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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터니티가 눈을 뜬 곳은 지평선까지 이어진 초원에 솟아오른 돌무리의 안이었다. 지평선이라. 눈을 뜬 이터니티는 지평선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의 잠을 깨운 가랑비는 빗줄기가 너무 가느다란 나머지 바람에 흩날리며 안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이 본 지평선은 지구가 둥금으로 만들어진 지평선이 아니라 먼 곳에서 그것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알 수 없도록 비가 그것의 시야를 막고 있을 뿐이었다.

 비는 창백한 이터니티의 피부를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4월의 영국은 아직 따듯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비는 영국을 떠나려 하는 추위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눈이 될 수 없는 자신을 저주하며 초원을 적시고 있었다.

 이터니티는 그것의 주인을 보았다. 론 브래드버리의 피부가 외부로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주인이 최대한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그것의 주인에게 비가 맞지 않도록 바위산의 안쪽에 숨겨놓았지만 조금의 비에 그것의 주인의 팔이 젖어있었다.

 이터니티는 주인을 둘러싼 천으로 주인의 팔을 닦아주었다. 밤새 비를 맞으며 자느라 그것의 속옷까지 전부 비에 젖어있었던 탓이었다. 저체온증으로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만 그것은 그것에 감사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보다 주인의 체온이 떨어지거나 오르지 않았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것의 주인은 이터니티가 자신의 팔을 닦아주자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 자신의 행동 때문에 새근새근 자고 있던 주인이 깨어난 탓이었다. 그것의 주인의 팔을 다 닦은 그것은 주인을 둘러싼 천을 토닥이며 조용히 자근자근한 목소리로 그것의 주인에게 말했다.

 “잠을 깨워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인님, 아침입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주인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마음같으면 이곳에 집을 짓고 주인님을 모시며 주인님의 마지막까지 영원히 함께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인님을 노리는 사람들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릅니다. 주인님께서 원하지 않으셔도 이것은 전부 주인님을 위한 것입니다. 모두 주인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터니티는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그것의 얼굴에 흐르는 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면 충분했다. 그렇게 몇번을 토닥이자 그것의 주인의 울음은 조금식 잦아들었고 빗소리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숨소리를 내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제야 그것은 자신의 주인에게서 눈을 떼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색할정도로 넓은 평원은 나무 하나 없이 풀만으로 늘어서 있었다. 초원은 그저 푸르기만 하지 않았다. 추위에 아직 풀이 자라지 못한 탓이었을까 초원은 갈색과 노란색으로 늘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솟아오른 돌더미들은 이곳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무언가의 유적이라는 착각마저 주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먼 옛날의 신이 만들어낸 탑이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했을테고 중세인들은 고대인들이 지은 탑이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음모론자들은 외계인이 만들어낸 유적의 흔적이라고 말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저 자연적으로 생긴 돌무더기에 불과했다. 고고학자라면 이곳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했을 테지만 그것은 이터니티처럼 머물 곳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의 흔적일 뿐이었다.

 이 모든 것에 빗구름으로 인한 그림자까지 더해져 이터니티가 바라본 풍경은 색채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모노톤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2010년대 영화 감독들이 좋아한 멸망한 세상의 풍경이 바로 이터니티가 바라본 풍경과 같았다. 이터니티가 눈을 감았던 이 바위가 사실은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었던 횃불이었다는 반전을 삼는다면 완벽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마무리가 되었겠지.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이 광경은 이터니티의 시대에도, 그보다 더 오래된 중세, 고대, 선사, 인류가 영국땅을 밟기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자연이란 변화무쌍하고 동시에 변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이터니티의 영원이 끝나고 이 땅에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이 광경은 이 자리에서 그대로 이어져갈 것이었다.

 갑자기 몰아친 오한에 이터니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자신의 팔에 묻은 빗물을 털어냈지만 비에 젖은 손으로 물을 털어봐야 쓸모없는 일이었다. 젖은 바위에서는 한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비에 젖은 바람은 그것의 몸에서 열을 앗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몸을 떤 것은 그 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것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플리머스에 그것을 도와준 존 윈체스터를 뒤로 하고 도시를 떠나왔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은 알 길이 없었다.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것이 의지할 사람이 이 세상에 남아있을 것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 혼자였다. 그것은 자신의 주인인 론 브래드버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기 위한 무력은 갖추었다.

 하지만 무력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의 배하나 채울 수 없는 무력이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인가. 플리머스를 떠난지 이틀이 지났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보다 강했다. 하지만 결국 ATP를 이용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기전은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바이오로이드를 인류과학의 기적이라 불렀지만 그 기적은 결국 과학의 범주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터니티는 손을 뻗어 땅에서 자란 풀을 쥐어뜯었다. 뿌리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낸 그것은 정체모를 풀을 뿌리채 씹어먹었다. 풀에서 진액이 흘러나와 그것의 혀에 닿자 그것은 눈을 찡그렸다. 헛구역질마저 나올 뻔했다. 그것은 그 모든 감정과 맛과 풀을 억지로 삼켰다.

 맛이 없는 것을 넘어 이것을 먹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심마저 드는 맛이었다. 언젠가 소완이 신메뉴 개발에 실패했다고 그것에게 준 그것의 바이오로이드생애 최악의 음식의 베스트에 들었던 정어리 파이조차 조금전 먹은 풀에 비하면 최소한 음식의 범주안에 드는 것이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풀을 먹어야 했다. 그것은 어떻게든 힘을 내야 했다. 그것은 어떻게든 그것의 주인을 지켜야 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것의 주인을 섬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 자신이 살아남아야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조금의 힘을 낼 수 있었다. 아무리 풀을 사람이 소화할 수 없다 해도 풀에는 소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비도 잦아들어 이제 하늘에서 빗방울은 볼 수 없었다.

 론 브래드버리를 안은 이터니티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여 누군가가 자신들을 미행하는가 본 것이었다. 의미가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설령 누군가가 이터니티를 따라온다 한들 이터니티가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고 있었을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이터니티는 몸을 비틀거리며 초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구름 사이로 해가 드러나며 초원에 빛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노란 빛은 초원에 퍼지며 모노톤의 초원에 색을 가져왔다. 풀들은 빛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빗방울이 묻은 푸른 잎을 반짝였다.

 그것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걸어가는 초원을 사람들은 다트무어라 불렀다. 과거에는 다트무어 국립공원이었지만 더는 이곳은 공원이 될 수 없었다. 전에 언급했듯 연합전쟁 당시 플리머스는 블랙리버의 상륙기지 역할을 했다. 블랙리버의 영국 전역 개입 초기, 영국군은 플리머스 재탈환을 위한 대규모 공격을 가했고 상륙한 블랙리버는 본격적인 전투에 나선 것으로 대규모 회전이 발생했다.

 엄청난 수의 병력이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플리머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다트무어 남부였다. 이터니티가 머물렀던 그레이트 트롤스워시 토어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조금만 더 다트무어의 초원을 걷게된다면 전쟁의 흔적을 얼마든지 발견할 것이었다.

 연합전쟁이 끝난지 수십년이 지났고 그 흔적은 이제 다트무어에 솟아오른 돌무더기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있었다. 이곳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흔적은 이제 평원에 거체를 뉘인 AGS들과 고대 유적이라 착각할 정도로 형태가 남지 않은 참호와 포탄이 만들어낸 크레이터들 뿐이었다.

 비로 인해 물이 불어난 개천을 건너려던 이터니티는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몇미터는 되는 거체가 목을 숙이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린인가 생각하며 다가간 그것은 그 거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K180 셀주크였다. 개천옆의 언덕을 엄폐물 삼아 포격을 하던 것으로 보였던 그것은 두개의 포신중 하나를 잃었고 남은 하나의 포신은 축 처져 포신의 끝은 개천의 바닥을 찌르고 있었다. 전신을 덮은 초록색의 페인트는 곳곳이 벗져겨 녹슨 자신의 속살을 드러냈지만 오히려 그 색상은 주위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색이 되어 멀리서 보면 이곳에 AGS가 누워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있었다.

 두 다리 사이에 나있는 AI 모듈은 이미 빛을 잃은지가 오래였다. 물에 잠신 K180 셀주크의 머리에는 수많은 이끼가 달라붙어 햇빛에 센서의 유리 부분이 반짝이지 않았다면 이것이 AI모듈인지 이터니티는 알 길이 없었을 것이었다.

 전쟁의 흔적이자 허무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거구에 이터니티가 다가가자 무언가가 K180 셀주크의 안에서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이터니티는 본능적으로 그 무언가를 따라 개천의 언덕을 올랐다.

 먼 곳에서 흰색의 동물이 쏜살같이 도망치고 있었다. 두마리의 토끼였다. K180 셀주크의 아래에서 비를 피해 보금자리를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이터니티는 바닥에서 돌을 주워들었다. 저 토끼라면. 두마리의 토끼라면 그것의 밥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먹어야 할 지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일단은 고기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에게는 힘이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돌을 던져 토끼를 잡는데는 노력과 요령이 필요했지만 이터니티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바이오로이드였다. 돌을 던져 토끼 한둘 못잡으면 그것의 힘은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인가.

 이터니티는 자세를 취했다. 멀리 달아나려는 토끼를 향해 돌을 던질 준비를 했다. 그 순간이었다. 흐르는 물소리의 사이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울음소리였다. 론 브래드버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람도 바이오로이드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파괴된 셀주크의 AI모듈에서 합선으로 우연히 발생한 소리도 아니었다.

 이터니티는 K180 셀주크를 바라보았다. 녹이 슨 거체의 아래에 흰 무언가가 그것의 눈에 들어왔다. 한마리의 토끼였다. 그 토끼는 아직 흰 털이 채 자라지 않은 자신의 새끼를 안고 있었다. 아기를 낳은 토끼는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가 없던 것이겠지.

 그것은 멀리 달아나는 토끼를 바라보았다. 저들은 왜 도망치는 것일까. 자신에게 맞서 새끼 토끼를 보호하지도 않고 겁이 나 도망갈 뿐인 겁쟁이들이었다. 그야말로 토끼에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것이 돌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만일 새끼 토끼가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그러면 누가 늑대와 여우의 표적이 되었을까. 도망친 토끼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토끼는 도망친 것이었을까. 도망친 토끼들은 겁에 질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야수와 맹수가 자신들을 쫓게 해 도망칠 수 없는 새끼토끼와 어미토끼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존 윈체스터처럼 말이었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터니티와 론 브래드버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토끼들은 살기위해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새끼 토끼를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려는 것이었다.

 이터니티는 자신을 희생하려는 토끼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자신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자신과 같은 자들을 자신의 저녁거리로 만들 수 없었다. 이터니티는 그렇게 잔인한 바이오로이드가 아니었다. 이터니티는 그저 힘없는 바이오로이드에 불과했다.

 이터니티는 돌을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초원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가 잦아든 초원의 시야거리는 점점 넓어져 이제는 평원 여기저기에 난 전쟁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바이오로이드와 AGS가 이곳에서 자신들의 생을 맺었는가. 이터니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일 것이었다.

 그곳에 고작 하나의 희생을 더하는 일이었지만 이터니티는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토끼에 자신을 투영한 이터니티는 달려가고 있는 토끼가 그저 흰 토끼로만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 자신이 다시 풀을 뜯어먹어야 한다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주인님도 주인님을 위해 제가 누군가를 해치지 않기를 바라시죠?”

 이터니티는 여전히 잠들어있는 자신의 주인에게 물었지만 당연하게도 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주인이 무엇을 원할지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은 분명 휴이 브래드버리와는 정반대일 테니까.

 론 브래드버리를 지키기 위해 희생할 것은 이터니티 그것 자신 뿐이면 충분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터니티는 초원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여정의 끝에는 평화와 안식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 초원처럼 과거의 고통과 아픔은 잊고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설령 그런 날이 오지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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