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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은 대원들이 함부로 사령실에 드나들지 못하게 막았다. 그 대신, 주기적으로 오르카호를 돌아다니며 시찰하는 쪽을 택했다.


사령실에 아무나 들어오게 하면 적극적인 일부 대원들만 만남을 독차지할 게 뻔했고, 사령관의 위엄도 손상될 가능성이 높았다. 안전에 문제가 생기리란 점도 있었다.


그러나 시찰이 처음부터 잘된 것만은 아니었다.


각 부대는 사령관이 친히 둘러보겠단 말에 혼비백산했다. 그녀들은 사령관이 나올 때마다 거주공간을 청소하고 각종 채비를 갖추느라 바빴다.


특히 군대처럼 조직된 군용 바이오로이드들의 경우가 더욱 힘들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선지 매주마다 쉬지 않고 군의 최상급자가 나타나는 것 아닌가.


덕분에 하급 병사들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청소하고, 때 빼고 광내고, 무장 점검을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물론 지휘관들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늘 같은 사령관이 무슨 지적이라도 한다면…… 심지어 라비아타조차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령관도 곧 시찰 때문에 하급 병사들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소원수리로 알게 되었다. 그제야 아차 싶어서 전군에 시찰을 이유로 각종 준비를 시키는 걸 금지했다.


역시 높은 사람이 되어보면 자연스럽게 낮은 사람들의 고충을 신경쓰기 힘든 모양이었다. 21세기의 대학생에 불과했던 남자는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물론 소원수리로 인한 부대 내 파장은 여전했지만, 거기까지는 사령관이 모르는 또 다른 이야기.


그런데 시찰로 인한 다소간의 파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령관이 처음 페어리 시리즈 바이오로이드의 구역에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페어리 시리즈란 농업과 정원을 가꾸는 민수용 바이오로이드였는데,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전투용으로도 개조되었다.


특히 최상급 바이오로이드인 오베로니아 레아와 티타니아는 핵미사일 이상 가는 재해급 파괴력의 보유자이기도 했다. 그런 설정이었다.


"앗. 주인님- 절 보러 오셨군요? 히힛."


정원사 바이오로이드가 기뻐서 달려들다가 문득 멈칫했다. 사령관의 뒤에서 경호원이 빙그레 미소짓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마치 먹잇감을 두고 혀를 날름거리는 뱀과도 같았다.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살기에, 정원사 리제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 주인님? 이 해충은 왜 데려오신 거죠. 리제를 만나러 오신 게 아니신가요?"


"리제만이 아니라 모두를 보기 위해서야. 그리고 리리스한테 해충이라는 말은 좀 어울리지 않는구나. 나한텐 이애나 너나 모두 소중하거든."


"……."


리제는 대답하지 않고 리리스와 마주 노려보았다.


그때까지 리제는 리리스와 별로 만나볼 일도 없었고,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였다.


리제는 처음으로 그녀를 겁내지 않는 대원을 보자 기분이 상했다. 사실 대부분의 대원들은 리제의 호전성과 레아의 백 때문에 리제를 슬슬 피해다녔던 것이다.


저 해충이 나와 주인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한편, 사령관은 게임의 리제가 리리스와 자주 투닥거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참에 리제와 리리스를 대련시킬 생각이었다.


리제가 사령관에게 집착하는 만큼이나 힘의 논리에 충실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령관이 리제를 보고 말했다.


"리제야. 만약 리리스가 날 경호하는 게 불만족스럽다면, 리리스한테 도전하지 않겠니? 서로 대련을 해 보는 거야."


리리스는 안 그래도 리제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 얼른 승낙했다. 상대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본 리제도 약이 올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오르카호 실내 훈련장에서 둘의 맨몸 대결이 펼쳐졌다.


"해충!"


리제가 먼저 덤벼들어서 주먹을 붕붕 휘둘렀지만, 한 대도 맞추지 못했다.


리리스는 리제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다가 슬쩍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빈틈 투성이야."


리제는 이를 악물고 다시 덤볐다. 그러나 용기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리제가 비록 쌍검을 잘 다루긴 했어도 맨손 격투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다. 따라서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인 리리스를 맨손으로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정원사였다가 전투용으로 개조된 리제와 달리, 리리스는 처음부터 전투와 경호를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이 싸움은 이미 리리스가 이겼어." 사령관이 중얼거렸다.


리제의 움직임은 이미 모두 읽히고 있었다. 리리스도 리제를 진심으로 상대하지 않고 어느 정도 가르치면서 쓰러뜨리는 눈치였다.


"싸우는 폼이 어설퍼. 무작정 달려들지 말라고!"


"이, 이…… 해충!"


리제는 이를 악물고 계속 팔을 휘두르거나 발차기를 날렸다. 그마저도 점점 체력이 떨어져 느려지는 게 눈에 보였다.


과연 리리스는 리제가 지친 기색이 뚜렷하자, 리제의 멱살을 잡은 그대로 매트 바닥에 업어쳐 버렸다. 머리에 피가 몰린 상대에겐 더 가르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호되게 메쳐진 리제는 바닥에 뻗어서 신음을 흘렸다.


지켜 보던 사령관이 손뼉을 치며 싸움을 멈췄다.


"그만, 그만. 그만하면 됐어."


사령관이 리제를 일으켜 준 다음 리리스와 악수하게 시켰다.


"리제도 이젠 인정하고. 리리스도 리제한테 관대하게 대해 줘. 얘가 좀 맹목적이긴 해도 꽤 용기있는 아이니까."


리리스도 리제가 생각 외로 여기까지 버텨서 제법이라는 눈치였다.


"스토커. 다음에 필요하면 찾아 와. 몸으로 가르쳐 줄 테니."


"해충."


리제 역시 입을 내밀면서도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리제도 섣불리 공격성을 내비치진 않게 되었다. 게임에서와 달리 동료 바이오로이드에게 함부로 덤벼들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리리스가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이렇게 한번 성공을 거두자, 사령관은 내친 김에 소완과 리리스도 서로 겨루게 했다. 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법칙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쌍식칼 없이 싸우는 소완은 전투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중국권법은 본래 무기의 사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때문에 소완도 맨손 싸움으로는 리리스를 이기지 못했다.


대련이 리리스의 승리로 끝나고 나니 소완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주인. 소첩은 실력 발휘가 제대로 되지 못했나옵니다. 소첩의 애병인 소주검을……."


"총을 쓰면 당신은 바로 죽을 텐데요?"


"후후. 목에 바람이 들어와도 그러실 수 있겠사옵니까?"


살벌한 말이 오고가자 사령관이 나서서 둘을 말렸다.


"그만 해, 둘 다. 어쨌든 리리스가 이긴 건 이긴 거잖아."


소완은 어쩔 수 없이 승복했다.


"……그것은 그렇사옵니다."


"물론 소완도 대단히 잘 싸운 거고. 그렇지, 리리스?"


리리스도 내심 소완을 가볍게 볼 수 없다고 판단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완은 최고급 전투 모듈과 더불어 강인한 체력 덕분에 맨손 싸움으로도 쉽게 밀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젠 서로 인정할 건 인정하고 선의의 경쟁을 해 줬으면 해. 덮어 놓고 싫어하지 말고. 알았어?"


"예."


"알겠사옵니다."


둘은 의미심장한 눈빛과 함께 악수를 나누었다. 과연 힘겨루기를 해본 덕분인지 둘의 사이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번은 하치코가 사령관에게 줄 파이 재료를 찾겠다며 외출 요청을 해 왔다.


사령관은 마침 잘되었다 싶어서, 소완으로 하여금 하치코를 데리고 식재료 수급을 해오라 명했다.


소완과 리리스 사이에 하치코라는 접점도 만들어 주려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리리스는 하치코를 타인에게 맡기는 일을 불안하게 여겼다.


"하치코. 이상한 짓 당하면 꼭 언니한테 알려야 해요?"


"리리스.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소완도 하치코를 잘 가르치겠다고 맹세했다고."


하치코는 자매가 신경써 주는 게 기쁜지 마냥 웃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오르카호를 나선 소완과 하치코는 산과 들을 쏘다니며 식재료를 챙겼다. 하치코는 특히 후각이 예민한지라 식재료가 있을 장소를 찾아내는 데엔 일품이었다.


인류가 멸망한 지 수십년이 지나자 환경은 예전보다도 번성해 있었다. 여기저기에 식재료로 쓸 동식물이 한가득이었다.


하치코는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나서 소완과 떠들고 다녔다.


그동안 오르카에서 소완에게 다가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주방이든 어디서든 매사에 엄격하고 날카로운 성격으로 다들 어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붙임성 좋은 하치코는 예외였고, 소완한테도 서슴없이 요리법 등을 물어 오고는 했다. 덕분에 소완도 하치코를 귀여워하는 참이었다.


어느 산속에 들어선 하치코는 얼마 안 가 화려한 버섯들을 확보하자 좋아라 했다.


"주방장님! 이거 보세요. 이 버섯들도 파이에 넣으면 분명히 맛있겠죠?"


소완은 하치코가 내민 버섯들을 보자 안색이 변했다.


"하치코. 그건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버섯이옵니다."


"네? 왜요?"


"독버섯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것을 주인의 음식에 넣었다가는 그분이 사경을 헤맬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엥- 정말인가요? 이렇게 예쁜데……."


"예쁜 버섯일수록 위험한 법이지요. 자아. 어서 버리고 오시길."


하치코는 자칫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는 생각에 금방 울상을 지었다.


소완은 한숨을 쉬며 하치코를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하치코 양은 상식이 조금 부족한 듯싶사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소첩이 하치코 양의 스승이 되어 드려도 괜찮겠사옵니까?"


"앗. 정말요?"


"하치코 양이 요리를 좋아하는 데에 비해, 아는 게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대로 놔둘 수가 없어서."


"아…… 감사합니다! 헤헷. 그럼 앞으로 스승님이라 부를게요."


하치코는 신이 나서 꾸벅 인사를 올렸다. 소완은 피식하다가 문득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당신의 언니께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녀와는 사이가 껄끄러운지라."


"리리스 언니도 좋아하실 거예요. 왜냐하면 그분도 소완 스승님을 속으로는 친구라고 생각하실 거거든요!"


하치코가 웃으며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사옵니다마는…… 음?"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말하던 소완은 갑작스럽게 하치코의 등 뒤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식재료를 발견한 요리사의 눈빛을 띠었다.


"왜 그러세…… 앗. 멧돼지가."


감각이 예민한 하치코도 근처에 멧돼지가 달려간 것을 눈치챘다.


"하치코. 힘을 합쳐서 멧돼지를 잡으십시다. 주인께 보존식 따위가 아닌 맛있는 고기 요리를 대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네, 스승님!"


하치코와 소완은 부리나케 달려서 멧돼지를 쫓았다. 멧돼지도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멧돼지도 산을 타는 데엔 일가견이 있었지만, 최상급 바이오로이드 둘이 쫓아오는 걸 뿌리치기란 역부족이었다. 바이오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초인적인 신체를 지닌 것이다.


이윽고 멧돼지를 따라잡을 무렵 소완이 하치코에게 일렀다.


"하치코. 녀석을 몰되 총은 쏘지 마십시오. 고기가 상하면 큰일이니."


"알겠습니당!"


둘은 갈라져서 멧돼지의 앞뒤를 막아 섰다.


진즉에 노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도망치던 멧돼지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짐승도 바이오로이드는 이길 수 없다고 직감한 것이었다.


얌전히 죽어주시지요. 소완이 미소와 함께 식칼을 날려서 멧돼지를 절명시키는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커다란 톱날검이 날아와 동시에 멧돼지한테 꽂히는 게 아닌가.


소완과 하치코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는데, 웬 빨간 머리 소녀가 튀어 나오더니, 웃으며 멧돼지 시체를 끌어 안는 것이었다.


"잡았다! 완전 땡잡았네. 히힛."


소녀를 본 둘은 흠칫하고 놀랐다. 소녀…… 떠돌이 바이오로이드의 머리에는 하치코처럼 개과의 귀가 돋아나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꽁무니에는 또한 개의 꼬리까지 달려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든 식재료를 빼앗길 순 없었다. 소완은 얼른 빨간 머리 소녀를 붙들었다.


"잠깐. 그 멧돼지는 소첩이 잡은 것이옵니다. 어째서 사냥감을 가로채십니까."


소녀가 별꼴이라는 눈으로 말했다.


"뭐라고? 이건 내 칼로 잡은 거야. 이게 안 보여?"


"소첩의 검도 꽂혀 있습니다만."


"흥. 먼저 찾은 놈이 임자지. 난 며칠간 고기를 못 먹어서 배고프다고."


소완이 소녀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말로 해선 안 되겠군요."


"해 볼 테면 해 보시던가. 힘으로 뺏어 봐."


둘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하치코가 끼어들어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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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귀 소녀의 정체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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