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먹고사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삶과 책임이 뒤바뀌는 순간 - 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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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면 그녀가 죽을 때 적어도 곁에서 밤을 보냈겠지, 떠난 그녀가 적어도 나를 욕하는 동시에 동정하며 뒤돌지 않았겠지.



 몇 주가 지났다. 나름 적응하며 살고 있었다. 실수를 하는 바이오로이드와 실수 투성이의 하루하루만을 보내왔던 나의 어제들이 슬프게도 매우 닮아 있었다. 



 어렴풋이 알기로는 바이오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주인으로 인지한 것을 사랑하게 되는 모양이다 .. 그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탯줄에서부터 묻어있던 냉소와, 자궁에 두고 온 박애. 나를 설명하는 모든 것이였으며, 지금 또한 그러했다. 분명 끝이 구릴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당 90250원을 품에 받아들고, /결코 큰 돈이 아닌 것이었다/ 옛 통학로를 지나가다가 거대한 트럭이 정차된 채 서 있었다. 주변에는 쓰레기에 초파리가 꼬인 양,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발걸음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이내 그들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혹시 이 주변에서 초록색 머리를 한 바이오로이드를 본 적 있으신가요. 폐기 신고가 들어와서 받으러 왔는데, 요즘 통 가만히 있는 바이오로이드가 없네요. 


 잘 모르겠네요. 요즘같은 시기에 길거리에 대놓고 버려진 것들은 아마 암시장에서나 다시 볼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좋은 대답을 못 드려서 미안합니다.



 이거 골치 아픈 일이 되었네요. 누군가는 사태가 되어가는 이 일에 책임을 지어야 할 텐데. 그게 제가 아니기를 빌 뿐입니다. 라고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감사합니다, 하고 얕게 고개를 숙였다. 



 수명 연장을 위한 신체 개조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시대에도 영원이란 것은 없다. 의미조차 감정조차 그대로 영원하지 못 할 것이라면, 잠깐의 순간에 박제시켜 숨을 멎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대로 욕조 안에 그대로 어항 안에



 다녀왔어. 별 일은 없었지.


 네.


 밥은.


 기다리고 있었어요. 금방 내 올게요.


 천천히 해.


 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텅 빈 방소리에 염증을 느껴서 서랍을 뒤적였다. 번뜩이는 LP를 한 장 꺼내어, 쌓여있던 외투와 먼지들을 대강 걷어내자 보이게 된 고동색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얹었다. 아버지 유품이었다. 



 아버지는 쿨 재즈를 즐겨 들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런 고루한 음악을 왜 좋아했던지, 라고 볼멘소리를 혼잣말처럼 하며 낡은 물건들을 찬장 구석으로 치웠다. 아버지에 대해서 알려주신 건 이게 다였다.



 그마저도 어렸던 내가 이걸 방 구석에서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갑상선 암으로 죽은 몸의 뇌 속에 묻혀버렸을 이야기다. 집을 나오며 몰래 챙겨온 몇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사하던 그 부슬비 오던 날도 그녀의 편지를 버리지 못 했다. 손목 위 그녀의 머리끈을 풀지 못 했다.



 이런 음악은, 좋아해? 아니, 일단 순서를 고쳐야 겠네. 음악은 좋아해? 


 음악. 말씀이신가요. 글쎄요, 뭔가 좋아하냐는 질문은 처음인지라. 


 그럼 이제부터 좋아하도록 해. 


 음. 그럴까요.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줏대 없는 듯 하면서도 맞다 좋다 함부로 떠들지 않는 점은 좋아해. 


 저도 .. 좋아합니다.



 금방 상이 마련되고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도란도란한 분위기가 밥공기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밥이 아닌 그 따듯한 김같은 것을 먹었다고 생각했다. 수저에는 밥풀이 한 톨 남아 동료들을 애도하고 있었다. 



 잘 먹었어.


 네.


 잠깐, 앉아 봐.


 네. 앗.


 계속 거슬렸어. 손가락에 이건 뭐야. 상처야? 


 아니, 그. 면목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제때 이야기를 해 줬어야지. 내 피 색이랑은 달라서 금방 못 알아챘잖아.


..


 제발 버리지말아주세요절대로두번버림받고싶지는않아요제발요제발


..


 아 존나 짜증나네.


..


 어떠한 이유로든 나를 필요로 하는 여자가 시끄럽게 나불대면, 그저 단단히 껴안아주는 것보다 입을 다물게 하는 데 효과적인 것이 또 없는 것이었다. 아담한 체형이 품 속으로 쏙 들어왔다. 불과 몇 달 전에 안아봤던 여자의 몸보다도 훨씬 가녀린 듯 했다. 또 가벼운 듯 했다. 


 

 혼내려는 게 아니야. 쫓아내려는 건 더더욱 아니야. 넌 내 소유물이니까, 망가지게 둘 수 없어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해주면 될까.


 이정도 상처는 그냥, 하루정도 가만히 두면 다시 알아서 붙을 거에요. 그러니 제발


 더 말 하려고 하는 거거든 관둬. 나는 앵무새는 필요 없다고 했어. 또 실수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당치도 않아요, 정말. 더 폐 끼치는 건 사절이에요 .. 


 

 짜증이 일어서 참기 힘들었다. 넌 왜 내가 널 껴안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안겨있지? 왜 내 가슴팍에 몸을 기울이고 무게를 맡기고 있지? 



 난 네가 원래 애지중지하던 주인님도 아니고 그냥 길에서 널 무료로 주워온 속물같은 남자인데, 궁하면 암시장에다가 냅다 팔아버릴까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었다. 그런데



 왜 넌 이렇게 멍청하지? 날 자꾸 실망시키지 마. 감정은 성하면서 일만 못 하는 쪽으로 망가진 바이오로이드는 흔하지 않아. 너라면 그 경계선을 넘을 수 있어. 아마도. 너라면 끝내 인간이 될 수 있어. 어쩌면 인간보다도 더욱 고귀한 무언가가 될 수 있어. 그니까 날 실망시키지 마.



 바닐라. 벗어.


 네 ..? 


 벗으라고, 이 쓸모없는 년아.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년이 귀도 어둡군. 


 ..네



 왜 저항하지 않고 한 꺼풀씩 벗어버리는 건데. 넌 순종하는 게 아니잖아. 존속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잖아. 저절로 죽어갈 줄도 모르잖아. 죽지 않으니까, 갈아 끼우면 되니까 그리 순순히 몸을 대어 줄 수 있는거야? 한 순간에 괄시당한 네 삶을 변호하려고 내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살인예고까지 하던 얼마 전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거야? 


 넌 고귀하지 못 해. 난 처녀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이 씨발 멍청한 년.


 읏.. 


 넌 존나 저렴한 년이야. 


 하으으..


 이렇게 젖탱이를 조무르면, 살살 녹는 표정으로 침을 질질 흘리는 기능이 들어있어서도 아니야. 비록 꽤나 천박한 발상에서 온 기능이기는 해도. 


 응으흐으으아하아아.. 하아...


 멋대로 두근대기나 하고. 너 자신을 위해서 살아달란 말이야 제발. 내 엄마라는 작자마냥 평생을 꼴사납게 누구 똥꼬나 빨다가 죽지 말라고. 이 씨발!


 응핫♥ 하우우우으으주인니임.. 


 이젠, 흐. 주인님이라고 하네. 결국 여기에 육봉 쑤시는 짐승이 네 주인이라는 거냐? 그것 참 훌륭한 인수인계 절차네. 이 멍청한 걸레년아. 다 보지로 받아. 방전 될 때까지 좆질할라니까. 



 턴테이블에서는 계속해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녹음 현장일 그곳에는 훌륭한 베이시스트도 있었을 것이고, 드러머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멋진 관중도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지금은 그저 이 천박한 분노의 해소가 내는 질척한 소리의 방음체계에 불과했다. 감정의 연쇄적인 탈선을 뇌가 눈치채지 못하게 돕는 마취제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유품은 그러한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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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익, 탁. 창틀에 양팔꿈치를 걸치며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뻑뻑 바쁘게 피우는 작자들을 만약 담배를 태우던 선인들이 봤다면 한놈도 빠짐없이 다 죽였겠지. 그정도로 나는 볼품없게 연기를 들쑥날쑥 태우는 녀석들을 싫어했다./특히 그 빌어먹을 대학의 머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니에게 책임을 다 지우게 될 것을 알고도 목을 멘 아버지도 그들을 싫어하셨을까? 



 야.


 하아. 하아-


 담배, 펴?


 하아, 하아..


 이런.


..


 핫, 무슨 바보같은 질문인지. 그리고 무슨 바보같은 기분인지. 나는 왜 이 양산형 기계 따위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주인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일을 잘 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고.. 어쩌구저쩌구. 그렇게 태어난 아이인 것을. 인간도 그리 태어나면 그리 되는 건 다를 바 없는 것인데.

 


 한 번도 내가 비운 적 없는, 허나 비워져 있는 재떨이에 꽁초를 짓누른다. 깨끗하게 비워진 게 열받아서 괜히 더 드럽게 비벼서 세운다. 제아무리 간절히 바란다 한들, 여기에서 꽃이 필 수 있을까. 나는 재떨이 위에서 살면서, 괜히 날아든 민달래씨같은 우연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잠이나 자야지.  


..


 내 자리에서 자네. 


..


여자친구도 거기에선 잔 적 없는데. 


..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