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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이 라비아타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나눈 건 첫 장기 출항 - 그러니까, 의식주의 개선에서 시작해서 소완의 영입으로 마무리된 일련의 사건이 마무리되었을 무렵이었음.

글쎄, 서로에게 그렇게 특기할 만한 계기 같은 것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눈코뜰 새도 없이 바쁘던 환경 정비가 일단락하면서 사담을 나눌 여유도 늘어났을 뿐이니까.

물론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할 만큼 서로를 신뢰하게 된' 계기를 찾자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라비아타는 소완이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바이오로이드에게도 명령 같은 간단한 방법이 아니라 소완 자체를 바꾸려고 한 방법에서 진정으로 사령관의 선성을 믿게 되었고, 사령관은 주먹구구에 가깝던 저항군을 추스르는 과정에서 라비아타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으니까.


형식상으로는 주인과 메이드지만, 실질적으로는 피보호자와 보호자 - 더 나아가 남매 같은 관계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거야.

그리고 그 부분이야말로 사령관이 첫날 밤 이후로는 리제에게도 거의 표현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불안'을 라비아타에게 토로할 수 있었던 근거였고.


이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반면, 철충을 보기만 해도 대부분의 정보와 최적의 대응법을 떠올릴 수 있고, 닥터조차 해석하지 못하는 철충의 말을 당연한 듯 알아듣는 자신.


그런 의문은 기묘할 만큼 라비아타가 처음에 품었던 - 사령관이 철충 측의 존재가 아닌가 했던 의심과 맞아떨어졌지만, 라비아타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미혹을 잘라내고 다만 다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어.

어쩌면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진실의 무게를 직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 후로는 특이한 행동을 벌이는 철충도 보이지 않아 그저 한때의 이상 현상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랐지만-

결국엔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사령관도 라비아타도 내심 마음을 굳혔지.


*   *   *


…뭐,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 필요한 건 마음이 산산조각난 리제를 달래주는 일이었지만.

전황을 재차 확인하고, 자신이 지휘하지 않아도 거점 확보에는 문제가 없으리라는 확신이 생길 즈음 해서 사령관은 오르카 호로 귀환했어.

아직 해저를 탐사할 방법은 확정하지 못했지만 재촉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함장실의 문을 연 사령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 ….


호빵처럼 동그랗게 솟아올라 있는 이불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입술을 깨무는 것이었지.

설마 이대로 잠들었나 해서 슬쩍 귀를 기울여 봤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고…….


- 리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가볍게 이불 위를 쓰다듬으며 불렀더니 뭔가 웅얼거리는 대답이 나오긴 하네.

철충의 말보다도 이쪽이 알아듣기 힘들다고 쓰게 웃으면서, 사령관은 아예 옆으로 누워서 '호빵'을 둘러싸듯 자세를 잡았어.


- 우리 귀여운 부관님이 왜 그렇게 상심하셨을까.

- ….

- 좀 공개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이상한 말은 하나도 안 했는데.

- …했잖아요.

- 어떤 게?

- 아이… 많이 원한다고….

- 이상하지 않아.

- …………처음엔 한 명만 키우자고 했으면서.


슬슬 문장이 명확해지는 걸 보니 조금은 회복한 거려나.

사령관의 짐작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는지, 리제는 슬쩍 이불을 들춘 사령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면서도 피하지는 않았음.


- 어디까지나 첫째 이야기잖아. 그것도 평화를 되찾은 후의.

- …….


보이는 건 얼굴 약간 뿐이었지만, 사령관은 리제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음.

사실 리제가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할 리는 없었지.

과거에 첫째 이야기만 했던 것도 불안한 미래 앞에서 한 명 만큼은 담보하겠다는 뜻이었고.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리제가 진짜로 부끄러워한 건 아이를 많이 가지고 싶다고 한 발언 자체가 아니라-


- 차라리 지금이라도 안주할 땅을 찾아볼까?

 싸움 같은 건 관두고.

- ……그러자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여유를 되찾았을지언정 아직 종착지조차 보이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런 마음 편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었겠지.

물론 사령관은 그걸 탓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어.

리제보다 더 태평하게 살아가 -다 못해 넋을 어디에 두고 다니나 걱정이 되- 는 대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점도 있지만, 애초에 리제의 '마음 편함'은 자신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에 기반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괜찮아.


뭐든 해낼 테니까.

다짐하듯 꺼낸 말에 리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불을 걷어낸 대신 사령관의 팔을 끌어다 덮었음.

그 뒤 사랑한다고 속삭인 것에 맥락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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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시리즈가 6지 이후 원작하고 갈라진 가장 큰 원인은 라비아타와 사령관의 관계라고 생각하빈다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9989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