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준비되었습니다.”

 

"고마워, 페로.”

 

"…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다 못해 저 한 명이라도 동행하시면...”

 

“됐어. 나 혼자가 편해.

내가 왜 괜히 리리스가 아니라 페로한테 동행해달라고 부탁했는데.”

 

"… 네, 리리스 언니라면 어떻게든 말렸겠죠.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바로 불러주세요.”

 

"알았어. 고마워.”

 

 

페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컴패니언 숙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발을 멈췄다.

 

 

"아, 주인님?”

 

"왜?”

 

“주인님께서 홀로 발키리 부관을 만나신다 강력하게 주장하셔서 리리스 언니가 말하지 말라 했던 것이 있어요. 

… 그래도 왠지 말씀 드리긴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뭘 말이야? 

 

“아르망 추기경께서 어떻게든 각하께서 홀로 가시는 걸 막으려고 하셨다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언니가 알려주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혼자 만나실 건가요?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

 

 

아르망이?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건가? 고민을 해봐야 할 일이긴 한데, 뭐 나 혼자 가면 발키리가 탈옥하기라도 하나? 아니면 뭐가 있나? 탈옥이라면 문제가 되긴 할 텐데, 이 시설을 보면 별로 그럴 것 같지도 않고?

 

 

“됐어. 금방 갔다 올 테니까.”

 

"… …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일이 있으시면 바로 저희를 불러주세요.”

 

 

페로는 다시 가던 길로 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간이 감옥으로 가는 통로 같은 방이다. 확실히 바이오로이드를 가두는 감옥은 그 규모도 제법이다. 몇 중으로 감싼 철제 문은 당연하고, 그런 문을 몇 겹으로 보안하기 위해 방 몇 개를 사용해 각 방마다 30cm가 넘는 철문을 달아 놓았다. 그나마 이전에 사용하던 것을 보수, 관리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기간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도 빨리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 오르카 호에 이 정도 시설이 있었을 줄은 나도 몰랐다.

 

 

 

 

"… 완전 영화에서나 보던 1급 죄수용 감옥인데…

...

아니지, 내가 여기 있는 게 영화보다 더 말이 안 될 일이다.”

 

 

발키리는 외부에서 이곳으로 비밀리에 이송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기 위해 컴패니언과 호드가 힘을 썼다고 하니, 발키리 한 명을 위해 참 많이도 고생을 하는구나 싶다. 이 정도로 준비가 필요했으면 그냥 괜찮은 곳으로 추방을 하고 내가 만나러 갈 것 그랬다. 괜한 욕심이었나?

 

 






--끼이익---

 

죄수방과 가장 가까이 있는 철제 문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이런 부수적인 것들까지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

 

내가 문을 열자 안에는 실험실 같이 방탄 유리로 격리된 곳에 발키리가 온 몸이 결박된 채 묶여 있었다. 입에는 어떤 식으로 장착 할 수 있는 건지 감도 안 오는 알루미늄 마스크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딱 붙어 있었고, 팔 하나에는 각각 하나씩, 천장과 연결된 거대한 강철 수갑이 달려 있었다. 신체 하반신을 전부 결박하고 있는 거대한 기계가 보이는 것 그대로, 발키리를 삼킬 듯한 위용을 내뿜으며 웅웅 소음을 내고 있었다.

 

 

"…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는데...

… …

… 어디 보자… 닥터가 여기 어디에 버튼을 달아놨다고 했는데…”

 

 

이곳에 오기 전에 닥터가 간략하게 설명을 하면서 방 안 쪽 책상 아래에 버튼을 달아놨다고 했다. 결박 장치들을 해제하는 버튼이니 대화를 하고 싶으면 조심해서 누르라 했다. 다시 결박하는 장치는 못 만들었으니까 생각을 하고 풀어주라 했다.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여기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 일이고, 나간다 한들 바로 탈옥으로 간주되어 컴패니언 전체의 추적을 받게 될 텐데.

 

 

 

-끼릭--끼릭끼릭-----

 

버튼을 누르자 장치의 기믹이 풀리면서 발키리가 땅으로 풀썩 떨어졌다. 거칠게 숨을 쉬는 것을 보니 바이오로이드라도 이 정도의 결박은 힘들어 하는 것 같다. 뭐... 그래야 벌이라는 구색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발키리의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다.

 

 










 

"… … 왜 오신 겁니까. 각하.”

 

"그냥, 얘기를 좀 하고 싶었거든.”

 

 

발키리가 있는 방으로 스피커가 하나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마이크를 통해 발키리와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이크 소리가 지직 거리는 것을 보면 이것 상태도 영 아니다 싶다.

 

 

"… … 전에 만나 뵀을 때와 비교하면 우스운 꼴이군요.

이런 제 모습을 보니 재미있으시겠습니다. 각하.

이전의 사령관도 그랬는데 말입니다.”

 

“난 이런 걸로 재미있어 하지 않아.

도대체 나와 그 새끼를 언제까지 비교해야 속이 풀린 작정이야?”

 


발키리의 어깨라 위로 한 번 튕기고는 다시 내려왔다. 비웃는 건가.



“그냥 농담 한 번 했을 뿐입니다.

지금 제 꼴은 제가 봐도 우스울 노릇이니, 각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틀렸습니까?”

 

"응, 틀렸어.

내가 너를 안 죽이게 하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서 하는 말이야?”

 

"글쎄요, 저를 먼저 범인으로 지목하신 건 각하 아니십니까?

저를 범인이라 하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뵐 일도 없었겠죠.”

 

“사람 속 터지게 하는 소리 하지마.

내가 너를 범인이라 알려준 건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보호하려고 했던 거라고.”

 



"… 이해가 되지 않는 군요.”

 

"그래, 그렇겠지. 너를 찾으려는 수사가 얼마나 정신 없었는지 알 턱이 없으니까.

내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어도 컴패니언 애들이 내 패널까지 다 뒤졌을 거라고.

애들이 나 몰래 한 게 어디 한두 개도 아닌데, 나를 위해서라면 그런 것도 했겠지.

그랬으면 이 문제에 내가 관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을 거 아니야.

이제 이해가 좀 되니?”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 그래도 설명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하여간 무슨 생각인지 모를 애라니까.”

 


이번에도 발키리는 고개를 으쓱거렸다.



“그런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그보다도 각하를 위해 각하의 패널을 뒤진다니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앞뒤 안 맞는 게 어디 한두 개니?

다른 모든 단서는 전부 꽁꽁 숨겨둔 네가 나한테만 결정적인 단서들을 놔둔 것도 앞뒤가 안 맞지."


"궁금하십니까?"


"궁금한 게 한두 개여야 말이야.

...

… … 그보다도… … 흠…”

 

"왜 그러십니까?”

 

“전용 회선 해킹은 어떻게 한 거야? 대체?

닥터도 못 하는 걸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해서.”

 

 

발키리는 나를 뻔히 쳐다보았다.

 

 

"… ...”

 

"왜, 말 못할 일이라도 있어?”

 

"아뇨,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닥터도 하지 못하는 걸 제가 할 수는 없겠죠.”

 

“하하… 그래, 그렇겠지.

근데 했으니까 문제지.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잖아.”

 

“방법이 뭐 따로 있겠나요?

보안이 튼튼하면 그냥 정문으로 들어가면 되죠.”

 

"… … 난 너한테 전용 회선 암호 코드를 준 적이 없는데?”

 

“그 또한 맞는 말씀입니다.”

 

"… 훔쳤어?”

 

“저는 그게 어디 있는 지도 모릅니다.”

 

"… 뭔데, 어떻게 한 건데?”

 

"… …”

 

 

발키리는 묵묵부답이었다. 통신 보안을 위해서라도 더 캐물어야 하나 싶었지만, 리리스가 이런 걸 안 했을 리도 없고, 그냥 넘어가자. 시간이 없다.

 

 

"… 그래, 넘어가자.

근데 정문으로 들어 올 수 있는 애가 뭔 꼬리가 그렇게 길어서 기록을 다 남기고 그래?

나였으면 그보다는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고 온갖 애를 썼을 것 같은데?”

 

"… 하하하… 그래도 덕분에 잡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애들이 내 패널과 통신 회선을 뒤져도 알 수 있는 건 없었겠지.

근데 안 그랬잖아. 마치 찾으라고 놔뒀던 것처럼.

그럼 너도 알고 있지 않아? 

내가 아니라, 컴패니언 애들이 직접 패널을 뒤져서 찾았을 때 애들이 너를 어떻게 했을지?”

 

"… ... 영리하시군요. 각하.”

 

“영리는 개뿔,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것도 생각 안 할까 봐?

내가 그것 때문에 며칠을 고민 했었는지 알아?

너를 보호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애들이 자기 힘으로 너를 찾으면 그 때는 어떻게 될까,

내 팔자에도 없던 걱정을 네 덕분에 셀 수도 없이 했다고.”

 

"… 확실히 컴패니언 쪽에서 먼저 찾는 모양이 되면 각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제한됐겠죠.

그렇게 되면 일의 주도권은 각하가 아닌, 리리스 경호대장에게 넘어갔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분이라면 그렇게 됐을 때도 알아서 잘 하셨을 수 있지 않을까요? 궁금하군요.”

 

“이미 일어난 일 뒤처리 하는 것도 힘들어 죽을 뻔 했다.

더 이상 이상한 짓 하지 마.

내가 감옥살이 하는 걸로 이 일을 마무리 하려고 뭔 짓을 했는데.

애들 풀어서 가짜 소문 퍼트리고, 네 이야기 덮으려고 내가 이곳 저곳 안 돌아다닌 곳이 없어.

가서 직접 케이크 배급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무슨 아이돌이라도 되는 줄 알았단 말이지.

그래도 덕분에 지금은 밖도 잠잠해졌어.

에휴... 내가 너 때문에 무슨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 ...”

 

 

발키리는 눈을 토끼마냥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 왜, 할 말 있어?”

 

"발할라..."


"응?"


"... 발할라 대원들은 잘 있습니까...?"



발키리는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 정말입니까?"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해서 뭐하겠어."


"... ..."


"정 못 믿겠으면 이거라도 봐바."



나는 주머니에서 다 녹아버린 초콜릿 바를 꺼내들었다. 오기 전에 냉장고에 조금 얼려놓기는 했는데, 여전히 포장지 너머로도 끈적거렸다.



"... 뭡니까?"


"알비스가 이거 너한테 달라고 부탁하더라.

쪼르르르 달려와서는 자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 주는데 안 받을 수가 있어야지.

밥도 안 먹고 다닐 텐데 이거라도 먹을 수 있게 해달라 하더라."


"... ..."


"근데... 하, 참... 이걸 주려고 해도 여기 뭐 빈틈이 있어야지.

이 창문 말고는 다 벽이고, 창문도 전부 다 강화 유리 같고...

여기 환풍기는 없어? 뭐가 이렇게 콱 막혀있냐?"


"... ..."



발키리는 창문 너머 책상에 놓은 초콜릿 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얼마나 포장지를 만지고 만졌으면 일부는 닳아 은색의 비닐막만 보일 지경이었다. 냉장고도 있을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보관하는 이유는 나도 도통 짐작할 수가 없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발할라 아이들의 처량함을 대변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초콜릿 바가 아니라 초콜릿 반죽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덩어리를 발키리는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 ..."


"이제 좀 믿겠어?" 


"... 네. 믿겠습니다."


"그럼 이거는 내가 여기에 따로 둘 테니까 나중에 밥 가지고 올 때 같이 넣어달라고 해.

내 명령이라 하면 이거 하나 정도는 해주겠지 뭐."


"... 알겠습니다."



발키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난 그것도 부담스러워서 이리저리 이상한 곳은 없는지 살펴만 보았다.이렇게 보니까 여기 벽은 구멍도 없다. 밥도 안 먹고 사나? 밥 넣어주는 구멍은 있을 텐데?


















"각하."



발키리가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왠지 섬뜩한 웃음과 함께 말이다.





"... 왜."


"그냥 놀라서 그랬습니다."


"뭐가?"


"제 생각보다 영리하셔서 놀랐습니다.”

 

"... 욕을 하려면 해도 되니까 그냥 해라."


"칭찬입니다."


"… 뭔 칭찬이 이렇게 욕같이 들리냐?”

 

“정말입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시라 생각했는데, 일처리가 생각보다 능숙하시군요.

많은 사람들의 시야를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옮기고, 그 사각에서 기존의 일을 묻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많이들 그렇게 하잖아.”

 

“하지만 그걸 현실에서 직접 하는 것은 어렵죠.

그런 지적인 면모를 보니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감동이라면서 어쩜 저렇게 표정이 변함이 없는지 신기하다.



“감동은 개뿔…

…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냥 조용히 있자고.”

 

"… 예, 가만히 있을 겁니다.

저는 말이죠.”

 

"… ?”

 

 

자기는? 그럼 다른 누군가가 시끄럽게 할 것이란 뜻인가? 애초에 이렇게 뻔한 소리를 왜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하는 거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란 뜻인가?

 

 

"… 무슨 뜻이야?”

 

“표면적인 의미 그대로입니다.

저는 가만히 있을 것이란 뜻이죠.”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냐고.”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신 각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 너한테 받은 선물에는 좋은 기억이 없는데 말이지.”

 

“그래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럼 '너'는 안 움직일 거란 게 선물이란 거니?"


"그걸 알려드린다는 것이 선물이란 것이죠."


 

 

발키리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것이 미소인지, 조소인지 캐묻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물어본다고 알려줄 것도 아니니까.

 





 

"… 에휴... 시간 없으니까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사진, 그걸 나한테 보낸 이유가 뭐야.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그런 걸 보면 무슨 일을 겪을 지 니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일처리 하시는 것을 보면 평범한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말 돌리지 말고!

왜 그랬던 거냐니까?”

 

“정말 모르십니까?”

 

"왜, 그것도 내가 추리해야 하는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뭐… 원하시면 말씀 드려야죠.” 

 


발키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야 각하께서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뭐?”

 

“모르는 무언가를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는지 아십니까?

하물며 그 사진들은 경호대장과 지휘관들이 힘을 합쳐 각하께서 알지 못하게 막던 정보 아니었습니까?

그런 것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알게 되셨으니, 선물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지 않습니까?”

 

"… 뭔  개소리야?”

 

“그래도 다행입니다.”

 

“뭐가?”



발키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각하께서 그렇게 아프셨던 것을 보고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각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쾅----

 

“야.”

 

"네. 말씀 하시죠.”

 

“너는 내가 고통 받는 게 웃겨?”

 

“그럴 리가요.”

 

“개소리 하지 마.

내가 그것 때문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그렇게 죽어간 애들 때문에 며칠이나 잠을 못 잤는지 알아?

차라리 전쟁터에 가서 총 맞고 뒤질까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는 알아?

그 빌어먹을 죄책감 때문에 몇 번이나 토를 했는지는?

그게 기쁘다고?”

 

"네. 다행입니다.

몇 번이나 말씀 드려야 합니까?”

 

"야!!!”

 

"… ... 하.”

 

 

내가 유리창을 부숴질 듯이 칠 때도 발키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궁금하십니까?

왜 다행이라 했는지?”

 

"뭐, 내가 물어보면 알려줄 생각은 있어?”

 

"물론이죠.

전 각하께서 저에 대해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각하가 좋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좋아? 내가 좋은 사람이야?

그럼 너는 뭔데? 그런 사람을 괴롭히는 너는 뭔데?”

 

"제 스스로가 악역이 아니라 할 생각을 없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악역을 자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 한 번 들어나 보자고.

왜 그랬는지.”

 

 

나는 앞에 있는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각하께서는 저희를 사랑한다고 하셨죠.

근데 누구도 그걸 증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존재에게 그렇게 당하고 나서도 그저 사랑이라 하면 좋다고 달려드는 것이?”

 

“난 그 사랑에 보답하려고 열심히 살았다 생각하는데.”

 

‘제 기준에서 각하의 행동은 충분치 않습니다.”

 

"… 뭘 더 원하는 데?”

 

“뭘 더 원하는 건 아닙니다.

무언가를 원하는 것인지 아는 것은 명확하게 자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각하도 아시겠죠. 저희는 원래 사람을 섬기도록 만들어졌다는 걸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졌을지언정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받으면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지렁이마냥 밟으면 꿈틀거린단 말이죠.

고작해야 꿈틀거릴 정도지만 말입니다.”

 

"... 그래서?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내가 사랑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거야?”

 

“어찌 각하 같은 분께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각하께서는 이 사랑 받아본 적 없는 자매들을 사랑해주는 걸로 사랑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네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상황은 객관적으로 봐야겠죠.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각하께서는 괜찮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에는 증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불확실한 어떤 것을 믿는 것은 신물이 나서 말입니다.”

 

 

발키리는 표정에는 무언가 말하기 힘든 광기가 서려있었다.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있긴 하는, 익숙하게 자신의 가면 뒤로 숨겨놓은 형언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더욱 나로 하여금 발키리를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건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이미 스스로를 증명하셨으니까요.”

 

"내가?”

 

“그렇게 고통 받으신 것.

그것이 제가 원한 유일한 각하의 반응이었습니다.

그건 각하께서 저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였으니까요.”

 

"… 뭐?”

 

“그 사진을 받고 우울해하시는 각하의 모습을 직접 뵙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죠.

컴패니언의 경호가 평소 이상으로 세밀하고 계획적으로 변했다는 것.

각하께서 드시는 음식이 평소보다 유독 많이 남았다는 것.

그런 정황들을 보면 각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 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증명이 되었으니까요.”

 

"… … 그러면 이제 끝난 거야?”

 

 

발키리는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각하께서 슬퍼하시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쉽지만 그런 분을 사령관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는 보다 더 강인하고 담대한 분이 필요하죠.

고작 사진 몇 장 보고는 들어 눕는 분이 아니라 말입니다.

 

"… 뭐?”

 

"아쉽지만, 각하께서는 사령관의 자리를 맡기에는 너무 나약하다는 말입니다."









---쾅!!!---

 

난 아까보다 더 세게 유리창을 치면서 말했다.

 

 

“아까는 슬퍼해서 다행이다 어쩐다 했으면서

이제는 슬퍼했으니까 사령관이면 안 된다?

어쩌란 거야?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그냥 다 안 되는 거야?”

 

“안 될 일은 없습니다.

각하께서 슬퍼하시면서도 스스로의 일은 충분히 처리하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각하께서 쓰러져계실 때 얼마나 많은 인원이 각하를 대신하기 위해 고생을 했는지 생각해보시죠.

각하께서 밤잠 못 샜던 것처럼 그녀들도 잠을 자지 못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버려지는 자원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이, 더 힘든 곳을 탐색해야 했습니다.”

 

"… 그건 너의 자업자득이지.

사진을 보여준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그런 것을 생각해보셨던 적이 있습니까?

자기가 누우면 얼마나 많은 자매들이 고생하게 될 지?

그럴 리가 없겠지요.

만약이라도 그랬다면 저희를 그렇게나 사랑하시는 각하께서 그렇게 무력하게 누워계셨을 리 없으니까요.”

 

"…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럼 결국 토하고, 그만큼 쳐먹으면서 할 일은 하라는 거잖아.

그 딴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는 건 뭐 하자는 거야.

난 인간이라고! 

니들 같이 튼튼한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고!”

 

“각하.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각하께서는 쓰러지셨고, 그 때문에 많은 자매들이 고통받았습니다.

그런 자가 사령관일 수는 없습니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사람이면서 바이오로이드보다 일도 더 많이 하고, 사랑도 해야 한다?

왜, 다음부터는 나보고 전투도 직접 하라고 하지 그래?”


“각하, 냉정해지시죠.

다들 각하를 사령관으로 인정해주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이런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사령관 되는 자가 어찌 죽어가는 병사들도 모를 수 있겠냐 말입니다.

사령관으로 모시면서, 사령관이 알아야 하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니, 그건 분명 과보호죠.

지금 지휘관들은 마치 시간만 지나면 각하께서 알아서 사령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것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너야 말로 다른 애들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잖아!

애들이 그냥 내가 적응하기 위한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일지 어떻게 알아?”

 

“그 시간은 어디서 나오죠?

그 시간을 버는 것이 누구냔 말입니다.”

 


발키리는 내 말을 자르듯이 물었다. 



"그건 당연히...!!"


"당연히 저희죠. 저희의 죽음으로 시간을 버는 겁니다.

전쟁에서 시간은 목숨과만 맞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겁니까?

수많은 자매들이 각하께서 사령관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죽어가는 겁니다.

목숨으로 번 시간, 당연히 가장 효율적인 길로 가야 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를 그렇게 죽기를 바라십니까?

저희를 사랑한다는 각하는 어디 계신 겁니까?

각하께서는 스스로의 논리와 어긋나는 길을 가고 계십니다.

저는 그걸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 그건 알려준 게 아니라 너의 욕심이지!

난 나가서 싸우라고 한 적도, 가지고 있는 자원을 흥청망청 쓴 것도 아니야.

오히려 너희 때문에 내 밥도 줄이고, 내 시간 전부를 할애하고 있는 거라고.

근데 너는 처음부터 내게 완벽을 요구하고 있잖아!

그건 욕심이지. 과욕이라고!”

 

"네. 욕심인 거 압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꿈꾸면 안 되는 겁니까?

말씀해 보시죠. 저희는 각하께서 훌륭한 사령관이 되시는 꿈도 가지면 안 되는 겁니까?

늘 각하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더 나은 모습을 위해, 각하께서 더 나은 분이 되게 만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안 되는 겁니까?”

 

“발버둥? 발버둥 친다고? 

헛소리 하지마!

발버둥을 치든 뭘 하든 난 상관없어!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내 주변 애들을 셀 수도 없이 걱정시켰다고!

근데 이제는 그것도 내 탓이라 하는 거야?!!

그 사진에서 죽은 애들도 내 탓이라 했던 것처럼??”

 

“… ...”

 

“내가 그 사진에서 죽은 애들이 누군지 내 힘으로 찾아보려고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

죄책감 때문에 눈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보고서를 수십, 수백 장을 뒤져봤다고!

그래, 그런 건 사령관이면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이겠지?

근데 난 아니라고! 나한테 당연한 게 아니라고!!

근데 왜 그걸 당연한 거라고 하는 건데!!

넌 내가 정말 그냥 사령관일 뿐인 거야??

나를 단 한 번이라도 나로 봐준 적은 없어?”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동화? 너에겐 지금이 전쟁일 지 몰라도 나에겐 이건 삶이야!

전 지구 상에 혼자 남은 사람이라고!

너희를 사람이라 봐줄 때는 사람도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 겨우 익숙해진 걸 이렇게 끄집어 내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니?

멸망 전 사람에게도 그랬어? 이렇게 절벽에 떠미는 식으로 사람을 사령관으로 만들었냐고!”

 

“각하시니 이런 과격한 방법을 택할 수 있던 겁니다.”

 

"나니까? 나라서 이렇게 했다고??

하! 내가 우습게 보였다는 뜻이야?

아니면 나 같은 병신이 사령관 놀이나 하고 있는 꼴이 아니꼬왔던 건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쾅!!---

 

유리창을 너무 세게 때렸다. 손에서 피가 났다. 피가 나는 것은 아프지 않았다. 뼈가 아팠을 뿐이다.

 

 








 

“너… 너는 진짜 기계처럼 생각하는 구나?”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뭐에 그렇게 쫓기는 건데?”

 

“전쟁에서는 모든 것에 쫓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죽어도 그렇게 할 거야?”

 

"… ... 죽지 않게 할 겁니다.” 


"안 죽어? 지금 내가 니가 보여준 그 사진들과 그 죄책감 때문에 뭐까지 했는 지 알아?

밧줄을 들고 와서 어떻게 묶어야 내 몸이 달려도 매듭이 풀리지 않을까, 그걸 고민했다고!

언제 죽어야 애들 몰래 죽을 수 있을까? 어떻게 죽어야 사후 처리하는 애들이 제일 편할까?

그걸 생각하면서 나 혼자 시간을 보냈다고!”

 

“... ...각하, 강인해지셔야 합니다.”

 

"강인? 그러다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그 때 가서 그럴 거야?

사령관은 강인해져야 하는데 이 새끼는 강인하지 않았다고?

이 새끼는 사령관 할 만한 놈이 아니었다고?

내가 그 사진을 몇 번이나 봤다고 생각해?

아침에 일어나면 그 빌어먹을 기억들이 자꾸 떠올라서 속이 몇 번이나 뒤집어졌다고!

근데 이제는 그것도 내 탓이라 하네?”

 

"… 각하 제발 냉정하게...”

 

"냉정? 하, 냉정?? 

난 하다 못해 네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할 줄 알았어!

내가 여기 왜 왔는데!!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그 소리 한 번만 듣고 싶어서, 너랑 화해하고 싶어서!

그래서 이 모든 걸 만들었다고!

따돌림 당하는 발할라 대원들 때문에 네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발할라 아이들에게 자원도 더 주고!

애들이 발할라 부대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가지도록 팔자에도 없는 광대 노릇이나 하고!

나를 믿어주는 애들의 믿음을 이용해서 다른 곳으로 시야를 돌렸어!

레오나를 만나서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고!

근데 넌 고작 한다는 소리가 사령관 자격 실격이라는데, 근데도 나보고 냉정해지란 소리가 나와?!!!”

 


묵혀있는 응어리들이 터져나오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소리 한 번 쳐본 적 없던 목이 갑자기 무리를 했는지 켁켁 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 … 화를 내시는 군요.”

 

“그럼 화가 안 날까?

난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어!

계획에 없던 일들도 셀 수 없이 하면서 애들 기억에서 이 사건을 겨우 지웠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애들과 지휘관들에게 미안해 하면서 고개를 숙였는데?

그게 다 너 때문이었어! 너를 보호해주려고!

근데 넌 이런 나도 만족스럽지 않은 거야???

아직도 내가 실망이냐고!!!!”

 

"… ...”

 

 

발키리는 고개를 들더니 말 없이 계속 천장을 쳐다보았다. 너무 화가 났다. 자기랑은 전혀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로 보였다. 난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 이렇게 고생을 하고 생각을 했는데, 이 애는 나를 그냥 사령관 자리를 채울 사람으로 보고 있구나. 실망스러웠다.

 

 

 

 

 

 

 





 

"… … 더 말 해봐.

내가 니 마음에 차는 사람이 아니니까 실망이라도 해보라고.

그럼 내가 사령관 권한으로 당장 풀어줄게. 그리고 밖에 나가서 내가 너를 위해 뭘 했는지를 봐.”

 

"… 제가 고마워 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 니 마음대로 해.

실망을 하든, 개판을 치든, 아니면 아직도 마음에 안 드는 내 머리에 총알 쏴서 죽여버리든.

난 니 바람과 달리 그냥 평범한 사람이거든.

이렇게 바라는 게 많으면 그냥 죽여. 그게 더 편하겠네.”

 

"… … 너무 흥분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진정을...”

 

"내가! 진정을! 하게 생겼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난 나를 사랑해준 애들의 의견을 전부 묵살하고 여기까지 왔다고!!!!

이 빌어 쳐먹을 감옥이 이 오르카 호에 다시 나타난 것도 전부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니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그 옛날 것들은 전부 치워버리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 때 남은 것을 부활시키라고 내가 명령을 내렸는데!

내가 이걸 다시 만드는 애들 기분을 몰랐을 것 같아??

그 기분을 알고도 명령을 내린 내 기분을 네가 아냐고!!!

근데 왜 나한테만 그래??? 난 너를 살려주려고 했는데, 그걸로 안 돼?

안 되는 거냐고!!!!”

 

 

"… ...”

 

"… 나를 지난 시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지마.

난 내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여기 왔을 뿐이야.

그래도 난 나를 싫어하는 애들을 원망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했어.

전부, 내가 이렇게 한 것도 전부 너희와 함께 살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근데 너는 아닌 것 같네.

너한테 나는 그냥 대용품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되네. 선물이라 했던 것도, 슬퍼하는 걸 다행이라 했던 것도.”

 

"… … 그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랬다면 각하라 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각하? 그딴 호칭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넌 나를 각하라 생각도 안 하잖아!

각하가 될 만한 후보자 중 하나쯤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내 할 일을 다 했으면 그 다음은 뭐였는데?

그 이상으로 나한테 뭘 바랄 생각이었는데?!!”

 

"… … 죄송합니다.”

 

“미안하긴 개뿔!!!

너가 나한테 진심으로 미안하다 생각했던 적은 있어?

나한테 사진을 줬을 때도 난 병신마냥 그게 무슨 선물일지 기대를 하면서 열어봤다고!

너가 범인이라 알려질 때도 죽어가는 애들을 알려준 목적이 뭐였을 지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해줬어!

하다 못해 내가 나를 위해 그런 일을 했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고!

사령관이라면 알아야 하는 것임은 틀림 없었으니까!

그런데 뭐? 일도 해?

일도 하고, 슬퍼하기도 해? 

아니! 너라면 백날 일 해도 안 슬퍼하는 거라 했겠지!

너한테 내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으니까!!”

 

 

 

 

 

 

 

 

 

 

 

발키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 … 각하.”

 

"… 시끄러워.”

 

“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십니까?”

 

"… ...”

 

 

내가 그 주제에 대해서는 약하단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발키리는 입을 열었다.

 

 

“아이를 죽이고, 뜯고, 자매를 살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손에 묻은 피를 닦기도 싫어지더군요.

그래서 그냥 장갑을 꼈습니다. 장갑은 벗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 ...”

 

 

문득 발키리의 흰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죽고 싶다 하셨죠.

밧줄로 목을 매 죽고 싶다 하셨죠.

저도 무슨 감정인지 압니다. 무슨 기분인지 아주 잘 알죠.”

 

“네가 어떻게...”

 


발키리가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 밝은 웃음이었음에도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바이오로이드는 어떻게 자살할 수 있을까요?

사람보다 몸도 더 튼튼하고, 목숨줄도 더 질긴 바이오로이드가 말입니다.

바이오로이드가 밧줄로 목을 매달아 죽으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에 몸부림쳐야 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자매를 죽여야 했거든요.”

 

"… 그건 나에 대한 공감이야, 아니면 조롱이야?”

 

“공감도, 조롱도 아닙니다.

그저 각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자매들을, 그것도 어린 자매들이 하루 종일 목을 매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LRL이, 알비스가, 더치걸이, 그 작은 아이 수십 명이 전부 같은 장소에서 목을 매달고 죽어가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수십 개의 입에서 각기 다른 비명소리와 생명의 불씨가 사그라 들어가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냔 말입니다.

그 밧줄 수십 개를 직접 설치한 제가 무슨 기분이었을지, 그걸 보며 황홀해는 미친 악마를 보좌해야 했던 제 기분을 각하께서는 공감하십니까?”

 

"… ... 그게 무슨...”

 

“그 날로 전 목을 매달았습니다.

거기 있던 밧줄 하나를 챙겼죠.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목을 매달고 10분이 지나자 죽음으로 가는 길에 시동이 걸린 느낌이었습니다.

한 1시간쯤 지났을까요, 목에 감각이 사라지더군요.

3시간 정도가 지나면 목을 지탱하는 근육에 경련이 옵니다. 혀가 자꾸 입 밖으로 튀어나오더군요. 마치 몸의 주도권을 뺏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6시간이 지나면 그 때가 되어서야 의식이 점점 흐릿해집니다. 그 이전까지는 아주 또렷했죠.

겨우 힘을 줘 어떻게든 목구멍을 열어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14시간이 지나면 끝나게 됩니다.

그 때부터는 말 그대로 숨 쉴 수 없게 되어버리죠.

뇌에 산소가 들어오지 않으니 세상이 점점 어두워집니다. 숨 쉴 수 없는 고통은 그 때부터 시작이죠.

바이오로이드란 존재가 한 번 작정하고 고통 받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감이 조금은 오십니까?”

 

"… ...”

 

“각하께서는 목 매달 장소를 생각하셨다고 하셨죠.

하지만 저는 실제로 목을 매달았습니다. 

각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며 어디서 죽어야 제일 좋을 지 생각하셨지만,

저는 저를 도구 취급하는 인간이 제 죽음을 알게 되면 제 자매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걱정하면서 목 매달 장소를 찾았습니다.

각하께서는 어떻게 해야 깔끔하게 죽을 지를 고민하셨지만,

저는 어떻게 해야 빨리 죽을 수 있을 지를 고민했습니다.”

 

 

발키리는 정말 표정이 없는 듯 했다. 웃고 있는 얼굴, 그대로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도 모를 만큼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때 레오나 대장이 저를 찾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죠.”

 

"…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데...

뭘 원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그냥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억지로 어떻게든 살다 보니 어느 날 레오나 대장이 제게 말하더군요.

제가 이렇게 아둥바둥 사는 꼴이 안쓰럽다면서 말이죠.

그러고는 제게 총 한 자루를 쥐어주었습니다.

꽤 크고, 깨끗한 총이었죠. 피 한 방울 안 묻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 것과 비교하란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장이 제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죽으란 뜻이었죠. 이 빌어먹을 세상은 빨리 하직하란 겁니다.

목 같은 거 매지 말고 깔끔하게 죽으라고요.”

 

“… ...”

 

“그런데 웃긴 건 뭔지 아십니까?

죽는 건 전데, 그걸 주는 대장의 눈이 곧 죽을 사람의 눈 같았습니다.

자기 부하를 죽음으로 보내는 방법 말고는 편하게 해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겁니다.

웃기지 않나요? 현실이란 것이 이렇게나 잔혹한데, 아직도 제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악착 같이 살아남았죠. 그 인간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팔았고, 창녀처럼 유혹했습니다.

죽고 싶었지만, 결국 저도 죽기 싫었거든요.”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개월 동안 대장은 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부하에게 자살을 종용한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겠죠.

그런데 레오나 대장은 그렇게 약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고 드센 분이시죠.

하지만 그런 분도 대장에 자리에 있으면서 깎이고 깎였습니다.

거대한 바위가 작은 모래알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그건 작아지는 바위가 슬픈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가 한심스러운 것이죠.”

 

"… 내가 바위다, 이 말이야?”

 

“아뇨,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각하는 바위도 될 수 없습니다.

아마 작은 조약돌 수준일까요? 

저를 투옥시키기 위해 해주셨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보다는 조금 더 큰 수준은 될 것 같군요.”

 

"… ...”

 

 

할 말이 없었다.

 

 

 

“반면 레오나 대장은 지휘관으로서 바위 같은 분이었습니다.

태생부터 튼튼한 바이오로이드고, 지휘관이 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그 자리에 걸맞는 최적의 존재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분도 지금은 연약해졌죠. 솔직히 그 분이 이제 지휘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입니다.

각하라고 다를까요?”

 

"… ...”

 

"철충과 싸우다 보면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를 죽여야 할 겁니다.

자살과 다름 없는 임무에 보내질 때도 있을 것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 살릴 수 있던 자들도 죽게 내버려 뒀음을 깨달을 때도 있겠죠.

그리고 각하께서는 그런 일들을 버틸 분이 아닙니다.

그 사진들이 그것을 증명해줬죠.

각하의 사랑을 증명했고, 역설적으로 각하께서는 사령관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음을 증명했습니다.”

 

"…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건데…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될 일이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소리를 쳤다. 발키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 전에 레오나 대장이 아르망 추기경과 말했던 내용을 들려줬었습니다.

추기경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각하께서는 사령관이 되기엔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부족한 채로 있기를 바란다고.

그걸 채워가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 아니까 그냥 계속 부족한 채로 남아 있길 바란다고.

… 참 어리석은 과보호입니다.”

 

"… ...”

 

"생각해보시죠.

준비되지 않은 사령관이라 하여 어찌 모든 것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고작 바이오로이드 따위가 최후의 인간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언젠가 각하께서는 제가 보여드린 죽음의 보고서를 찾아내셨겠죠.

그러면 결국 실망하셨을 겁니다. 이런 것을 자신에게 숨겼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단순한 실망이 아닌, 배신감도 느끼셨을 겁니다.

컴패니언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저를 찾아냈을 때 각하께서 저를 지켜줄 수 없었을 것처럼,

각하께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찾아내셨을 때, 저희가 각하께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 일로 내가 실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작게나마 배신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발키리가 직접 알려줬을 때 이 정도였다면, 스스로 애들이 나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찾아냈을 때,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나의 힘으로 알아냈다고 생각했을 때, 그 때는 얼마나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을 지, 상상 못할 것은 아니었다.

 

 

“더 나아가볼까요?

각하께서는 혼란스러우셨겠죠.

사람이 아닌 존재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허무하기도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각하를 속인다 생각했다면?

그랬다면 저희 관계에 사랑이란 것이 존재할 수나 있었을 까요?

그저 각인된 맹목적인 사랑이라도 저희 사이에 있을 수 있었겠냔 말입니다.”

 

"…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각하께서도 결국 이전 사령관과 같은 행보를 가게 되었을 거란 겁니다.”

 

 

 








 

-------쾅!!!----

 

유리창에 금이 갔다.

 

 

 

 

"어, 어디서 감히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저 하나의 가능성이란 뜻이었습니다.”

 

“내가 그 개새끼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면서도 그딴 개소리를 해??

내가 보여준 행보가 우습니?

내가 너희에게 해준 것들이 우스워? 하찮아 보여?

그깟 배신감 조금 느꼈다고 내가 너희를 버릴 것 같아?”

 

“시간은 차고 넘칩니다.”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시간은 많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딱 한 번. 한 번만 잘못된 길로 가기 시작하면 그 때는 아무도 각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최후의 인류시니까 말입니다.

이제 이 망할 세상에 남은 인간은 각하뿐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뇨, 결국 그렇게 될 겁니다.

지금은 각하의 사랑이 변함 없겠죠.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지나는 것만으로 점점 깎이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면 각하께서도 변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게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는데...”

 

"아뇨, 십 년이 걸려도, 백 년이 걸려도, 천 년이 걸려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겁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

 

“저희가 그 때까지 각하를 버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발키리는 당당했다. 내가 그 괴물과 똑같은 놈이 될 것이란 망언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할 만큼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이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발키리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거다.

 

 

 

 

 

 

 

 

"…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발키리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제 곧 반군이 올 겁니다.

무적의 용 참모총장이 이끄는 함대니 화력이나 규모 면에서 오르카 호는 싸울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거기에 조용히 아무도 몰래 탑승하시죠.

그럼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 뭐?”

 

“그러면 다른 섬이나 조용한 곳에 내려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다른 바이오로이드 몇 기를 함께 드리겠습니다.

거기서 평화롭게 사시면 됩니다. 사령관의 자리를 포기하세요.”

 

"… 뭐… 뭐??”

 

 

반군? 밖에 있는 애들? 아니 그보다 무적의 용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홀로 전장에 보내져서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무적의 용이 반군을 이끌고 있다고? 그럼 라비아타도 거기 있는 건가? 죽긴 한 건가? 보고서에 써있던 건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난 뭘 믿어야 하는 거지?

 

 

“각하께서 협조해주시지 않으면 전면전 형태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 모두가 일에 휘말릴 겁니다.”

 

".... 너, 너가 나를 위해 왜 그런 걸 하는 건데?”

 

"각하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그럼 왜 나한테 말도 없이... …”

 

“각하께선 좋은 사람이지, 좋은 사령관은 아닙니다.

이곳에 발을 대지 마세요.

그건 각하의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냥 잊고 사시는 겁니다. 각하께서 원래 사셨던 것처럼.”

 

“나 없이 어떻게 싸울 건데!

나 없으면 철충은 어떻게 상대할 건데!”

 

“방법은 찾으면 됩니다.

적어도 지금의 각하께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배우고, 성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전장에 익숙해지고, 죽음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오르카 호에서는 그런 시간을 줄 수 없을 겁니다.

여기 모두가 각하를 끔찍하리만큼 사랑하니까요.”

 

"내가… 내가 사랑하는 애들은!

리리스는, 마리는, 칸은, 아스널은!

그 애들 몰래 여기서 떠나라고??”

 

"네. 떠나세요.

그리고 언젠가 이곳에 익숙해지시면 그 때 다시 돌아오세요.

작은 조약돌이 모래가 되는 것을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런 걸 어떻게 다른 애들하고 상의도 없이...”

 

“상의한다고 될 일일까요?

사랑 같이 끈적한 것으로 꽁꽁 싸여있는 이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냔 말입니다.

지휘관들과 경호대장이 각하를 포기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그래도 다른 애들이...”

 

 

 

---- 쾅!!—

유리창에 다시 금이 갔다. 이번에는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각하, 이건 각하의 결정이 중요합니다.

사령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결정하세요. 가셔야 합니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발키리는 나를 계속 종용했다. 가야 한다고? 그것도 애들 몰래? 내가 애들을 버리는 입장이 되란 건가? 이미… 이미 몇 번이나 버려졌던 애들을 또 버리라고? 내가 괴물이 되기 전에 버리고 도망치라고? 하지만… 그러면 나는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난 믿어준 애들을 또 다시 배신하는 것이니까.

 














 

 

… 발키리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 … 발키리.”

 

“가셔야 합니다.”

 

"아니, 그거 말고.

잠깐이긴 한데, 묻는 말에만 대답해봐.”

 

"… 말씀하시죠.”

 

“반군이라 했지?”

 

"네. 그렇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대탈출 때 나갔던 애들이야?”

 

"네.”

 

“그걸 누가 이끌고 있지?”

 

“무적의 용 참모총장입니다.”

 

“언제 도착하는 거지?”

 

“몇 시간 이내, 혹은 몇 십분 이내일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그 애들이 내 일에 대해 얼마나 알지?”

 

“각하께서 변했다는 사실만 소문으로 듣는 수준입니다.

잘 알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그 애들은 나를 싫어하겠네?”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일단 들어 봐. 

그리고 너는 나를 그런 곳으로 보내려는 거고?”

 

“… ...”

 

“너는 분명 내 안위를 위해 그곳에 가야 한다고 했어.

근데 아직도 나에 대한 분노가 식지 않은 애들이 내 안위를 위해 함대까지 끌고 온다?

말이 안 되지 않아?”

 

"...”

 

“내가 너에 대해서 화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너를 계속 믿고 있었어.

네가 결국 나를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고 말한 것도 아직 믿고 있어.

근데 조금만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잖아.

무적의 용 함대가 온다는 걸 네가 알고 있는 걸 보니 네가 그 함대를 끌어들인 거 아니야?

대답해. 명령이야.

 

 

발키리는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 네. 그렇습니다.”

 

“그럼 네가 그녀들을 설득할 수 있는 뭔가 있었겠지.

하지만 고작 내 안위 걱정하는 걸 가지고 설득할 수는 없었을 거고,

다른 뭐가 있었겠지. 아니야?”

 

"… ...”

 

“생각을 해보자고.

네가 뭐를 가지고 설득을 했길래 그 정도의 함대를 끌고 왔는지.

정보 제공이었을까? 단순히 네가 나에 대한 정보를 저쪽에 흘리고 저 애들은 그걸 보고 나 때문에 온 것일 수도 있겠지.

나라는 존재는 객관적으로 봐도, 전술적으로나 협상의 측면에서나 중요한 요소니까.

그런데 어떻게 지금 오는 거지?

너가 말했던 것처럼 그 사진들로 충격을 받은 나 때문에 업무가 마비가 되어 오르카 호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은 이때를 어떻게 정확하게 노린 거지?

지휘관급 애들도 걱정하느라 자기 일 제대로 못했을 테니 아마 지금이라면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겠지.

어떻게 저 애들이 이렇게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오는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기다려 봐. 생각하는 중이니까.

그렇게 확실한 힘의 우위를 가지게 되면 당연히 우린 그 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가야겠지.

그걸로 나를 빼앗는다 하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너희의 확실한 승리로 끝나는 거지.

그런데 나를 빼앗고 나서 뭘 하겠냐, 그게 문제야.

나에 대해서 아직도 화가 잔뜩 난 애들이 나를 보면 뭐라 할까?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넌 그런 애들을 설득시켰고.

그게 뭔 뜻일까?"


"저는 그저..."


"하지만 거기 있는 애들의 분노를 너가 사라지게 한 건 아니야.

방금도 네가 아직 그 애들은 내게 분노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발키리는 입을 다물고 계속 내 말을 경청했다.

 

 

“네가 그 애들을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그럼 남은 건 하나지.

네가 그 애들에게 동의한 거지.

나에 대해 화를 내는 애들에게 똑같이 나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준 거 아니겠어?

자기도 똑같이 화가 났다는 걸 보여주려고 말이야.”

 

"… ...”

 

“그럼 그런 식으로 화를 내고 있는 애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다룰까?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분명 나를 어딘가에 버리긴 하겠지.

근데 그게 네가 말한 것처럼 좋은 의도에서는 아닐 거야.

실험실의 쥐처럼 가두고, 격리하고, 써먹기 위해서겠지.

아닌가? 내가 틀렸나?”

 

"… ...”

 

"말해봐. 이건 내 과대 망상인가?

아니면 네가 또 다시 나를 속이려고 한 건가?”

 

 

나는 페로를 호출했다.

 

 

“페로.”

 

"네, 주인님. 무슨 일이라도...”

 

“사령관 권한으로 명령한다.

지금 오르카 호에 있는 전 병력 전부 다 준비시켜.”

 

"네? 갑자기 무슨...”

 

“전쟁할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일단 가능한 병력들은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준비시켜.

내 이름을 팔아서라도 빨리 준비시켜. 지금 당장.”

 

"…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페로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소리가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면서 통신이 종료되었다.

 

 

"… … 자율적인 움직임보다는 각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겁니다.”

 

"맞아. 근데 난 전부를 지휘할 만한 능력이 없거든.

지금은 이게 더 효율적이야.”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시군요.

다행입니다.”

 

"… ‘다행’의 기준이 너랑 나는 많이 다른 것 같네.

난 지금 미쳐버릴 것 같거든.”

 

“그보다도 제 말을 그렇게 믿으셔도 됩니까?”

 

 

발키리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 말했지. 내가 너를 믿고 있다고.”


"이럴 때 적용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걸 믿으면, 나쁜 것도 믿어줘야지."

 

“그 믿음이 거짓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게 걱정할 일인가?“

 

"… 무슨 말씀이신지?”

 

“그 함대가 오는 게 아니라면 이 지랄을 할 필요도 없겠지.

애들한테는 그냥 연습 한 번 했다고 하면 될 일이야.

진짜로 싸울 일이 아니면 나야 좋은 거지. 안 그래?”

 

"… 무엇이 어떤 거짓일지 각하께서 어찌 아십니까?

몇 시간 뒤가 아니라 며칠 뒤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 거짓이라면 어찌 하실 겁니까?”

 

 

난 발키리를 보면서 똑같이 웃어주었다.

 

 

“지금 네가 말하고 있잖아.

거짓이 아니라고.”

 

"… ...”

 

“진짜 나를 속일 필요가 있었다면 내가 속을 때까지 기다렸겠지.

그리고 나서 네가 원하는 뭔가를 하지 않았겠어?”

 

"...”

 

“근데 지금 이렇게 거짓일지 아닐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멍청한 추리 같은 건 애초에 할 필요도 없지.

명령으로 알아보면 되잖아? 이게 거짓인지 아닌지?

내가 알기로는 발키리라 해도 명령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 하, 결국은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하시는 군요.”

 

"실망이야?”

 

“그럴 라가요. 가장 좋은 카드는 안 쓰는 것이 바보니까 말입니다.

각하께서 그리 답답한 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발키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후우… 맞습니다. 제가 각하의 명령권을 우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래, 우회할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에 썼겠지.

그 방법을 이용해서 어린 애들을 죽일 때에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했을 것 아니야?

발키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했겠지.”

 

'… 맞습니다.”

 

 

발키리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확실하게 하자고.

몇 시간 뒤에 네가 부른 무적의 용 함대가 여기에 도달할 거고,

그 목적은 나 때문인 것. 맞지?

말해. 명령이야.

 

 

"… 네. 맞습니다.”

 

 

 

 

 

 

 

나는 크게 한숨을 지었다.

 

 

"… 차라리 아니라고 했으면 속이 편했을 텐데.”

 

"… … 각하.”

 

 

발키리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왜.”

 

“각하께서는 저희를 믿는다 하셨죠.”

 

“응.”

 

“고작 이런 명령 하나로 모든 진실을 아실 수 있는데 왜 굳이 저희를 믿는 겁니까?

왜 믿음이라는 불확실하고, 불필요한 방식으로 고수하시는 겁니까?”

 

"...”

 

“제가 맨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뭘 말이야.”

 

“각하께서 저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곳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설명해줬잖아.”

 

“제가 이해되지 않던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이런 일을 미연에 알고 계셨을 수도 있습니다.

명령권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제가 각하를 배신했을 때부터 좀 더 깊이 파고 들었을 수 있었겠죠.

아니면 제가 무적의 용 참모총장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조차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 그랬겠지.”

 

“근데 왜 그렇게 사용하지 않으시고, 고작 저를 보호하시기 위해 이런 곳까지 만드신 것인지,

왜 이렇게나 비효율적으로 명령권을 사용하셨는지, 그것이 이해가 안 됐을 뿐입니다.”

 

 

발키리는 처음으로 호기심을 내비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미연에 이 일이 일어나지 않게 알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명령권이 있다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바이오로이드도 어렵지 않게 심문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후회하는 중이다. 이런 일은 정말 막을 수 있었으면 막았을 것이고, 명령권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유는 많이 있었다.

 

 

“… 그래,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거야?”

 

“네. 혹여나 명령권 자체를 쓰지 못하시는 것 아닌가 했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군요.”

 

"맞아. 처음으로 명령권을 쓸 때 아스널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했지.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잖아.”

 

“왜 그러셨던 겁니까?”

 

 

금이 간 유리창 너머로 발키리가 갈라져 보인다. 나는 입을 열었다.

 

 

 

 

 

“불안정한 관계로 쌓아 올린 신뢰가 명령으로 쌓아 올린 것보다 더 튼튼하니까.”

 

 

발키리가 입을 열었다.

 

 

“… 참 사령관답지 않은 이유군요.”

 

“하지만 사람다운 이유지.”

 

“각하께서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난 누군가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것이 너무 좋았어.

리리스가 그랬고, 칸이 그랬고, 마리가 그랬고, 아스널이 그랬지.

그러니 난 너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려는 거야. 

그럼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저는 각하와 다른 존재입니다.”

 

"알아, 너는 바이오로이드고, 나는 사람이지.”

 

“그런데 왜...?”

 

 

난 발키리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난 사람이니까.

사람이니까 사람다운 이유로 사는 거야.”

 

 

 

무전기가 잡음을 내며 통신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페로에게서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에 철충이 여기로 쳐들어왔을 때 이렇게 준비를 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다르다. 경험도 없지는 않고, 불시에 당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크게 숨을 쉬고, 허파에 공기를 가득 담고, 조금 있다가 다시 뱉는다. 긴장을 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발키리.”

 

"네.”

 

“솔직히 오늘은 너에게 많이 실망했어.”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네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네 과격한 방법은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 … 실망시켜드린 걸 죄송하다 하길 바라십니까?

 

“마음대로 해. 미안해 하든, 아니면 고마워 하든.

내 덕분에 그 커다란 결박 장치에서도 자유로우졌잖아.”

 

"… 그렇군요.”

 

 

난 발키리를 뻔히 쳐다봤다. 발키리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내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렇게나 뒤틀려보였던 얼굴이 이제는 다시 차분해졌다. 발키리의 눈과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 왜 그러십니까?”

 

"그냥.”

 

“… … 그런다고 더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

이미 제가 해드릴 말은 다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너를 쳐다보면 뭐를 바래서 그러는 거라 생각하니?”

 

"… ...”

 

“내가 볼 때는 너 그러는 것도 다 옛날 습관인 것 같아.

그 놈이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나는 잘 몰라도 이러는 게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잖아.

나중에 시간 나면 같이 밥이나 먹자. 대화도 좀 하고.”

 

"… 제게 그럴 시간은 없습니다.”

 

"바쁜 거 알아. 그래도 밥도 안 먹고 살아?”

 

"… … 실없는 소리 하실 거면 그냥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말입니다.”

 

"… 냉정하기는, 정 없게 시리.

안 그래도 갈 시간이었어.”

 

"… … 막는 사람도 없는데 안 가고 계신 건 각하십니다.”

 

"… ...”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이 감옥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그 두꺼운 철제문들을 생각하면 한 세월이니 말이다.

 

 

"… 각하.”

 

"왜에. 나 간다니까.”

 

 

발키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뻔히 쳐다보았다. 지금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안함이 서려있는 듯 했다.

 

 

"… … 아뇨.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때는 밥 한끼 같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불러 봤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도 다시 만나면 되겠네.

감옥에서는 뭘 먹나? 밥은 주니?”

 

"… 참 실없는 걱정이십니다.”

 

 

발키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런 표정을 보면 발걸음이 도통 떨어지지 않는데.

 

 

"… 할 말 있어?”

 

"… … 아마 내일은 뵙지 못할 겁니다.

… 내일 모래도 힘들 것 같네요.”

 

“그럼 그 다음 날에 만나면 되겠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닐 겁니다.”

 

“… … 알아, 근데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내일 와서 못 보면, 그 다음 날에, 다시 다음 날에 또 오면 되겠지.”

 

"… … 저는 각하가 생각하시는 만큼 착한 아이가 아닙니다.”

 

“악역을 맡은 애가 착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각하의 기대를 다시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도 다 그래.

기대하면, 보란 듯이 배신하지.”

 

“배신한 존재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아니.”

 

"그러면...”

 

"… ...”

 

 

무전기가 계속 잡음을 냈다. 빨리 오라고 자꾸 재촉하는 것 같다. 잠시 무전기를 끄고, 나는 입을 열었다.

 

 

“배신이 싫은 거지, 너희가 싫은 건 아니니까.”

 

"… 알겠습니다.”

 

"그래, 할 말은 다 했고?”

 

"… 네.”

 

“그럼 난 가볼게.

네가 만족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지금은 사령관 노릇을 할 사람이 필요하거든.”

 

 

나는 발키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두꺼운 철제문을 넘었다. 문 하나 여는 것도 이렇게 힘이 빠지는 일인지 그 때 처음 알았다. 다행히 그 앞에는 나를 데리러 온 리리스와 페로가 있었다. 그 둘이 문을 열어주니, 힘 쓸 일 없이 그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 거다. 내가 병력을 준비한 것은 그저 힘의 우위가 생기지 않도록, 적어도 보이는 모습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어차피 모든 일은 내가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로 해야 한다. 무적의 용이 얼마나 많은 함대를 가지고 왔는지는 몰라도,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령관 노릇을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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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어휴 길다 길어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