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글 : https://arca.live/b/lastorigin/26776595 





 어떤 시작으로 이번화의 첫 장면을 그리는 게 좋을까. 먼저 모든 영상물의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검은 화면. 아무것도 없는 화면이다. 영상기기에 따라서는 최소한의 빛을 내는 것, 혹은 모든 빛을 끄는 것 중 하나겠지.

 물론 그 검은색은 진정한 검은색이 아니다. HDR이니 돌비비전이니 말하지만 검은색은 진짜 검은 색이 아닌 개념적인 것이었다. 검은색은 색이 아니다. 색이란 물체에 반사된 빛을 말하는 것이었고 검다는 것은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고 흡수한다는 의미였다.

 아니지, 아니지. 그냥 검은 화면을 생각하자. 그것이 검은색이든 모든 빛을 흡수해 어떤 색도 내지 않건 관계없었다. 그 검은 화면을 문자그대로가 아닌 아무것도 없는 화면이라는 것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하자.

 관객은 검은 화면을 싫어한다.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화면을 상상하자. 검은 화면은 몇초정도 계속된다.

 관객들의 인내심이 떨어지기 시작할 즈음 한 음을 던진다. 낮고 길게 늘어지며 바닥까지 떨어지는 소리다. 우퍼 스피커가 있다면 관객의 가슴을 울릴 소리일 것이었다. 그 소리에 관객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영상오류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스크린이 아닌 자신이 기대한 그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여기서 영화는 밀당을 시작한다. 한 음이 던져졌지만 다음 무언가가 나오기 전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른 음이 던져진다. 이번에는 화음이다. 그 화음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도미솔 도파라 시레솔 같은 전형적인 화음이 아니었다. 그 의도된 불협화음은 관객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준다. 그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수많은 불협화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그것은 모든 사람의 귀와 심장을 메운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이것만으로 관객들의 기대심리는 최고조에 다른다.

 화면이 밝아짐과 동시에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적막이 그 자리를 메운다. 그 절묘한 대조로 모두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넓은 다트무어의 평야가 화면에 비춰진다. 갈색과 초록이 젊하게 섞인 평야의 곳곳에는 바위가 솟아나있었다.

 그 광경을 하늘 높이에서 보여준다.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은 평야 곳곳에 그림자를 깔고 있었고 몇몇 구름은 빗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화면은 점점 아래로 이동하기 시작하며 초원을 가르고 달려가는 한무리의 차량을 비춘다.

 긴박한 음악이 점점 크레센도로 커진다. 그와 동시에 화면에 보이는 차들의 크기도 커진다. 그렇게 줌인하던 화면은 컷이 전환되며 타이틀 로고가 뜬다.

 제목이 뭐지? 어쨌든.

 이제 본편이 시작된다.

 “에릭 님, 펜리르를 믿을 수 있으십니까?”

 뒤에 앉은 바닐라 A1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에릭 발렌타인은 앞서 달려가고 있는 펜리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평원을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것을 쫓는 차를 모는 잉글리쉬 셰퍼드는 그것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만일 에릭도 부자들이나 한다는 오리진 더스트로 몸을 강화하고 합금으로 된 외골격으로 몸을 바꾼다면 저렇게 달릴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긴 했다. 그는 저렇게 빨리 달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차라리 더 좋은 차를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무슨 소리야. 펜리르는 너희 저택에 있던 바이오로이드잖아. 오히려 펜리르를 잘 알아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펜리르도, 바닐라 A1도 같은 덴버러 백작가의 저택에서 일하는 바이오로이드였다. 오늘 처음으로 펜리르를 본 에릭보다 바닐라 A1이 펜리르를 잘 알 것이었다. 오히려 펜리르를 믿을 수 있냐고 묻고 싶은 것은 에릭이었다.

 “같은 저택에서 일했지만 저와 펜리르의 근무처는 달랐습니다. 볼 일도 없었죠. 솔직히 말해 펜리라는 바이오로이드를 주인님께서 보유하고 계신다는 것마저 가끔 잊을 정도니까요. 펜리르를 마주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고 솔직히 말해 대화조차 나눠본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스타크로스성에서 일하는 브래드버리 가문의 바이오로이드의 정확한 숫자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정도로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은 자신의 업무만을 충실히 감당했다. 서로가 마주하는 바이오로이드는 자신의 업무중에 만나는 바이오로이드가 전부였다. 저택의 외곽경비를 담당하는 펜리르와 저택 내부의 잡일을 하는 수많은 바닐라 A1이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하다못해 소문이라도 들어봤을 거 아니야. 내가 본 펜리르는 최소한 거짓을 말하는 바이오로이드는 아니었어. 본능에 충실하고 단순한 바이오로이드야. 우리를 유인해 불리한 곳에서 블랙리리스와 싸우게 만들거나 우리를 다른 곳으로 보내 블랙 리리스와 만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머리를 쓸 타입이 아니야. 문제는 블랙 리리스야. 독단적으로 론 브래드버리를 추적해 우리가 찾는 신고자를 먼저 잡을 정도로 머리가 좋고 그 머리를 굴릴 줄도 아는 바이오로이드야. 심지어 무력도 만만치 않지. 대체 그 블랙 리리스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당연히 제가 섬기는 그분께 기도를 올리시는 겁니다. 그분이라면 이 자리에 블랙 리리스를 불러올 수도 있고 에릭 발렌타인님이 손을 까딱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도록 하실 겁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자 언제든 이 세상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것도 가능한 분이시죠. 찬양받으소서, 감히 미천한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지신 이시여!”

 아자젤의 말이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이 감히 발가락에 난 털조차 햝을 수 없고 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낮은 아무것도 아닌 자가 기도를 올립니다. 블랙 리리스라는 바이오로이드로 이곳으로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제가 모시는 이 에릭 발렌타인이란 사람에게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이 자에게 힘을 주시고 권능과 능력을 덧입게 하여 손을 까딱하지 않고도 블랙 리리스를 이길 힘을 주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에 감히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이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하옵소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그것의 기도를 들은 에릭 발렌타인은 아자젤이 듣는다면 불순하다고 할만한 생각을 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아니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가끔은 이야기를 재밌는 방향으로 바꿀 필요도 있었다.

 -좌측에 적 접근!

 한 켈베로스의 무전이 날아왔다. 그 무전의 직후 잉글리쉬 셰퍼드가 모는 차의 좌측 뒷편에서 달려오던 차가 오른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충격에 날아가 평야를 몇번 구르던 차량은 바위에 처박혔다. 안에 탑승한 몇기의 켈베로스와 그것의 조각들이 차 밖으로 날아와 사방에 피를 튀겼다.

 무슨 일이냐고? 블랙 리리스의 등장이었다.

 “펜리르! 멀었어?”

 잉글리쉬 셰퍼드는 창밖을 머리를 내놓으며 외쳤다. 펜리르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우측 뒷편에서 달려오던 차량이 왼쪽으로 날아갔다. 이번에 그 차는 거창하게 폭발을 했다.

 “후방에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피해요!”

 뒷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바닐라 A1의 외침이었다. 그것의 말에 잉글리쉬 셰퍼드는 펜리르의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머리를 차 안으로 집어넣으며 핸들을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차가 있던 자리에 빠르게 회전하는 무언가가 땅바닥에 거대한 자국을 내더니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저게 뭐야!”

 잉글리쉬 셰퍼드는 하늘로 날아간 무언가를 보며 외쳤다.

 “아,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이시여! 그대의 계시를 잘 받아들였습니다!”

 에릭의 옆에 앉은 아자젤은 놀라운 얼굴로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블랙 리리스에요! 저건 블랙 리리스의 방호용 드론이고요!”

 에릭 발렌타인은 앞좌석으로 건너오며 차밖의 드론을 가리키며 외쳤다. 블랙 리리스는 그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자신을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속력을 내더니 그들이 탄 차의 오른편에 붙었다.

 “담당관님!”

 오른쪽의 차의 유리가 내려가자 한 켈베로스가 머리를 내밀며 외쳤다.

 “지금 다 같이 간다면 승산이 없을 겁니다! 분명 블랙 리리스는 어디서 이곳을 보며 우리를 죽이려 할 겁니다. 먼저 블랙 리리스를 잡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안돼! 지금 이 전력으로는 블랙 리리스를 이길 수 없어! 지금 우리는 어떻게든 참고인을 찾아야 해! 먼저 찾아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길이야! 그러니까!...”

 그들의 앞으로 블랙 리리스의 방호용 드론, 로자 아줄이 날아왔다. 그것은 푸른 방어막을 펼친뒤 헬리콥터처럼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잉글리쉬 셰퍼드는 재빠르게 핸들을 꺾어 그것을 간신히 피했지만 그 드론은 차의 오른편은 조금 긁고 지나가며 차안에 엄청난 양의 스파크를 튀기고는 뒤쪽으로 날아갔다.

 “명령이야. 최대한 저걸 피하...”

 다시 제 방향으로 돌아오며 다시 오른쪽에서 달리던 다른 차량에게 말을 하던 잉글리쉬 셰퍼드는 말문을 잃었다. 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차의 위쪽이 깔끔하게 잘려나가있었다. 그 차에 타고 있던 켈베로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에 타고 있던 켈베로스들의 허리 위는 말끔하게 잘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점점 속도가 줄어들며 뒤로 처지는 차에서 눈을 돌린 잉글리쉬 셰퍼드는 무전기의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프로스트 서펀트대, 지금 블랙 리리스의 공격을 받고 있다. 시급히 이곳으로 와서 지원을 도와주도록!”

 잉글리쉬 셰퍼드의 무전에 답변은 없었다. 그것은 화를 내며 송수화기를 던졌다. 대답이 없다는 것에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블랙 리리스의 공격을 받은 거겠지.

 “아무래도 우리뿐만이 남은 모양입니다.”

 “잉글리쉬 셰퍼드, 괜찮은 거에요?”

 에릭은 잉글리쉬 셰퍼드의 입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말했다. 그것은 입에서만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의 오른쪽 옆구리에도 조금 전 공격 때문인지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직 차를 몰 수 있어요. 죄송하지만 제 허리춤의 접이식 소총을 꺼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여기에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저 드론에 대항하려면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코트를 젖혀 허리체 찬 총을 보여주었다. 에릭 발렌타인은 그 총을 빼들었다. 총은 들고다니기 편하게 접혀있었지만 차에서 펼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뒤의 바닐라, 배틀 메이드죠? 전투모듈이 달려있을 거에요. 에릭 씨나 아자젤보다는 도움이 되겠죠. 그것에게 총을 넘겨주세요.”

 에릭은 아자젤에게, 아자젤은 바닐라 A1에게 총을 건네주었다. 뒷좌석에는 공간에 여유가 있어 바닐라 A1은 가볍게 엽총을 펼쳤다.

 “로자 아줄은 뒤쪽으로 날아갔으니 높은 확률로 뒷쪽에서 날아올 겁니다. 방호용 드론이니 제가 가진 .338 강화탄으로는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날아오는 궤적을 바꿀 수는 있을 겁니다. 펜리르가 참고인을 찾을 때까지입니다. 그때까지만 버텨주세요.”

 바닐라 A1은 뒷좌석의 트렁크 자리로 넘어가더니 발로 차 뒷문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자세를 잡았다.

 “단 세발입니다.”

 바닐라 A1이 노리쇠를 당겨 약실에 탄이 장전된 것을 확인하자 잉글리쉬 셰퍼드가 말했다.

 “세번의 기회가 있어요. 그것도 바닐라가 한발로 로자 아줄을 막았을 때의 일이고요.”

 탕.

 대답대신 들려온 것은 총소리였다. 그 직후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로자 아줄이 차량의 오른편의 땅을 긁고 지나갔다. 그 소리와 광경에 에릭 발렌타인은 화들짝 놀랬다.

 “두발 남았어요!”

 “감사합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이시여!”

 아자젤은 기쁨의 기도를 다시 드리기 시작했다. 바닐라 A1은 그것의 기도를 듣는둥 마는둥 아자젤의 앞을 지나가며 에릭과 잉글리쉬 셰퍼드의 사이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이제 앞에서 올 겁니다. 겁쟁이처럼 총소리에 놀라지 마십시오.”

 살짝 기분이 나빠지는 바닐라 A1의 말이었다. 그 말에 반박하고 싶어지는 본능이 피어난 덕분인가, 에릭 발렌타인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잠깐, 아까 본 로자 아줄은 두개였어. 그런데 왜 하나만 날아오는 거지?”

 “...”

 바닐라 A1은 말이 없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차 안에 있던 전원은 재빨리 각자 다른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5시 방향! 로자 아줄이 날아와요!”

 아자젤이 외쳤다.

 탕!

 그러나 바닐라 A!이 쏜 방향은 오른쪽 뒤를 가리키는 5시 방향이 아니라 왼쪽 앞에 가까운 10시 방향이었다. 그 직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로자 아줄은 아슬아슬하게 차량의 위를 지나갔다. 바닐라 A1은 자신의 사격 솜씨에 감탄할 틈도 없이 아자젤의 머리 옆으로 총을 내밀더니 주저없이 펌프를 당겼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저라면 뭔가 붙잡을 겁니다. 바보같이 창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게요. 안전벨트라던”

 큰 충격이 차에 전해졌다. 로자 아줄이 차에 박은 것이었다. 바닐라가 사격을 해 맞춘 덕분인가 로자 아줄은 차에 탄 그 누구도 공격할 수 없었다. 아무도 타지 않은 차 뒤를 말끔하게 잘라낸 로자 아줄은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그 공격으로 차의 오른쪽 뒷바퀴가 잘려나갔고 차의 뒷부분은 주저앉아 땅을 긁고가기 시작했다. 잉글리쉬 셰퍼드는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추려 했고 차는 옆으로 한바퀴 돌고나서야 그 자리에 멈추었다.

 “뭐하는 거야! 왜 멈춰! 거의 다 왔어!”

 펜리르가 차로 달려오며 외쳤다.

 “이게 지금 갈 수 있는 걸로 보여? 너와 함께한 블랙 리리스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어! 너는 공격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고!”

 차에서 빠져나와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며 에릭은 외쳤다. 아자젤과 바닐라 A1도 다른 바위에 몸을 숨겼다. 차에서 내리지 않은 것은 잉글리쉬 셰퍼드 뿐이었다.

 “에릭님, 이젠 어떡하죠? 도망칠 수도 없고 총알도 다 떨어졌어요!”

 바닐라 A1은 잉글리쉬 셰퍼드의 접이식 엽총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모르겠어. 잉글리쉬 셰퍼드! 총알은 더 없는 거야?”

 잉글리쉬 셰퍼드는 대답이 없었다. 에릭은 차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차의 클락션이 울렸다. 잉글리쉬 셰퍼드는 핸들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작동불능이 되었거나 기절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아자젤과 바닐라 A1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었다. 펜리르가 있었지만 그것이 블랙 리리스의 앞에서 에릭에게 따를 것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것은 무조건 블랙 리리스를 따르겠지. 만일 승산을 원한다면 오히려 펜리르를 이곳에서 보내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었다.

 “펜리르, 우리는 따라갈테니 그 신고자를 찾아내! 그리고 반드시 나를 찾아와!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아닌 이곳의 유일한 인간인 내게 와!”

 “알았어!”

 펜리르는 달려갔다.

 “발렌타인 님, 계획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계시라도 받으셨습니까?”

 아자젤이 펜리르를 보더니 에릭에게 외쳤다.

 “계획? 물론이지. 계시를 받은 건 없지만 방법은 있어. 네 말대로 할 거야. 나는 손을 까딱하지 않고 멀쩡하게 다트무어에서 빠져나갈 거야.”

 “정말이십니까? 정말로 그분의 교리를 따르실 겁니까? 우리의 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지신 그분의 첫 신도가 되시렵니까?”

 아자젤을 기쁜 얼굴로 물었지만 에릭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양손을 들어올렸다.

 “아니, 그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네 말이 내게 영감을 주었어. 만일 저 블랙 리리스가 자신을 방해하는 것을 그 누구라도 죽인다고 한다면 말야, 반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야. 저것이 우리가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하면 되는 거잖아.”

 “에릭 님! 후방입니다!”

 바닐라 A1이 외쳤지만 에릭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외쳤다.

 “블랙 리리스! 이야기를 하지!”

 그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여전히 로자 아줄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에릭 님! 뒤쪽입니다! 피하셔야 해요!”

 아자젤은 손을 뻗었다. 그것의 손에서 나오는 레이저라면 저 로자 아줄을 부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야 했다. 그 노력을 에릭은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자젤. 그만둬. 만일 블랙 리리스가 대화할 의지가 있다면 날 공격하지 않겠지. 안 그래, 블랙 리리스? 듣고있는 거 다 알아. 그러니 대화하자고.”

 로자 아줄을 조준한 아자젤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에릭의 명령만 내린다면 그것의 손에서는 레이저가 나와 로자 아줄을 공격할 것이었다. 하지만 에릭의 말에 아자젤은 거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의 귀에 그것이 믿는 신이 속삭였다. 그것을 움직인 것은 그 신의 음성이었다.

 “어째서입니까. 이제 제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나이까.”

 아자젤은 허망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로자 아줄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멈출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블랙 리리스에게 달렸다. 물론 다음 이야기는 에릭 발렌타인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내용이 될 것이었다.

 만일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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