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난테가 부르짖기 시작한다. 기사가 발을 구를 때마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그의 모습을 감춘다. 다섯 번째로 먼지가 일었을 때, 멍하니 그를 지켜보던 마리가 정신을 차린다.
어떻게든 막아야한다. 장교 이전에 한 명의 여인으로서 부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안겨주고 싶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기사라고 믿는 정신이상자라도, 그가 익스큐셔너를 단신으로 처리할 수 있는 자라면 다르다.
마리의 모듈이 빠르게 연산을 시작한다. 자칭 기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넓은 봉토. 방랑 기사에게 땅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다. 심지어 철충이 내뱉은 점액질로 뒤덮인 땅은 사용할 수도 없다. 황금. 문명이 무너지고 가장 먼저 가치를 잃은 것이 황금이었다. 명목상으로나마 주인이 남아있는 펙스의 금고를 제외하고, 남은 것은 모두 멸망 직전의 회의주의에 휩싸여 녹아내려 바다로 흘러갔다.
‘제시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라! 명예? 광인이 명예를 알까? 더군다나 인정해줄 인민도, 주군도 없는 상태에서?’
‘잠깐, 주군?’
“주군!”
“예?”
흙먼지가 멈춘다. 로시난테를 움켜쥔 기사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투구가 순식간에 수백 개의 추를 단 것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집어 던지자 어딘가 어설퍼 보이던 그가 순식간에 백전노장의 기사로 변모한다.
기사를 꾀어낼 마지막 기회임을 확신한 마리가 다시 입을 연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이제 뒤는 없다.
“기사에게 필요한 것은 넓은 봉토도, 충실한 하수인도, 재빠른 말도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기사일지언정 모실 주군이 없다면 진가를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죠. 저희와 함께하신다면 최고의 주군을 선사해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주체를 바꾸어버리는 것은 멸망 전부터 쌓여온 관록인가?”
조롱의 의미가 담겨있는 말을 들으며 마리는 단번에 자신의 실수를 통감했다. 충성 서약은 기사가 주군을 선택하고 인정하는 것. 즉, 주군은 기사를 고를 수 없다. 더군다나 선사라. 마리는 마치 그녀가 기사에게 호의를 베푸는,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말했다.
거듭된 실수로 다급해진 탓일까. 억지로라도 일단 데려가려는 마음에 마리는 주시자의 눈을 전개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다프네가 나노 로봇을 활성화시켰고, 리앤은 권총 그립에 손을 올려놓았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기사는 여인들을 둘러보았다. 저렇게 작은 몸에, 저렇게 작은 것을 가지고서 덤비겠다는 것일까? 같잖기 그지없다. 문득 폼멜을 쓰다듬자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닳고 닳아 둥글어진 것이 느껴진다, 10년일까, 100년일까, 그것도 아니면 1000년, 10000년 일수도 있다. 길을 떠난 뒤로부터 시간은 세지 않았다. 혼탁한 눈은 발을 이끌지 않았다.
”비도 피할 겸, 한 번 즈음 주인을 가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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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호로 가는 길에, 슬레이프니르와 기사는 한참 동안 언쟁을 나누었다. 기사는 물속에 그렇게 거대하고 움직일 수 있는 요새가 있는 것이 말이나 되냐고 우겨댔고, 슬레이프니르는 자신이 그곳에서 사는데 뭐가 말이 안 되냐고 주장했다.
”좋습니다. 저는 그대를 이해합니다. 그대의 외견을 보건데 그대는 필시... 펭귄 아니면 굴이란 녀석이겠군요. 제가 아무리 식견이 짧다만 둘 다 바다를 고향으로 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펭귄은 움직이는 얼음덩이 위에, 굴은 자신의 껍데기를 집으로 삼으니. 아무래도 서로 말하는 것이 달랐던 모양이지요?“
”아니!! 나는 펭귄이 아니야! 나는 제비라고! 내가 어딜 봐서 펭귄인데?! 제비라는 증거로 빨간 포인트도 있잖아!“
”그대는 아프리카 제비요, 아니면 유럽 제비요?“
”그건... 그건 나도 모르는데!“
”보십시오, 본인이 어떤 제비인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제비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슬레이프니르의 눈이 빙글빙글 돈다. 나는 제빈가? 제비면 무슨 제비지? 그렇다고 펭귄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펭귄이었던건가? 제비도 아니고 펭귄도 아니면 나는 뭐지?
혼란스러워하며 자기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하는 슬레이프니르를 보며 다프네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우쭐한 듯 어깨를 핀 기사의 옆으로 마리가 다가간다.
”정말 박식하시군요. 그런 건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원래 훌륭한 기사라면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법입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다프네가 폭소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사는 여전히 로시난테를 끌며 천천히 걸을 뿐이다.
”사실 슬레이프니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대도 저를 놀릴 셈입니까? 세상에 어떤 영주가 물속을 이동하는 요새에서 산단 말입니까?“
”아니요.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거의 도착했으니 정 못 믿으시겠으면 실제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아, 저곳입니다.“
마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기사가 마리에게 따지려는 순간, 엄청난 소리와 물보라를 동반하며 거대한 금속 언덕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은 기사는 곧바로 뒤돌아 슬레이프니르에게 사과했다.
”그대의 말이 맞았습니다. 물 속을 이동하는 거대 요새는 실존합니다. 내 식견이 짧았음을 인정하겠습니다, 봄의 전령이여.“
”봄의 전령? 그건 제빈데? 나는 제비가 아니라 펭비야! 아니, 제귄인가?“
”,,,저 분은 괜찮은게 맞습니까?“
”가끔 비슷한 증세를 보이긴 하시는데 오늘따라 심하네요. 자, 들어가시-“
마리가 뒤를 돌아보며 오르카호를 소개하는 순간, 기사는 그의 애마 로시난테에 올라타고서 줄행랑쳤다. 떠나는 기사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마리의 얼굴에 무언가 들러붙는다. 기사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흔들던 손수건이다. 손수건을 보자 마리의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크하하하핫!“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마리가 저지른 모든 실수를 용납하고 순순히 따라온 기사가, 고위 연결체를 단독으로 처리할 능력이 있는 기사가, 어림잡아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철충을 격퇴하며 살아온 남자가, 고작 이따위 이유로 도망치다니! 누군가는 가까이 보면 비극인 것이 인생이라 하였다지만, 이건 아무리 가까이보아도 희극이었다.
혼란에 빠진 슬레이프니르를 챙기느라 뒤처진 리앤과 다프네가 정신 없이 웃고 있는 마리에게 다가간다. 방금 지나간거 기사 아니었냐. 왜 떠난거냐.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 질문이 쇄도하지만, 마리는 여전히 웃기만 한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리앤이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마리는 손수건을 건냈고, 리앤과 다프네 역시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아이고 배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거야?“
한참을 웃은 리앤이 마리에게 묻는다.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켜 억지로 호흡을 진정시킨 후, 슬레이프니르에게 쫓아가 잡아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어차피 맨정신이면 도망칠 것이 뻔하니 기절시켜도 좋네.“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겠다며 엔진에 시동을 거는 슬레이프니르를 뒤로 하고, 마리는 오르카 호를 지켜보았다. 혹여 기사를 잡지 못하면 일이 복잡해지겠군. 인상을 쓴 마리가 수통을 찾아 코트 주머니를 뒤진다. 수통과 함께 손수건이 딸려나오고, 거기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봐도 웃기단 말이야. 한 번 코웃음을 친 마리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박고서 입술을 축였다.
-저는 물이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