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북한 지역

 무주지

 코헤이 자애병원



 세속의 권세도 버리고, 신의 권능도 버린 땅에서, 이제는 코헤이 교단이 운영하는 자애병원마저 그 땅에 사는 이들을 버렸다.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었던 자애였다. 일본의 주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넌지시 이야기하거나,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거나, 코헤이가 본색을 드러낸다면 언제든지 끝장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간단한 이유만으로도 끝장날 수 있었던 자애는, 너무나도 큰 이유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간단했다. 코헤이에 충성하는, 그리고 코헤이에게 쓸모가 있는 이들만 골라서 넣어도 병상 수가 부족했으니까. 


 "언제 병원이 다시 열립니까? 제 딸이 아픈데..."


 "아프고 지랄이고, 알 바 아니니까 꺼져!"


 "제발, 대략적인 기한만이라도, 예를 들어 다음 달에는..."


 "야! 꺼지라고!"


 직원들은 북한 사람들 앞에서 최소한의 가면조차 쓰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에 아침부터 와서 줄을 서고 있던 북한 사람들을 밀어내고, 저항하는 이들을 총으로 마구 쏴죽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들을 결국 밀어냈다. 병원 정문 앞에서, 환자들이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현실을 깨달은 이들은 제 발을 부지런히 놀려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났고, 그럴 힘이 없었거나 현실을 모르는 이들은 그 앞에서 죽어서, 그대로 버려졌다.


 하지만 그건 코헤이 교단이 알 바가 아니었다. 미국의 여자아이가 강간 살해당하는 건 전세계적인 정책의 변화를 이끌고, 세계의 대중 언론은 미국 대통령의 개인 경호용 리리스의 '귀여운' 면모를 방송한다. 하지만 북한인들은? 얼마나 죽건 누가 신경이나 쓰는가, 누구 알 바란 말인가.


 결국 그들이 알 바는, 북한에 묻힌 무언가가 될 수는 있어도 북한인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헤이 내부 사정이 제일 중요했다.


 "신이시여..."


 그리고, 코헤이 내부 사정이 워낙에 개판이었다. 자애병원 상층의 병실에서,  총무수녀는 코헤이의 길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마신 적 없는 술에 입을 대고, 한번도 피운 적 없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베로니카 48, 그 년의 머리에 박힌 총알은, 축복이 아니라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다.



 모든 재앙의 시작은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그리고 코헤이 전체에게 내려진 최악의 재앙들 중 첫 시작이었다.


 '씨발! 못 찾았다고 말하랬어! 찾아! 찾으라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게 말입니다...'


 '아이 썅! 지금 주교회가 난리가 났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총무수녀는 총무수녀보다도 까마득한 윗선에게 당장 찾아내라, 못 찾아내겠으면 자살해라. 시성은 시켜주겠다는 노골적인 협박까지 들었다. 총무수녀도, 자신을 까마득한 윗선이라 생각할 말단들에게 당장 찾아내지 않으면 다른 베로니카가 가서 너희들을 친히 죽일 것이라 경고하며 채찍질했다.


 하지만 찾아낼 수 없었다. 총무수녀가 통제할 수 있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베로니카들을 총동원해도 불가능했다. 방첩망에 걸릴 위험을 감수하고, 바이오로이드들의 '망명'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는 중국 지역에 요원을 침투시켰는데도 소득이 없었다. 동남아시아 지역, 중동, 북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중부 아프리카, 유럽, 러시아, 북미와 남미까지. 그 모든 곳의 협조를 받아내도, 전부 못 찾았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


 다크 웹에서 한 명도 놓친 적이 없다는 인간 사냥꾼들을 모집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는데도 찾을 수 없었고, 그 결과로 승승장구하던 총무수녀는 침묵의 징계를 받고 3달 간 업무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거기서 끝났다면, 3달간의 침묵, 사실상의 정직 처분만 받고 끝날 일이었다면 총무수녀의 커리어가 박살난, 그저 개인의 재앙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모든 게 철저하게 어그러졌다.


 코헤이 교단에 협조하는 군벌의 우라늄 광산을 일반 보병부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군 기갑부대가 들이닥쳐 전부 쓸어버렸다. 그들이 쓸 생각이 아니라, 아무도 못 쓰게 만들 모양으로 일을 저질렀단다. 아예 공병들을 불러 갱도에 폭약을 설치해 무너뜨리고, 철거할 필요도 없게 모든 시설들을 깔끔하게 박살냈다고. 그 과정에서 빼앗긴 광산을 되찾으려고, 군벌은 아예 버려진 북한군 전차까지, 코헤이에서는 베로니카까지 동원했지만 코헤이의 비밀 전술은 전혀 먹히지 않아 되려 전멸하고 말았다. 코헤이 교단 앞으로 날아온 국제원자력기구의 출석 요구서는 덤이었다.


 코헤이가 북한 지역에 마련한 안전가옥도 전부 박살나고, 일본 자위대 통제구역 바깥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관련자들이 전부 체포당해 관할국으로 끌려갔다. 북한 군벌과 협정을 맺어 가지고 있던 마약 공장은, 베로니카들이 지키고 있었는데도 한미 연합군의 특수부대가 전부 제압하고 깨끗한 상태로 확보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과 동북 3성에서 일하던 협력자들도 전부 연락이 두절되거나 총살당했다. 


 러시아를 경유한 인신매매 조직은 미군 특수부대를 대동한 CNN 촬영팀이 전부 드러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언론사들도 북한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코헤이 교단이 북한에서 벌인 일에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CNN, BBC, 폭스 같은 거대 언론사부터 이름도 한번 못 들어봤을 조그마한 언론사까지,  코헤이 교단이 북한에서 일을 벌이고 있다고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마치 모두가 코헤이의 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코헤이를 철저하게 분쇄하려 들었다. 


 '총무수녀! 나 아오야마 주교요. 그대가 저지른 큰 실수를 수습할 기회를 주겠소. 다만, 당신이 저지른 일이 일인 만큼... 정말 어려울 거야. 정말로. 그건 알아두시오.'


 그때 총무수녀는 어떤 업무도 수행할 수 없는, 정치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식물인간 상태였기에 그런 끔찍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대신해 임시로 동북아 지역 비밀작전을 수행하던 대리가 치명적인 사건사고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분쇄기에 갈려 닭 모이가 되면서, 모두가 그 업무를 기피했다. 시킬 사람이 총무수녀 말고는 없었다. 총무수녀에게 가해진 침묵 징계가 1달만에 '신앙 관련 발언 금지' 정도로 감경되면서 일선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 후 총무수녀는, 잃어버린 것을 당장 되찾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베로니카의 신체를 개조해 그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붉은 눈과 검은 머리칼을 다르게 만들고, 말투까지도 교정했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으아아악!!!"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마약 공장에서 중간 연락책으로 일하던 협력자들을 전부 죽여서 북한의 이름없는 산야에 묻었고, 일본의 마약 딜러들은 도쿄만 바닷바닥에 깔려 말을 못 하는 상황이 되었다. 


 "크흠! 정말로... 도움이 많이 되는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라카엘 님의 불호령을 들으니 정신이 다 깨는군요. 괜찮다면, 한번만 더..."


 우라늄 관련한 사건은 묻기가 정말로 어려웠지만, 자민당 의원들에게 온갖 접대와 뇌물을 바친 끝에 총알받이 역할을 맡은 광신도 몇몇이 15년형 정도를 받게 만들어서 꼬리를 잘랐다.


 "총무수녀님. 주교회에서 내려온 명령과 상충되는 지시입니다. 그런데도, 시행합니다."


 "총무수녀 권한으로 명령합니다. 즉시 시행하십시오."


  상층부에서는 무조건 북한 지역의 인신매매 사업을 사수하라고 명령했지만, 총무수녀가 파문을 감수하고, 완전히 끝장난 인신매매 사업을 지키는 대신 코헤이와의 연결고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을 전부 숙청하는 방식으로 꼬리를 잘랐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그나마 사건을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줄였다. 제 2의 옴진리교 사건으로 비화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내부의 사건과 북한의 실패는 수습했어도,외부의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국제원자력기구, 미합중국 마약수사부, 국제노예노동해방전선 같은 집단들은 북한인들처럼 관련자들을 찾아가 다짜고짜 총으로 쏴죽여서 입막음할 수 있는 하류인생들이 아니었다. 아니면 일본의 정치인들처럼 섹스 접대와 뇌물, 섹스 비디오 협박 따위로 흔들 수 있는 욕망에 충실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총무수녀는 병 때문에 요양하는 와중에도 예상 질문과 답변을 복기했다.


 "우라늄 채굴은 우리와 연관이 없습니다. 코헤이 교단에서 관리하는 광산이 몇 곳 있으나, 전부 석탄 광산이며, 이곳에서 채굴된 석탄은 모두 북한 지역 주민들의 난방, 발전, 그리고 자립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코헤이 교단에서는, 북한 지역의 발전적 자립을 위한 코헤이 교단의 시도에 찬물을 끼얹는 그런 일련의 음해 행위에 깊은 유감을 분명히 표합니다."


 국제원자력기구. 핵의 ㅎ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미국의 하수인. 연합 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이 패배했지만, 기업들 역시 어줍잖은 테러리스트들이 핵무기를 들고 설치다가 자기네 회사에서 핵폭탄을 터트리는 꼴은 바라지 않았기에 그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어차피 이들에게는 곧 들킬 운명이었다. 원심분리기에다가 우라늄을 집어넣는다면, 1피코그램의 우라늄도 잡아내는 이들에게 들켰겠지. 이래서 마약은 몰라도 우라늄 쪽은 건드리지 말자고 그렇게 건의했건만. 


 "마약 문제의 경우 코헤이 교단은 이에 대해 권장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사업을 경영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시하신 사례는, 북한 지역에서 활발하게 대민활동을 수행하는 코헤이 교단의 이미지를 악용해 각종 범죄를 저지르던 이들의 소행으로..."


미합중국 마약수사부. 고작 마약 하나만 맡는 곳이 '부'까지 붙었다. 마약으로 장사하는 모든 범죄조직들의 악몽이었다. 총무수녀도 정보기관에서 재직했기에 그들의 마약 전쟁은 잘 알고 있었다. CIA와 연계해서 중남미에 쿠데타를 사주해 독재정권을 설립하고, 블랙 리버와 결탁해 수십만명의 바이오로이드 병사들을 독재자에게 공급했다. 그 대가는? 마약을 재배하려고 하면 그 마약에 조금이라도 엮인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약 농장과 함께 불태워버리고 그 땅을 국유화하는 과격한 마약 금지 정책을 펼치도록 했다. 마약만 없앨 수 있다면 100억 인간을 다 죽인다는 방안도 진지하게 고려할 끔찍한 인간들이었다.


 "코헤이 교단 역시 모든 인간은 빛에게 고유한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 누구도 그 권리를 뺏을 수 없다는 교리로 각종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희도 국제 노예노동해방전선의 활동과 비슷하게, 아프리카의 군벌들을 공격하여 사실상의 노예 상태에 놓여있던 수천명의 아이들을 구한 이력이 있습니다. 만약 귀측에서 말하는 대로 코헤이 교단이 정말로 인신매매에 관여했다면..."


  마지막으로 국제 노예노동해방전선. 이들은 UN에 얼마 남지 않은 제 기능을 하는 국제 단체였다. 다른 조직들, 심지어는 유니세프와 유네스코조차 그 존립 가치가 위협받는 판에, 유일하게 국제적으로 지지받는 조직이었다. 사실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그들 역시 코헤이의 광신도들처럼 미친 놈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 코헤이 교단의 광신도보다도 더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뺏을 수 없는 천부인권이 있다"는 신념 하나만을 믿고 총무수녀를 지옥에서 올라온 사탄으로 규정해서 물어뜯을 게 뻔했다.


 "후우. 말을 말자."


 총무수녀는 한숨을 쉬었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출석 요구서, 코헤이 주교회의 질의서, 경시청이 숙청한 마약 딜러의 시신을 확보했다는 첩보, 국제노예노동해방전선이 코헤이 교단에서 판매한 아이를 미국 의회 청문회에 올리려 한다는 정보. 이 네 가지가 동시에 밀어닥치자, 뇌에 장착한 스트레스 호르몬 억제기가 고장나면서 쓰러졌다.


 눈을 떠 보니 바로 이곳, 병원이었다. 그러나 병원에 있다고 쉴 수는 없었다. 쉬면서 일해야 했고, 한 가지 일이라도 처리해야 했다. 의료기기가 삑삑대는 소리를 메트로놈 삼아, 손가락을 툭툭 튕기며 국제원자력기구의 조사를 비롯한 온갖 끔찍한 상황의 대응책을 생각하고 있던 와중,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찾아왔다.


 "사라카엘 님이 또 탈출하려 했다고? 아이 씨ㅂ... 아니, 신성한 직장에서 욕 쓰면 안 되지. 주교회에 알리고, 구속복 입히고 사슬 두 개 더 붙여. 지금 상태로 나갔다가는 진짜 병신이 되는 거야. 아자젤 님은 너가 가서 책임지고 상태 보고 있다가, 큰일날 거 같으면 나 불러. 바이오로이드가 패혈증에 시달리는 걸 보니까 상태가 말이 아니다."


 코헤이의 수많은 고귀한 인물들과 천사들을 치료했고, 비명에 떨어진 베로니카 48을 살려냈고, 이제는 총무수녀 자신을 보살피는 주치의. 주치의는 노크를 세 번 하고는 들어와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총무수녀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 그를 슬쩍 곁눈질했다. 주치의도 서 있다는 것만 빼면 총무수녀와 비슷한 몰골이었다. 눈은 충혈되었고, 머리는 헝클어졌고, 얼굴에는 수염이 잔뜩 자라 산적 같은 꼴이 되었다. 주치의는 의자를 끌어와 총무수녀 옆에 앉았다.


 "또 일을 하시고, 또 술을 드시는군요."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맡은 직무가 직무라 일을 안 할 수가 없고, 이 일을 하다 보면... 지금 상황에서는 술 없이 맨정신으로 일할 수가 없네요."


 "저야 이해합니다. 하지만 총무수녀님의 몸이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는 않겠죠."


 "일하다 죽으면 시성은 몰라도 시복은 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시복은 될 것 같습니다."


 "요즘 부상자가 많이 들어오나 보군요."


 주치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법도 했다. 사라카엘과 아자젤이 날아가는 사이, 어디선가 미사일이 날아와 '격추'당하는 일이 늘었다. 베로니카까지 낀 호송대가 북한 군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장을 갖춘 이들에게 습격당해 후송당하는 이들이 가득했다. 


그 때문에 북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던 1층도 북한 사람들을 전부 내쫓고, 그 자리를 코헤이 인원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꿔버렸으니. 이제 보니 주치의도, 상태를 보는 겸해서 쉬러 온 것 같아서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했다.


 "옛날 같았으면 살렸을 친구들도 못 살리고 있어요. 시간도 없고, 피곤해서 빠르게 판단이 안 되기도 하고."


 그게 다 돈인데, 주치의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코헤이에 고용된 일반 전투원들이 아니라, 베로니카들까지 사상자 분류를 통해서 당장 치료할 수 있는 이들은 살리고 어차피 죽을 이들은 산 채로 장기를 뽑았으니. 주치의는 좋았던 옛날을 떠올렸다.


 "옛날에는 모든 게 무한정이었죠. 자원도 무한, 인력도 무한, 시간도 무한. 베로니카 48 기억하십니까?  6번 경추 골절, 5번 요추 탈락, 대장천공 및 장기 오염, 과다출혈, 심혈관계를 포함한 다발성 장기부전, 안구 파열, 두개골 다발성 골절과 천공, 그리고 심각한 뇌출혈까지. 그런데 이게 살았단 말이죠. 그때 저는 남는 게 시간이었고, 그 수술을 집도할 때 저 말고도 수술팀이 3시간 단위로 8팀이나 대기했고, 그 베로니카 하나를 살리자고 혈액 냉장고 한 통을 통째로 털어다가 썼으니까요."


 "...베로니카 48."


 "아, 죄송합니다."


 신나서 마구 떠들던 주치의는, 그 베로니카 48이 총무수녀에게는 아주 특별한, 안 좋은 의미로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뒤늦게 기억해내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총무수녀는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고 표현하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그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요. 베로니카 48. 베로니카 48... 정말로, 그 년을 살린 걸 보면서 당신의 실력을 코헤이의 빛 다음으로 믿게 되었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베로니카 48은 어째서 도망친 걸까요? 사람이 좀 이상한 모습이 보이긴 했습니다만..."


 왜 도망쳤을까, 그 이야기에 주치의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심히 물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네, 그럼... 쉬는 시간을 겸해서..."


 주치의는 베로니카 48에게 있었을 변화를 설명했다. 그때 주치의가 베로니카 48을 어떻게 살렸을까? 그녀의 눈은 며칠 전에 폐기한 베로니카의 눈구멍에서 뽑아서 새로 달았다. 척추는 아예 새 것으로 갈아끼우고, 신경 플러그를 다시 꽂았다. 하지만 뇌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고, 뇌를 재생하는 과정은 다른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22세기를 바라보는 인간의 뇌과학도, 사람의 뇌를 죽음에서 완벽하게 끌어내기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신에게 그녀의 뇌를 맡기고, 긴급수복 절차를 진행해서 살렸다고 했다. 그런데 커넥톰 분석 자료를 다시 보고 생각해보니, 다른 부분은 전부 복구할 수 있었지만 신앙과 충성에 관한 부분은 도저히 복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은."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에게 당연히 복종하게 만드는 신경 프로그램은 망가졌고 복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관한 부분은 오히려 강화되었고... 뇌를 아무리 헤집어도, 그녀를 죽이지 않는 이상 망가뜨릴 수 없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몇 번을 시도했는데도 정상화가 불가능했어요."


 "즉, 그녀는 도구라서가 아니라, 코헤이의 신자로서 내 말을 따르는 꼴이 되었다는..."


 "그렇습니다. 이제 보면... 그녀는 기계가 아니라 광신도가 된 것 같습니다. 총무수녀님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총무수녀님을 신으로 모시는 광신도가 아니라..."


 "자신만의 빛에 대한 생각이 있고, 그 기준에 비춰봤을 때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총무수녀가 아니라, 천사고 뭐고 없을 수도 있겠군요."


 주치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총무수녀는 눈을 감고 침대에 제 몸을 눕혔다. 총무수녀는 베로니카 48이 봤을 수많은 광경들, 저질렀을 수많은 짓들을 떠올렸다. 자선 사업가가 코헤이의 뜻을 어긴 아동 성범죄자니 당장 죽이라는 식으로 명령했다. 사실은 코헤이 교단과 업무 영역이 겹치고, 그들 때문에 코헤이의 이미지 세탁에 해가 되어 제거한 것 뿐이다.


 코헤이를 믿고 있던 대통령이, 사실은 이단과 내통한 스파이니까 죽이라고 지시했고, 베로니카 48은 연설하는 와중에 그 사람을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고, 대통령의 살해를 지역의 토착 교단 과격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덮어씌우고 코헤이 교단에 순교자 이미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주교들이 모인 밀실 회담이 마지막에 난교의 장이 되었을 때, 베로니카 48이 그곳의 경호를 맡고 있었지. 그걸 전부 보았고, 알고 있는 년이, 오직 신앙만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광신도 괴물로 변했다라. 총무수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그녀의 머리에 납탄이 박히고 나서 변한 모습을 보고 좋아했던 자신을 저주했다. 그 변화를 더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 그 년의 머리에 총알을 꽂아넣어서 완전히 끝장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베로니카 48, 동북아에 배치된 베로니카들 중 최고의 자산이 그렇게 사라졌다. 


 "잠깐... 지금 이렇게 된 것도..."


 "총무수녀님? 무슨 문제라도?"


 이제 알 것 같았다. 베로니카 48의 이탈은 수많은 재앙들 중 처음이 아니라, 그 연속되는 재앙들의 시작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동안 미군 특수부대도 농락하던 베로니카가 어째서, 수적 우위까지 끼고 싸우는데도 미합중국의 군대를 이기지 못했을까?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우라늄 비밀 채굴은 몰라도, 우라늄 비밀 채굴과 코헤이 교단과의 관계를 어떻게 눈치챘을까? 마약 공장의 정확한 위치는 비밀 요원이 아니면 모르고, 안전가옥은 비밀요원들조차도 전부 아는 게 아닌데 어떻게 전부 위치가 들통나서 박살났을까?


 총무수녀를 대신해 잠시 들어왔다가 양계장 사료 신세가 된 친구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죽어나가던 미군 특수부대들이 갑자기 베로니카들을 잡아 족친 이유는? 미군 특수부대가 베로니카 48에게 코헤이의 전술을 학습받았을 수도 있고, 조금 더 열정이 있고 미군이 그녀를 조금 더 믿었다면 아예 훈련을 실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 지역의 우라늄 채굴과 코헤이의 커넥션을 눈치챈 이유는?  미국과 블랙리버가 핵확산의 ㅎ자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키고, 알지도 못하는 집단이 우라늄을 채굴하려 하면 난리가 난다는 점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우라늄 군벌과 코헤이 교단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추할 만한, 적어도 코헤이를 배후로 지목할 만한 정보를 누설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베로니카 48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가 소거법을 통해서 용의자를 코헤이 교단으로 줄일 정도의 정보는 건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마약 공장과 안전가옥의 위치가 드러난 건? 굳이 자문할 필요도 없었다. 베로니카 48은 북한 전역의 마약 공급망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코헤이 교단의 조커로 활약했다. 북한 지역의 자생 군벌이나 해외의 조폭들은 물론이요, 각국의 마약수사국도 당해내지 못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너무 주목이 쏠린 나머지 이틀마다 한번씩 안전가옥을 바꿔가며 추적을 피하고 조용히 숨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마약 공급망도, 마약 생산지도, 그리고 안전가옥도 베로니카 48이 ㄴ6잘 알고 있을 수밖에.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총무수녀는 손을 벌벌 떨며, 베로니카 48이 불러온 파장을 생각했다. 코헤이의 주교들이 이 상황을 알고 있을지, 모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몰랐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계속 몰랐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한국 속담이 있다지만, 또 잃는 걸 막으려면 어쨌든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엎지른 우유 때문에 울어봐야 소용 없다지만, 우유를 엎질렀으면 어쨌든 누군가는 닦아야 한다. 총무수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주치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뭐, 할 일이야 많습니다만..."


 "현재 들어온 베로니카들 중에, 신앙과 복종 부문에서 문제가 생긴 이들을 전부 조사하고, 복구가 불가능하면 싹 다 폐기하고 장기를 적출하세요."


 "...진심이십니까?"


 "네. 진심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리지만, 전 언제나 말을 할 때마다 진심입니다."


 "...일하러 가겠습니다."


 주치의는 머리를 싸매고 일어나서 병실 밖으로 향했다. 총무수녀는 주치의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미 떠나간 베로니카 48을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또다른 누군가가, 베로니카 48과 같은 꼴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오스트리아, 빈

국제원자력기구 본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양복쟁이가 그녀의 적이고, 그녀를 찍고 녹화하는 모든 카메라가 적인 상황. 총무수녀는 누가 펜을 잡냐에 따라서, 펜이 칼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무기보다도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지지 않고 분연히 코헤이를 변호했다. 그녀와, 그녀가 대변하는 코헤이 교단을 공격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다양했다.


 여태까지 은퇴해서 연금 안 받고 뭐 했는지 모를 빼빼 마른 영양실조 노인네부터, 대학을 졸업하긴 했는지 궁금한 어린 녀석까지, 그 많은 이들이 서류를 하나하나 짚으며 이야기했다.


 "사카모토 김이 북한 지역 우라늄 채광에 긴히 관여했다는 내부고발 파일을 확보했어요. 게다가 이 사람이 코헤이 교단에서 간부직을 맡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이거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당신네 조직도에 나와있는 사람이에요. 사람.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사람이 코헤이에서 직분까지 맡고 나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그런 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에 대해, 코헤이 교단을 대표하여 매우 큰 우려와 유감을 표합니다. 하지만, 코헤이 교단은 신도수가 1000만 명이 넘는 거대한 종교이며, 신도 개개인의 잘못을 코헤이 교단의 전체로 확대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명확히 반대합니다. 샬론타이 감독관님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교황청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합니까?"


 "원심분리기를 개조해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수준에 사용 가능한 물품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신고도 있어요. 여기 증거영상, 코헤이 교단에서 일하는 과학자가 이렇게 올려 놨네요. 야, 얼마나 당당하시면 아예 이렇게 인터넷에 영상까지 올라와 있던데, 국제원자력기구에 아예 자진신고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묻겠습니다. 이거 왜 그러셨어요?"


 "코헤이 교단은 빛의 사도로서, 빛이 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정한 섭리를 올바르게 탐구하는 것 역시 중요한 교리 중 하나로 삼습니다. 이것이 22세기가 다가오는데도 아직도 지구의 나이가 6000살밖에 안 됐고, 청동기 시대의 관절염 걸린 노인네가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서 세상의 동물을 전부 실어날랐다는 멍청한 소리를 믿는 집단과 차별화된 점이지요. 네. 원심분리기를 구매했습니다.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 세상에 원심분리기 하나 없는 연구실이 어디 있습니까? 코헤이 교단은 매년 과학 연구를 위해 매년 500억 엔의 예산을 출원해서 재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돈으로 원심분리기 하나를 안 산다면 그게 더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논점을 흐리지 마세요! 중요한 건 원심분리기를 샀다는 게 아니잖아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원심분리기를 개조했냐 이 말입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원심분리기를 개조한 사람은 헤클러 박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꾸 원심분리기 성능이 더 좋은 것이 필요하다기에, 불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불허했습니다만, 그러자 임의로 원심분리기를 개조했습니다. 이에 대한 처벌로 헤클러 박사를 즉각 해고했으며, 해당 원심분리기는 기술적으로 불안정해서 비싼 돈을 주고 다시 수리했습니다. 이상입니다."


 "그거 지금 증거 인멸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럼 그 원심분리기가 필요한 연구진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던지, 아니면 실험 하려고 모인 사람들한테 이론 화학 이론 생물학이나 하고 있으라고 얘기하면 됐던 겁니까?"


 계속 이야기가 이어졌다. 분명히 불리한 상황이었고, 저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확실하니 총무수녀도 마음 놓고 세게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들에게 틈을 보일 수 있는 기회는 주지 않고, 한 번, 두 번, 세 번 생각하며 대답했다. 최대한 개인 책임으로 몰고 가고, 확실하게 죽여서 입막음한 이들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말했다.


 "그 헤클러 박사한테도 우리가 출석 요구서를 보냈고, 출석 요구에 불응하길래 수배했는데, 자택에서 뒤통수에 말뚝이 박힌 채로 발견됐어요. 게다가 사카모토 김이라는 사람은 지금 실종된 상태입니다. 이거에 대해서 할 말이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체포된 북한의 우라늄 군벌들이, 전부 석연치 않게 사망했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코헤이 교단의 인장이 발견되었다는데, 이거 총무수녀 당신이 시킨 일 아닙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아닐 겁니다. 단순히 인장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코헤이 교단을 몰아가시려는 것은 아닌지요?"


 그 이후로도 계속 난타전이 이어졌지만, 그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몇 시간이 넘는 설전과 청문회가 끝나고, 국제원자력기구는 지금 당장은 총무수녀를 놓아주기로 결정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돌아가시지요."


 "감사합니다."


 "..."


 어떻게든 총무수녀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내려던 국제원자력기구와, 어떻게든 물어뜯으려 기삿거리를 찾던 기자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사실이지만 저들에게 증거가 없는 의혹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로 일관했다. 저들이 총무수녀의 뇌를 파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사실인 것 같으면, "확인해 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로 하거나, "믿는 신도 개인의 일탈입니다."처럼 꼬리자르기로 일관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연설하는 건 고역이다. 특히 그녀를 물어뜯으려는 사람이면 더더욱. 정보기관에서 일하던 경험을 살려 로봇처럼 감정을 죽이고 대답했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곳에 서 있었다고 생각하면... 코헤이의 역사가 그날에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소름이 쭉 돋았다.


 "총무수녀님. 이번 의혹에 대해 한 말씀만 해주시죠!"


 "주교단 중에 소아성애자가 많다는 의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총무수녀는 귀찮게 달려드는 두 발 달린 거대 모기들의 질문을 무시했다. 주둥이 대신 마이크를 내밀고, 카메라에 어떻게든 총무수녀의 모습을 담으려 했지만, 총무수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차피 좆된 상황에, 뭔가 수습하려고 더 얘기했다가는 좆되는 일밖에 생기지 않는다.


 "수고하셨습니다. 총무수녀님. 바로 공항으로 가실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1초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군요."


 운전기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페달을 밟았다. 총무수녀가 매일 보던 북한과는 달랐다. 정돈된 도로, 전기차로 가득찬 도로, 깨끗한 건물들, 세련되게 입은 사람들. 하지만 총무수녀는 이곳이 싫었다. 차라리 북한이 나았다. 단순히 이곳에는 코헤이 교단의 세가 덜하고, 소똥 냄새밖에 나지 않는 북한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총무수녀는 북한 지역에 한해서는 이면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북한 사람들이 살고 죽었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총무수녀가 나타나면 벌벌 떨었고,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이라도, 그녀가 수족처럼 부리는 코헤이의 종들 앞에서, 이 사람보다 더 위에는 누가 있을지 두려워하며 그녀를 경외했다.


 그뿐인가? 짭짤하게 마약을 팔고, 상층부가 원한 우라늄을 조달하고, 어떤 국가도 신경쓰지 않는 버려진 사람들을 팔면서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이곳에 그녀는, 그저 늙은 노인네에 불과했으니까. 빨리 이곳을 뜨고 싶었다. 차라리 북한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 어어?!"


 운전기사가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빵빵 울리는 크랙션 소리와 바퀴 끌리는 소리. 총무수녀도 그 소리에 옆을 돌아보고, 눈 앞을 가득 채운 트럭의 웅장한 앞모습을 보고, 차마 도망칠 수는 없었지만 쯧, 하고 혀를 찼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러서 겨우 눈을 떴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의 몸 상태가 어떨지는 잘 알 수 있었다. 트럭에 밀려 구겨진 자동차에 갇혀있으니까. 그리고 눈 앞에는? 그녀와 비슷한 신세로 전기자동차 안에 갇힌 운전사가, 충격을 받은 배터리가 내뿜는 불길에 산 채로 구워지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길..."


 총무수녀를 이를 악물고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다들 웅성거릴 뿐 그녀를 쉽사리 도우려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다친 사람을 끌어낼 만큼 선했지만, 불타는 차에 뛰어들 만큼 용감하지는 않았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데, 트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트럭 운전자가 옆 창문으로 나타나 총무수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빨리... 나를...!"


 총무수녀는 빨리 자기를 꺼내라며 악을 썼지만, 트럭을 운전하던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총무수녀는 발에서 점점 뜨거움이 느껴져 악을 썼지만, 그 사람은 총무수녀를 비웃듯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총무수녀는 마음이 급해져 소리쳤다.


 "당장 날 꺼내달라고요! 하다못해 구조대라도...!"


 "총무수녀님. 그러니까... 지금 고작 광신도 하나랑 노인네 하나가, 처신 잘못해서 트럭에 치인 것 가지고... 나한테 코헤이 교단의 추적을 받을 위험을 감수하라는 이야기입니까? 안 그래도 코헤이 교단에서 지금 날 찾을 수 있는 단서를 하나라도 얻으려고 안달이 나 있는데?"


 "이, 이 목소리는...! 베로니카! 왜 거기 있어요!"


 총무수녀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베로니카였다. 베로니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톤이 조금 달랐다. 그녀의 명령이라면 절대 복종하는 그 베로니카가 아니라, 마치... 


 "잠깐, 설마, 당신..."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한국 속담이 있지요. 총무수녀님."


 상대가 후드를 벗고, 자신의 검은 생머리와 붉은 눈을 보여주며 총무수녀의 '설마'가 맞음을 확인해주었다. 총무수녀는 바로 눈치챘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 48이었다. 홀연히 사라진,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라진 베로니카 48. 그녀는 베로니카 48은 살풋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총무수녀는 마지막 발악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악을 썼다.


 "이 년이! 사람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두다니! 양심이 아프지도 않느냐!"


 "양심이 아프다뇨? 아플 리가 없잖아요. 마치... 제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가만히 보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지 마세요. 그냥 쓰레기가 곧 타죽을 예정인 것뿐이니까."


 "이... 이... 베로니카, 이 년이...!"


 베로니카 48은 총무수녀를 감싸는 연기를 보고는, 표정에서 웃음기를 싹 뺐다. 그리고 총무수녀를 노려보며, 그녀가 품었을 모든 의문을 한번에 해결해주었다.


 "안서영, 안서영 자매의 죽음에 분노하는 척이라도 했다면, 마약 조직도, 우라늄 광산도, 인신매매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잘 풀렸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안서영...? 그게 누구야! 누구냐고!"


 "...이러니까 당신이 싫은 거야."


 그새 안서영이 누군지 잊어버렸구나. 베로니카-48은 진심으로 총무수녀를 경멸하며 뒤돌았다. 이제는 그녀가 불타도 알 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불타기를 바랬다.  


 총무수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베로니카는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베로니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경찰들도 찾으려면 꽤 걸릴 곳까지 들어간 다음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PDA를 들고, 비밀 번호로 누군가를 호출했다. 베로니카에게 뭔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게 있는지, 목소리가 잔뜩 변조된 상태였다.


 "국장님. 정보 감사합니다."


 "...하나 묻지. 자네가 원하는 건 정말 그게 전부인가?"


 "아직도 절 못 믿으시는 건가요?"


 "..."


 베로니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통화 상대를 떠보았다. 통화 상대는 잠깐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고작 그 늙은 여우 년 하나 죽이자고 이런 정보를 흘린다고? 베로니카-48, 자네의 공로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처음에는 자네가 흘린 정보가 역정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어. 왜인지 아나?"


 "...요구한 대가가 너무 작아서."


 "그래. 하나만 묻지. 너, 대체 원하는 게 뭐냐?"


 흠, 베로니카-48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해는 되었다. 베로니카-48의 존재가 모든 것을 뒤바꿨으니까. 지지부진하던 국제원자력기구의 수사도, 그동안 검증되지 않은 소문만 무성하던 북한 지역의 마약 실태도, 분명 북한 지역에서 온 것은 알 수 있지만 판매자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던 복잡한 북한 지역의 인신매매 시스템 추적도, 전부 베로니카-48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거나, 지금보다 한참 지지부진했을 게 뻔했다. 베로니카-48은 장난기를 부리며 말했다.


 "그러면, 제가 국장님한테 '무리한 부탁'을 하면, 국장님도 제 동기를 믿어주겠네요? 복수."


 "...뭐라고?"


 "코헤이 교단을 엿먹일 수 있는 카드가 있어요. 사라카엘, 아자젤, 라미엘, 엔젤. 그들이 주교 위에서 헐떡이는 걸 본다면 신도들이 참 좋아하겠죠."


 "...원하는 게 뭔지 말해라."


 "T-14 미호."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미호를 원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니면 그 많은 미호들을 다 달라는 것도 아닐 테고."


 "제 마음을 잘 아시네요. 그럼 말씀드리죠."


 후우... 베로니카는 숨을 들이쉬고, 자신이 원하는 미호를 특정할 만한 단서를 남겼다.


 "제3합동체계연구단 대테러연구팀 팀장이었다가, 서관 마을을 대위 계급장을 달고 통치했던 T-14 미호. 그 년의 생명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원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북한 빨갱이 두 명한테 미국 시민권이랑 주거지를 포함한 신분을 만들어주는 것 정도는 덤 느낌으로 해주실 수 있겠죠?"


 그녀는 아직 처리해야 할 빚이 하나 남았고,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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