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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망


 폐하께서 오늘 회의에 대해 잊어버리셨을 확률, 매우 높음.


 “평안하신지요, 폐…….”

 “헉, 맞다! 10시 회의! 으아악, 나 준비 하나도 안 했는데!”

 “…하아.”


 그래도 제 인사는 다 받아주시고 기억하실 줄 알았어요, 폐하…….


 예상보다 좀 빨랐지만, 어쨌든 폐하께선 까먹은 걸 기억하고선 비명을 지르셨다. 응, 내 얼굴을 보고 생각나셨을 확률이 제일 높구나. 폐하는 체면이고 뭐고 방방 뛰면서 거의 비명을 지르시고 계셨다. 아, 물론 평소에 체면을 차리셨냐면 그건 아니다. 아마 이 오르카에서 폐하를 가장 하찮게 여기고, 가장 험하게 다루는 분을 꼽자면 그건 폐하 자신밖에 없을 거다.


 “으아! 어떡해! 어떡해애! 오늘 마리에 칸에 레오나, 메이에 용까지 다 참석한다고 했는데!”

 “리리스 님도 참여하신다고 합니다. 경비 강화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다고 하더군요.”

 “아니 걔는 왜 하필 오늘 참석한대? 캑, 으아, 나 심장마비 올 거 같아! 아니 올 거야! 지금 몇 시지?! 8시 반! 좋아! 어떻게든 할 수 있어!”

 “…….”


 부관인 나는 쏙 무시하시고, 폐하께서 말하고 폐하께서 답하신다면 난 폐하를 질투해야 하는 걸까? 어떡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폐하께 바보가 옮았나봐……. 헛생각은 그만하고 가지고 온 자료를 얼른 폐하께 드렸다. 안 그랬으면 폐하께선 일주일 치 업무 내용을 다 훑어보셨을 거니까.


 “회의 자료는 다 정리해놨습니다, 폐하. 가시기 10분 전에 제가 요점만 읽어드릴게요.”

 “엉?! 아르망 네가 어떻게?”

 “폐하께서 오늘 회의를 잊으셨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사실 느낌이 들었다기보단 알았지만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폐하께서 너무 상처 받으실 것 같아 좀 순화해서 말했다.


 “나이스 아르망! 아니, 아르망 선생님! 역시 너밖에 없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그럼 오늘 업무를 시작하시죠.”


 역시 미리 준비해두길 잘했어. 폐하의 미소를 보니 어젯밤 좀 늦게 잤던 피로가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다. 한껏 기뻐하시던 폐하였지만 내가 내민 업무 목록을 보시니 금세 표정이 어두워지셨다.


 “응! 오늘도 열…심히 해도 이거 다 끝낼 수나 있으려나…….”


 요 며칠 계속 격무에 시달리셔서 그런지 오늘따라 폐하의 목소리엔 유난히 힘이 없으셨다. 가엾은 폐하……. 폐하께서 열심히 힘써주시는 덕에 저항군은 순풍을 얻은 배처럼 나아가고 있지만, 정작 그 모든 영광과 혜택을 누리셔야 할 폐하 본인은 눈에 띌 정도로 힘들어하시고 계셨다. 


 폐하를 위로해드리고 싶다. 오늘은 오전 업무만 마치고 쉬시라고 하고 싶다. 폐하의 시간을…나와 함께 보내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하지만 안 돼. 내가 여기서 그러면 폐하께선 내일 더 힘들어지실 거다. 난 내 마음을 꾹 눌렀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로 폐하를 바라봤다. 폐하께 안심을 드릴 수 있는 미소로 말이다.


 “후훗, 부지런히 하신다면 오찬 전에 끝내실 수 있습니다.”

 “하하, 부지런히……. 그래, 네 말이니까 믿고 할게.”


 믿는다니……. 혹시 얼굴이 빨개진 걸 보진 않으셨겠지? 폐하께선 이렇게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분에서 치고 들어오신다.


 나는 아르망, 그리고 폐하의 부관이란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폐하를 섬기는 자. 폐하를 보좌하고, 또 폐하를 기쁘게 해드리는 게 내 가장 큰 즐거움. 그래, 그거면 만족해.


 난 그걸로 만족해야 해.


 “하암…….”


 벌써 지루하신 모양인지 폐하께선 크게 하품을 하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손은 쉬질 않으시니……. 정말 이 아르망, 감격이에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요? 마치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 같아 대견해요, 폐하.


 하지만 이대로라면 폐하께서 주무실 확률이 점차 커지는데……. 폐하께 안 들키도록 몰래 옆방에서 대기하던 메이드 분들께 연락을 넣었다. 잠시 후, 콘스탄챠 님과 함께 메이드 분들이 아우로라 님의 특제 디저트와 잠이 깰 만한 시원한 음료수를 가지고 오셨다.


 “주인님? 조금 이르지만 간식 먼저 드시는 건 어떠세요?

 “와, 좋지. 마침 졸렸는데 잘 됐다. 저기, 그 탄산음료도 있어?”

 “그럼요. 논 알콜 칵테일이라도 만들어드릴까요?”

 “그것까지? 이야, 이거 일하는데 너무 호사를 누리네.”


 콘스탄챠 님이 쉐이커를 들어 올리며 싱긋 웃으셨다. 역시 콘스탄챠 님. 폐하의 취향을 정말 완벽하게 꿰고 계신다. 분명 저 모든 준비도 폐하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려하고 신경 쓴 결과일 거야.


 절대 폐하보다 한발 먼저 앞서진 않지만, 폐하의 가는 길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시는 분. 내가 목표로 하는, 어른스러운 매력을 가진 분 중 하나다.


 “와, 이거 톡 쏘면서 아주 상쾌한데. 달달하고 향도 좋고. 이거 맛있다. 좀 많이 줘.”

 “후훗, 가득 만들어 놓을 테니 시원할 때 드세요. 주인님.”

 “고마워, 이따 점심 때 보자!”


 음료수와 간식을 두고 콘스탄챠 님과 메이드 분들은 사령실을 나갔다. 자, 다시 일을…….


 “아르망도 어서 먹어. 이거 되게 맛있네.”


 난 바보야, 왜 폐하가 내게 권해준다는 변수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상하게 이런 일상적인 일들은 예지가 잘 되질 않는다. 하지만 저걸 먹으면 분명 오늘 일도 밀리는데……. 그럼 폐하께선 또 힘이 드실 텐데…….


 “폐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드시면서 하세요.”

 “이걸 어떻게 다 먹어? 간식으로 배 채우겠다. 딱 봐도 너랑 먹으라고 만들어 놓고 간 거잖아. 그리고 아무렴 내가 나 혼자 먹겠니? 양심이 있지.”

 “하지만 이걸 지금 저랑 드시면……. 전 그저 폐하께서 졸려 보이셔서 드시면서 잠 깨면 좋을 것 같아서…….”


 폐하께서 제때 일을 끝마치게 도우려 했는데 이래선 의미가 없다. 부정적인 확률은 늘어나고 당혹감은 풍선 부풀듯 커져만 갔다. 어떡해, 실수했어. 난, 나는 그저 폐하를…….


 “아르망.”

 “네, 네?!”

 “어휴, 어깨에 힘 좀 빼. 일 좀 늦으면 어떠니? 일이야 많이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간식 먹으면서 한 때의 여유를 즐기는 건 지금 우리가 가진 특권이라고.”


 특권? 폐하의 그 한 마디에 방금 전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던 당혹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놓칠 정도의 허탈함이었다.


 “그럼 그냥 땡땡이치시는 거랑 뭐가 달라요…….”

 “음, 땡땡이는 나 혼자 일 안 할 때 치는 거고, 아르망이랑 같이 먹으면 잠깐의 휴식 시간이 되겠지?”

 “그런, 무슨…….”


 어쩜 이렇게 뻔뻔하실까? 씩 웃으시며 내게 과자를 내미시는 폐하의 모습이 참 얄미웠다. 참 얄미운데…폐하께서 가볍게 하시는 말씀 하나하나에서 나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재빨리 폐하의 곁으로 의자를 끌고 가 앉았다. 그리고 폐하가 주신 과자를 크게 한 입 물었다.


 “와아…….”

 “어때? 맛있어?”

 “네! 앗, 네…….”


 어떡해, 과자 하나에 목소리가 커지다니 무슨 내가 아쿠아나 알비스도 아니고……. 내가 귓볼까지 새빨개지는 걸 아시는 건지 모르시는 건지 폐하께선 웃으시며 내게 음료수며 과자를 막 권하셨다.


 “푸하하,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역시 아르망은 이럴 때가 제일 귀여워.”

 “으으……. 놀리지 마세요!”

 “그래그래, 먹으면서 다시 힘차게 일하자고.”

 “하아……. 폐하의 오전 업무가……. 제가 폐하의 땡땡이를 도운 꼴이라니…….”

 “음! 앞으로도 이런 실수는 적극 환영하오, 아르망 추기경.”

 “진짜 놀리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폐하 미워요!”


 이럴 때 보면 정말 어쩜 이렇게 철이 없으신지 모르겠다니까! 꼭 하지 말라도 해도 이렇게 짓궂게 놀리실 땐 정말 화가 난다. 그래도 말씀처럼 정말 드시면서 한 손으론 업무를 보고 계시니 더 뭐라 할 수도 없고……. 결국 나도 폐하의 곁에서 입이 심심할 때마다 과자 한두 개 집어먹으며 업무를 도와드렸다. 


 이런 폐하의 돌발행동만큼은 정말 예지할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불안감,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작은 북처럼 고동치는 설렘. 폐하와의 추억이, 기쁨이, 다음 번의 기대감이 한데 어우러져 내 가슴을 아스라이 울린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한번, 실낱같은 희망으로 난 예지를 한다.


 폐하께서 회의에 늦으실 확률…약간 있음.


 이따 오찬 때 소완 님께 야채가 싫다고 투정 부렸다가 혼날 확률…이건 조금 높음.


 나를 어린애라 생각하시는 확률, 매우 높고.

 그리고 나를 여자로 봐주실 확률은…없었다.


 …괜찮아.


 괜찮아야 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잖아. 늘 똑같은 결과잖아.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다.  폐하와의 이 소중한 관계를 깨고 싶지 않다. 폐하의 곁에 있고 싶다. 비록 이분이 날 여자로 봐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날 그저 어린애로 보시고 장난치시는 거라 해도……. 난 이분이 좋으니까.


 폐하를 사랑하니까.


 이게 폐하에 대한 나의 사랑. 절대로 이뤄질 리 없는, 절대로 들켜선 안 될 나의 마음. 


 그저 이 마음을 간직한 채로 폐하에 곁에 있을 수 있길.


 나는 그걸로도 만족할 수 있어. 응, 나는 괜찮아.


 그렇게 끊임없이 되뇌이며, 나는 일에 집중하시는 폐하의 옆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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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아르망 시점이란 변화구를 뙇

아 변화구 조아요

 

쓰읍 아르망의 복잡한 감정선? 이게 되게 어렵네요. 잘 전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