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3316232

이전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9151164


--------------------------------------------------------------------


선전포고는 자신만만하게 해놨으니 이제는 실천할 차례였지.

그런 이유에서 리제는 바로 소완의 작업실로 뛰어들어갔음.

레시피야 받아뒀지만 역시 검수를 받아가며 만드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건데.


- 불가하다 말씀드렸지 않사옵니까.

- 그러니까, 그냥 자리 정도만 빌려줘도 된다니까요. 애초ㅇ……앗.


어머, 놀라워라.

왜 소완 리리스 원작 리제가 사이좋게 옥신각신하고 있는 걸까.


- 미안합니다. 잘못 찾아왔나봐요.

- 아니요. 딱 좋을 때 오셨사옵니다.


물흐르듯 뒤를 돌아 빠져나가려던 움직임은 소완의 억센 손아귀에 간단히도 무산되었고.


- 혼자서 노력할 테니까 놔 주면 안 될까요!?

- 함께 해주시지요, 이 난동의 끝까지……!


아니야, 여기서 쓸 대사가 아니야.

그런 내면의 절규가 무슨 쓸모가 있을 리도 없어서, 리제는 결국 이 요상한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되고야 말았지.


*   *   *


- 확실히 말해두자면, 크기가 클 수록 그이는 부담스러워 할 거예요.


저도 딱 세 알만 만들 거고요.

확신이 담긴 리제의 말에 다행히도 두 명은 고집을 꺾어 줬음.

그래, 원작이랑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해서 경악했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많이 순해진 건 착각이 아니라 기쁘구나.


- 아우로라 양이 봐주는 시점에서 터무니없는 사고가 벌어질 리도 없으니, 추가적인 가공을 할 실력이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원료의 차이 뿐.

 그 점에서 이 행사에 참가하는 분들 대부분은 같은 재료를 쓸 테니 아무 문제 없지 않사옵니까.

 모양을 다듬는 정도라면 도와드릴 테니 그 정도로 만족하시지요.


좀 여유가 생기자마자 '물론 나는 실력이 있으니 우위에 서 주겠다'는 기만질을 하는 건 어떨까 싶네요, 소완 씨.

당사자인 리리스나 원작 리제도 그 도발을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어서 잠깐 발끈했지만, 아무튼 도와주긴 하겠다는 소리를 들은 입장에서 강하게 나가기는 어려웠는지 꿍얼거리는 정도로 끝났고.


- 그러니까 일단 초콜릿은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세요.


다짐하듯 꺼낸 발언에 오래지 않아 수긍하는 두 명을 보면서, 리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음.


이러니저러니해도 소완이 두 명을 당장에 쫓아내는 게 아니라 도와주기는 하겠다고 한 것도, 리리스와 원작 리제 두 명이 '원작'에 비해서는 낫다지만 '평소'에 비해서는 훨씬 황당무계한 사건을 벌인 것도 결국 같은 이유에서였으니까.

요컨대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사령관에게 마음을 표현하려는 대원이 늘어난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 거지.

소완도 그 부분은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나름 유하게 대해준 것일 테고.


사랑에 순서는 없고 정실(일단은)으로서 누군가를 편애할 생각도 없지만, 지금의 균형이 방치하는 것만으로 유지될 리도 없지.

다음 휴가 때는 피크닉이라도 같이 가게 해줄까 생각하면서 리제는 자기가 만들 초콜릿 재료를 하나둘 꺼내들었음.


- 발상의 전환으로 1/200 스케일 리리스 초콜릿은 어떨까요?

- 딱 한 방울만 쓴 블러드드랍 초콜릿… 오히려 낭만적일지도…….?

- 정신 차리라니까요?!


*   *   *


이래저래 떠들썩한 발렌타인의 밤.

사령관은 마침내 전달이 끝난 초콜릿의 산을 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음.


심플하게 모양틀에 굳힌 것부터, 견과류 같은 각종 속재료를 더해 만든 것, 크림을 섞어 부드럽게 가공한 것, 카카오 가루를 묻혀 마무리한 것. 아예 마시는 형태로 만들어온 것까지.

페로가 언니가 왔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봐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던 리리스랑 리제는 어째 카카오 가루로 범벅이 된 것 치고는 꽤 얌전한(겉보기로는) 초콜릿을 내놓고는 기진맥진해서 돌아갔고.


모두의 마음 - 굳이 연애적인 의미가 아닌 호의도 포함해서 - 을 받은 건 기쁘지만, 결국 내가 혼자 전부 먹어야 하는구나.

장기 보존은 가능해도 오르카 호의 창고가 넉넉한 편은 아니니, 초코 여왕의 성에 머무르는 며칠 사이에 적잖은 양을 먹어치워야 하는 것도 사실이라 사령관은 내심 각오를 다졌음.


뭐, 그것도 내일의 내가 해야 할 일.


- 여기요.


일단은 약속한 대로 리제의 초콜릿을 가장 먼저 입에 댈 차례였음.

동글동글한 공 모양 초콜릿이 셋.

각각 윗부분에 고양이, 강아지, 그리고 리제가 귀엽게 데포르메되어서 그려져 있었음.


- 추천하는 순서라도 있어?

- …순서는 없지만, 일단은 하나만.

- 음….


리제 모양은 어쩐지 아까우니까 나중으로 남겨두고, 강아지부터 먹어볼까.

자기가 집어올린 초콜릿을 확인한 리제가 뒤로 돌아선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사령관은 그대로 초콜릿을 한 입에 넣고 깨물었음.


- …….


그리고 입 안에서 화악 퍼지는 알콜의 향에 눈썹을 치켜 올렸음.

위스키 봉봉이었구나.

사령관에게 술을 권하는 건 암묵적으로 금지된 상황이었으니 확실히 리제 말고는 만들 사람이 없긴 했지.

물론 술에 약하다고는 해도 이 정도에 취하지는 않았어.

-않았지만, 동시에 이해하고 있었지.


리제가 자신에게 술을 권한다는 건…….

사령관의 생각이 거기에 닿았을 즈음에, 리제는 다시 몸을 반 바퀴 돌려 사령관을 마주봤음.


강아지 귀 모양 머리띠랑, 끈이 달린 초커라.

가끔 자신의 권유로 입곤 했던 파격적인 코스튬에 비하면 큰 변화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여느 때보다도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착각일까?


- …멍.


착각일 리가 있나.


--------------------------------------------------------------------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9273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