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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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콱! 콱!

 

 햇님이 모습을 감추기 전, 새빨간 빛을 내뿜어가며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 라붕이 작전관은 산 중턱에 위치한 어딘가에 서서 제 눈 앞에 펼쳐진 스크린 너머의 여성들과 작은 회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 세 분 모두 제 특수작전에 협력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음. 부탁드리겠습니다. 작전관님.

 

-뭐, 나에겐 나쁠 것 없는 거래네.

 

-하하하! 새로운 인간님이라고 해서,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만, 실제로 대화를 나누어보니 유쾌한 인간님이셨군.

 

“과찬입니다. 그럼 내일을 기대해주십시오.”

 

-수고해. 작전관님.

 

-부디 제 부하들을 한층 성장시켜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음. 다음에 또 연락하게. 물자들은 잘 받고 있네.

 

삑-!

 

“...후우. 오케이. 끝끝끝.”

 

 눈 앞의 세 개의 스크린이 사라지자 라붕이 작전관은 이마 위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내며 고개를 아래쪽으로 돌렸다. 그가 시선을 내린 곳에는 몇몇 인원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어느 곳에서 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구덩이를 파내는 중이었다.

 

“애들아! 거! 거기 좀 더 넓혀라!”

 

“대..대장! 이만큼만 파도 되지 않겠어?”

 

“야! 이프리트! 너희가 뭐냐! 어! 바이오로이드 아니냐!”

 

 열심히 흙구덩이를 넓히던 이프리트의 아우성에 라붕이 작전관은 땀범벅이 된 얼굴 위로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 정도 깊이 가지고 어, 되겠냐?”

 

“아아..그건..뭐. 개인차이지 않을까?”

 

“하하하!”

 

 그와 그녀의 만담에 그들과 함께 구덩이를 넓히던 인원들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 역시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에 들려있던 삽자루를 어깨 위로 들쳐 매었다.

 

“뭐. 그래. 이 정도면 준비는 끝이지.”

 

“..대장은 이렇게 여기 있어도 돼?”

 

“응? 아아. 뭐, 행정 업무는 아르망이 맡아서 해주고 있거든. 지금 내가 딱히 할 게 없어.”

 

 흙먼지로 인해 샛노란 얼굴이 거멓게 변한 더치걸의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눈웃음을 그리며 그녀의 뺨 위의 검버섯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새하얀 은발을 해질 녘의 붉은빛에 반짝이는 한 여성이 그의 등 뒤로 안착했다.

 

탁-!

 

“주인님. 특수 설비 점검이 끝났어요.”

 

“응? 오! 리리스. 그래. 고생했다. 리제나 소완은?”

 

“..주인이시여. 소첩의 임무는 이미 마쳐두었나이다.”

 

 블랙 리리스의 등장에 라붕이 작전관이 새빨간 빛을 흡수해대는 그녀의 백옥같은 피부를 바라볼 때, 그의 어깨너머에서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라붕이 작전관은 비명을 내질렀다.

 

“-히익!”

 

“후훗. 무얼 그리 놀라시옵나이까. 소첩이 더 당황스럽나이다.”

 

“아..아니! 인기척 좀 내고 다니자!”

 

“소첩은 주인께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즐거우니, 앞으로도 이래 등장하겠나이다.”

 

 입을 가리며 옥빛의 눈동자를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숨기는 소완의 웃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지친 눈으로 주변을 휙휙-둘러보았다. 설마 그 아이도 여기에 이미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가 속으로 다른 소녀의 인기척을 찾아 헤맬 때, 기다렸다는 듯 그의 왼쪽 귓바퀴로 음침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리제도 다녀왔어요. 히힛!”

 

“허억!”

 

쿠-당!

 

“-야! 애들아! 제발! 내 심장 떨어진다! 진짜!”

 

“하하핫!”

 

 등 뒤로 푸르른 요정의 날개를 퍼덕이며 등장한 리제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이 뒤로 엎어지자 그 광경을 가만히 주시하던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소녀들과 여성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입술을 삐죽이 내밀던 라붕이 작전관은 후-하고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흙바닥에 엎어진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리제, 네 쪽은 안전 점검 끝났어?”

 

“네. 주인님. 저는 착한 아이인걸요? 수십 번 확인하고 또 수십 번 확인했어요. 히히히! 절대 끊어질 리 없어요.”

 

“..그래. 확실히 점검했구나. 소완, 너는?”

 

“소첩도 모든 작업 확인을 마쳤나이다. 무게까지 확실히 확인했으니, 이제 그녀들이 옮기기만 하면 끝이나이다.”

 

“음. 그쪽이 가장 걱정되기는 했는데, 뭐. 튼튼한 게 장점인 바이오로이드들이니, 여차하면 다프네 불러야지.”

 

 제 주위를 둘러싼 여성들의 말에 라붕이 작전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있을 일들의 일과표를 하나둘 확인하며 고개를 그녀들에게서 땅을 고르던 인원들을 향해 돌렸다.

 

“애들아! 우리도 내려가서 이제 저녁 먹고 쉬자!”

 

“와-아! 끝났슴다! 끝임다!”

 

“브라우니! 대장님 앞에서! 경박하게!”

 

“뭘, 우리 대장이 저런 걸로 뭐라 하지는 않잖아. 히힛.”

 

“언니도 참. 후훗.”

 

“헤헤헤. 오늘 저녁은 뭘까?”

 

 저마다의 삽자루를 챙기며 산 아래턱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들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잠깐 빤히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빠른 걸음으로 그녀들 중 두 명의 어깨 위를 콱-붙잡았다.

 

“..너희는 오늘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응?”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에, 두 여성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새빨간 해질 녘의 노을빛을 머금은 채 한껏 진중한 표정으로 돌변한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58)

 

끼-익! 끼-익!

 

“하-아! 하아!”

 

 연보랏빛의 가림막을 걸어둔 작은 전등, 그 위로 전류가 흘러 가림막의 안에서 빛을 뿜어내는 전등의 빛이 그 연보랏빛을 사방으로 뻗어 보내며 어두컴컴한 이 좁디좁은 밀실의 안의 사물들의 모양새를 흐릿하게나마 붙들어 매어주고 있었다.

 

“흐-읏!”

 

 연보랏빛에 반사되는 가구들은 좁은 방 안에 걸맞게 몇 점 놓여있지도 않았다. 작은 서랍장과 벽에 걸린 거치형 옷걸이들. 하지만 그런 작은 가구들 사이로, 유독 커다란 가구 하나가 방의 중앙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삐-걱!

 

“하-악! 사..사령관!”

 

 방의 중앙에 자리를 잡은 거대한 원형의 침대 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것인지 분홍색의 가림막의 너머로 희끄무레한 두 인영이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강한 열기로 어두컴컴한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아! 하아!”

 

“사령과-안..”

 

 보드라운 얇은 이불이 깔린 침대의 위, 분홍빛의 머릿결을 그저 흐름에 맡긴 채 이리저리 풀어헤친 여성의 부름에도 그녀를 끌어안은 남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굵직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제 품에 안겨 붕 떠 있는 그녀의 몰캉한 둔부의 위를 꽉 쥐어 잡고선 다시 거친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우. 하-아.”

 

삐-걱! 끼익!

 

“-흐읏! 하악!”

 

 남성이 허리를 들출 때마다 그의 굵직한 양손에 하반신의 자유를 잃은 소녀는 그의 목에 두른 제 팔에 힘이 점차 풀리는 것을 느끼며 얄따란 입술 사이로 거친 열기와 함께 짧은 숨소리가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겠다는 듯, 남성은 제 팔과 대조되는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더욱 세게 조우며 계속해서 근육이 도드라지는 제 골반을 움직여 대었다.

 

끼익! 끼-익!

 

“하악-! 흐읏! 처..천천히! 제발!”

 

“하아! 후우! 하아!”

 

 두 남녀의 거친 정사에 푹신한 침대의 위로 거친 물결이 일렁였다. 여성의 이마는 이미 그의 굵다란 팔과 가슴 너머에서 느껴지는 체온 탓에 땀범벅으로 번져 올랐고, 남성 역시 수십여 분을 지속해온 이 행동에 모공 위가 이미 한껏 젖어 있었다.

 

찌-걱! 찌-걱!

 

“하으..하아..”

 

 이제는 목을 지탱할 여력이 없었던 것인지, 이마에 달라붙은 제 머릿결을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있던 그녀가 목을 뒤로 젖히자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남성의 두 눈이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녀의 목의 위로 꽂혔다.

 

“-미호. 너..이런 걸 좋아했지?”

 

까-득!

 

 낮게 깔린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점차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그녀의 뜨거운 귓불을 간질이는 동시에 여성은 일순간 제 목을 물어뜯는 짐승의 이빨에 가쁜 숨 사이로 단말마를 내질렀다.

 

“-히얏!”

 

“...후우!”

 

 목의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강렬한 통증에 미호라 불린 분홍 머리의 소녀는 감겨가던 눈썹의 사이로 자신의 머릿결과 같은 진분홍색의 눈동자를 빛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남성은 제 혀에서 느껴지는 쌉싸름한 맛에 입맛을 다시며 그녀가 정신을 차린 사이에 그녀의 허리를 고정하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끝낼게. 미호.”

 

“사..사령관 나 더는..”

 

“걱정마. 움직이는 건..”

 

“히-얏!”

 

“..나 하나면 되니까.”

 

 사령관이 제 허리춤을 고정하고 있던 팔을 풀어버리자 그의 팔에 겨우 상체를 지탱하고 있던 미호의 허리가 뒤로 젖혀 붕 떠 있던 그녀의 정수리가 푹신한 이불의 위로 닿았다. 하지만 그녀의 골반만큼은 그의 널따란 손에 붙잡혀 있었기에 그녀는 하반신만 붕 뜬 모양새로 그의 거친 허리놀음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후우! 후우!”

 

삐걱-! 삐-걱!

 

“하읏! 흑! 하악!”

 

 사령관의 골반이 짧은 리듬감을 유지하며 앞뒤로 움직이자 소녀의 골반 역시 그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흔들려대었다. 그녀의 흉부의 위에 얹힌 마른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유방 역시 그의 숨소리와 함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좌우로 마구 흔들려대었다.

 

“미호! 정신..꽉 잡아!”

 

“..하아..하아! 핫!”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이는 사령관과 달리, 이미 모든 체력을 소진한 미호의 분홍빛 동공은 풀려 있다 못해 초점을 잡을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중력에 의해 아래로 젖혀진 제 유방과 자신의 엉덩이를 꽉 잡은 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나신의 남성.

 

찌-걱!

 

“-하악!”

 

 그의 굵직한 손아귀에 붙잡힌 제 엉덩이의 위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쾌감에 이불자락을 찾던 미호의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얇은 덮개 위를 꽉 붙들어 맨 체 그녀는 쉴 새 없이 몰려오는 이질감에 제 턱을 천장을 향해 치켜세웠다.

 

“..흐윽! 하악!”

 

“후우! 후우!”

 

끼-익! 끼-익!

 

 둔부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축 늘어져 있던 그녀의 탄탄한 다리가 자신의 양팔 위를 감싸 안아오자 남성은 짧게 움직이던 골반을 더욱더 크게 휘둘렀다.

 

찌-걱!

 

“흐윽! 하악!”

 

 그런 그의 무자비한 폭력의 향연 속에서 미호는 그저 이불자락을 쥔 채 거친 숨을 토해내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종결을 느낀 남성이 고간 아래서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에 그녀의 엉덩이 위를 붙잡고 있던 왼손을 빼내어 그녀의 등 아래쪽으로 가져갔다.

 

“..미호. 이제 갈게.”

 

“하아! 흣! 사..사령..”

 

찰싹!

 

“-캬하악!”

 

 사령관의 두꺼운 왼손이 자신의 등 아래쪽을 내리치는 동시에 쾌감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미호의 허리가 위쪽으로 붕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체액을 뿜어내던 그녀의 고간 사이로 뜨거운 격정이 몰려와 사령관의 양팔을 붙잡으려던 그녀의 양다리가 수직으로 곧게 뻗어 올라갔다.

 

“-흐윽! 하악!”

 

“...”

 

“하아..사..령..”

 

툭!

 

 끝물에 올라오는 강렬한 감각의 폭풍에 휩쓸려가던 그녀의 양팔과 양다리가 축 늘어지자 그녀의 등과 둔부를 쥐고 있던 사령관은 천천히 붕 떠 있는 그녀의 하반신을 침대 위로 얹히려 들었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음문에서 사령관은 천천히 제 물건을 빼내며 온몸을 땀으로 뒤덮은 미호의 나신을 보고는 곁에 던져뒀던 수건을 집어 들어 그녀의 신체 이곳저곳을 닦아주었다.

 아까의 쾌감으로 아예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수십 분에 가까운 행위에 지쳐서인지 거친 숨을 토해내던 미호의 작은 입술 사이에선 이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제 귓가를 간질이자 사령관은 입꼬리를 쓱 올리며 새로운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와 뺨을 닦아 내렸다.

 

“수고했어. 미호.”

 

“..사령..관..”

 

“응응. 이제 푹 자도록 해.”

 

“...으..응..”

 

 새하얀 피부가 덮인 목 위로 새빨간 이빨 자국이 남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아직 피부 위로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제 몸을 손에 들린 보드라운 수건으로 닦아내었다.

 

“..후우. 이제 이걸로 오늘 업무는 끝이구나.”

 

 한참을 유지해온 격정의 시간, 이제는 오늘의 마지막 업무도 끝냈다는 생각에 사령관은 옷 한 벌 거치지 않은 미호의 몸이 행여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 인해 탈이 날까 싶어 그녀가 깔고 누운 이불의 반편을 들어 그녀의 몸 전체를 덮어주고선 침대 위에서 일어나 제 주변을 둘러싼 분홍빛의 가림막을 거두어내었다.

 

촤-륵!

 

“..음. 지금 시간이면..”

 

 벽면에 걸린 디지털 시계를 유심히 바라보던 사령관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씻을 생각을 머리 한쪽으로 치워둔 채 방금 제 땀을 닦아내었던 수건을 골반 위에 두른 채 방의 한구석에 놓인 작은 냉장고로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삑!

 

 사령관의 손길을 느낀 작은 냉장고의 문이 자동으로 열림과 동시에 자욱한 냉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오자 사령관은 그 안개 속에서 무언가를 찾든 이리저리 안을 뒤적였다. 그리고 그가 손을 다시 빼내었을 땐, 은색의 음료수 캔이 그의 손가락에 걸려 빠져나왔다.

 

“..라붕씨는 이 음료를 마셨었지?”

 

 이 오르카 1호의 개인실에서 단 몇십 분을 보냈던 남성이 유일하게 마셨던 음료, 바닐라의 이야기로는 꽤 깊숙이 넣어둔 캔이었는데 굳이 찾아내서 마신 것 같다고 했을 때, 사령관은 그가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를 제쳐두고 이 음료를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딸-깍!

 

치-이익!

 

 캔 따개를 뒤로 젖히자 벌려진 알루미늄 사이로 샛노란 거품이 강렬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사령관은 재빨리 그 거품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쓰읍!”

 

 거친 운동 탓에 메말라 있던 입천장과 목구멍 너머로 씁쓸한 거품의 맛이 맴돌기 시작하자 사령관의 얼굴이 찌푸려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힘껏 손을 올려 거품이 아닌 캔의 안에 들어있는 음료를 힘껏 자신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꿀꺽-꿀꺽

 

“-크으!”

 

 시원한 캔의 겉면 감촉만큼이나 얼음장과 같은 캔 내부의 음료가 목구멍을 지나 위 속으로 직행하자 사령관은 뜨뜻하던 복부를 안쪽에서부터 식후는 이 청량감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맛이구나. 라붕씨가 좋아하는 맛이. 하하하!”

 

 격렬한 정사를 마친 후 즐기는 맥주 한 캔의 여유, 사령관은 차츰차츰 익숙해져 가는 맥주의 따끔한 감각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새로운 남성과 만나 관계성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만큼 새로운 나날을 선사했다.

 이 음료의 즐거움을 깨달은 것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레오나가 와인병을 들고 왔을 땐, 그냥 그랬는데. 어째 이렇게 혼자 즐기는 술이 더 맛깔이 나는지 모르겠네.”

 

찰랑!

 

“으음. 언제쯤 라붕씨랑 다시 만나려나. 마리나 용은 곧장 넘어올 분위기긴 하지만, 다른 지휘관들은 별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사령관은 오른손에 들린 맥주캔을 이리저리 뒤흔들며 자신이 있는 방안의 곳곳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향기. 예전 같았으면 그저 한없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공간이었기에 그에게도 소중한 장소였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그 누구도 없는 사령관실이 그에게 더 편한 곳이 되었다.

 

‘여기서는 메시지 같은 걸 주고받긴 좀 그렇지.’

 

 지금 그의 행위는 어딘가에 있을 탈론 페더의 카메라에 녹화되고 있을 터, 그렇기에 사령관은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행여 진중한 정사 뒤에 단말기를 잡고는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나갔다가는 왠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호에게도 실례고. 흠. 시계가..’

 

 사령관은 벽면에 걸린 시계를 빤히 바라보았다. 10시 정각까지 얼마 남지 않은 분침의 숫자에 그는 재빨리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고는 방의 한구석에 비치된 샤워실로 걸어갔다.

 

자-박 자-박

 

‘탈론 페더의 카메라가 여기까지는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

 

딸-깍!

 

 어두컴컴한 방 안의 분위기와 대비되는 새하얀 벽면 타일들이 환한 전등빛 아래서 반짝대자 사령관은 흐흥-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실의 물을 틀어놓고는 좌변기 위에 허리를 앉혔다. 그리고는 성인의 신체에 걸맞은 기다란 왼팔을 뻗어 샤워실의 찬장에 숨겨두었던 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라붕씨랑 문자를 주고받는 시간을 방해받기는 싫거든요~’

 

 아까까지 미호를 챙기던 양반이 맞긴 맞는지, 사령관은 싱긋이 미소를 짓고는 근래 들어 가장 자주 들어가는 메시지 방을 꾹-하고 터치했다. 그러자 단말기 화면 위로 최근 그에게 날아온 라붕이 대장의 기다란 감사 메시지가 나타났다.

 

“헤헤. 아스널의 말대로 상대의 취향을 조사하는 것도 효력이 있었네.”

 

 사령관은 제 부하의 성실한 조언에 감사함을 느끼며 남아있던 캔의 내용물을 다시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라붕이 대장의 등장 이후로 사령관은 하루하루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음음. 조금씩 사이가 진전되는 게 문장에서부터 느껴지는데? 헤헷.”

 

 그저 자신이 마시지 못하는 리오보로스의 유산 중 한 병을 딸랑 보내주었을 뿐인데, 라붕이 대장은 평소처럼 딱딱한 대답 대신 자신의 취향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행복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둥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그에게 써서 보내었다.

 

‘좋아! 헤헤! 라붕씨는 친구와 비슷한 관계를 만들자고 하셨지만..아니지. 내가 노리는 건 진정한 친구! 또는 든든한 형제라고!’

 

 아직도 사령관의 머릿속에는 그가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의 문구가 남아있었다.

 

-나는 그때 친구라는 말이 국산 말인 줄 알았는데, 국어 선생 얌생이가 칠판에 ‘친할 친’자에 ‘옛 구’자를 써서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벗이라고 썼던 게 기억난다. 억수로 멋있는 말 아이가?

 

‘맞지! 음! 친할 친! 옛 구! 옛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아직 아니긴 하지만. 시작부터 그렇게 옛이라는 의미에 집중하는 건 오판이지!’

 

 얼마나 꿈에나 그리던 다른 남자와의 우정인가, 샤워실 밖의 미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령관에게는 지금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이 라붕이 대장이었다.

 

“라붕씨 덕분에 우리 저항군의 자원 사정도 괜찮아졌고. 정말, 유능한 형..음. 형! 형이라고 하자 그냥!”

 

-요새는..이북에서도 제사를 지낸다지.

 

-모든 게 잘 풀리면 이 일이나 한번 제대로 키워보자. 너나 나나 그 좋은 기술 어따 쓰겠냐. 우리 둘이 뭉치면 대박 날 거야.

 

‘크으! 진짜 라붕씨랑 언젠가 진짜 호형호제하는 날이 올 거야! 진짜로!’

 

“으하하하하!”

 

 영화 ‘의형제’에 나오는 대목을 머릿속에 그려내던 사령관은 뺨 위로 커다란 보조개를 그리며 샤워실의 물줄기 소리가 무색해지게 환한 웃음소리로 내부를 가득 메우며 근래 들어 가장 행복한 나날들을 떠올렸다.

 

‘안드바리는 매일 물자 들어오는 시간만 기다리면서 행복해하고.’

 

 항상 자원 부족에 허덕인다면서 긴축 재정을 요구하던 표독스러운 소녀의 얼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한 미소와 함께 매일 늘어만 가는 컨테이너의 물량에 기쁨의 눈물을 흘려대었다.

 

‘요새 제품의 질도 좋아졌다고 하던데. 정말 어떻게 하신 거지?’

 

 사령관이 요안나 아일랜드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기본적인 인프라 구성부터 다양한 제조설비를 지원해주기는 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그의 소관을 벗어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언제나 보급받는 물자들의 수량만 확인할 뿐, 그 물건들의 질이 어떤지까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 병사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제복의 질이나, 기호품의 질이나. 모두 훌륭하다는 칭찬 일색뿐.

 사령관은 그것이 마치 제 형제를 칭찬하는 소리로 들려 저 멀리 있는 라붕이 대장에게 엄지를 척 올릴 뿐이었다.

 

‘정말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듬직한 등처럼, 라붕씨는 대단한 인재였어. 아, 그냥 부 지휘관 자리를 밀어붙일 걸 그랬나.’

 

 지금이야 이렇게 혼자 술을 마신다지만, 만약 나중에 영화에서 나왔던 것처럼 키르케가 간소하게 설치해둔 오르카 1호의 바에서 둘이서 술잔을 들어 올리며 격 없이 대화를 나눈다면..

 

“아! 진짜! 그냥 요안나 아일랜드로 직행을..”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사령관이 제 중요 부위만 가린 수건을 펄럭이며 좌변기 위에서 박차 일어나는 순간,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알림음이 그의 단말기에서 들려왔다.

 

삑!

 

“왔다아아!”

 

59)

 

 땅거미가 내려앉아도 한참은 내려앉은 늦저녁의 시간대, 세상을 밝게 비추던 햇님이 지평선 너머로 내려가고 어두운 밤하늘에는 오로지 하늘 아래 짙게 깔린 어두운 장막을 거두어내려는 달빛과 검은 하늘 위에 속속히 박혀 있는 별빛만이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이 내리쬐는 어느 한적한 섬의 한가운데, 창밖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빛으로 어둠을 등진 남성이 제 손에 들린 단말기의 환한 스크린 위를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딱-딱! 따-닥!

 

 천장에 달린 전등조차 켜지 않은 이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남성의 손에 들린 단말기의 입력음만이 조용한 이 방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딱-! 타닥!

 

“...어디 보자. 우선 말문은 텄고..이제 군 관련 이야기로 살짝이 넘어가면서..”

 

탁! 타타닥!

 

“음..보급 물자에 대해서 고맙다라..이 소리는 너무 자주 해 주시는군. 어디..여기서는 한번 발을 빼고..원래부터..이랬어야..하는 겁니다..”

 

탁-! 타각!

 

“사..령관님. 행여 제가..몇몇 인원들을..음..임관. 그래. 제 권한으로 임관을..시켜도..”

 

따각-! 타닥!

 

“옳지. 허가 오케이.”

 

 남성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것처럼 오른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단말기 너머에 있는 대화 상대와의 대화에 열을 올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달빛 아래서 쭉 바라보고 있던 몇몇 인영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음. 생활에 지장이 없으시냐고 물으시는데. 아르망. 여기서는 어떻게 써 보내는 게 낫겠냐?”

 

“..폐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선 저희의 작전을 감추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흠. 뭐, 특수작전이니까. 음. 그래도 사령관님이 물으시는데 너무 평범한 건 별로지. 아, 그래.”

 

 어두운 장막 속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에 가죽 의자의 등받이에 온몸을 실은 남성, 라붕이 작전관은 좋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입꼬리를 한층 더 올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백사장을..휴향지로 만드는 작업에..착수할 듯싶습니다. 음. 거짓말은 아니지.”

 

“후훗. 폐하. 좋은 답변인 듯하옵니다.”

 

“그렇지?”

 

 제 아이디어에 호응을 보내는 어둠 속의 인영에게 라붕이 작전관은 제 눈썹 한쪽을 위로 올리며 단말기의 대화상대에게 좋은 이야기들을 써 내려보내었다.

 

타-닥! 탁! 따-각!

 

“으음. 리리스와 소완, 그리고 리제 보고 잘 지내냐고 물으시는데. 본인들의 이야기가 제일 좋겠지. 리리스, 리제, 소완. 너희 요새 어떻냐?”

 

 라붕이 작전관은 상대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제 업무실의 소파 위에 앉아 달빛을 거울삼아 홍차를 기울이는 세 여성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세 여성은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리리스는 지금보다 행복한 시간이 없답니다?”

 

“소첩 역시 마찬가지이옵니다. 제 생애, 이곳에 온 것에 단 한 점의 후회도 없사옵니다.”

 

“후후훗. 주인님,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주인님. 이 세상에 주인님과 저, 단둘만 있다면 더 좋을 거 같아요.”

 

“..리제. 그건 너무 나갔다. 하하하!”

 

 제각기 다른 여성들의 대답에 라붕이 작전관은 만족스럽다는 듯 눈웃음을 크게 지으며 다시 단말기 위를 두들겼다.

 

탁! 타닥!

 

“그녀들은..이곳에서..잘 적응하고..있습니다. 사령관..님!”

 

“후훗. 작전관도 이제는 우리 주군과의 대화에도 거침이 없어졌네만.”

 

“물론. 요안나. 당연한 소릴. 사령관님이신데, 내가 압존법을 유지하면..뭐. 문제가 없지.”

 

“우리 주군께서는 딱히 압존법을 쓰지 않아도 괜찮아하실 것 같네만. 무얼. 천천히 돌아가는 것 역시 좋은 일이네.”

 

 책장의 옆면에 등을 기댄 채 달빛 아래서 체인메일의 은빛은 반짝이는 기사의 충고에 라붕이 작전관은 싱긋이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

 

타-닥! 탁!

 

“시간도..늦었으니. 저는 이만..내일을 위해! 들어가 보도록..하겠습니다!”

 

“사령관님께서 많이 아쉬워하실 것 같습니다. 폐하.”

 

“어쩌겠어. 우리도 내일을 위해서는 일찍 자야 한다고.”

 

 라붕이 작전관은 자신이 얻을 것을 다 얻었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단말기의 전원을 내린 채 제 업무실에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임관 허가까지 받았고. 이제부터 우리만의 단출한 임관식을 진행해볼까.”

 

 라붕이 작전관의 말에 달빛을 등지고 서 있던 이들의 만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단 두 사람,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업무 테이블 앞에서 열중 쉬엇을 유지하고 있던 두 여성만큼은 딱딱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아내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사령관과 메시지를 주고받던 아까와 달리 한껏 진중한 얼굴과 몸짓으로 제 책상 위에 놓인 위스키 병의 머리 부분을 힘껏 쥐어 잡았다.

 

“...나도 자료로만 본 거지만 말이다. 고대 중국의 주(周)라는 나라에서는..”

 

 적막과 달빛만이 내려앉은 그의 업무실의 안으로 그의 무뚝뚝한 음성이 벽면을 두들기며 이 자리에 있는 여성들 모두의 귀에 들어왔다.

 

“..이 술로 말이다. 지위를 구분했단다.”

 

 라붕이 작전관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제 앞에 놓인 차가운 얼음이 한가득 담긴 통에서 집게 찾아 얼음 한 조각을 집어 들곤 제 앞에 놓인 글라스 잔 위로 툭 떨어뜨렸다.

 

딸-그락!

 

“...”

 

 그리고 그의 앞에 선 여성들은 그의 행동을 말없이 빤히 바라만 볼 뿐, 그 어떤 추가적인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도 라붕이 작전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 이야기를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작위의 작(爵)자가 술잔이라는 뜻이란다. 황제가 쓰는 잔이 따로 있고, 공작이 쓰는 잔이 따로 있고. 백작이 쓰는 잔이 따로 있단다.”

 

딸-그락!

 

 자신의 목소리와 얼음이 글라스 잔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방안에서 라붕이 작전관은 제 자취방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보았던 다큐 프로그램의 내용을 천천히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래서 제 작위에 따라 황제로부터 하사받는 술잔이 따로 있었다더군.”

 

 주(周)나라는 이후 고대 중국의 사회기반이 되는 종법 제도라는 것을 처음 시행한 고대 중국의 국가이다. 종법제란 황제를 중심으로 귀족들이 각자의 작위을 그에게서 하사받아 각자의 세력을 꾸리는 것, 그리고 그 작위의 작(爵)이 곧 그들이 평생토록 사용할 술잔을 의미했다.

 

딸-그락!

 

 그의 목소리에 그 자리의 모두는 그저 귀만 기울였다. 마치 그의 목소리에 잡음이 끼이는 것도 싫다는 듯 그녀들은 모두 얼음 조각상처럼 숨소리조차 깊이 내쉬지 않았다. 

 그런 관중들의 침묵에도 라붕이 작전관은 묵묵히 제 앞에 놓인 글라스 잔들 안으로 얼음조각을 넣는 것에 열중하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공작이라는 단어가 중세 유럽에서나 쓰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어. 후후후.”

 

딸-그락!

 

“...작위 하사는 황제만이 하는 행위지. 하지만 나는 황제가 아니다. 사령관님이 곧 황제시지.”

 

“...”

 

딸-그락!

 

“하지만 난 사령관님으로부터 이곳을 수호할 임무를 맡고 왔다. 그리고 방금, 황제께서 내 종묘를 만들어도 된다고 하셨다.”

 

딸-그락!

 

 마지막 글라스 잔까지 모두 커다란 얼음을 채워 넣은 라붕이 작전관은 그 반들반들한 얼음의 겉면 위로 사령관에게서 선물 받은 위스키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쪼-르르륵!

 

“...나는 부하가 더 필요하다. 이 9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유능한 부하들이 더 필요하다. 아니. 당장 내일이 아닌, 앞으로도 날 도와줄 녀석들이 더 필요해.”

 

쪼-르륵!

 

“요안나. 너는 안 마시겠지?”

 

 글라스 잔에 카라멜 빛깔의 음료를 채우던 라붕이 작전관은 시선을 왼편으로 돌려 책상을 등지고 서 있는 여기사에게 눈길을 보내었다. 그러자 그 여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손바닥으로 자신의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음. 내 두 명의 주군을 모실 수는 없는 법일세. 미안하네. 작전관.”

 

“아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괜찮아. 조금..아니. 많이 아쉽긴 하지만.”

 

“..후후후. 내 잔은 다음에 우리 주군과 나누어주시게나.”

 

“..그건 좀 오래 걸릴 일 같네.”

 

쪼-르륵!

 

 그녀의 대답에 라붕이 작전관은 쭉 늘어놓았던 잔 중 하나를 제 앞으로 가져다 둔 채 그 잔에 다른 잔들과 마찬가지로 카라멜 색의 음료를 가득히 채워 넣었다.

 그러자 알싸한 증류주의 향이 그의 콧구멍 안을 콕콕 찔러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붕이 작전관은 그 강렬한 향에 볼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사령관님의 말대로 100년이나 묵은 술이니, 향도 기가 막히네. 아주 좋은 술이야.”

 

드-르륵!

 

 위스키로 가득 찬 얼음 컵들을 라붕이 작전관은 이제는 제 앞에 서 있는 두 여성의 배꼽 앞으로 밀어 넣곤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성의 시선을 느끼며 여전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작(爵)은 준비되었다. 와서 내 밑으로 들어올 녀석들은 하나씩 가져가.”

 

쿠-당! 쾅!

 

 그의 허가가 떨어지는 순간, 업무실의 소파에 앉아있던 세 여성이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찬 걸음걸이로 그의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리곤 그의 업무 테이블 앞에 서 있는 두 여성을 피해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진 글라스 잔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착한 리리스는 언제나 주인님의 충~실한 경호원이랍니다! 후훗!”

 

 은은한 달빛 아래서 충성을 맹세하는 호박색의 눈동자. 그녀의 환한 미소에 라붕이 작전관은 시선을 빼앗겼다.

 

“소첩에겐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 단 한 분뿐이었습니다.”

 

 녹빛의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은백발의 요리사, 처음 보았을 때보다 한층 풀어진 그녀의 눈매에 라붕이 작전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주인님. 이 잔으로 저희는 이제 영원히 함께인 거지요? 네? 그렇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마실게요!”

 

 마치 혼례를 하는 신부와 같이 황홀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는 정원사의 말에 라붕이 작전관은 처음과 달리 식은땀 대신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다. 못난 주인 밑에서 함께 고생하자.”

 

 세 여성의 당찬 포부에 라붕이 작전관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쉽게 그에게는 이 무거운 그녀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힘든 탓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쓴웃음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세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각자의 손에 들린 글라스 잔의 유리 겉면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꿀꺽! 꿀꺽!

 

“...아르망. 너는?”

 

 제 눈앞에서 글라스 잔의 내용물을 비우는 세 여성을 보던 라붕이 작전관은 행여나 하는 얼굴로 이 섬에 처음 당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보필해온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또-각!

 

“폐하. 제가 설마 폐하의 잔을 피하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물음에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금발의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달빛 아래로 제 어깨춤에 두른 붉은색의 수단을 빛내었다. 하지만 붉게 빛나는 것은 비단 수단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백옥같은 볼 역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만..그 폐하께서 저에게 직접 주셨으면 해서..”

 

“...하핫! 오냐!”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살짝이 눈망울을 글썽이는 부관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선뜻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언제봐도 자신이 하던 게임 속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소녀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이 해맑은 미소를 지을 때, 그의 앞으로 이미 내용물이 한껏 비어버린 세 개의 글라스 잔들이 쑥 들어왔다.

 

“...주인님. 저도요.”

 

“소첩 역시..”

 

“..햇츙..”

 

“..아니. 누가 관직을 두 번..아니다. 그래. 오냐. 기분이다! 마셔라. 마셔!”

 

 세 여성의 수줍은 질투에 라붕이 작전관은 하하하! 하고 큰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들의 손에 들린 글라스 잔을 회수하곤 다시 그 안에 위스키를 한가득 부어 넣었다.

 

쪼-르르륵!

 

“...하하하! 술 좋지. 그래.”

 

 이 얼마 만에 가지는 술자리인가, 라붕이 작전관은 이 세계로 넘어와, 아니. 이전 세계를 포함해 거의 5주 만에 가지는 술자리에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거침없이 글라스 잔에 술을 부어 넣었다.

 

“옛다! 나보다 빨리 천당 가는 놈들은 없길 바란다! 하하하!”

 

“-후훗. 그렇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리리스도 너무 행복한 것 있죠? 주인님.”

 

“앞으로 주인의 안주는 제가 직접 올리겠나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술은 혼자 드시지 마시옵소서.”

 

“아아. 주인님. 주인님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미로워요.”

 

“에잉! 술맛 떨어진다! 얼른 들어!”

 

딸-그락!

 

 짐짓 풀어진 목소리로 제 글썽거리는 눈망울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휙 반대편으로 돌린 라붕이 작전관은 제 앞에 놓인 글라스 잔 세 개를 그녀들에게 내밀었다.

 

‘...시발. 내가 왜 이런데. 무슨 감정선이 넘치는 중딩도 아니고..킁!’

 

 이제는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앞으로도 쭉.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 홀로 자취방에서 맥주를 홀짝대던 때의 외로움이 차츰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옅어지는 것을 느끼던 라붕이 작전관은 강한 위스키 향에 뜨거워진 콧방울을 킁-하는 소리를 내며 달래었다.

 

“...후후”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여성들의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걸렸다. 그야 자신들을 모르겠지만, 그녀들에게는 라붕이 작전관이 홀로 좁은 방 안에서 맥주캔을 들이키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때처럼 그저 그것을 바라만 볼 것이 아닌, 이제는 그의 옆자리를 채워주리라.

 

“...킁! 뭐. 그래. 고맙다.”

 

“후훗. 작전관도 감정이 풍부하군. 화만 잘 내는 줄 알았네만.”

 

“..사족은 됐어. 요안나.”

 

 여기사의 비아냥을 뒤로 한 채, 라붕이 작전관은 따가운 눈꼬리 위를 비비적거리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아직 남은 잔이 2잔, 라붕이 작전관은 주인 없는 글라스 잔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아직도 제 앞에서 부동자세를 유지하는 두 여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

 

“...”

 

“..이건 강요가 아니다.”

 

드-륵!

 

 라붕이 작전관은 요안나가 거부했던 글라스 잔을 그녀들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로써 그녀들의 앞에 각자의 위스키가 한가득 담긴 둥그런 유리잔이 준비되었다.

 

“나도 원하지도 않는 자리를 주겠다는 건, 별로다.”

 

 당장에 자신도 원해서 대장직을 받고 여기 온 것도 아니다. 분대장까지는 강요에 가까운 협박이었지만 행보관도 전문하사를 강요하진 않았다. 온갖 꼼수를 부려서 그렇지.

 

“..어쩔 테냐.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나가도 좋다. 방문은 안 잠갔다?”

 

“...정말 영악한 대장이야. 히힛. 여기까지 불러놓고 그냥 나가라고?”

 

 능청맞게 손사래를 치는 라붕이 작전관의 말에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입을 열자 그녀와 대비되는 커다란 체구의 성인 역시 입을 열었다.

 

“저희는 역시 군대 체질인가 봐요. 언니.”

 

“하필 걸려도 이상한 대장님한테 걸렸어.”

 

“...뭐야. 불굴의 마리 4호 소장님이 그립다, 그거냐?”

 

“헷! 부임 첫날에 자기 뇌파도 생각 안 하고 돌아다니는 대장님 밑이라니.”

 

“어어. 또 또. 남의 약점 가지고.”

 

 이프리트의 장난기 어린 말에 라붕이 작전관은 씩-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지도 내일이면 2주. 그는 과거 제 모습을 보는 듯한 이프리트의 모습에 그녀가 내릴 결정을 직감했다.

 

딸-그락!

 

“...전역하고 또 입대라니. 너무하네. 정말.”

 

“저는 별로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언니.”

 

“..캬캬캬캬! 나만 고통받기에는 너무 서럽거든! 상관 모욕죄의 처벌이다! 마셔라!”

 

“이잉. 이런 이상한 대장을 보내고. 사령관님도 너무 해.”

 

“...그래도 병사에서 장교로 진급했네요. 언니. 헤헤헷!”

 

꿀꺽-꿀꺽

 

“-켁! 이런 걸 왜 마셔!”

 

“...저..저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이 방 안의 인원 중 이미 주인이 있는 바이오로이드들 제외한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것을 지켜본 라붕이 작전관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위스키 병의 마개 위에 입을 올리곤 목을 뒤로 젖혔다.

 

꿀-꺽! 꿀-꺽! 꿀-꺽!

 

“..이거 원래 얼음이랑 같이..”

 

“막걸리 드시는 거 봤잖아요. 언니.”

 

 거침없이 커다란 유리병의 내용물을 위장으로 내리꽂는 그의 모습에 여성들은 저마다 웃음꽃을 피웠다. 그의 아담이 위아래로 움직이기를 몇 차례, 라붕이 작전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위스키 병을 내려놓으며 천장을 향해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으! 술맛 죽이네!”

 

60)

 

 언제나처럼 햇님이 하늘 위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 이른 아침 식사를 위해 요안나 아일랜드의 취사장으로 온 인원들은 저마다의 식판 위에 아침 메뉴를 한가득 담아 올린 채 자리를 잡고 떠들고 있었다.

 

“오늘 밥, 유독 맛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게! 아침 댓바람부터 고기반찬만 가득하네. 헤헤!”

 

“이것 봐! 부식으로 초쿄파이야! 헤헷! 알비스 배불러!”

 

“흐응. 너무 고기에 치우친 식단도 별론데요. 페더, 저도 음료수 하나만 주겠어요?”

 

 평소보다 더 화려한 아침 메뉴, 부식부터 음료수까지 다채롭게 준비된 배식 창구의 광경에 파견 인원들은 걱정 하나 없는 미소와 함께 저마다의 기호식품을 집어 들곤 매일같이 반복되는 천국을 만끽했다.

 

“아아-이제 곧 복귀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쉬운데.”

 

“다음 파견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아쉬운 감정을 얼굴 위로 한껏 드러내는 워울프와 달리 탈론 페더는 숟가락 머리를 입에 문 채 머리를 굴려 다음 파견까지의 일정들을 계산해보았다. 아무래도 한 번에 200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올 터이니, 한참은 걸리지 않을 터.

 

“..전 빨리 본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네요. 아직도 그 년들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면..으으!”

 

 앨리스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라붕이 작전관과 백사장에서 만난 그날 이후, 그 미친년들을 피해 다닌다고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계속해서 지루한 초소에 숨어있었던 그녀는 요새 주방장이 취사장 주방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오랜만에 산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전방으로 가기 싫다!”

 

“..얼른 철충들이나 쓸어버리고 싶네요. 후우.”

 

“으응. 요 근래 대장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니 사진도 얼마 못 찍었어요. 어디 계신 거지?”

 

“알비스는 초코바만 있으면 좋아!”

 

 저마다의 숟가락과 포크를 놀리던 그녀들 사이로, 워울프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포크를 제 옆에 앉은 인원들을 향해 겨누며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너희들, 혹시 오늘 아침에 생활관 밖에 무슨 택배? 같은 거 받았냐?”

 

“타인에게 포크를 겨누는 행위는 실례에요!”

 

“...뭐, 그런 건 제쳐두고. 예. 저희 쪽 애들도 다 하나씩 받았어요.”

 

“우웅. 안에 초코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이상한 녹색 군복이 있었어.”

 

“..그렇지? 생긴 것도 모양새 빠지는 게..어? 이프리트! 야!”

 

 아침에 갑작스레 모든 생활관으로 배달된 괴상한 군복을 떠올리던 워울프는 취사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프리트를 향해 팔을 크게 휘둘렀다.

 

“야! 너 그거 왜 입고 있냐!?”

 

“...안녕.”

 

 취사장으로 들어선 이프리트는 평소 입고 다니던 스틸라인 제식 군복과 귀여운 토끼 귀 장식이 달린 후드 대신 그녀들이 아침에 받은 괴상한 개구리 같은 패턴의 군복을 입은 채 제 후임들과 함께 취사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어머. 꽤 귀엽네요? 이프리트.”

 

“헤헷. 사진 한 장 찍어도 되요?”

 

“...그러든가 말든가.”

 

 후줄근한 개구리 복장을 한 채로 들어선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후임들인 레프리콘과 브라우니 역시 제 선임과 같이 아침에 배달받은 이상한 군복을 걸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취사장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들의 등장에 취사장에 있던 파견 인원들은 깔깔깔-웃으며 그녀들의 초라한 모양새에 밥알을 튀겨 대었다.

 

‘...그래. 너희들은 웃어라. 하아..’

 

 자신들을 비웃는 그녀들의 모습에 이프리트는 지친 속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제 식판을 집어 들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메뉴들을 적당량만 부은 채 힘없이 비어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뱀. 이거..정말 입고 가야..”

 

“시꺼. 내 말 잘 들어. 오늘..뭔지 몰라도 일이 터진다. 그러니까..”

 

삐-잉! 삐-잉!

 

 후임의 볼멘소리에 이프리트가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울 때, 취사장의 벽 구석에 걸려 있던 스피커 너머로 강렬한 비프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적들이라도 온 건가요?”

 

삐-잉! 삐-잉!

 

 행여 적들의 기습인가 싶어 숟가락을 놀리던 파견 인원들은 눈썹을 부라리며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전투 모듈들을 활성화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의 기대와 달리, 비프음의 뒤로 낮게 깔린 남성의 목소리가 그녀들의 귀에 들어왔다.

 

-아아. 현 시간부로 모든 파견 인원들은 각자의 업무를 중단한다. 그리고 9시 정각까지 당일 아침에 개별 배분된 전투복으로 환복 후, 본관이 임관식을 치루었던 연설장으로 집합하도록. 이상.

 

“...? 대장님 목소리잖아. 이거?”

 

“어머.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갑자기 왠 집합이죠?”

 

“음. 아침에 받은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소리도 있군요.”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치를 챈 여성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담담한 남성의 명령에 누가 무어라할 것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의 업무를 제쳐두고 모여서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것인가, 그것보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씨발.”

 

“이프리트. 너 라붕이 대장님이 옷 갈아입으라는 소릴 할 줄 알고 있었냐?”

 

“...”

 

 워울프의 짤막한 물음에 이프리트는 눈썹을 찌푸린 채 허겁지겁 제 식판 위를 비워 내려 들었다. 선임의 숟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본 레프리콘과 브라우니 역시 재빨리 자신들의 앞에 놓인 식판 위로 숟가락을 얹고는 아침밥을 깔끔하게 비워내었다.

 

달-그락! 달그락!

 

“어어? 야! 먹다 체하겠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보이네요. 후훗.”

 

“...왜들 그러십니까? 아직 9시까지는 시간이..”

 

“-잘 먹었습니다아아!”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슴다!”

 

 주변의 만류하는 목소리에도 식판 위에서 전쟁을 벌이던 세 여성은 재빨리 각자의 깔끔한 식판을 들고는 재빨리 식기 반납대에 식판을 내던지고는 취사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치 폭풍을 피해 달아나는 듯한 그녀들의 다급한 뜀박질에 취사장에 있던 파견 인원들은 눈만 껌벅일 뿐, 도무지 그녀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로 취사장의 출입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래?”

 

 워울프는 평소 느긋하던 양반이 왜 저리 바쁜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으나, 배식창구 너머로 그 상황을 주시하던 아우로라들과 포티아들은 이프리트들이 뛰어나간 출입구를 바라보다 서로 눈웃음을 지었다.

 

“...헤헤. 역시 저분들은 눈치가 빠르네요.”

 

“그러게? 우리 대장님이 어떤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해뒀는지 아는 눈치네?”

 

“저희도 이제 점심..아. 저녁이려나요? 하여튼 다음 배식을 준비하죠.”

 

“히힛. 천국 다음에는 지옥이라, 우리 대장님. 너무 음흉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누던 아우로라들과 포티아들은 그녀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취사실로 걸어 들어갔다.

 

61)

 

 한때, 이 세계를 플레이하던 유저들 사이에서 후회물이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후회물이 뭐냐고? 간단하다. 주인공의 무능함을 참지 못하던 바이오로이드들이 새로운 인간을 발견한 후, 주인공을 배신하고 새로운 인간의 편으로 돌아서는 것을 주 서사로 삼는 장르다.

 

뚜-벅 뚜-벅

 

“아르망. 오르카 라이브 채널로 생방송을 보낼 준비는?”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익스프레스 양들이 전원 카메라 장비를 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전등 하나 켜지 않은 어두운 통로 안, 나와 내 부하들은 그 터널의 끝에서 미약하게나마 들어오는 햇빛을 쫓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소완. 점심 식단의 준비는 맡겨두고 왔냐?”

 

“후훗. 물론이옵니다. 주인이시여. 아우로라양들이 매우 기뻐하는 눈치였사옵니다.”

 

“..천국의 밥을 먹었으면, 어디 맛깔 나는 흙맛도 좀 봐야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미성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흐릿한 터널의 외관과 터널의 끝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빛뿐, 그런 와중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내 오른팔을 옆으로 내밀었다.

 

“오늘 분 오리진 더스트는..”

 

“..무적의 용 중장님이 보내주신 최고급으로 준비했습니다. 폐하.”

 

“오우! 좋지!”

 

 따끔한 감각과 함께 이물질이 혈관을 타고 내 몸 곳곳에 스며들어오는 감각에 나는 목을 둥글게 돌리며 내 몸에 들어온 이 액체를 재빨리 몸 이곳저곳으로 퍼뜨렸다. 처음에는 좀 거부감이 들었지만, 이제는 별 거부반응도 일어나지 않는다.

 

“리리스. 개별 구류들은 전부 준비시켜뒀지?”

 

“네! 주인님. 물론이죠. 실키양들이 꼭두새벽부터 뛰어다녔답니다?”

 

“하하하! 그 녀석들도 참, 어지간히 밤잠을 설쳤나 보네?”

 

“후훗. 안드바리양도 오늘 하루 내내 단말기만 응시할걸요?”

 

“거거. 이거 아이들한테 보여주기에는 정서에 안 좋은데.”

 

“후훗.”

 

 최고급 오리진 더스트의 투여로 오른손 위로 상상도 하지 못하던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왼손에 들린 위스키 병의 머리가 깨지지 않게 나는 조심스레 왼팔의 힘만 풀며 어깨를 위아래로 돌려대었다.

 

“리제. 알고 있겠지? 직접적인 폭력은 안 된다?”

 

“히히히! 네! 주인님. 주인님의 명령이니까, 명심하고 또 명심할게요!”

 

“내가 여기서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게 네 혓바닥이야. 어디 원 없이 혀를 놀려봐라.”

 

“히히힛! 물론이에요. 주인님.”

 

뚜-둑! 뚝!

 

 어깨 관절과 목관절에서 들려오는 뚜둑이는 소리에 나는 위스키 병을 들어 언제나처럼 알코올을 내 목구멍에 들이밀었다.

 

꿀꺽! 꿀-꺽!

 

“-크으! 좋구만 좋아!”

 

“대장. 그렇게 술을 마시면 나중에 문제 생기지 않겠어?”

 

“어어. 내 간 무시하지 마라. 원체 좋은 놈이 오리진 더스트 덕분에 너희쯤은 가뿐하게 이길 수 있거든?”

 

“..대장님의 간은 저희가 그냥도 못 이길 거 같은데..”

 

“하하하! 빠른 포기 좋네! 노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두 여성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나와 같이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여성들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대었다. 호박색, 녹색, 연보라색, 푸른색, 거기에 연푸른색들.

 

“모두 명심해라. 이 사람이라는 게 말이다.”

 

 나를 향해 쇄도해오는 그녀들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혓바닥을 입술 사이로 내밀며 윗니와 아랫니로 내 시뻘건 혓바닥을 고정해 보였다. 내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그녀들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육체적으로는 죽이기 어려워도.”

 

 총상을 맞아봐서 이제는 안다. 총 한 발 맞는다고 막 그렇게 죽지는 않는다. 다만 총상을 입고 난 후에 찾아오는 무력감과 좌절감이 무서운 것이지. 아직도 꿈속에 등장하는 철충의 기관포를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이. 정신적으로 죽이는 데에 요 혓바닥 하나면 끝장난다.”

 

“하하하!”

 

“음성 모듈 잘 준비하고, 이제 개막식이니까.”

 

“물론이죠!”

 

 그녀들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들이 점차 흉악한 미소로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 나 역시 보조개를 한껏 그려내었다. 평소와 같은 제복 차림이 아닌 시뻘건 티셔츠와 검은 티셔츠들을 입은 채 구두 대신 군화를 신은 그녀들의 모습을 눈으로 한 번씩 훑은 후, 나는 다시 앞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뚜벅-뚜벅

 

“-나는 말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이 세상에 처음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나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가 수없이 봐 왔던 후회물의 이야기들을 떠올렸었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나 혼자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쳤다. 애당초, 이 세계는 후회물이 허락되지 않는 세계였다.

 

뚜-벅 뚜-벅

 

“어차피 내 소관의 일도 아닌데, 굳이? 귀찮게? 이런 생각으로 움직였지만.”

 

 후회물의 정석 중에 정석, 무능한 사령관과 유능한 두 번째 인간. 이것부터가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전제였다. 우리 사령관님 봐라, 얼마나 멋지냐. 수천 번의 전투를 진행하면서도 0패라신다. 이 양반, 우리 세계로 왔으면 정치 폭풍에 휘말렸을 양반이야.

 

뚜-벅

 

“..우리 애들을 얕보면, 그건 못 참지.”

 

 후회물에서 그리도 쉽게 주인공을 배신하던 블랙 리버의 장교들은 그런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회의실에서 날 죽일 듯이 노려보았었다. 맨날 주인공을 배신하는 넘버 원 장교들, 불굴의 마리와 철혈의 레오나의 그 살벌한 눈빛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모공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어후.

 

뚜-벅! 뚜-벅!

 

“그렇게 잘난 전방 소속의 대원들이라면, 오늘부터 시작될 훈련쯤은 가볍게 끝내지 않겠어?”

 

“..그러게. 헤헷!”

 

 생각해보면 난 금태양이 아니다. 금태양처럼 바이오로이드들이 돌아볼 만한 능력도, 업적도 없다. 평범한 병사로서 전역한 내게 부 지휘관은 무슨, 그냥 우리 애들이랑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병영 생활을 즐기는 게 낙이다. 애당초 내가 무슨 소설 속 금태양처럼 새디스트도 아닌데 말이야.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걸 포기해야겠지. 이제는 몇 걸음 남지 않은 햇빛의 축복 앞에서 나는 벽면에 기대어 서 있는 백발의 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뚜-벅!

 

“여. 오드리!”

 

“오! 대장. 오늘도 빼숀이 너무하네요. 정말.”

 

“하하하! 아니, 이게 정복이라니까?”

 

“후훗. 그래도 자-! 여기 대장의 코트 정도는 제가 준비해뒀답니다. 이건 꼭! 입고 강단에 서주세요!”

 

 오드리의 섬섬옥수에 걸린 두껍고 커다란 검은 장교 코트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잉. 뭐야. 저게. 어깨에 걸쳤다가는 어깨에 결림이 생기겠다.

 

“오드리. 이거 너무 크지 않아?”

 

“오우! 노! 이건 앞을 잠가 입는 게 아니에요! 절대 단추를 잠그지 마요!”

 

“...하아. 그래. 알겠다.”

 

 그녀의 강한 의지표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어깨를 내밀었다. 그러자 분명 오리진 더스트의 효력으로 가볍기만 하던 내 어깨의 위가 한순간 무게추를 얹은 것처럼 무거워져 나는 목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역시 벗고..”

 

“폐하. 잘 어울리십니다. 후훗.”

 

“정말 주인님의 위엄에 걸맞은 코트에요!”

 

“...”

 

 마치 내 신세에 즐겁다는 듯 웃어대는 아르망과 콧김을 식식-내뿜는 블랙 리리스의 모습에 나는 펄럭대는 코트 자락 아래서 양팔을 내뻗었다. 왼손에는 사령관이 선물해준 위스키 병, 그리고 오른손에는 닥터가 건네준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지휘봉’.

 음, 준비물은 다 챙겼지. 다시 한번 복장과 준비물들을 점검한 나는 내 명령을 기다리는 여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아. 써라.”

 

“-예!”

 

달-그락!

 

 내 짤막한 부름에 여성들은 일제히 벨트에 걸어두었던 짙은 선글라스와 검은색의 모자를 꺼내어 썼다. 와 씨발. 내가 PTSD 먼저 오게 생겼네. 이거.

 그런 내 속내도 모르는지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모자를 쓴 블랙 리리스가 내 시야 앞으로 제 얼굴을 휙-들이 밀었다.

 

“어울리나요? 주인님.”

 

“...어어. 어울리니까 가까이 오지마라..”

 

“그러는 대장도 우리처럼 입고 나갈 거잖아. 히힛!”

 

“...그래. 맞지. 키키키!”

 

 검은 선글라스 아래로 사악한 미소를 짓는 이프리트의 말에 나 역시 한껏 가슴 속에 파묻어 두었던 분노를 풀어 재끼곤 한껏 뺨을 속눈썹 아래로 밀어 올렸다.

 

딸-그락!

 

“-자자. 이제부터 쇼를 시작하자고.”

 

 검은 선글라스 탓에 시야가 어두워졌음에도 내 눈에는 그녀들의 얼굴이 잘만 보였다. 그녀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차 옅어지며 차가운 얼음장처럼 돌변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터널의 밖에 펼쳐진 햇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작전관. 잘 다녀오시게나!”

 

“오! 다녀온다. 요안나!”

 

짝-!

 

 벽면에 기대어 서 있던 여기사와 하이파이브를 나눈 직후, 나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연설장의 흙바닥 위로 군화를 들어 올렸다. 이 2주라는 시간, 별의별 방법으로 내 머리끝까지 스트레스를 가져다준 저 군기 빠진 썅것들에게 드디어 심판을 내릴 수 있다.

 

쿵!

 

“-이 썅것들, 사람을 빡돌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 상스러운 몸 위에 똑똑히 새겨주마!”

 

 난 금태양이 아니야. 그 빡대가리처럼 감정에 함부로 휘둘리는 병신이 아니라고. 이 2주 동안 내 온갖 잔 대가리를 굴려 가며 아주 철저하게, 치밀하게 준비한 무대 위로 나는 거친 걸음을 내디뎠다.

 

‘오늘만큼은 내가 바로 정의다!’

 

 이유 없는 분노만큼, 무식한 것도 없지. 내 분노에는 언제나 정의와 당위성이 함께 한다.

 

“가자! 애들아!”

 

“예-!”

 

쿠-웅!

 

62)

 

웅성-웅성

 

 뜨거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요안나 아일랜드의 높은 산 중턱, 그곳에는 2주 전, 라붕이 작전관의 임관식을 진행했던 거대한 연설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평소에는 잘 쓰이지 않던 이곳이었지만, 오늘은 정오 전부터 200이 넘는 여성들이 저마다 녹색 패턴의 후줄근한 군복을 입은 채 연설장의 한가운데서 떠들고 있었다. 

 

“우리보고 왜 여기 모이라 하신 거야? 대체?”

 

“이 옷 좀 봐. 멋스러움이라고는 전혀 없잖아.”

 

“알비스는 알비스 제복이 더 좋은데. 히잉.”

 

“대장님은 왜 이렇게 안 오신데? 우리보고 9시까지..”

 

 아침 댓바람부터 자신들을 불러 모은 새로운 인간, 그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에는 그의 직위가 높았던 탓에 이 자리에 모인 여성들은 그저 간접적으로나마 그의 명령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어? 저거 익스프레스들 아니야?”

 

 어느 한 여성이 검지를 들어 올려 하늘을 가리키자 다른 여성들 역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검지가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응? 그러게. 쟤들이 왜 여기에..”

 

 수십에 달하는 여성들의 시선에도 어깨 위에 묵직한 대형 카메라를 들추어 맨 익스프레스들은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기보단 그녀들의 현재 모습을 하늘 위에서 내려찍는 것에 열중했다. 그런 그녀들의 행동에 아래에 있던 여성들의 눈썹이 휘어졌다.

 

“대체 뭘 찍고 있는 거야?”

 

“역시 후방 애들, 할 게 없으니 이런 거라도..”

 

쿵!

 

“...응?”

 

 거친 군홧발 소리가 연설장 한쪽에 준비된 교단 뒤에서 들려오자 여성들의 시선이 전부 교단 쪽으로 돌아섰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교단 위를 바라보던 그녀들의 시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군복을 입은 여성들이 줄지어 햇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뚜-벅! 뚜-벅!

 

“어? 저..저 녀석들은 대체..”

 

“저! 저! 저 여자들이 왜 갑자기?”

 

“...”

 

 햇빛 아래서 은발을 휘날려 대는 두 여성과 갈색빛을 머금은 기다란 머릿결 휘날리는 여성들은 제아무리 검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한들 파견 인원들에게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특히나 그녀들의 칼에 죽을 뻔했던 앨리스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갔다.

 

뚜벅-! 뚜-벅!

 

“...”

 

“쟤..쟤들은 부품 생산 쪽의 이프리트랑 노움..아냐?”

 

“쟤들이 왜 저런 옷을..”

 

 작달막한 체구와 성인 여성보다 한참은 더 큰 체구를 자랑하는 두 사람의 등장에 다른 인원들의 시선이 그녀들의 딱딱한 군홧발을 따라 이동했다.

 대체 저들이 무슨 연유로 저런 옷과 선글라스를 대동한 채 이곳에 왔단 말인가. 거기다 얼굴들은 왜들 저리 딱딱하게 굳어있는지. 시꺼먼 선글라스 탓에 어떤 눈인지도 파악하기 어려운 탓에 무언가의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몇몇 인원들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씨..씨발! 내 예상대로야! 이..이거 뭔가..’

 

 자신과 똑같은 이프리트 개체, 하지만 풍겨오는 포스가 남다른 그 모습에 진작에 연설장으로 왔던 이프리트는 식은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양 주먹만 꽉 쥔 채 고개를 돌려 교단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간의 뇌파, 이프리트는 제발 그만큼은 아니길 바라며 초점이 흔들리는 연푸른빛 눈동자로 교단만을 응시했다.

 

뚜-벅! 뚜-벅!

 

척-!

 

“...”

 

“대..대체 이게 무슨..”

 

 마치 자신들을 포위한 것처럼 정사각형의 연설장 주변에 자리잡은 검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낀 여성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부동자세를 잡자 파견 인원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들도 이제 눈치를 채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쿵-! 쿵-!

 

 교단의 나무 바닥 위에서 들려오는 거친 군홧발 소리에 연설장에서 웅성대던 여성들의 시선이 모두 그 위로 향했다. 점차 가까워져 오는 인간의 뇌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자신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 남성의 등장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예상에 걸맞게 한 남성이 군홧발 소리를 내며 교단의 단상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쿵!

 

“...”

 

 다만 처음 등장한 여성들과 같이 검은 선글라스와 셔츠, 그리고 한눈에 봐도 두꺼운 검은 장교 코트를 입은 채로 말이다.

 

“대..대장님 맞지?”

 

“그..그런 것 같은데..”

 

“...”

 

 머리 위에는 검은 모자를, 감정을 읽어내야 할 눈 위에는 검은 선글라스를. 어깨춤에는 은으로 만든 별모양 장식을 네 개 박은 장교 코트를, 그리고 왼손에는 어디서 가져온 지 모를 위스키 병과 오른손에는 시꺼먼 지휘봉을.

 

 이색적이어도 너무나 이색적인 그의 모습에 파견 인원들은 입술만 벌린 채 강렬한 햇빛을 한 몸에 받는 그의 모습을 그저 빤히 바라만 보았다.

 

“...모두.”

 

“..모..모두?”

 

“...차렷.”

 

착-! 차착!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한 마디에 연설장에 모여 있던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차렷 자세로 돌아섰다. 무언가 많이 이상하다. 어째서 그 상냥한 인간님이 저런 모습으로 저렇게 차갑게 말하는가. 근래 들어 자신들을 풀어준 양반이 아닌가.

 

딸-각!

 

 수많은 의문이 그녀들의 머릿속을 헤집을 때, 그녀들을 부동자세로 만든 인물은 그녀들의 앞에서 왼손에 들려있던 위스키 병을 들어 제 목구멍 위로 퍼붓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

 

 본디 수많은 이의 목소리로 가득했던 연설장의 한가운데서 남성이 술을 넘기는 소리만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그녀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자신들을 째려보는 5명의 검은 귀신들. 그리고 교단 위에 서 있는 귀신들의 수장. 지금 새로이 등장한 인물 중 검은 제복 차림을 하지 않은 이는 수장의 뒤에 서 있는 금발의 여성뿐.

 

꿀-꺽!

 

“-크으!”

 

“...”

 

 이 대낮에 자신들의 앞에서 음주하는 인간의 모습에 파견 인원들은 도무지 자신들의 상황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여기에 우리를 불러 모은 것인가, 대체 왜 저들은 저런 옷을 입고 자기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 애초에 노려보고는 있긴 한 건가. 선글라스 탓에 그녀들의 시선도, 눈동자도 읽을 수 없다.

 

“...본 대장은.”

 

“...?”

 

 위스키를 들이마시던 그의 입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오자 차렷 자세를 유지하던 여성들의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상황의 해답을..

 

“..귀 오르카 병사들에게 실망했다.”

 

“...아?”

 

 드디어 말문을 여나 싶었던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파견 인원들은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대체 저게 무슨 뜻인가? 그리고 그런 그녀들에게 해답을 알려줄 필요도 없다는 듯 남성은 그녀들이 여태껏 해오던 일들을 쭉 늘어놓기 시작했다.

 

“멋대로 생산 물자에 손을 대고, 파견 인원인데도 제 업무에 충실하지 않고, 본 대장의 소속하에 있는 생산 인원들의 말을 무시하며. 식사를 개선해 주었음에도 제 먹을 만치 푸는 것이 아닌 5리터짜리 잔반통을 매 끼니마다 3개씩 배출하고.”

 

“...”

 

“...본 대장은 말이다. 그런 너희들에게..”

 

 남성은 뒷말을 흐리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성들에게 미간에 주름만 잡은 채 분노가 짙게 깔린 목소리로 제 말을 이어갔다.

 

“..아주 실망했다. 이제 내 말을 알아먹겠나?”

 

“..무..무슨 소리인가요! 그게 뭐 어때서요! 우리는 전투 인원들이라고요! 여기 인원들과 달라요!”

 

 남성의 분기 어린 목소리에 가만히 듣고 있던 앨리스가 그의 오오라에 질 수 없다는 듯 그를 향해 목청을 세웠다. 하지만 그녀의 반박에도 남성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제 오른손에 들린 검은 지휘봉을 단상 위에서 까닥대었다.

 

“..오늘까지 너희는 천국을 즐겨왔지.”

 

딱-! 딱-!

 

“그런데 우리 애들은 지옥을 겪어왔어.”

 

딱-! 딱-!

 

“너희들이야 제깟 그 잘난 전투 모듈 하나만 믿고 행패를 부렸나 본데.”

 

딱-! 딱-!

 

“...지금 이 시간 후로 너희들이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다.”

 

“..어?”

 

 남성의 짤막한 음성에 그녀들의 눈썹이 이마 위로 올라갔다. 지금 이 인간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파견 인원들은 저마다의 침만을 꿀꺽 삼킨 채 모공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단상 앞에 선 남성의 입꼬리가 흉측하게 위로 올라갔다.

 

“-악. 이거 이외의 발언을 쳐하는 새끼들은 전부 오늘 이 산 아래에 묻힐 거다.”

 

“...악?”

 

“너흰!”

 

 쿵!

 

“-히익!”

 

 그의 말의 뜻을 연설장에 모인 그녀들이 채 이해하기도 전, 남성은 전과 달리 거칠고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제 왼손에 들려있던 위스키 병을 나무 단상 위로 거칠게 내려찍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파견 인원들의 얼굴이 그제야 울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늘!”

 

쿵!

 

“...대..대장님이 대체 뭐라는 거야? 알..알비스는 모르..”

 

 마치 영화에 나올 법한 오니와 같이 선글라스와 모자의 캡 아래로 드러난 뺨과 입꼬리를 흉측하게 끌어 올리는 남성의 모습에 알비스는 생애 처음으로 철충이 아닌 인간의 두려움을 체감했다. 그것은 비단 이 소녀뿐만이 아니었다.

 

“..히익!”

 

“..대...대장님이 대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여성들의 울먹대는 목소리에 단상 앞에 선 남성은 위스키 병을 내려치는 것을 멈추곤 푸르른 하늘 아래로 제 오른손에 들린 검은 지휘봉을 높게 쳐들었다.

 

“내 손을 거쳐!”

 

휘익!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아까까지 자신이 두드리던 나무 단상 위로 쩍-!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내리쳤다.

 

콰직! 쩌적!

 

“-히이익!”

 

 그가 휘두른 지휘봉에 나무 단상이 반으로 쪼개지자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파견 인원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색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향해 라붕이 작전관은 입술을 벌려 흰 이빨을 햇빛 아래로 드러내며 지휘봉 손잡이에 있던 덮개를 위로 올렸다.

 

“진정한-!”

 

찰칵!

 

“-군인으로 거듭날 것이다!”

 

삑-!

 

“...에?”

 

 라붕이 작전관의 우렁찬 포효와 함께 연설장의 모서리에서 검은 철제봉들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리고-그 철제봉들의 머리 위로 붉은 전자파가 뿜어져 나와 연설장 안에 있던 이들의 머리 위로 쭉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어어?!”

 

삐-빅! 삑!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프음과 함께 갑작스러운 전자파에 당황해하던 그녀들의 머리 위로, 전자파가 일제히 닿기 시작하자 여성들의 머릿속의 무언가가-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의 모두에게 강렬한 고통을 선사했다.

 

“-꺄아아악!”

 

“아악! 아아악!”

 

“이..이게 대체!”

 

 무언가 작동을 멈추었다. 본디 있어야 할 것 중 하나가 사라졌다. 이 정체를 알기 힘든 무력감. 자신들의 자존심 그 자체였던 어떤 것이 강렬한 고통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것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전투 모듈이..”

 

“..이..이게 대체 무슨..”

 

 전투 바이오로이드들의 핵심 요소이자 그녀들의 호승심의 결정체, 전투 모듈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종적을 감춘 것에 파견 인원들은 황망한 눈으로 지휘봉 위의 버튼을 꾹 누르고 있는 라붕이 작전관을 바라보았다.

 

“지옥에 온걸-!”

 

 그리고 그는 자신을 향한 그녀들의 얼굴을 향해 사악하고 잔혹한 미소를 얼굴 위로 그려내며 2주라는 긴 시간 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우렁찬 포효와 함께 내질렀다.

 

“-환영한다! 이 썅것들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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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이 짧았던 것은 이번 편을 위함이었다!


 이로써 이번 에피소드의 주목적이었던 '라붕이의 이세계 정착기'가 완료되었다. 

 단순히 그냥 유격! 유격! 이런 에피소드를 쓰고 싶어서 이야기를 진행한 게 아니라, 라붕이라는 이세계에 떨어진 인간이 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가며 또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으며 자기자신을 이곳에 정착시키는 그런 이야기가 이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 목적이었거든. 이제 뒤에 벌어질 일들은 가볍게 즐기시면 됩니다.


 근데 씨발 야설은 못 쓰겠다. 왜 괜히 씨발 7편에서 동침 이야기를 쳐 꺼내서..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