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남자는 하도 황당해서 뺨을 꼬집고 허벅지를 때려 보기도 했지만, 꿈에서 깨어날 기미는 전혀 없었다.


눈을 떠 보니 평소 자신이 쓰는 방이 아니라 게임 속 주인공의 방이 아닌가. 바로 최첨단 잠수함의 넓고 편리한 함장실인 것이다.


그가 했던 게임은, 지구의 마지막 인간이 되어 바이오로이드라는 여성들을 지휘해 적과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인류는 멸망했고 남은 이들은 여성들 뿐. 플레이어가 유일한 남성에 등장인물 전원이 여성이라는 것만 보아도 특정 계층을 노린 게임이라 할만 했다.


그는 그 게임을 즐긴 대로 즐긴지 오래인지라 더 이상 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게임만 몇년을 넘게 매일같이 해왔기 때문이다.


메인 스테이지는 모두 클리어했고, 주인공의 레벨도 모두 최대 한도에 달했다. 장비나 캐릭터 강화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배경과 캐릭터 설정까지 모두 외웠을 지경이었다.


"……?"


더 이상한 점은, 거울을 보면 남자 자신의 모습이란 사실이었다. 픽션에서 자주 보았듯이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의 몸에 씌였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허.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누군가한테 납치라도 당했나. 그러나 대학생으로서 원한을 살 짓 따위는 도통 하지 않았다.


남자는 간신히 진정한 다음 잠들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생각했다.


집에 늦게 들어와서 스트레스나 풀려고 게임을 했고, 게임 도중에 지루해져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내동댕이쳐진 핸드폰에서 전화가 왔었다.


발신 번호가 이상하여 장난전화라고 생각했다. 단지 한순간의 변덕으로 받은 전화였다.


-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멸망한 세계에서 살고 싶은가요.


"그야 당연히 후자죠. 할일 없어요?"


그때 그는 상대방 여성의 말을 장난으로 치부하고 끊어 버렸었다.


혹시, 그 전화로 위치를 추적해서 납치라도 한 것일까.


남자는 설마 게임 속 세계로 들어왔다고는 아직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납치라면 이렇게 게임 속을 철저히 구현해 놓은 방에 재울 이유 또한 전혀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있던 그는 우선 나가서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다.


세트장에 와 있는 건지, 아니면 계속 꿈 속인지. 이 방을 나가면 알 수 있으리라.


남자가 금속제 문 앞에 서자, 문이 미끄러지듯이 좌우로 열렸다.


하지만 통로에 나가 보니 역시 게임에서 보던 풍경 그대로였다. 남자는 더더욱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이것저것 알아보고, 결국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다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현재 잠수함 안에 있었으며, 잠수함 안에는 게임의 익숙한 등장인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살아 있는 생명답게 게임 속의 그래픽과 똑같이 생기진 않았다. 그러나 신체적 특징이나 말투 등등이 등장인물들과 너무도 닮아 있는 게 아닌가.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셨습니까. 요즘은 안 그러시더니. 좀 실망입니다."


"바닐라야. 주인님께 그렇게 말씀드리면 안된다고 몇번이나 말했잖니…… 죄송해요. 이 애가 말은 이래도 걱정하려고 그런 거니까……."


버섯머리 소녀가 퉁명스럽게 내뱉고, 안경을 쓴 묘령의 처녀가 얼른 사죄해 왔다. 둘 다 개조된 메이드복 차림이었다. 보통 메이드가 입지 않을, 가슴 부위가 강조된 선정적인 메이드복이었다.


물론 남자는 그 둘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각각 바닐라와 콘스탄챠라는 게임 속 등장인물인 것이다.


남자는 놀라서 얼이 빠져 있던 걸 간신히 수습했다. 그리고는 그녀들의 장단에 맞춰 줄까 고민하다가 우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뭐든지 애매할 때는 항상 말을 아껴야 했다.


"주인님. 늦었지만 아침 드시겠어요?"


"……."


콘스탄챠의 물음에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식당에서 드릴까요, 아니면 사령실에 가져다 드릴까요."


"……사령실."


"네. 주방에 그렇게 말해 놓을게요."


콘스탄챠가 바닐라를 데리고 멀어져 갔다.


게임대로라면 이곳은 분명 항공모함을 개조한 초거대 잠수함이었다.


남자는 기억을 더듬어 통로를 지나 사령실로 들어섰다.


함교와 지휘통제실 노릇을 하는 넒다란 사령실 역시 게임 속에서 보았던 풍경과 흡사했다. 전면 관측창을 통해서 해저의 풍경이 실시간으로 그려지고, 가운데의 사령석을 중심으로 각종 패널과 슈퍼 컴퓨터까지 존재하는 장소였다.


사령관 자격으로 사령석에 앉은 그가 턱을 괴었다. 게임 속처럼 참치 치즈 샌드위치가 아침밥으로 날라져 왔다.


주인공은 게임 초반에 이런 참치 음식들이 맛없다고 투정부렸었지. 인류가 멸망해서 식재료가 대부분 참치캔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샌드위치의 맛은 현실과 똑같았다. 그는 샌드위치를 씹으며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어쩌면 게임 속이 아니라 어디 시설에 납치된 걸지도 모른다. 게임 캐릭터로 보이는 여성들은 실상 코스튬 플레이 중인 연기자들일지도 모른다. 남자를 이용해서 유튜브나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상식이 그것을 거부했다.


어떤 미친 놈이 사람을 납치해서 이런 몰래카메라를 찍겠는가. 차라리 고용을 하거나 자원봉사를 해달라고 설득하는 게 빠를텐데. 게다가 그가 하는 게임이 이런 것을 찍을 정도로 메이저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뒤로도 다른 등장인물들을 몇번 만나본 결과, 그는 이곳이 잠수함 '오르카호' 안이며, 자신은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온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류는 철충의 침략과 휩노스 증후군으로 멸망했고, 지구는 철충들이 차지했다는 사실도.


그가 지구의 마지막 인간으로 저항군을 이끄는 몸이 되었다는 것도. 모두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왜 빙의한 게 아니라 내 몸이지?"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남자 - 사령관이 이끄는 바이오로이드 저항군은 현재 사령관의 몸을 새로 만들고 나서 다음 계획을 준비하는 시점이었다. 게임 외적으로 치자면 이벤트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얼마 전까지 사령관은 어떤 이유로 철충이라는 적에게 몸에 침식된 상태였다.


이에 바이오로이드들은 과거 인류가 남긴 육체 제조기를 사용해서, 사령관의 몸을 바이오로이드로 만든 다음 뇌를 이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도 남자는 수상쩍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게임 속 주인공의 모습이 아니라 원래의 자신 모습 그대로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새로 만든 육체라면, 이게 처음부터 자신의 모습이었단 뜻인가. 도통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게임의 주인공인 '사령관'으로 행세하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게임 내 설정과 정보에 대해 누구보다도 박식했다. 아군이든 적이든 잘 안다고 자부했다.


또한 게임에서 일어날 일도 웬만큼 알고 있었다. 앞일을 아는 것만큼 강력한 무기는 드물다. 덕분에 주인공 같이 군사 지식 등이 없어도 이 세계를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주인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브리핑이 끝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곁에 있던 경호원 CS페로가 물었다.


"엉? 무슨 일?"


"아니, 오늘 아침부터 무언가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아서."


"아…… 그냥. 별거 아니야."


사령관은 얼른 둘러댔다.


그러고 보면 CS페로의 생김새는 게임 속과 정말 흡사했다.


단정하게 정돈한 긴 은발에 황색과 청색의 오드아이, 프릴과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옷가지, 무엇보다도 고양이의 꼬리와 귀까지. 모든 것이 게임과 닮았다.


특급 경호원인 그녀는 컴패니언 시리즈로서, 프로토타입을 베이스로 고양이의 유전자가 섞인 바이오로이드인 것이다.


현재 오르카호에는 페로 뿐만 아니라 하치코라는 컴패니언도 함께 있었다. 하치코는 페로와 다르게 강아지 귀와 꼬리를 가진 바이오로이드였다.


그리고 그런 하치코와 페로의 프로토타입은 블랙 리리스라는 등장인물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초 고등급 캐릭터이며, 스토리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사령관은 급히 물었다.


"참. 그러고 보니 리리스는?"


사령관은 리리스라는 캐릭터를 무척 좋아했던 것이다. 그래서 게임 속 세상에 들어가서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자신이 정녕 게임 속에 들어온 것이라면 리리스를 직접 보아야 완전히 믿을 것 같았다.


그런데 페로는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음, 리리스 언니는 아직 구조되지 않았습니다. 알고 계셨을 텐데요."


"……아, 그랬지."


사령관은 뒤늦게 초반 스토리가 떠올랐다.


바이오로이드 저항군은 사령관이 이끌기 전에, 적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었다. 개중에서 리리스가 섞인 부대는 사령관을 찾아 나섰었다.


부대는 다행스럽게도 사령관을 찾아냈다. 그러나 정작 리리스 본인은 부대를 보호하느라 혼자서 고립되고 만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부대원들한테 공을 가로채인 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아는체하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리리스가 고립되어 있다고 했었지? 빨리 구하러 가야 할 텐데."


"저희도 노력 중에 있습니다만 그분이 구조 시그널을 알아채시는 게 급선무입니다. 허나, 시그널을 받지 못한다면……."


실종이나 전사를 암시하는 말에 사령관이 침묵하자 페로도 입을 다물었다.


역시 긴장감 없이 게임 플레이를 할 때와, 그 내용을 현실로 맞닥뜨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사령관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다시 말을 꺼냈다.


"그, 그래도 리리스는 살아 있을 거야. 엄청 강하잖아?"


"아마도요. ……아시다시피 저흰 주인님이 안 계시면 전투력이 급감하니까."


페로의 말대로 바이오로이드는 주인 되는 인간이 없으면 전투력이 낮아진다. 게다가 인간의 명령에 거역할 수도 없다. 그런 존재였다.


"페로도 언니가 빨리 구출되길 바라지 않아? 그녀도 페로와 하치코를 다시 만나면 좋아할 거야."


사령관은 게임 속에서 리리스와 다른 컴패니언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만, 그분도 그럴지는 모르겠군요."


"어? ……너흰 사이 좋은 자매잖아."


페로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 저와 하치코는 별개의 컴패니언 부대였습니다. 리리스 언니가 저희 컴패니언 부대들을 통솔하는 건 맞지만. 모두가 리리스 언니와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일 같은 때 주로 뵈었죠."


사령관이 머리를 긁적였다. 페로가 말을 이었다.


"하긴, 컴패니언은 현재 저와 하치코 외에는 모두 MIA나 전사했으니…… 지금은 느림보 하치코와 제가 그분의 유이한 자매이겠군요."


자매끼리 사이 좋기로 유명한 컴패니언도 처음부터 한 가족 같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여하간 사령관은 우선 리리스를 구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온 이상 자신은 이곳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언제든지 수틀리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몸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리리스와 같은 초특급 경호원이 필요했다.


그녀는 충성심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등장인물이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그녀를 혼자 고립되게 놔둘 순 없었다.


따라서, 사령관은 리리스와 구조 부대가 따로 떨어졌다는 방향으로 잠수함 기수를 돌리도록 지시했다.


남자가 사령관이 되고 나서 오르카호의 첫 작전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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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리리스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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