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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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인 것도 오랜만이겠네.”

 

“… …”

 

 

 

아직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되지 못한 리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지휘관들을 회의실로 불렀다. 왜 그런 것 가지고 오랜만이라고 하냐 궁금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기존 인원에 추가로 용과 라비아타까지 불렀기 때문이다.

 

 

 

“… … 사령관.”

 

“왜? 칸?”

 

“저들을… 어째서 여기로 부른 것인지 이야기해줄 수 있겠나?

사령관을 죽일 뻔한 자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 심히 불쾌하군.”

 

“…”

 

 

 

용과 라비아타는 헛기침도 하지 못하고 땅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비단 칸뿐만 아니라 다른 지휘관들도 저 둘을 보는 눈이 좋지 않았으니 가시 방석에 앉은 기분일 것이다. 나는 내 지휘관들이 나를 위해 그렇게 화도 내준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애들은 내 편이란 뜻일 테니까.

… 물론 레오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 면목 없습니다. 칸…”

 

“정말 그랬다면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비아타 통령?

무슨 낯짝으로 우리에게 얼굴을 들이미는지 모르겠군.

마리 대장,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각하께서 부르신 것이니 저희가 왈가왈부 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 그래도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사전에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군. 사령관.

그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우리 입장이란 것이 있으니 말이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도와줄 수 있지?”

 

 

나는 나름대로 칸에게 웃으며 말했다. 칸의 얼굴은 조금 발갛게 변하더니, 이내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칸이면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고마워. 그럼 이제 본론을 해보자고.”

 

 

내 말을 신호로, 다들 자신의 앞에 있는 패널에 손을 뻗었다.

 

 

“흠… … 본론이라…

다시 말하지만 이번 작전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사령관.

저쪽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 제대로 된 정보도 없는 지금,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르는 일이다.”

 

“맞는 말이야.

그래서 용과 라비아타가 나를 도와주기로 했어.”

 

“믿을 수 있는 건가?”

 

“일단은.

그리고 어차피 이 둘 아니면 방법이 없어.”

 

“이미 이곳의 반군 모두가 우리의 통제 하에 있다.

방법이야 찾으면 많지 않겠나?”

 

“처리하는 방법은 많아도 신뢰를 되찾을 방법은 이게 유일할 거 같은데?”

 

“굳이 신뢰를 되찾을 필요가 있나?

이미 저들은 그대를 한 번 버린 자들이다.

굳이 그대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지 않더라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레오나가 눈썹을 잠시 움찔거렸다. 칸은 용과 라비아타가 못 미더운 것 같다만 나에게는 레오나가 더 위험 인물인지라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해봤으니 이렇게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흠흠… 

내가 저 애들에게 기회를 주는 건 칸이 생각하는 그런 좋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어차피 저 병력이 나중에는 필요할 거거든.”

 

“오르카 호의 상황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부터 차곡차곡 제조 시설을 가동시키면 시간은 조금 걸릴 지 몰라도 저 정도 병력을 구축할 수 있지 않겠나?”

 

“… ‘조금’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가만히 있던 용이 입을 열었다. 불쾌한 목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칸은 용을 째려보았다.

 

 

“무슨 뜻이지?”

 

“…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오.

다만 오르카 호에 있는 제조 시설만으로는 이 정도 병력을 구축하는데 년 단위의 시간이 걸릴 것이란 뜻이오.”

 

“그러니 그런 시간을 투자하면…”

 

“단순히 병력의 양만 따졌을 때를 말하는 것이오.

이에 더해 본관의 함대와 미사일, 병력 체계를 만드는 데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들 것 같소?

몇 년? 몇 십 년? 아니, 애초에 가능하긴 할 것 같소?”

 

“… 그건 그렇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도 용은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 칸도 따로 반박할 수는 없었다. 

 

 

 

“흠흠…

아무튼 그런 이유만은 아니야. 칸.

나는 최대한 빨리 병력을 키워야 하거든.”

 

“…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사령관?”

 

“있긴 있는데…

… … 아무튼 그냥 그래.

다른 누구를 못 믿겠으면 대신 나를 믿어줄 수 없을까?”

 

 

잠깐 머뭇거리던 칸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면서 말했다.

 

 

“… 그대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도 어쩔 수 없군.”

 

“그래, 좋아.

그럼 내가 가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고 생각할게.

안전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부 기관들이나 반군 정리는 용과 라비아타가 도울 테니까.

그래 줄 거지?”

 

 

용은 헛기침을 손으로 막으며 대답했다.

 

 

“… 그대를 따르기로 했으니 다른 방도가 있겠소?”

 

“그래, 그래.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래. 용.

기대하고 있을게.”

 

“… … 흠, 흠…”

 

 

용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부끄러워하며 볼이 빨개지는 것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다른 걸 말해보자.

용과 라비아타는 함께 갈 거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 둘을 빼면 나 혼자 가는데 어떻게 할까?

나 혼자 가는 거에 동의하는 사람?”

 

 

… 아무도 대답이 없다.

 

 

“… 그럼 나랑 같이 갈 사람?”

 

 

칸이 손을 들었다.

 

 

“사령관. 내가 미쳤다고 그곳에 홀로 그대를 보내겠나?

내가 함께 간다면 적어도 그대를 위험하게 만들 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함께 가겠다.”

 

“… 고맙긴 한데…”

 

 

칸이 이글거리는 눈을 보란 듯이 뽐내면서 내게 자신을 어필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칸을 데리고 가고 싶지만…

 

 

“… 칸은 좀 그래.”

 

“좀, 좀 그렇다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사령관?”

 

“아니, 칸이 가면 든든하긴 하겠지.

칸이 얼마나 강한 지는 나도 호드 애들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게 문제야.

너무 강하니까.

내가 저기에 가는데 칸이 내 옆에 꼭 붙어있으면 저 애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칸 같이 강한 애가 찰떡 같이 내 옆에 붙어있는데, 내가 포로로 왔다고 생각이나 하겠어?”

 

“그건… …”

 

“애초에 나는 저 애들이랑 동등한 관계에 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가는 건데 칸이 있으면 안 될 거야.

저쪽에 있는 애들 중에 칸을 이길 수 있는 애가 몇이나 되겠어?

그런데 칸이 내 옆에 있으면 내가 저기 있는 애들하고 동등한 관계겠어?

저 애들이 나보다 앞서는 것은 그런 무력뿐인데?”

 

“… … 그렇지만 안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그건 용과 라비아타가 도와줄 거야.

라비아타 정도의 경호원이면 걱정할 건 없겠지.”

 

“… …”

 

 

칸은 시무룩한 표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축 내려간 눈매를 주목하고 있다 보니 언제 바르고 온 건지, 눈가에는 검은 화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싸우러 갈 마음이 컸나 보다. 

 

 

“그런 이유로 아스널이나 마리도 좀 그렇지.

다들 어지간한 일반 대원보다는 강하니까.

그래서 그냥 일반 대원들 중 한 명을 데려갈까 하는데 어떨 것 같아?”

 

“일반 대원 말씀이십니까?

… 스틸라인에서는 마땅한 인재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각하.”

 

 

마리가 입으로 손톱을 씹는다. 틱, 틱, 손톱 뜯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린다.

 

 

“아냐, 괜찮아.

이미 스틸라인은 엄청 고생하고 있잖아.

내가 저기로 가면 그 때는 지금 반군 관리하고 있는 애들도 다 빼고 쉬고 와.”

 

“… … 죄송합니다.”

 

“그럼 호드에서 워울프는 어떤가?

저렇게 보여도 실력은 대단한데.”

 

“그 성격에 이런 임무를 맡기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 그럼 카멜은 어떻겠나?

워울프보다는 침착하니 도움이 되긴 할 텐데…

… 샐러맨더나 하이에나는 어울리지 않고…

…”

 

 

뭐가 그리 심각한지 칸도 입술을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굳이 자기 부대에서 보내지 않아도 괜찮은데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주니 부담스러울 정도다.

 

 

“흠… 캐노니어에서도 마땅한 대원이 없군.

그대를 보좌하는 입장에 대포를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아마 그대와 함께 간다고 해도 경호 역할을 해줄 수는 없을 것 같다.”

 

“비스트헌터는 어때?”

 

“마음 같아서는 그대와 함께 보내고 싶긴 하지만 그 애의 주무기도 경호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말이다.

나라고 왜 그대와 함께 가고 싶지 않겠나?”

 

“…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지휘관들이 자기 부대에 대한 정보를 패널에서 잔뜩 살펴보며 나와 함께 갈 대원을 찾아보고 있었다. 아무리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도 간혹 개체 중 특이한 친구가 나올 때도 있으니 그런 애들 중 경호에 적합한 애가 있지 않을까 하난 마음에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한참을 찾아도 적합한 대원을 찾을 수는 없었다. 토모와 리앤 수준의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애초에 논외일 뿐만 아니라, 그런 애들이 있어도 나와 함께 가기에는 불안하다는 것이 지휘관들의 결론이었다. 용과 라비아타는 그런 지휘관들의 모습을 미안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렇게 계속 찾아도 답이 안 나오자 리리스 대신 컴패니언에서 애들을 뽑는 방향으로 결정이 되는 듯했다. 포이는 성격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페로나 하치코가 적합할 거라 생각했지만 하치코는 유약한 성격 때문에 부담이 심했고, 페로가 제일 괜찮다는 의견으로 수렴되었다. 아니면 둘을 함께 보내도 되지 않나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러면 몇 명이 적합할 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토론의 방향이 변해버렸다.

 

 

“애초에 지휘관을 보내는 편이…”

 

“숫자는 대충 한 부대 정도면…”

 



치열한 논의가 계속되던 때에,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상황만 지켜보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 내가 가겠어. 사령관.”

 

 

레오나가 휠체어의 바퀴를 끌면서 앞으로 나섰다. 칸이 놀란 눈을 하며 그녀를 다그쳤다.

 

 

"레… 레오나…?”

 

“내가 가겠다고.

논의가 계속 길어지는 걸 보면, 내가 제일 적합하지 않겠어? 사령관?

다들 나는 애초에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 나, 여기 와서 레오나 목소리 거의 처음 듣지 않았나? 다른 것보다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 … 나 때문에 굳이 힘쓸 필요는 없어.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

 

“다리 한 쪽은 잘리고, 그나마 남은 부위도 신경 마비 상태.

남은 다리로는 걸으려고 해도 의족 없이는 걷지 못할 만큼 근육이 약화되어 있고,

총 몇 방 쏘는 것 말고는 전투력이 특화된 것도 없어.

지휘 능력이야 봐줄 만 하겠지만, 고작 사령관 한 명을 데리고 함선에서 빠져나올 만큼의 능력 역시 없지.

이 정도면 문제를 일으키려 해도 일으킬 수 없을 텐데, 문제는 없잖아?”

 

“… …”

 

 

 

원래 이렇게 자조적인 말을 하던 애였나? 레오나와 별로 교류가 없었던 나는 물론이거니와, 레오나와 가장 친했던 칸마저도 놀라 입을 열질 못했다.

 

 

 

“… 용?

네 생각은 어때?”

 

 

용도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레오나를 향해 목소리를 뱉었다.

 

 

"… … 굳이 레오나 지휘관, 그대가 함께 갈 필요는 없소.

몸도 온전치 않은 그대가 간다고 경호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함께 갈 생각이오?”

 

"… … 예. 함께 가야겠습니다. 참모총장.”

 

 

레오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쁘기보다도 혼란스러웠다. 레오나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니까.

칸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 레오나, 가도 괜찮겠나?”

 

“상관없어.”

 

“네가 가면 경호의 측면에서는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통령이 있는 이상 이 이상의 경호는 불필요해.

그리고 전투력이 강한 지휘관들은 사령관이 원치 않다고 하니 갈 수도 없어.

물론 나보다 강한 대원들은 많겠지.

하지만 지휘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논의가 끝나지 않은 거 아니야?”

 

“… …”

 

 

틀린 말은 아니다. 나에 대해 미친 듯이 분노하고 있던 때라면 몰라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지금에서는 반군 역시 군용 바이오로이드이므로 지휘관이란 지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나에 대한 오해를 풀러 가는 상황. 무력을 통한 경호는 라비아타로 충분하다.

 

 

“… 레오나.”

 

“왜.”

 

“무슨 생각이야?”

 

“별 다른 뜻은 없었어.

내가 싫으면 따라오지 말라고 말해.”

 

“그런 건 아니지만… …”

 

 

레오나와 나는 정말 일말의 교류도 없었다. 오르카 호가 어느 정도 편해진 지금에서도 발할라 대원들이 주변에 있으면 금새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하물며 레오나 주변에 있으면 어떻겠나? 내가 잡혀 있을 때에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여자다. 솔직히 지금의 레오나는 내 등 뒤에 칼을 찌르면 찔렀지, 지켜줄 만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번도 내게 그런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 그래, 당신도 싫겠지.

그래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요새 몸이 더 안 좋아졌거든.

아마 내가 총을 꺼내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나를 제압할 테니까.”

 

“난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어. 레오나.”

 

“당신 얼굴 보면 그게 그거지.

그리고 지금 같은 때에 나를 믿는 것이 더 이상하단 거, 나도 알아.”

 

 

 

조금 날 선 내 말투에도 레오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모를 레오나를 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치솟는다. 그것들이 내 얼굴 모공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나올 때쯤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용에게 물었다.

 

 

“… 용?

레오나가 가는 편이 좋을까?

난 레오나에 대한 여론은 잘 모르니까.”

 

“그대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나쁜 것은 아니라 보오.

레오나 지휘관이 그 인간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반군 내부에서도 잘 알려져 있으니 말이오.”

 

“그럼 상관 없을 것 같긴 한데… …”

 

 

레오나가 그렇다고 한다면 용과 라비아타와 같은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에 대해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는 사람이 나에 대해 변호해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연극이 될 테니까. 하지만 레오나가 나를 변호해줄 생각이 있을까?

 

 

 

“… 레오나.”

 

“난 여기 있으니까 자꾸 안 불러도 돼. 사령관.”

 

“만약 나를 따라 반군 내부로 들어간다면 나를 도와줄 생각이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지만,

도움되는 건 도와줄 생각이야.”

 

 

레오나의 시니컬한 반응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겠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유형의 사람 말이다. 조금 과장 보태면 레오나가 꼭 그런 유형이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하는 놈들과 달리 레오나는 고생했던 과거가 있으니 참작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참작하고 말고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리 저리 돌려 말하지 않고 도와주겠다고 선을 그은 것 정도? 그나마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까지라 했으니 언제 어떻게 반응할 지는 모를 일이다. 도와준다고만 한다면 지금 있는 선택지에서는 최선의 선택지일 것이다. 도와주기만 한다면.

 

 

“레오나… … 도와줄 거지?”

 

“... 내가 못 믿을 년이란 건 아니까 말꼬리 흐리지 않아도 돼.”

 

“도와줄 거지?”

 

“…”

 

 

레오나는 한숨을 뱉으면서 패널에 김이 서리게 했다. 자신이 끼고 있는 검은 장갑으로 뽀득 뽀득 소리가 나게 패널을 문지르며 내게 대답했다.

 

 

 

“… 죽어도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을 테니까 그만 의심해.”

 

 

레오나의 강단 있는 말투와 내용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걱정 반, 의심 반으로 레오나를 쳐다보던 칸도, 아스널도, 마리도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못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 교류도 얼마 없던 지휘관으로 하여금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내 입을 다물게 했다. 여기서 더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아이들에게 죽는다는 단어가 쉬이 나올 말은 아니니까.

 

 

 









“… 그래, 그럼 함께 가자. 레오나.”

 

“… …”

 

 

내가 벽과 대화하는 것인지 모를 만큼 레오나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 자, 그럼 다른 지휘관들도 상황 정리 좀 해주고.

특히 스틸라인은 지금까지 반군 관리하느라 고생했어.

마지막까지 정리만 잘 해줘.

아, 맞다. 

마리야, 저쪽 함선 상태는 어때?”

 

“함선 상태는 양호합니다.

용 대장의 치료 시간이 조금 더 지연되느라 수리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아마 지금 바로 가셔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스틸라인이 수리도 도와줬어?”

 

“네, 그렇습니다.”

 

“… 그래, 알겠어.”

 

 

마리에게 이것 저것 반군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칸과 아스널에게는 오르카 호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고 받으면서 사령관 선에서 결정해야 할 것들을 정리했다. 용에게서 받은 좌표로 오르카 호를 이동시키고, 용의 함선의 이동 스케줄을 조정하게 해서 함선과 오르카 호 사이에 충돌이 없도록 시기를 조절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르카 호는 아직도 이동 불가능인가?”

 

“닥터에게 물어보는 편이 빠를 겁니다. 각하.”

 

“닥터가 지금 회선에 들어와 있나?”

 

“… 잠시만.”

 

 


마리는 한 손으로 자신의 패널을 쥐고 내 귀에 달려 있는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마리의 손과 얼굴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참아가며 눈을 감았다. 막사 안에서 맡았던 마리의 익숙한 향기를 맡고 있자니 지금 이 상황에 서글퍼졌지만 눈을 감았기에 울지는 않을 수 있었다.

 

 

“… … 됐어?”

 

“네, 됐습니다.

한 번 불러보시겠습니까?”

 

“그래, 그럼…

… 아아, 닥터? 들리나?”

 

“---ㅇ---ㅗ---빠---?

지---금---드---ㄹ—리나??”

 

“… 이거 잘 안 들리네?”

 

 

-툭 툭.

 

무전기를 몇 번 쳐주니 신경질적인 음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빠? 이제 들려?”

 

“응, 들리네.

닥터도 회선에 있었구나?”

 

“긴급 상황에 나만큼 필요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당연히 24시간 대기하고 있어야지!

아무튼, 왜 불렀어?”

 

“아, 그래.

다른 건 아니고 우리가 오르카 호를 언제쯤 움직일 수 있을까 해서.”

 

“오르카 호 구동?

아마 금방 될 거야.

따로 기기적인 결함이 있던 것은 아니었거든.

그냥 좀 부숴지고 그랬을 뿐이지.”

 

“… 그게 그거 아니야?”

 

“시스템적인 결함과 단순 부품 문제를 비교할 수 있겠어?

아무튼 다시 구동하는 건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다행이네.

그럼 최대한 빨리 운행해줘.”

 

“알았어!

그럼 내가 우리 오빠를 어디로 모셔 드려야 할까?”

 

 

닥터의 발랄한 목소리는 무전기 너머로도 애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내가 반군으로 간다는 걸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아… … 목적지는 마리가 알려줄 거야.

거기로 와줘.”

 

“어디인지 그냥 오빠가 알려주면 안 돼?”

 

“그,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내가 지금 회의 중이라서 말이야.

… 아, 맞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과장된 말투로 호들갑을 떨었다.

 

 

“왜??”

 

“그거 말고도 따로 부탁할 게 있는데, 해줄래?

아마 기술팀 전체랑 같이 해야 할 거야.”

 

“뭔데?”

 

 

궁금해 하는 닥터에게 최대한 담담하게 설명해주었다. 나중에 반군이 우리에게 합류하고 난 다음에 할 생각이었지만, 게임과 자꾸만 달라지는 스토리 라인을 보면 최대한 빨리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을 들은 닥터는 할 일이 생겼다면서 신이 난 것 같지만, 지금 내 마음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이제 호랑이 소굴에 머리를 집어 넣어야 할 판이니까.

 

 

 

"알았어!

그거라면 신나게 해줄 수 있찌!"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닥터의 발랄한 목소리가 웅웅 거리며 귓가에 메아리 친다. 저 너머에서 다른 닥터와 이야기를 주고 받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쯤에 뒤에서 누군가 나를 툭툭 쳤다.

 














“… 사령관.”

 

 

한창 집중하고 있던 내 뒤에서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친 사람은 용이었다. 지금 보니 회의는 이미 마무리 되고 있었다. 용은 은근슬쩍 회의실에 남아 모두가 빠져나간 지금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조용해졌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왜?”

 

“회의는 끝난 것 같소.”

 

“… 그래서?”

 

“출발은 언제 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오.”

 

“그야 준비되면 바로 떠나야지.

스틸라인이 빠지고 나면 바로 출발할 거야.

너희 대원들도 네 걱정을 할 테니까.”

 

“… 그런가...”

 

 

용은 주춤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대의 지휘관들에게 인사할 시간을 주지 않아도 괜찮겠소?”

 

“인사?

… 

괜찮아. 필요 없어.”

 

“그대를 많이 아끼던 모양인데, 그래도 시간을 주는 편이 좋지 않겠나 싶소만.”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죽을 수도 있는 모험이오.”

 

“그럼 용이 지켜주겠지.”

 

 

용은 안타까운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 물론 그렇게 할 것이지만, 그래도 안전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소?”

 

“안전을 생각했으면 이런 작전을 세우지도 않았겠지.”

 

“그대는 사령관이오.

내가 하기에는 우스운 말이지만… 그대는 지금 오르카 호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란 말이오.”

 

“알고 있어.”

 

"그리 쉬이 말할 내용이 아니란 말이오!

아니, 애초에 그런 중요한 자리에 있는 자라면 조금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소?

전부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라 무례를 무릎쓰고 물어보겠소.

대체 왜 본관을 믿는 것이오?

그대는 어째서 이리도 무책임한 것이란 말이오.”

 

 

 

용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등허리를 늘씬하게 쭉 빼고,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대는 나를 믿으면 안 되는 것이오.

세상 전부가 믿어도 그대만큼은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단 말이오.

 

“… ...”

 

 

자신을 믿지 말란 말과는 달리, 용의 눈은 서글프게 반짝이고 있었다. 얼굴로 자신의 감정이 전부 다 들어날 만큼 간절한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그 입은 주저함이 없었다.

 

 

“왜 믿냐고?”

 

“그렇소.

그대는 나를 믿어서는 안 될 진데, 어찌 그런… …

… 선택을…”

 


 

내 얼굴을 보더니, 용은 말꼬리를 공중에 흩뿌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제는 내가 대답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믿었냐고?”

 

“…”

 

“그게 인간적인 거니까.”

 

“… 그렇게 해서는…”

 

“알아. 이렇게 무작정 믿는 건 지양해야지.

하지만 난 지금까지 인간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했어. 

사령관으로서가 아니라.

그러니 너희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믿는 것도 인간으로서 할 거야.

사령관으로서가 아니라.”

 

“… 본관은 이해할 수 없소.”

 

“나도 고민 많이 했다.

근데 이게 맞는 것 같으니까 그런 거야.

실망시키지나 말라고.”

 

“… … 인간이라…”

 

 

 

 

 

용은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나와 용 사이를 구분 짓는 유리창이 없었다. 반사될 모습도, 굴절될 모습도 있지 않다. 그저 용이 있었고, 나는 그걸 바라보았다. 무엇에도 그리 반짝이는지, 용의 눈빛은 구슬픈 맛이 났다.

 

 

 

 







“그나저나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 그대가 혹시라도 다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렇소.”

 

“그런 걱정은 진작에 했어야지.”

 

“그대가 원하는 것이 반군의 회유라면 이 위험한 작전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기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오.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란 말이오.”

 

“… 그래서?”

 

 

 

용은 간지러운 듯이 입가를 우물거렸다. 

 

 

 

“… 본관도 그대를 위해 온 힘을 다할 테니, 그대도 그대를 지키기 위해 안주하지 말란 뜻이오.”

 

“난 안주한 적 없는 것 같은데.”

 

“그, 그런 뜻이 아니오!”

 

 

용은 작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 늘 생각하시오. 이유를 알 수 없더라도 막연하게 나마 생각하시오.

어떻게 해야 반군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할 수 있을지.

레오나 지휘관이 어째서 따라 오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눈 앞에 있는 용이라는 자를 믿을 수 있는 건지, 믿어서 얻을 이익이 뭔지 계속 생각하란 말이오.”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계속 생각하시오.

생각하지 않는 지휘관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소.”

 

 

딱 한 발자국을 거리에 두고, 용과 나는 마주 섰다. 회의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선 나는 용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조금 더 컸던 나를 올려다 보며, 용은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본관은 실패했소.

지휘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고,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소.

죽지 않아도 될 생명이 죽었고, 살아야 할 자들이 본관의 잘못으로 인해 그러지 못했소.

제 아무리 전쟁이라는 이명 아래에 행해진다고 한들, 그 책임이 한 줌이라도 가벼워질 수는 없소.

과거의 짐들로 어깨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고, 죄책감이란 비단 아래 눈물을 감추는 것이 습관이 되는 존재가 지휘관이란 말이오.”

 

“… 용…?”

 

 

용의 말투가 물에 흠뻑 젖어 들어갔다. 

 

 

“… 본관은 분노라는 명분 아래 그대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했소.

생각하기를 포기한 지휘관은 죽은 지휘관이라 했지.

그러니 본관이 그대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을 때, 본관은 이미 죽었던 것이오.

죽기를 자처하는 그런 자가 무적이란 별칭을 칭하다니…

… 우습기 짝이 없지.”

 

 

 

용의 눈을 봤다. 회의실의 불빛은 약간의 조명을 제외하고는 꺼져있었지만, 용의 눈은 어느 조명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용을 처음 봤을 때의 그 눈은 아니었다. 하늘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용과 나는 햇빛에 눈이 부시는 갑판 위에서 만났지만 그 어떤 불빛도 용의 눈을 빛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의 용은 그 눈을 파랗게 빛내고 있었다.

 

 


"... 나는 그대를 내가 아는 인간의 모습으로 판단했었소.

추악한 본성을 결코 숨길 수 없는 그 모습을 가지고 그대를 판가름 하려고 했단 말이오.

허나 그대는 실로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달랐소.

인간, 인간.

그 의미를 그대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


"... ..."


"하지만 지금은 그 단어가 그대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소.

그대는 내 사령관이오.

그리고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이오.

그러니 그대는 나와 같은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되오.

그 무게에, 책임에 짓눌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건 그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겁고, 또 감당할 것도 아니오.

절대, 절대 그래서는 안 되오.”

 

“…”

 

“그러니, 그대는 제발 나를 의심하시오.

저들을 이끌고 그대에게 칼을 들이민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시오.

의심이 아주 조금이라도 뿌리 박히면, 그 때 주저함 없이 내 목을 치시오.

그것이 그대가 해야 할 정당한 과제이자, 내가 속죄할 유일한 길이니 말이오.

그대가 참된 사령관이 되기 위해 내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용하시오.

내 그대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할 테니.”

 

 

 

용의 얼굴은 별빛처럼 빛났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게 빛나는 별빛 말이다. 하지만 구름이 잔뜩 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과 단 하나의 별이라도 있는 밤하늘은 분명 다르다. 그 별은 구름이 게고 있다는 증거이고, 동이 틀 무렵 환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용의 팔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무게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가벼운 손이었지만, 내게는 태산처럼 무거웠다. 그렇게 용은 내게 스러졌다. 어디선가 매화 향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 …”

 

“용? 괜찮아?”

 

“… …”

 

 

용은 말 대신, 훌쩍거림으로 대답했다.

 

 

“…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내 어깨를 쥐고 있던 용의 손에 힘이 천천히 빠져간다. 잔잔한 바람에 툭 하고 떨어져나간 낙엽처럼, 그 손은 내 몸에 기대었다.

 

 



“… 사람들은 내가 완벽하다 했었소.

아니, 완벽해야만 했고, 완벽하다고 믿었소.

그렇기에 자신들보다 위의 존재로 나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오.

인간이든 바이오로이드이든, 불확실한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천성이니.”

 

 

누군가 보는 눈이 없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용의 어깨를 팔로 감쌀 수 있었다.

 

 

“누구도 나를 불완전하다 말해주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완전함을 꾸며내야 했소.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으로 임무는 성공시키는 전술을 밤을 지새우며 연구했고,

아군에게 자상하며 적에게는 냉철한 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을 연기했소.

매일 아침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게 자는 삶에 익숙해져야 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인간의 멸시와 조롱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야 했소.”

 

 

용의 팔이 천천히 내 몸을 감쌌다. 그 팔에는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 무적이라…

… 이 얼마나 우스운 멸칭이오?

대원들과 사람들은 내가 한 번도 진 적이 없기에 무적이라 칭함 받는 것이라 알고 있소…

…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무적이라 칭했기에 그 이름을 견디려고 노력했던 것일 뿐이오.

나는 무적도, 뭣도 아니오.

지금 그대가, 나의 패배의 증거니.”

 

 

용의 향기가, 그 몸의 감촉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듯 했다. 부드럽고, 또 연약했다. 내 살과 같은 살을 가졌고, 내 눈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분노에 이글거리던 감정은 차분해졌고, 다만 그 온기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차라리 이렇게 지고 나니 속이 시원하군.

그 무적이란 이름이 얼마나 거슬렸는지, 그대는 모를 것이오.”

 

“… 용…”

 

“알고 있소.

목숨을 노리고 온 자가 어찌 뻔뻔스레 이렇게 안겨 있을 수 있는지 그대도 궁금한 것이겠지.

미안하오.

다만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기댈 수 있던 자가 없었기에 그저 사랑이 고팠던 것이오.

다른 마음은 없소.

그저 그대 곁이면 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이렇게 뻔뻔하게 쉬고 있는 것이오.”

 

 

용은 내 어깨 위로 자신의 얼굴을 편히 눕혔다. 새근새근, 유리창에 가려 들리지 않았던 이 작은 숨소리가 이제야 내 귀에 닿았다.

 

 

 

“… 어때, 내 곁이면 조금은 쉴 만 한 것 같아?”

 

 

용은 나를 껴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대답 대신이오.”

 

“하하… 그래…”

 

 

나는 용의 대답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때가 되어서야 나는 용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 제복은 꽤 부드러운 재질이구나, 머리카락 중 일부는 검은색이 더 짙구나. 얼굴은 또 이만큼이나 작구나. 귓볼의 모양은 둥근 편이구나. 옷에 달려있는 망토는 이런 식으로 달려 있구나. 벨트 때문에 더 부각되는 허리는 이렇게나 얇구나. 눈의 색도 짙은 검은색에 가깝구나. 생각보다 손은 그리 크지 않구나.

 

용은 유난히 자신의 복부를 내게 부벼댔다. 그 덕에 나는 용의 배에 나있는 상처를 옷감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작게 굴곡이 져 있고, 새로 난 살은 아직 말랑말랑했다. 조금만 집중해도 상처의 이질적인 살결이 파동을 그리며 내 머리에 깊게 파고 들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그 놈이 얼마나 싫었으면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배에 이런 상처를 새길 수 있었던 걸까. 나는 생각했다. 계속 생각했다.

 

 

 

“… 용도 힘들었구나.”

 

“힘들었지.

참 많이 힘들었지.

그랬기에 두 번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그랬기에 나는 그대에게 칼을 겨눴던 것이오.”

 

“…”

 

 

나는 말 없이 용을 끌어 안았다.

 

 

“… 나는 인간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생각했소.

인간 위에 서서 그들을 지휘했던 거의 유일한 개체였으니, 인간에 대해서도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소.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해도 본질적으로 그들의 명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소.

시키는 임무는 꼬박꼬박 하는 주제에 인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니. 

나의 오만이었지.”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용은 나를 망연하게 쳐다보며 눈에 맺힌 눈물을 걷었다.



“… 참 복잡한 감정이오.

난 특별해야만 했소.

한 나라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기업이 심혈을 다해 만들었으니 나는 특별한 존재여야 했소.

그러니 아마 예전이었다면 그런 말은 위로가 되지 못했을 것이오.

나는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해야 했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리도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군.”

 

 

용은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배에 난 상처가 짓무를 때까지 강하게,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 …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소.

쉬기만 한다면 이 응어리진 아픔들도 함께 씻어질 줄 알았는데… 모르겠소.

이미 씻겨나간 것인지, 아니면 씻기지 않게 붙잡고 있는 건지… …

… 그러니 이 뻔뻔한 자가 조금만 더 안겨 있어도 되겠소…?”

 

“… 얼마든지.”

 

 

용이 내 몸을 아플 때까지 껴안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 향기와 채취가, 살결과 감촉이 내 생각을 품어냈다. 껴안고, 또 껴안는다. 내 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처럼 아득한 애증의 감정이 머리에 은하수처럼 쏟아진다.

 






무언가 비어있는 듯한 감정. 정말 오랜 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내 몸은 온갖 것으로 쌓여있었다. 사랑으로, 기쁨으로, 또 분노와 슬픔으로, 놀라움과 죄책감으로 덮여있었다. 그 중 어느 것도 내게 쉼을 주지는 않았다. 기쁘면 기쁜 대로 힘들었고, 슬프면 슬픈 대로 힘들었다. 감정이란 그만큼 노동이고, 에너지였다.

 

하지만 용을 품에 안고 나서는 왠지 모르게 속이 비어갔다. 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태곳적의 애정이 상쇄시키는 듯 했다. 내가 이것을 게임으로 하고 있었을 때, 그 때의 나는 용을 매우 사랑했다. 고작 게임 캐릭터에 얼마나 많은 애정을 담았겠느냐 하겠지만 나의 세상에서는 용이 그만큼 커다란 존재였다. 아무도 내 세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나는 누구라도 초대하고 싶었고, 용은 내 소중한 손님이었다.

 

이곳에 오고서 이제는 잊을 법도 한 그 때의 감정들이 용의 품 안에서 자꾸만 생각났다. 고작해야 게임 캐릭터에게 느꼈던 감정들. 살아 움직이는 지금의 감정들에 비하면 물가의 조약돌만도 못한 가벼운 것들이 내 생각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건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가벼운 것은 가벼워야 한다. 무거운 것들에 짓밟히고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란 말이다.

 

 

 

“… 용.”

 

“… 여기 있소.”

 

 

 

하지만 그건 법칙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 작은 감정들이 비밀의 방에서 리리스의 손을 잡게 해줬고, 콘스탄챠의 눈에 사라진 빛이 돌아왔음을 볼 수 있게 했으며, 날 선 바닐라의 말 뒤에 울먹임을 볼 수 있게 했고, 노을이 지는 하늘을 뒤로 칸을 안을 수 있게 했으니까. 그 감정들이 작은 막사 안에서 흙이 잔뜩 묻은 커피 향에 취해 마리와 함께 즐거워 할 수 있게 했고, 세상 모르고 신난 브라우니들과 즐겁게 놀 수 있게 해줬으며, 스러져가는 낡은 방에서 아스널과 함께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게 했으니까.

 

그 작은 감정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왔음을, 그 보잘것없는 사랑이 내가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했음을, 용을 안은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 사랑해.”

 

 

나는 용에게 말했다. 그것은 달달한 고백이었고, 한 맺힌 절규였으며,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각오였다. 

 

용은 내게 말했다.

 

 

“나도 사랑하오.”

 

 

세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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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다

졸라 많이 썼다고 생각했는데 왜 17000자 밖에 안 되지.

요새 등이 아파서 진득하게 앉아 있지를 못 해서 그른가

점점 내용이 읽기 힘들어져 가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서 퇴고를 하고 싶은데 허리가 아픔.


사실 용의 등장은 소설에서 가장 도전적인 부분 중 하나였음.

원작과 가장 많이 달라지는 부분이고, 반군의 대장으로 설정이 잡혀 있어 적개심도 max였고.

그래서 주인공도 그걸 적대하는 게 정상이었고, 그러면 관계가 어긋나는게 자연스러운 거였음.

실제로 원작에서는 용이 주인공의 손을 잡자마자 게임 속 내용이 떠오른다는 전개로 가버렸으니까.

갑작스럽게 붕 떠버린 이 부분이 원작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함.


아무튼

절대 애 호 해




+(원래는 이런 걸 생각하는 것도 보는 사람의 권리니 아무 말 없이 넘어가려고 했는데, 조금 난해할 수 있어서 개인적인 설명을 붙임.

굉장히 교과서적인 내용이니 소설에 집중하고 싶은 사람은 보지 않는 것을 권함.)




세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랑이라 한 건 한 때 칼을 들이밀던 서로에게 사랑을 느껴야만 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의미함.

주인공은 반군에게도 정말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용은 자신의 유일한 쉴 곳임을 뒤 늦게서야 깨달았기 때문에 사랑을 느꼈고, 또 사랑해야 했음.

이런 관점에서 이 사랑은 달달한 고백이고, 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준다는 뜻임.


또 이질적이라 한 것은 서로 손에 피를 묻힌 관계란 뜻임.

주인공의 명령으로 여러 반군이 죽었지만, 그 책임은 용과 주인공이 나누어 가질 수 밖에 없음.

동일한 존재의 피를 다른 두 명의 손에 묻혔으니 그것에 대한 모순됨이 둘의 관계를 이질적인 끈끈함으로 묶어둔 것임.

그런 관점에서 이 사랑은 한 맺힌 절규라는 뜻임.


동시에 이 사랑은 사랑을 고백하는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기인한 사랑이기도 함.

하지만 그 기억들이 지금의 행동 원리를 규명하고 있고, 그걸 깨우친 순간부터 진정으로 반군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사랑도 줘야 함을 깨달았음.

사랑이 없이는 지금까지와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기에 한때 가장 원망스러웠던 용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반군 전체를 품어내겠다는 각오를 뜻하는 것임.

그런 관점에서 이 사랑은 한 때 사랑했던 자들을 원망하게 만든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각오인 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