“훗,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끝으로 이제껏 교전을 벌이던 AGS 부대가 행동을 멈춘다.


“후퇴한다.”


조용하게 중얼댄 말이지만 모든 AGS가 일제히 화기를 떨어뜨리곤 전장을 이탈해간다.


슬슬 엔딩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