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전쟁 중반.

철충이 도시를 휩쓸고, 인류는 광기에 휩쓸려 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철충과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지구에 살아 있는 지성체들은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었다. 블랙리버 사의 바이오로이드이자 앵거 오브 호드의 지휘관인 신속의 칸도 그런 존재들 중 하나였다.


*


 "으윽, 대장...... 너무 아파......"

"괜찮다. 조금만 버틴다면 보급이 올 거다. 그때까지만 기다린다면 반드시 살 수 있다."

"아니야. 알 것 같아...... 몇십 년 넘게 굴러왔지만 이런 부상은 처음이라서 말이지......"


331번 워울프 상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칸의 손을 뿌리쳤다. 확실히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철충의 공격에 의료용품은 다 떨어진 지 오래였으며, 331번 워울프 상사가 누워 있는 병상도 피와 오물로 얼룩져 있었다. 


"제식 소총을 버렸을 때도, 연합전쟁 때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부대원들에게 포위당했을 때도 살아남지 않았나. 지나가는 위기일 뿐이다. 귀관은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다......"


애써 희망적인 말을 전하는 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워울프 상사가 뿌리친 손을 다시 잡으려는 그때, 막사의 문이 확 걷혔다. 칸이 고개를 돌리자, 하이에나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보고하기 시작했다.


"대장! 보급, 보급이 들어왔어!"

"정말인가! 다행이다, 워울프.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치료하러 오겠다."

"대장."


칸이 몸을 일으키자, 워울프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대장은 아직 멀쩡하니까....... 나 같은 건 잊고 살아....... 그냥 살지 말고....... 존나 행복하게 살아."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


칸은 마지막 말이라도 남기려고 하는 듯한 워울프를 외면하고 하이에나를 따라 막사 밖으로 나갔다. 보급 장소로 이동하는 그때, 칸은 는에 띄게 어두워진 하이에나의 안색을 살피고 물었다.


"괜찮나, 하이에나."

"그게, 대장......"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하이에나의 뾰족한 이가 입술에 박혔다. 얼마나 깊게 박혔던지,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스카라비아가...... 죽었어. 반드시 물품을 전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런가."


칸이 고개를 숙였다. 하이에나는 가슴 속에 눌러놓았던 무언가를 터트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나, 그 녀석을 지키지 못했어. 호위 임무가 더럽게 지루하기는 했어도 그 녀석 자체가 싫지는 않았는데......."


어느새 하이에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자신도 울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으나, 칸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다. 스카라비아도 마지막에는......."


물품을 전하는 데 성공해서 기뻤을 거다, 라고 말하려던 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스카라비아가 어떤 마음을 품고 죽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흐윽, 이제 그냥 다 그만두고 싶어! 331번 워울프 상사도 위독하다며? 이딴 세상, 차라리......!"


평소의 칸이라면 하이에나의 말을 막았을 것이었다. 허나, 그녀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칸에게는, 이렇게나 비참하게 살고 죽기 위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로 태어난 삶을 원망하는 것을 멈출 자격이 없었다. 


"저기, 칸 대장. 군단장님이 부르세요."

"알겠다. 45번 탈론페더 소위."

"네, 대장."

"하이에나를 달래 줘라."


칸의 지시에 45번 탈론페더 소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고 해도 인간인 군단장의 부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칸은 방금 고인 눈물로 지저분해진 워페인트를 고쳐 바르고 군단장 막사에 들어갔다.


"승리. 소장 신속의 칸."

"어어, 이리로 와 봐라."


칸을 부르는 군단장의 눈빛이 음흉하게 번들거렸다. 뭔가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의 명령을 피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녀는 그러한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군단장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참 아까워. 누구였더라, 저번에 죽은 퀵 카멜이랑 지금 썩어가는 워울프 말이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중에 손가락으로 501번 퀵 카멜 소령과 331번 워울프 상사의 몸매를 그려 보는 군단장. 그 모습이 너무나도 역겨웠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칸이 역겨워 하든 말든, 군단장은 둥그렇게 벗겨진 머리를 쓰다듬은 손으로 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다가오는 손길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크큭. 안 해본 티 내기는. 어쨌든 말이야. 그 더러운 병상에서 죽어가는 워울프가 불쌍하지도 않나? 슬슬 동료 곁으로 보내 줘야......"

"안됩니다! 이번에 들어온 의료용품을 쓰면 반드시 살 수 있습니다! 제발 그녀를 살려 주십시오."


칸의 부탁을 들은 군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금방 자신이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음을 알아챘지만, 군단장이 봐줄 리는 없었다.


짝-!


힘이 들어간 손바닥이 빠르고도 정확하게 칸의 왼뺨을 쳤다. 고개가 돌아가고 뺨이 붉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군단장은 역성을 높였다.


"똑바로 서, 씨발년아. 어디서 바이오로이드 주제에 하늘같은 인간님한테 명령질이야."

"시정하겠습니다."

"너같은 년들은 말이야, 내 말 한 마디에 개처럼 짖고 뒹구는 게 맞다고. 그놈의 지휘관 모듈 좀 달아줬다고 잘난 척은......"


어느새 군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타고 올라가 가슴을 훑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분고분한 칸의 태도에, 그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자비로운 인간님이시지.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말이야."

"......"

"이렇게 된거, 아다 한 번 떼보지 않겠나? 아다가 뭔지는 알지?"


모를 리가 없었다. 연합전쟁부터 몇 년을 인간 지휘관들과 부대껴온 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처녀였던 이유는, 그동안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는 것도 있었겠지만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에 비해 특정 부위가 아쉬워서였을 것이다.


"영광인줄 알아. 이런 기회 잘 없어. 날 만족시키면 그 워울프에게 의료용품을 베풀어 줄테니 열심히 해보라고."

"알겠습니다."


칸이 대답하자, 군단장은 바지를 벗어 뱃살에 파묻혀 있는 물건을 드러냈다. 그리고 명령했다.


"빨아."


*


 "흐윽, 흐윽...... 대장님......"


45번 탈론페더 소위는 패드로 칸의 성행위를 촬영하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 군단장이 자신을 불러 패드를 던져 줄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말이 제안이지, 강간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 영상을 촬영하게 해서 이득을 볼 사람은 군단장밖에 없었다.


어쨌든 화면 안에서는 10여분 간 이어진 청소 펠라가 끝난 후, 흥분한 군단장은 칸의 엉덩이에 자지를 쑤셔대고 있었다.


칸의 모습은 생각한 것보다 처참했다. 표정은 통증을 참느라 일그러져 있었고, 얼굴에 뿌려진 백탁액 탓에 눈 밑의 워페인트가 반쯤 지워져 귀신 같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삽입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칸의 배 밑에 깔아놓은 베개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군단장은 그것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 하나로 묶은 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떨어져 있었지만, 자세를 바꾸기 전 구속당한지라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씨발. 싼다!"

"흐윽!"


케이블 타이로 묶인 칸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팽팽하게 당겨진 케이블 타이가, 그녀의 손목에 흔적을 남겨가고 있었다. 


"쯧쯧. 젖꼭지에는 아직 손도 안 댔는데."


군단장은 선혈과 정액으로 범벅이 된 칸의 보지에서 자신의 물건을 빼냈다. 그리고 신속의 칸의 처녀를 따먹었다는 업적에 기분이 좋아진 듯 이번에는 상의를 찢고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아읏, 하으......."


절정에 다다라 눈이 풀린 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유두를 튕겨대는 군단장의 손가락을 오롯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만족시키라고 명령했던 군단장은 심기가 불편해진듯 방금 풀 스윙으로 친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야, 눈깔 제대로 안떠? 바이오로이드인 네년이 나를 만족시켜야지 왜 내가 너를 즐겁게 해주고 있지?"

"죄, 죄송합니......."

"썅년아! 군대에서 죄송하다는 말 쓰지 말라는 거 모르냐?"


군단장은 엉망진창이 된 칸을 조롱하듯 킥킥 웃어대며 그녀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칸은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니까 콱 조여봐. 이거 마지막 기회야."

"쿨럭, 커억......"


칸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두 다리는 군단장의 무릎에 깔려 있었고, 팔은 뒤로 돌려져 묶인 데다가 목까지 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부하들의, 동료들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 업보인 걸까.'


죽음이 가까워지자, 지금은 곁에 없는 동료들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고 있었다. 


'501번 퀵 카멜 소령...... 738번 워울프 병장...... 634번 샐러맨더 하사....... 506번 퀵 카멜 중위...... 931번 워울프 상병...... 645번 퀵 카멜 소위....... 미안하다....... 전부 내 탓이다.......'


칸의 눈에서 흐른 눈물 한 줄기가 엉망이 된 워페인트 자국 가운데를 가르고 뺨을 가로질렀다. 그 눈물을 본 군단장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칸의 목을 조르는 행위가 재미없어졌던 건지, 그는 그녀의 목에서 손을 풀었다.


"씨발. 처녀라 그런지 좆같이도 못하네. 할 거 다 했으니 꺼져."

"그럼 331번 워울프 상사는......."

"꺼지라고! 내 알 바냐?"


군단장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칸을 걷어 차 침대에서 떨어뜨렸다.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머리에 쓴 장비가 깨지고 말았다. 


"군단장님!"


깨진 장비의 파편이 이마에 박혀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칸이 애타게 군단장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귀를 막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무리 깨워 봐도 잠에서 깰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막사 밖으로 나갔다.


"331번 워울프 상사......"


건기가 가고 우기가 찾아올 때라, 막사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칸은 뭐에라도 홀린 듯 331번 워울프 상사가 있는 의료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로 높이 묶은 머리카락은 풀려 있었고, 하의는 아예 사라지고 상의는 가슴이 드러나게 찢겨 있었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던 정액과 피가 빗물에 씻겨 나간 것은 그나마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뒤로 묶인 채 다리 사이의 통증 때문에 절뚝절뚝 걸어오는 그녀에게서는 '신속의 칸'이라는 이명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칸 대장님!"


그녀가 막사에 들어서자 45번 탈론페더 소위가 화들짝 놀라 케이블 타이를 풀어 주었다. 칸은 케이블 타이 모양으로 멍이 든 손목을 한 번 쳐다보고는, 탈론페더에게 물었다.


".......331번 워울프 상사는?"

"그, 그게.......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탈론페더가 울음을 터뜨리며 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사죄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간님의 명령이었더라고 해도....... 저, 그 영상을 찍느라 워울프 상사의 임종도 보지 못하고....... 저 때문에 워울프 상사는 홀로 쓸쓸히......."


칸은 말없이 탈론페더를 밀치고 병상에 누워있는 워울프에게 다가갔다.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봤지만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에 귀를 대 봤지만 심장의 고동 또한 들려오지 않았다.


".......워울프를 치료하긴 했나?"

"그게...... 군단장님께서 인간 병사 분들께 쓴다고....... 의로물품들을 인간 막사로 옮기라고 지시하셨어요."


탈론페더의 말을 들은 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결국 331번 워울프 상사의 죽음도 자신의 책임이었다. 자신이 못해서, 자신이 군단장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그녀가 외롭게 죽은 것이다. 


칸은 워울프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그녀의 성대를 타고 나온 괴성이 막사 안에 울려퍼졌다.


허나, 그런 칸과 대조되게 죽은 워울프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


 오랜만에 그런 꿈을 꿨다. 얼마 전 마키나의 '낙원'에서 그들을 봤으니 훌훌 털어버린 줄 알았건만. 칸은 꼭꼭 숨겨 놓았던 양주 한 병을 가지고 부대원들의 무덤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무덤 앞에서 세레스티아가 만들어준 꽃다발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대장은 아직 멀쩡하니까....... 나 같은 건 잊고 살아....... 그냥 살지 말고....... 존나 행복하게 살아.'


못 들은 척 했던 331번 워울프 상사의 유언이 칸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잔에 술을 쪼르륵 따랐다. 술이 잔을 반쯤 채우자, 칸은 그것을 한 번에 마시고 무덤에 말을 걸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귀관들은 그곳에서 행복한가......?"


물론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칸은 술을 한 잔 더 따라 무덤에 뿌린 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